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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칼날/나선


프레빌 48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0

새벽 4시.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73개였다. 맥브라이드는 세어본 적이 있었다. 각 계단마다 다른 소리를 냈다. 17번째는 삐걱거렸고, 42번째는 움푹 패여 있었으며, 마지막 계단은 물에 잠겨 찰박거렸다. 뤼프케의 군화 소리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발걸음. 10년간 전장을 누빈 직업군인의 걸음걸이였다.


복도의 벽은 곰팡이로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천장에서는 지하수가 똑똑 떨어졌고, 그 물방울이 바닥의 웅덩이에 떨어질 때마다 메아리가 울렸다. 공기는 축축하고 차가웠으며, 쇠 냄새와 오줌 냄새, 그리고 절망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형광등은 절반이 꺼져 있었고, 켜진 것들도 불안정하게 깜빡거렸다. 그 희미한 빛 속에서 철창의 그림자가 벽에 기괴한 무늬를 그렸다.


"얼마나 확실한가?"


맥브라이드의 목소리는 복도에 낮게 울렸다. 그의 숨결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지하 감옥의 온도는 영상 2도를 넘지 않았다.


"90% 이상입니다. 통신 기록, 금전 거래, 목격자 증언까지."


뤼프케가 파일을 넘기는 소리가 났다. 종이가 습기를 머금어 축축했고, 넘길 때마다 찢어질 듯한 소리를 냈다.


감방 안에는 브뤼셀군 정보장교 앙투안 드비에가 있었다. 철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한때 날카로운 매의 눈을 가졌던 정보장교는 이제 부러진 인형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군복은 찢어지고 더러워져 있었고, 한때 윤기 나던 검은 머리는 일주일 만에 반쯤 하얗게 새어 있었다. 왼쪽 눈은 퍼렇게 부어 있었고, 갈라진 입술 사이로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는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었다. 고문은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체포 과정에서의 저항은 그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왜 그랬나?"


맥브라이드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날씨를 묻는 것처럼 건조했다. 드비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한때 있었던 교활함도, 자부심도 없었다. 오직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부은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있었다.


"가족이... 베를린에..."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말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갈라진 입술에서 다시 피가 배어나왔다. 그는 더러운 소매로 피를 닦았다. 한때 깔끔했던 손은 이제 때와 피로 더러워져 있었다.


뻔한 변명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진실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었다. 드비에의 아내와 12살 딸은 베를린 근교에 갇혀 있었다. 네오나치들은 그들을 인질로 잡고 정보를 요구했다.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의 선택과 군인으로서의 의무 사이에서, 그는 전자를 택했다.


"몇 명이 더 있나?"


"7명... 아니, 8명입니다."


드비에가 말할 때마다 그의 부러진 갈비뼈가 움직이는 듯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며 이름들을 불었다. 각각의 이름은 배신의 무게를 더했다.


명단을 받아든 맥브라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숨결이 차가운 공기 속에 하얗게 피어올랐다. 종이 위의 이름들 중에는 믿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마르틴 상사 - 그와 함께 아르덴 전투를 치렀던. 소피 대위 - 브뤼셀 방어전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그들도 모두 무언가를 잃고, 무언가를 지키려다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처리는?"


뤼프케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감정이 없었지만, 맥브라이드는 그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경직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뤼프케도 명단의 몇몇과는 전우였다.


맥브라이드는 잠시 고민했다. 공개 처형? 그러면 공포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병사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신뢰는 무너질 것이다. 비밀 처리? 그러면 소문이 돌 것이다.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추측이 난무하고, 더 큰 불안이 조성될 것이다.


"재판을 열어라. 공정하게."


"장군님, 그러면..."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가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최소한의 절차는 지킨다는 거야."


맥브라이드는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73개의 계단. 올라갈 때는 내려올 때보다 더 무거웠다.


---


3일 후, 군사재판이 열렸다. 


