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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세탐2 스트립트 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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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학세탐 2강 역사와세계 1부 스크립트


인간은 역사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재구성한다. 역사의 수단은 기록과 해석이며 세계의 시간 과 공간은 이를 통해 규정된다. 과거 역사학에서 설정한 문명의 중심과 주변의 경계는 제사유의 대상이며 이에 따라 다원적 세계에 대한 탐구가 필요해졌다.

이번 강의에서는 유럽의 시간을 중심으로 적립된 세계상에서 벗어나, 상호 연관된 흐름들로 구 성된 하나의 네트워크로서 세계의 형성 과정을 살펴본다.


1. 역사는 실재하는가: 유라시아 초원의 고대 세계

1970년대 말 고고학자들은 유라시아 초원의 동부, 타림분지 북쪽에서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문화에 속하는 고분 유적을 발견했다.

그곳의 기운은 몹시 건조해서 죽은 사람의 몸이 미라로 만든 것처럼 보존되었다.

입은 옷과 천으로 된 부장품도 썩지 않았고 시신의 머리털도 고스란히 보존된 상태여서 그 색 깔까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타린 미란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드러났다.

섬세하고 균형이 잘 잡힌 얼굴에 밝은 갈색 머리를 한 미라는 죽는 순간에도 미소를 지은 것처 럼 보인다.

이 미라는 유적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미라에 속하며 매장 시기는 기원전 2천년에서 기원 전 1800년 사이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발굴 작업이 진행되면서 무덤 속 미라들이 동아시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해 골의 크기가 컸고 머리털이 금발이거나 붉은색이었다.

얼굴 윤곽도 동아시아인과는 판형이 달랐다.

외관적으로 유럽 인종의 특성을 가진 것으로 보여 많은 논란이 있었고 여러 차례 DNA 검사 결 과를 거쳐 최근 연구 결과에서는 고대 북방 유라시아 인종인 것으로 드러났다.

유라시아 초원은 널리 알려진 문명 세계의 중심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고 고학적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화석은 아프리카 초원을 비롯한 여러 초원 지대에서 발견된다. 이는 인류의 첫 활동 무대가 초원이었음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청동기 시대의 초원은 유라시아 대륙의 문명을 잇는 다리가 되었다.


발굴된 무덤이나 주거지에서 청동도구와 장신구를 규칙적으로 발견할 때 그 시기를 청동기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청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합금이다.

동 즉 구리는 인류가 최초로 인식하고 이용한 금속이다.

원시 인류는 도구를 만들기 위한 재료를 찾다 우연히 천연 구리를 발견했을 것이다.

후에 인류는 구리를 재현하는 방법도 고안하였는데 이는 바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야금술의 탄생을 의미한다. 가장 오래된 청동은 구리와 비소의 합금이다.

이보다 강도가 강한 청동 합금은 구리의 주석을 섞은 것이다.

청동기 문명의 시대는 대장장이들이 녹인 광물을 섞어 자연에서 발견한 구리보다 우수한 합금 을 만들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를 말한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 문명은 기원전 3700년에서 3500년 무렵 비소 합금 청동이 만들 어지면서 시작되었다.

청동 야금술은 통념과는 달리 동유럽에서 시작해 서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인도 유럽어의 고향 으로 여겨지는 흑해카스피의 초원에서 청동기 시대는 훨씬 일찍 시작되었던 것이다.

초원에서 동아시아로 이어지는 길은 타림분지의 동쪽 끝을 통과한다. 기원전 2천년에서 1600년 경 중국과 타림분지의 경계에 있는 치자 문화 유적에서는 말이나 나팔 모양의 귀걸이, 칼자루 끝에 고리가 있는 외날 청동검, 초원 유형의 도끼가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중국에서 최초의 고대 왕조가 등장했고 기원전 1800년경부터는 서쪽 세계와 교 류하기 시작했다.

타린미라의 유적 발굴과 청동기 유물의 존재로 알 수 있듯이 유라시아 초원의 고대 세계는 문 명 교류의 한 통로인 동시에 또 하나의 문명을 배태한 공간이었다.

이처럼 고대 세계의 진실한 증언자는 유적과 유물이다.