장소는 구 브뤼셀 시청의 소회의실이었다. 한때 EU 관료들이 점심 회의를 하던 곳이 이제는 즉석 법정이 되었다. 오크 나무로 만든 탁자는 여전히 윤기가 났지만, 군데군데 총탄 자국이 있었다. 벽에 걸린 EU 깃발은 찢어져 있었고, 창문의 절반은 판자로 막혀 있었다.


작은 법정에는 50명만 입장이 허용되었다. 그들은 신중하게 선별된 사람들이었다. 각 파벌의 대표들, 신뢰할 만한 장교들, 그리고 몇몇 민간인 증인들. 입구에는 무장한 경비병 4명이 서 있었고, 그들의 손가락은 방아쇠 울 안에 걸려 있었다.


재판장은 프랑스군과 브뷔셀군에서 각각 한 명씩, 그리고 민간인 법조인 한 명으로 구성되었다. 프랑스군 대표는 르페브르 중령이었다. 50대의 노장교로, 한쪽 팔을 전쟁에서 잃었다. 브뤼셀군 대표는 반 담 소령이었다. 전직 헌병대장으로 규정과 절차에 집착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민간인은 안나 드 브라이언트였다. 전쟁 전 브뤼셀 지방법원 판사였던 그녀는 이제 60대가 되어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증거는 명백했다. 검사 역할을 맡은 젊은 법무관이 증거들을 하나씩 제시했다. 베를린으로 정보를 넘긴 대가로 받은 금화들 - 나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암호화된 통신 기록 - 김영호의 팀이 해독한. 그리고 무엇보다 드비에 자신의 자백서 - 떨리는 손으로 쓴, 피가 묻은.


"피고인들에게 최후 진술 기회를 주겠습니다."


드 브라이언트 판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낡은 나무 망치를 들고 있었다. 전쟁 전부터 사용하던 것이라고 했다.


8명의 피고인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들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발목은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첫 번째, 마르틴 상사. 42세. 아내와 세 아이의 아버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 번째, 소피 대위. 31세. 미혼. 그녀는 정면을 응시하며 침묵했다. 한때 아름다웠던 금발은 이제 뿌리부터 검게 변하고 있었다.


세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침묵. 무거운, 숨막히는 침묵.


일곱 번째, 피에르 일병. 19세. 아직 수염도 제대로 나지 않은 소년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렸다.


"저는... 저는 그저... 어머니가 아프셔서... 약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약을 준다고... 정보 하나만 넘기면 인슐린을 준다고..."


그는 울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억제할 수 없는 흐느낌이 법정을 채웠다. 몇몇 방청객들이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여덟 번째. 장 뤽 통신병. 23세. 그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똑바로 서서, 도전적인 눈빛으로 재판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광기 어린 확신이 있었다.


"어차피 다 죽을 겁니다! 베를린이 오면 협력자들만 살 수 있어요! 당신들은 바보예요! 맥브라이드는 우리를 모두 죽음으로 이끌고 있어! 적어도 저는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외침이 법정에 메아리쳤다. 경비병 중 한 명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옆구리를 쳤다. 장 뤽은 쓰러졌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다 죽을 거야... 다..."


판결은 예상대로였다. 주범 3명 사형 - 드비에, 마르틴, 소피. 나머지는 강제노동 10년에서 20년. 피에르는 나이를 고려해 5년.


드 브라이언트 판사가 판결문을 읽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그녀의 손이 망치를 쥔 채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정의를 집행하는 것과 사람을 죽음으로 보내는 것 사이의 간극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


처형은 다음날 새벽에 집행되었다. 


새벽 5시 23분.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 처형장소는 구 왕립 공원의 한 구석이었다. 한때 아이들이 뛰놀던 잔디밭이 이제는 피로 물들 운명이었다. 


공기는 차가웠고,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가로등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몇 개의 횃불만이 흐릿한 빛을 던지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사형수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총살형이었다. 집행 부대는 6명. 각자 다른 부대에서 차출되었다. 그들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몇몇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드비에와 함께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맥브라이드는 직접 참관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10미터 떨어진 곳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의 회색 군복은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보였다.