초원의 유목민처럼 문자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유적의 발굴이나 유물의 존재 그리고 기록만으로 역사가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고대 중국에는 '사史'라는 관리가 있어 기록을 담당했다.

'사'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과거의 사건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학문과 그 학문을 담은 서적을 지 시하는 의미로 바뀐 것은 사마천의 사기부터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전쟁을 정리한 기록에 히스토리아라는 이름을 붙였고 투키디데스는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대한 기록에 그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 명칭에는 경험을 통해서 탐구한 지식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동양의 사와 서양의 히스토리 모두 지난 일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석과 비판을 담으려했다.

과거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에 대한 의미 부여가 가능해질 때 역사는 실재하게 된다.



2. 세계사의 탄생, 실크로드

역사는 시간과 공간 두 축을 따라 세계를 해석하고 서술하는 일이다.

따라서 역사는 세계 이해의 수단이 된다.

하지만 역사의 의미를 유연하게 생각할수록 세계의 역사에서 말하는 '세계'가 과연 무엇인지 보 편적 차원에서 분명하게 규정하기 어려워진다.

세계의 개념 자체가 경험의 범위를 벗어나 적립되기 어렵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 든 세계사란 곧 그들만의 세계사를 의미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사는 다른 역사 분야와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

자신의 과거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타자의 과거 또한 포함한다는 점이 바로 그러하다.

후한서에는 서쪽 변방 국가 대진국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는 로마를 가리키는 것이다.

대진국 사람들은 키가 크고 머리를 짧게 깎으며 수놓은 옷을 입고 누에 뽕나무를 기른다. 그곳 의 통치자는 수정 유리로 기둥을 세운 다섯 개의 궁전을 거쳐야 했다.

자연재해로 나라에 큰 피해가 있으면 군주가 물러나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으며 그들은 이러한 관습에 거의 불만 없이 따랐다. <후한서>

이러한 특징은 사실 로마 제국의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

이는 중국에 대한 로마인들의 서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기록에 아시아의 극동 지역은 접근하기 어려워서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남아 있는

한편, 세레스(Seres) 즉 비단 생산자로 중국을 명명했다


한해 수도 장안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가는 길은 초원과 산을 넘는 육로로는 약 7천 킬로미터이 고 북 베트남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해로로는 약 만 2천 킬로미터에 이른다. 서로에 대한 양 국의 경험은 중기 상인이 드넓은 땅을 가로질러 운반해온 상품, 예를 들어 중국의 비단, 옥, 칠 기와 지중해 지역의 직물, 산호, 진주, 유리 등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처럼 불완전하지만 타자의 과거에 대한 기록을 남김으로써 세계사를 탄생시킨 로마와 한 그 바탕에는 실크로드가 있었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구원해 학계에 정착시킨 인물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 (1883-1905)이었다.

그는 고대 중국과 그리스 로마 문화권 사이의 교섭이 주로 비단의 교역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인도 혹은 서방으로 연결되는 교역로를 실크로드-> 자이덴 슈트라센(die Seidenstrassen)이라고 명명했다. (9분 25초)

중국의 서쪽 변경에서 중앙아시아의 타림 분지를 거쳐 파미르 고원 서쪽으로 연결되는 교역로 는 중국 고대 역사서에도 명확히 기재되어 잘 알려져 있었다.

리히트호펜은 여기에 실크로드라는 시적인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근대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다.

세계사는 마치 하나의 카펫과 같다. 상하로 달리는 날줄이 각 지역 역사의 흐름이라면 그것을 좌우로 연결하여 카펫 전체를 완성시키는 것이 씨줄이다.

각 지역과 문명들 사이를 교차하며 연결하는 교류산, 상호연관은 바로 이 씨줄에 해당된다. 만 약 여러 개의 날줄만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실타래에 불과할 것이다. 이들이 씨줄 과 만날 때 비로소 견고한 하나의 직조물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처럼 지구 위에 여러 지역과 문명들이 공간적으로 연관성을 맺고 시간적으로 계기적 발전을 이룩하는 총체적 과정을 세계사로 본다면 실크로드야말로 그러한 연관성을 상징하는 키워드이 다.

한편 로마와 한은 세계사의 역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라시아 대륙 양쪽 끝에 터전을 잡은 두 제국은 모두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릴 일관된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실크로드를 통한 장거리 교역과 교환의 네트워크를 확립하기 위해 유리한 여건을 창출했다.

그러나 실크로드에서 원거리 교역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대상단이 바그다드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장안에까지 직접 가서 상품을 판매하는 형태는 아니었다.

국제 상인들은 각자가 전담했던 지역이 있었고 그런 지역적 교역원들이 연쇄적으로 연결되면서 유라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교역권이 형성되었다.

국제 상인 소그드인(soghd)들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교역 네트워크를 담당했지만 중앙아시아와 인도 혹은 서아시아와의 교역은 인도나 페르시아 출신 상인들이 장악하였다. 거기서 더 서쪽으로 가게 되면 지중해와 유럽의 무역을 좌우했던 유대인 상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처럼 실크로드는 각 지역의 교역권을 장악했던 국제 상인들의 활동 무대가 서로 중첩되면서 형성된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교역과 교환의 네트워크는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군사적 정복이 인류 역사에 끼친 영향력 다음으로 중요한 바깥 세계의 자극이었다. 그리고 이 바깥 세계의 자극은 예술, 과학, 기술의 변화와 발전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였다. 어떤 인간 집단도 자신들이 물려받은 문화와 기술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을 빼고는 어떤 새로 운 것도 홀로 창조할 수 없었다.



3. 은과 '변경', 네트워크의 세계

역사의 공간은 기본적으로 국가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지도 위의 국가들은 대부분 100년 전에 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가 당연시하는 국가나 국가사는 비교적 최근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적 사건이나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 이야기로서의 역사 서술에 대해 질문을 제기 해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먼저 민족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최근에 만들어진 인공적인 것이며 문화적으로도 제한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민족이나 국가의 범죄에 갇히지 않을 때 과거의 다양한 측면을 왜곡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역사의 공간을 어떻게 조형하는가에 따라 역사 서술은 본질적으 로 달라지는 것이다.

1983년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1983)'의 출간과 함께 역사가들은 근대 민족이라는 허구가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왔는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민족은 근대 역사가나 정치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초월하여 깊은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환상을 창조해낸다.


한때 자명해 보였던 역사와 민족의 관계는 이제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함께 인류의 과거와 관련된 다양하고 중요한 문제들이 민족이라는 범위 안에서 단순하게 연구될 수 없다는 자각이 점차 늘고 있다.

중심이 아닌 주변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국가와 핵심 도시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틀에서 간과했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주민들이 마주치고 국가들이 충돌하는 국경을 기준점으로 삼거나 육지가 아닌 바다 를 분석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다.

역사의 전통적 공간에 대한 도전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공간을 다르게 상정하거나 명확한 장소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새롭게 재설정

다면 우리는 다른 행위자들과 다른 이야기들을 접하게 된다.

'저울을 든 여인' [베르메르 작, 1664] 이 그림은 주화를 저울질 하려는 여성을 그린 것이다. 이 여성은 그림을 그린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의 아내 카타리나로 추정된다.

17세기에는 주화를 저울질하는 일이 경제 활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당시 은화나 금화는 오래 사용하다 보면 닳아서 은이나 금의 무게가 줄어들었다.

그래서 실제 주화의 가치가 얼마인지 알기 위해서는 저울질을 해야 했다.

탁자에 놓인 커다란 은화는 중국의 상하이와 네덜란드의 델프트가 포함되어 있던 더 큰 세계, 전례 없는 교역과 교류로 연결망을 넓혀가고 있던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카타리나는 이른바 은의 시대에 살았다.