첫 번째는 마르틴 상사였다. 그는 기둥에 묶이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리에 섰다. 눈가리개도 거부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기도하는 것 같았다.


"조준!"


집행관의 명령이 떨어졌다. 6개의 총구가 마르틴의 가슴을 향했다.


"발사!"


여섯 발의 총성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하지만 미세한 시간차가 있었다. 한 명이 주저했던 것이다. 마르틴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는 즉사했다.


두 번째는 소피 대위였다. 그녀는 담담했다. 마지막 담배를 청했고, 허락받았다. 말보로 라이트. 그녀가 평소 피우던 것이었다. 담배 연기가 안개와 섞였다. 


그녀는 담배를 다 피우고 스스로 기둥 앞에 섰다. 눈가리개를 받았지만, 제대로 매지 않았다. 흘끗 맥브라이드를 보았다. 그 눈빛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망? 이해? 아니면 그저 공허함?


총성이 울렸다. 소피의 몸이 꼭두각시처럼 쓰러졌다. 피가 안개 속으로 퍼져나갔다.


마지막은 드비에였다. 그는 끌려나왔다. 다리에 힘이 없어 두 명의 헌병이 부축해야 했다. 하지만 기둥 앞에 서자 스스로 똑바로 섰다. 


그는 눈가리개를 거부했다. 마지막 순간, 그의 입이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것이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맥브라이드를 향한 것일 수도, 배신당한 동료들을 향한 것일 수도, 아니면 베를린에 갇힌 가족을 향한 것일 수도 있었다.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의례적으로 세 발만 발사되었다. 드비에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그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붉은 피가 회색 콘크리트를 적셨다. 피는 빠르게 퍼져나갔고, 안개 속에서 검게 보였다.


"시체는 화장해서 가족에게 돌려주시오."


맥브라이드의 명령에 집행관이 놀랐다. 젊은 중위였다. 아마 처음으로 처형을 집행해본 것 같았다.


"장군님, 반역자인데..."


"죽은 자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소."


맥브라이드는 돌아섰다. 그의 군화 바닥에 피가 묻어 있었다. 걸을 때마다 피 묻은 발자국이 남았다. 그 발자국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


새벽 4시. 처형장에서 돌아온 맥브라이드의 군화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드비에의 피였다. 그것은 단순한 혈흔이 아니었다. 배신의 대가이자, 정의의 무게였으며, 지도자의 고독이었다.


벙커로 돌아오는 길은 800미터였다. 평소라면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이날은 30분이 걸렸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니, 영혼이 무거웠다.


거리는 죽어 있었다. 통행금지 시간이었고, 안개가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가끔 순찰병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그들도 맥브라이드를 보면 경례만 하고 비켜섰다. 


그는 병사들의 시선을 느꼈다. 건물의 창문 뒤에서, 골목의 그림자 속에서, 초소의 어둠 속에서. 두려움과 경멸이 뒤섞인 시선들. 


'저 사람이 드비에를 죽였다.'

'저 사람이 우리를 지킨다고?'

'저 사람도 언젠가는...'


속삭임들이 안개 속에 떠돌았다. 맥브라이드는 모든 것을 들었지만, 듣지 않은 척했다.


벙커 입구에 도착했을 때, 보초가 경례를 올렸다. 젊은 이등병이었다. 18살? 19살? 아직 수염도 제대로 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수고했네."


맥브라이드가 말했다. 이등병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마 장군이 자신에게 말을 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 예! 장군님!"


더듬거리는 대답. 맥브라이드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 미소 지으려 했다. 하지만 얼굴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


집무실로 들어서자 뤼프케가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보고서가 쌓여 있었다. 위스키 병도 있었다. 뤼프케가 준비해둔 것이다. 그는 상관의 습관을 알고 있었다.


"장군님."


뤼프케가 보고서를 내밀었다. A4 용지 다섯 장. 타자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내용은 전혀 깔끔하지 않았다.


"숙청 이후 탈영병이 23명입니다. 대부분 드비에와 친분이 있던..."


문장 하나하나가 무겁게 다가왔다. 드비에와 친분이 있던 자들. 그들 중 몇몇은 맥브라이드도 알고 있었다. 로베르 하사 - 드비에가 개인적으로 추천해서 진급시킨. 미셸 일병 - 드비에의 조카. 그들은 이제 어디로 갔을까? 베를린으로? 아니면 그저 죽음으로?


"잡지 마라."


맥브라이드의 명령은 단호했다. 뤼프케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회색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장군님?"


"잡아봤자 무엇하겠나. 또 죽일 건가?"


맥브라이드는 군모를 벗어 책상 위에 던졌다. 모자에도 안개의 습기가 묻어 있었다. 그는 피로한 손짓으로 뤼프케를 내보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혼자 남은 그는 서랍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제임슨. 전쟁 전 재고, 아일랜드산이었다. 병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랐다. 손이 떨려 조금 흘렸다. 호박색 액체가 책상 위로 퍼졌다.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첫 모금. 알코올이 목구멍을 태웠다. 40도의 화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위장에 도달하자 열기가 퍼졌다. 일시적인 위안. 거짓된 온기. 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필요했다.


두 번째 모금. 이번에는 천천히. 위스키의 향이 코를 자극했다. 보리와 이탄, 그리고 시간의 향기. 아일랜드의 향기. 고향의 향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향기.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


"혼자 축하하시는 겁니까?"


로스차일드였다. 은행가는 문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은 뱀처럼 부드러웠다. 검은 양복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깨끗했고, 구두는 반짝거렸다. 이런 종말의 시대에도 그는 마치 이사회에 참석하러 가는 것처럼 단정했다.


그가 맥브라이드 맞은편에 앉을 때, 의자가 삐걱거렸다. 오래된 가죽 의자였다. 한때는 EU 고위 관료가 앉았을 의자. 이제는 그저 낡은 가구일 뿐이었다.


로스차일드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불쾌한 구석이 있었다. 너무 매끈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주름이 거의 없었고, 피부는 창백하게 빛났다. 검은 머리는 포마드로 단정하게 넘겨져 있었고, 회색 눈은 차갑게 계산적이었다. 입술은 얇았고, 미소 지을 때조차 눈은 웃지 않았다.


"무슨 용건이오?"


맥브라이드는 위스키 잔을 내려놓았다. 유리가 나무 책상에 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간단합니다."


로스차일드가 말할 때, 그의 손이 움직였다. 길고 가는 손가락. 피아니스트의 손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맥브라이드에게는 거미의 다리처럼 보였다. 


"숙청은 좋습니다. 필요했죠. 하지만..."


그가 잠시 멈췄다. 계산된 침묵이었다. 극적 효과를 노린 것이다.


"하지만 공백이 생겼죠. 정보부, 통신부, 보급부... 꽤 많은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가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리듬이 있었다. 왈츠였을까? 아니면 장송곡이었을까?


"그래서?"


"제 사람들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로스차일드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의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전쟁 전 고급 브랜드. 아마 샤넬이나 디올. 이런 시대에 향수라니. 사치인지 허영인지.


"유능하고, 무엇보다 충성스럽죠."


그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차가운 미소. 


"물론 저에게."


대놓고 하는 말이었다. 도발이었다. 아니면 힘의 과시였을 수도 있다. 맥브라이드는 잔을 내려놓았다. 위스키가 조금 더 흘렀다.


"당신이 착각하는 게 있소. 나는 당신의 꼭두각시가 아니오."


맥브라이드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물론입니다."


그가 손을 들어 항복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조롱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사람이 필요하고, 저에게는 그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스차일드가 가슴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고급 종이로 만든 봉투. 한때는 평범했을 물건이 이제는 사치품이 되었다. 그가 봉투에서 종이를 꺼낼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니엘 코헨, 전직 벨기에 정보부 분석관. IQ 156, 5개 국어 구사. 가족은 모두 사망. 충성심을 살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죠."