은은 이 시기 세계 경제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카타리나를 포함해 은에 손을 대는 모 든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이 시대는 세계적으로 은 유통량이 비약적으로 확대된 시기였고 이를 견인한 것은 무엇보다 16 세기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었던 중국의 은 수요였다. 그리고 이 중국의 은은 전통적 정치 경제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서 다음 세계까지 파급되는 동아시아 변경의 세계를 만 들어낸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의 시대였다. 명나라는 북방의 국경을 반복해서 침입하는 몽골 세력 즉 북로에 대항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정비하고 대규모 군대를 북쪽 변방에 배치했다


이때 부피가 큰 곡물이 아니라 가볍고 운반하기 쉬운 은을 세금으로 거두어 들이고 현지에서군수 물자를 사들이는 시스템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마침 그 무렵 일본의 은 생산이 급증하여 일본에서 중국으로 은의 흐름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흐름은 명나라가 쌓은 해금 즉 민간의 해상무역 금지라는 댐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리고 이 댐을 무너뜨리려는 세력들 속에서 동남연안의 왜구 즉 남왜가 등장했다.

북방의 군사적인 긴장이 높아질수록 군사비는 증대하여 세금을 내기 위한 중국의 은 수요는 증 가하고 은 수요가 증가할수록 일본 은의 유입 압력이 높아졌다.

이처럼 북로와 남왜는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북과 남의 변경에서 은을 매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북로와 남왜는 단순한 이민족의 침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과 주변 민족이 뒤 섞여 형성된 변경 사회 그 자체였다.

특히 남에는 일본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동남연안 주변에 여러 지역 사람들이 뒤섞인 밀무역 집단이었다.

전통적인 역사가 지배 엘리트 중심의 국가 건설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때 역사 서술의 논 조는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한 국가의 국민이 되는 종점을 당연시 할 것이다.

변경의 역사는 그러한 과정을 뒤집는 데서 출발한다. 체제의 중심이 아닌 체제의 변경에 초점을 맞추는 탈국가주의적 시각을 채택함으로써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보게 하고 보이지 않았던 행 위자들을 수면 위에 등장시키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것이다.

세금으로 징수된 은이 대량으로 투입되는 북방의 군사지대와 신대륙과 일본의 은이 모여 중국 으로 흘러들어가는 동남 연안 지역에서는 은을 기반으로 큰 이익을 낳는 국제 교역 시장이 형 성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국제 상업의 이익을 둘러싸고 다양한 무력 집단이 뒤섞인 폭력적인 분쟁으로 가득한 세계이기도 하였다.

전통적 역사의 중심부가 아닌 이 변경의 세계에서 패권을 다투며 성장한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의 유럽 상업 집단, 만주의 누르하치 집단과 같은 세력들이 바로 이후 17세기 동아시아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는 주역이 된다.


한편 북노, 남왜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명나라는 그 후 방침을 전환해 민간의 해상 무역을허용했다.

이와 같은 전환의 시기는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 은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획기적인 시기였다.

당시 스페인 지베하의 신대륙에서는 포토시 은광 개발 이후 은생산이 급속히 확대되어 세계의 은 유통량 증가로 이어졌다.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채굴한 은은 대서양을 횡단해 본국 스페인으 로 옮겨졌지만 한편으로 무장 상선인 갈레온선으로 태평양을 횡단해 마닐라로 옮겨졌다.

그리고 마닐라에 옮겨진 신대륙기의 은은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로써 따로 떨어져 있던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의 경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그렇다면 카타리나의 은화를 만든 은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 시기 네덜란드 상인은 아시아 내에서만 은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은은 거의 유럽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따라서 그림의 은화를 만드는 데 사용된 은은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신대륙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은 수요가 높았으므로 네덜란드 상인들이 네덜란드로 들여온 스페인 문화 역 시 다시 아시아로 향했다.

그렇다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많은 은으로 무엇을 샀을까? 향신료, 직물, 차, 커피, 도자기와 같은 물품을 구입했다.

또한 은은 동남아시아의 네덜란드 식민지를 운영하는 막대한 자금으로 충당되었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팔아서 이익을 남길 상품을 구입하는 데 쓰였다.

다시 말해 상당량의 은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는 데 필요한 자본으로 쓰이면서 지역 내 교역은 물론 국제 교역까지 활성화시켰다.