그가 사진을 꺼냈다. 30대 초반의 마른 남자. 안경을 쓰고 있었고, 신경질적인 표정이었다.


"마리아 슈타인, 통신 전문가. MIT 박사 과정 중 전쟁 발발. 약혼자는 실종. 외로운 여자는 다루기 쉽죠."


또 다른 사진. 금발의 여성. 예쁘다기보다는 지적인 인상이었다.


"그리고..."


"그만."


맥브라이드가 명단을 밀어냈다. 종이가 책상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로스차일드는 줍지 않았다. 그저 맥브라이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대안이 있습니까?"


로스차일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독이 있었다.


"아니면 또 프랑스인들을 기용하실 겁니까? 그들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는 장군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프랑스인들. 그 단어가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로스차일드는 알고 있었다. 프랑스와 브뤼셀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그리고 그것을 이용할 줄 알았다.


맥브라이드는 계산했다. 빠르게, 차갑게. 로스차일드의 사람을 받아들이면 군대에 그의 영향력이 침투한다. 정보가 새고, 명령이 왜곡되고, 충성심이 분열될 것이다. 하지만 거부하면? 공백은 메워지지 않고, 행정은 마비되고, 그것을 빌미로 또 다른 압박이 들어올 것이다.


악마의 거래. 하지만 선택지가 있는가?


"세 명까지다."


맥브라이드의 양보였다. 로스차일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셋, 좋습니다 다만 부서장 하나를 우리쪽으로."


로스차일드가 즉시 반격했다. 이미 예상하고 준비한 숫자였을 것이다.


"부서장은 절대 양보못한다. 다섯."


맥브라이드의 목소리에는 종결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는 신호였다.


로스차일드는 잠시 계산했다. 그의 회색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창백하고 차가운 손. 맥브라이드는 잠시 망설였다가 악수했다. 로스차일드의 손은 예상대로 차가웠다. 그리고 축축했다. 마치 뱀의 피부처럼.


악수를 나눈 후, 로스차일드는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여전히 우아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장군.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겁니다."


그가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손잡이를 잡기 전에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장군. 혹시 프랑스 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제 정보망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끼였다. 너무나 명백한 미끼.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물어야 하는 상황이 역겨웠다.


로스차일드가 나간 후, 맥브라이드는 다시 위스키를 따랐다. 이번에는 가득. 유리잔이 넘칠 정도로.


거래는 성사되었다. 또 하나의 더러운 거래. 그의 영혼이 또 조금 더 갉아 먹혔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이것이 생존이었다.


---


숙청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다음 날부터 변화가 느껴졌다. 정보 유출이 멈췄다. 더 정확히는, 발각되는 정보 유출이 멈췄다. 누가 누구를 감시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군 내부의 기강도 다시 서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아침 점호에 늦는 병사가 줄었고, 경례가 다시 각이 잡혔으며, 명령 불복종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규율이 아니라 공포였다. 


맥브라이드는 알고 있었다. 공포만으로는 충성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공포는 일시적이다. 익숙해지면 무뎌진다. 그리고 무뎌진 공포는 분노로 변한다.


복도를 걷다 마주치는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에는 존경이나 신뢰가 있었다면, 이제는 경계와 두려움뿐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경례를 올렸지만, 시선은 피했다.


식당에서도 분위기가 달라졌다. 맥브라이드가 들어가면 대화가 뚝 끊겼다. 숟가락 소리, 그릇 부딪히는 소리만 어색하게 울렸다. 그가 나가고 나서야 다시 속삭임이 시작되었다.


'드비에도 그렇게 믿었겠지.'

'다음은 누구 차례일까?'

'입조심해. 벽에도 귀가 있어.'


---


로스차일드가 나간 후, 뤼프케가 긴급 보고를 들고 들어왔다. 그의 걸음걸이가 평소와 달랐다. 더 빨랐고, 더 긴장되어 있었다. 뤼프케가 이렇게 서두르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프랑스군 내부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그가 파일을 펼쳤다. 종이는 여전히 습기를 머금고 있었고, 잉크 냄새가 났다. 급하게 작성된 보고서였다.


"구체적으로?"


맥브라이드는 위스키 잔을 옆으로 밀고 보고서에 집중했다. 알코올로 흐릿해진 정신을 다잡았다.


"뒤부아 소장이 비밀 회합을 가졌습니다. 어제 밤 23시경, 구 생트 카트린 성당 지하실에서입니다."


뤼프케가 사진을 꺼냈다. 흐릿한 흑백 사진이었다.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듯했다. 어둠 속에서 여러 인물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참석자는 프랑스군 장교 12명, 그리고..."


뤼프케가 망설였다. 그의 턱 근육이 경직되었다. 나쁜 소식을 전해야 할 때 나타나는 그의 특징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시라크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자크 들롱입니다."


자크 들롱. 그 이름이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50대 초반의 정치인. 시라크의 오른팔이자 그림자. 전쟁 전에는 프랑스 정계의 실세였다. 그가 움직인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시라크가 배후에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들롱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인가?


"증거는?"


맥브라이드는 신중했다. 섣부른 판단은 치명적일 수 있었다. 특히 이런 민감한 상황에서는.


"아직 정황뿐입니다. 하지만..."


뤼프케가 또 다른 보고서를 꺼냈다. 이번에는 타자로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무기고 근처에서 프랑스군의 이동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주로 심야 시간대입니다. 그리고..."


그가 페이지를 넘겼다. 숫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탄약 소비량이 비정상적입니다. 훈련량에 비해 30% 이상 초과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축하고 있다는 뜻이군."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다른 쿠데타. 맥브라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깊고 무거운 한숨이었다. 그의 어깨가 처졌다. 갑자기 나이가 10년은 더 든 것처럼 느껴졌다.


끝이 없었다. 하나를 막으면 둘이 나타나고, 둘을 막으면 넷이 나타났다. 히드라의 머리처럼.


"감시를 강화하되, 티내지 마라."


맥브라이드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두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위스키 때문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순간 자신이 본 병사들의 의심과 불안에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야 할 것 같다. 방법이 있나"


뤼프케는 이해한다는 듯히 고개를 끄덕이거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특별 배급입니다. 이번 주에 감자 수확이 있습니다. 그중 일부를 나눠주면 어떻겠습니까?"


"시민들이 반발할 것같은데."


맥브라이드는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군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기여자'들에게 특별 배급을 하시오. 농부, 의료진, 교사, 그리고 군인."


"재원은 어떻게 합니까?"


"재벌들과 협상해보지, 그들도 이번에는 필요한 일이란걸 알아주면 좋겠군, 연합회를 소집..."


그가 잠시 멈췄다. 다음 명령이 목구멍에 걸렸다. 더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아니"


"예?"


"김영호를 불러라. 도청이 필요할 것 같다."


---


한 시간 후, 김영호가 도착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말끔했다. 검은 코트는 단정했고, 하얀 셔츠는 다림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피로의 흔적이 있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었고, 이마에는 주름이 늘어 있었다. 그도 이 지옥 같은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오."


맥브라이드가 의자를 가리켰다. 김영호는 조용히 앉았다. 그의 움직임은 정확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불필요한 동작이 하나도 없었다.


"급한 일이신 것 같군요."


김영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책상 위의 보고서들, 맥브라이드의 표정, 뤼프케의 긴장된 자세. 모든 것을 읽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신 것 같군요, 장군."


김영호가 먼저 말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짐작하고 있었다. 정보는 그의 사업이었고, 브뤼셀에서 일어나는 일치고 그가 모르는 것은 거의 없었다.


"무엇을 원하시오?"