17세기 세계 경제에서 은은 지역 경제와 지역 간 교역망을 연결하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이 카타리나의 탁자 위에 놓이는 과정은 유럽 팽창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4. 누구의 역사인가: 유럽중심주의와 근대성들

15세기 말부터 유럽의 팽창이 세계 모든 지역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유럽의 식민지가 된 곳에서는 역사와 세계의 개념도 크게 바뀌었다.

유럽의 팽창주의는 권력구조만 바꿔 놓은 것이 아니라 세계사에 관한 시각에도 유례 없는 영향 력을 발휘했다.

서구에서 20세기까지도 역사가들은 오직 유럽만을 다루는 반면, 동양학 연구자들은 ‘세련됐지 만 전통적인' 아시아의 문화를 연구하고, 인류학자들은 '원시적이고 변화를 모르는' 아프리카 사 회를 연구하는 식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유럽과 미국은 역사가 있지만 세계의 그 외 지역은 '시간의 변화를 모르는' 이질적인 곳이라는 가정을 바로잡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라마자[1953-] <역사에 대해 생각하기>

이 때문에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역사적 진실의 기준에 대한 문제 제기로 나아갔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인식을 보여주는 다음의 풍자 만화를 보자. (베이징 조정에서 외교사절단의 접견, 길레이 작, 1792) 이 만화는 메카트니의 건륭제 아련을 그린 것으로 이 시기 역사에 대한 영국 주류 여론의 인식을 대표한다.

그것은 중국 황제가 한쪽 무릎을 꿇은 메카트니 업신 여기며 오만하게 우쭐거리는 모습을 풍자 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만화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낙후한 문명으로 동양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런 이미지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유럽 중심주의적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만화가 1792년 9월 14일 메카트니 사절단이 런던을 출발하기 한 달 전에 그려졌다는 점이다.

화가(제임스 길레이, 1756-1815)는 그의 상상에 의거해 꼬박 1년 뒤에 회견 장면을 예고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한 해석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종결되었다.

역사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역사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화가는 물론 예언자가 아니다. 작품의 사상적 근원은 18세기 이래 유럽이 아시아를 보는 태도였다.

이처럼 해석이 역사를 이끌어냈으며 모든 해석은 우매한 동양을 전제한 것이었다.

자신과 다른 자에 대한 우월적 인식이 역사의 진행 방향을 좌우한 것이다.

동아시아는 몇 시인가? 이 말은 알렉산더 우드사이드가 <잃어버린 근대성들>에서 제기한 핵심 질문이다.

유럽 중심주의에 입각한 역사 인식과 시간관으로는 동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이나 시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역사 해석에서 서구 대 비서구의 문제는 근대의 개념 안에서 공간과 시간을 융합하는 문제이다. 근대는 변화하는 일시적 시간의 범죄이기도 하지만 국민국가, 도시화, 참여정치, 산업화, 교육, 인권과 같이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특징들을 포함하는 규범적 범죄이기도 하다.

근대를 합리화의 과정이라고 본다면 그 합리화 과정은 흔히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아주 다양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러 갈래로 진행되었으며 서로 별개의 것들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본주의 또는 산업화 의 성장과 같은 근대화의 필수적이라 여겨지는 획기적 사건과 무관하게 발생하기도 했다.

단수형의 유럽 중심적 근대성 개념은 한때는 서구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나중에는 유럽의 발전 경로를 기준으로 특정 사회의 진보 정도를 판단하는 범죄로, 이른바 근대화 이론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수형의 근대성이 아닌 복수형의 근대성들을 연구하는 것이 다.

여러 사회들은 다양하고 상의한 방식으로 자유의 확대, 교육, 부를 열망하고 성취해 왔다. 역사 가의 과제는 그 사회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근대화되어가는 다수의 방식을 서술하는 것이다.

쇄국 담론은 동아시아 역사를 '봉쇄해서 개방으로'라는 논리에 따라 허리를 절단한 것이다. 이 담론은 식민주의 문명 논리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 그 속에는 두 개의 큰 기둥이 있다. 하나는 정신과 신앙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무역과 시장의 자유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럽을 제패하던 시대에 이 두 기둥은 긴밀히 포개져 있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와 영국이 패권을 다투는 시대에 이르러 종교적 요소는 무대 뒤로 숨고 무역개방이 무대 위로 올라와 한 지역의 문명을 가늠하는 중요한 표준이 되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동아시아는 대항해 시대 이래 지구와 흐름으로부터 오랫동안 스스로를 멀리 해왔다.

동아시아의 깊이 뿌리 박힌 전통 문화와 아시아적 생산 방식에 사로잡혀 자본주의는 내부에서 발생하고 성장할 수 없었으며, 반드시 유럽 문명이 도래해야만 동아시아는 비로소 세계에 받아 들여지고 역사가 마침내 이곳에서 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세계가 바다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해왔고, 해양 무역의 동력이 결핍되어 있었 다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동아시아는 서구와 같이 국가적 영향으로 바다를 개척하지 않았을 뿐이다.

유럽과 동아시아 두 지역이 해양에 대해 진행한 서로 다른 개척은 문명적 차이라기보다는 오히 려 역사적 우연이라고 할 만하다.

초지역적인 상품 교환과 인적 이동은 결코 근대만의 현상이 아니다.

유라시아 대륙 및 인도양 지역에서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아라비아 지역의 상인은 일찍이 방대한 초지역적 무역 네트워크를 개척하고 주도했다.

물론 유럽인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고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무역 통로를 건립하여 인적 물적 왕래의 범위와 규모를 크게 제고했다.

반면 유럽인은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무역에 이르러서는 상당 부분 인도 태평양에 걸쳐 일찍부터 존재해온 무역망의 도움을 빌리는 데 그쳤을 뿐이다.

유럽 중심주의자들의 역사 해석은 인류의 발전 과정에서 유럽의 핵심적 역할을 부각하고 유럽과 비유럽 세계를 마주보는 거울처럼 서로 단절시켰다.

그들은 일부 문명의 주도성을 강조하고 근대를 형성하는 역사 과정 속에서 전 지구의 각 지역 이 상호작용하는 전체 네트워크를 주목하지 않았다.


5. 하나의 역사에서 지구사적 역사들로

유럽 중심주의와 동아시아의 쇄국에 대한 논의는 역사학의 전통적 연구 방식의 여러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근대화의 과정은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객관성과 엄밀함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역사학을 전문적으로 훈련된 역사가에 의해 실행되는 과학적 학문으로 변모시켰다.

1825년 베를린 대학에 초빙된 역사학자 레오폴드 폰 랑케(1795-1886)는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 구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역사를 엄밀한 과학으로 보았던 랑케는 가치 판단과 형이상학적 사변을 철저히 거부하며 1차 사료에 근거한 객관적 연구를 강조했다. 역사가는 "과거를 판단하는 것"을 피하고 "실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 랑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랑케 이후의 역사학자들이 근대 민족국가의 대두를 유럽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징후로 분석했다는 사실은 객관적 자료에서 해석의 여지를 제거하기 어렵다는 점을 반증한다. 근대 역사학은 유럽이 다른 지역보다 우월하다는 믿음과 함께 성장했다.

역사학자들의 신념은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쳤고 유럽의 발전은 역사의 이행에서 본받아야 할 모델이 되었다.

세계사의 전개를 바라볼 때 서로 다른 역사적 과정을 거친 사회에 단일한 설명의 틀을 적용하 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설명하려 시도하기 때문에 역사 학의 연구는 시간의 흐름을 배경으로 둔다.

그러나 자연의 시간과 달리 서로 다른 사회와 문화의 시간은 하나의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동일하게 흐르는 단선적인 시간으로 세계의 역사를 바라볼 경우 문명 교류의 현상은 앞선 쪽이 뒤처진 쪽에 영향을 끼치는 위계의 전개 과정으로 오독되기 쉽다.

진보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사의 지능을 설명했던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 의 역사관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어떤 사회가 세계사의 진행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 정신이 자유의 진보라는 이념에 합치해야 한다는 헤겔의 설명은 역사의 흐름에 보편적 목적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보편적 목적성에 대한 강조는 타자와의 만남이 지니는 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다.

역사의 정신에 본래적 특이성이 담겨 있다면 다른 사회와의 교류는 그 특이성을 현실로 만드는 자극제 역할 이상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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