맥브라이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저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김영호가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의 손가락이 길고 섬세했다. 피아니스트의 손 같았다. 하지만 그 손이 다루는 것은 건반이 아니라 정보였다.


"제가 원하는 건... 안정입니다."


그가 가슴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접힌 종이를 펼치자, 복잡한 도표가 나타났다. 브뤼셀의 권력 지도였다. 


중앙에는 맥브라이드가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여러 선이 뻗어나가 있었다. 로스차일드, 슈나이더, 그루버, 시라크, 뒤부아... 각각의 이름 옆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영향력 지수였을까? 위험도였을까?


"슈나이더가 너무 강해지고 있습니다."


김영호가 슈나이더의 이름을 가리켰다. 그 옆의 숫자는 78이었다. 가장 높은 수치였다.


"건설업을 독점하고 있고, 노동자 500명을 직접 지휘합니다. 사실상 사병이죠. 게다가..."


그가 선을 하나 그었다. 슈나이더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점선이었다.


"베를린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황상..."


"알고 있소."


맥브라이드가 끼어들었다. 김영호가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왜 가만히 두십니까?"


"때가 아니니까."


"때를 기다리다가는 늦을 수도 있습니다."


김영호의 경고는 날카로웠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로스차일드는 너무 탐욕스럽고."


김영호가 다음 이름을 가리켰다. 로스차일드 옆의 숫자는 71이었다.


"은행을 통해 경제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자 놀이로 시민들의 피를 빨고 있죠. 게다가 최근에는..."


그가 말을 멈췄다.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말하시오."


"프랑스군과 접촉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맥브라이드와 뤼프케가 시선을 교환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하지만 김영호도 알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 그의 정보망이 얼마나 촘촘한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루버는... 위험합니다."


김영호가 마지막 이름을 가리켰다. 그루버 옆의 숫자는 69였지만,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PMC 800명은 정규군보다 잘 훈련되어 있습니다. 중화기도 보유하고 있고, 무엇보다..."


그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목소리를 낮췄다.


"야심이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용병대장이 아닙니다. 그는 새로운 질서를 꿈꾸고 있습니다. 군사 독재를."


"그래서?"


맥브라이드가 물었다. 이 모든 정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영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다.


"균형이 필요합니다."


김영호가 도표의 중앙을 가리켰다. 맥브라이드의 이름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균형점에는 장군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가 펜을 꺼내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맥브라이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연결선들이 만들어졌다.


"저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통신망을 통해 모든 것을 감시하고,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습니다."


김영호의 제안은 단순했다. 통신망을 이용한 정보 수집과 분석. 재벌들의 동향을 미리 파악하고, 필요하면 견제하는 것.


"스파이 노릇을 하라는 거요?"


맥브라이드의 질문은 직설적이었다. 김영호는 미소 지었다. 작고 차가운 미소였다.


"정보는 힘입니다. 특히 이런 시대에는."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옳다고 해서 깨끗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김영호가 말을 이었다. "프랑스군 장교들의 통신을 감청해야 합니다. 군 통신망 접근 권한을 주십시오."


핵심이었다. 이것이 그가 진짜 원하는 것이었다. 군 통신망에 대한 접근권. 그것은 단순히 프랑스군을 감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모든 군사 통신을 감청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위험한 요청이군요."


뤼프케가 끼어들었다. 그의 우려는 당연했다. 통신 보안은 군사 작전의 핵심이었다.


"위험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김영호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보가 새고 있습니다. 다만 어디로 새는지 모를 뿐이죠. 저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맥브라이드는 고민했다. 또 하나의 더러운 거래였다. 하지만 선택지가 있었는가?


"대가는?"


"말씀드렸듯이, 전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영호가 계산기를 꺼냈다. 아니, 그런 척을 했다. 작은 전자 계산기였지만, 실제로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끄는 제스처였다. 이미 마음속으로 모든 계산은 끝났을 것이다.


"슈나이더가 보유한 건설장비 일부를 제게 넘기도록 압력을 가해주십시오."


통신망 확장에 필수적인 자재였다. 김영호는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동의하지 않을 거요."


"그럼 그의 베를린 접촉 기록을 공개하겠다고 하십시오."


"그걸 어떻게..."


맥브라이드가 물었다가 멈췄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김영호가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따뜻한 미소였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이 묻어났다.


"장군님만 정보를 수집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또 다른 종이를 꺼냈다. 이번에는 사진이었다. 흐릿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슈나이더가 어떤 남자와 만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검은 코트에 달린 휘장이 보였다. 나치의 문양이었다.


"3일 전, 동쪽 검문소 근처 폐건물에서 촬영된 것입니다."


증거였다. 확실한 증거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위협적인 증거였다.


"인상적이군."


맥브라이드가 인정했다. 김영호의 얼굴에 자부심이 스쳤다.


"협력하시겠습니까?"


김영호가 손을 내밀었다. 작고 깨끗한 손이었다. 한 번도 육체노동을 해본 적 없는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이 휘두르는 힘은 총이나 칼보다 더 위험할 수 있었다.


맥브라이드는 잠시 망설였다. 또 하나의 거래. 또 하나의 타협. 그의 영혼이 조금 더 더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좋소."


악수를 나눴다. 김영호의 손은 차갑고 건조했다. 로스차일드와는 다른 종류의 차가움이었다. 계산적이지만 적대적이지는 않은. 비즈니스적인 차가움이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김영호가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효율적이었다. 이미 다음 단계를 계획하고 있는 듯했다.


"아, 그리고 장군님."


문 앞에서 그가 돌아보았다.


"제 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너무 많은 적을 동시에 만들지 마십시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지만, 때로는 모두가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그는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


3일 후, 도청 결과가 나왔다.


아침 7시, 맥브라이드는 김영호의 부하로부터 보고서를 받았다. 젊은 여성이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였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마 마리아 슈타인과 비슷한 부류였을 것이다. 전쟁 전에는 평범한 IT 엔지니어였겠지만, 이제는 스파이가 된.


"여기 녹취록입니다."


그녀가 건넨 파일은 두꺼웠다. 3일간의 모든 통화 기록이 담겨 있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그중 중요한 부분에는 빨간 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맥브라이드는 표시된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부터 충격적인 내용이 있었다.


"로스차일드가 식량을 비축하고 있습니다. 가격 조작을 위해서죠."


"그루버의 PMC 내부에 불만 세력이 있습니다. 급여 문제로."


맥브라이드는 정보에 놀라워하면서도 얼굴이 찌뿌려졌다. 대체 그 동양인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건가.


그렇게 페이지를 넘기던 맥브라이드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프랑스군의, 쿠데타 모의에 관한 대화기록이었다.


*[2011년 X월 XX일, 22:47:33]*


*뒤부아: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신원미상 1: 무기는 충분합니다. 소총 200정, 권총 80정, 수류탄 400개.*


*뒤부아: 탄약은?*


*신원미상 1: 실탄 5만 발. 3일은 버틸 수 있습니다.*


*뒤부아: 3일이면 충분하다. 그때까지 결정될 것이다.*


반란 준비였다. 명백한 반란 준비.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다음 대화였다.


*[2011년 X월 XX일, 01:23:17]*


*들롱: 대통령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뒤부아: 직접 만나뵙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들롱: 하지만?*


*뒤부아: 메시지는 받았습니다. '신중하게, 하지만 단호하게'라고.*


*들롱: 그것이 동의라고 봐도 되겠나?*


*뒤부아: 각하께서는... 신중하시다. 하지만 우리가 성공한다면 지지하실 것이다.*


*들롱: 성공하지 못한다면?*


*뒤부아: 그럼 우리는 그저 일부 극단주의자들이겠지. 각하는 모르는 일이고.*


시라크가 관여하고 있었다. 직접적이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었다. 노련한 정치인다운 이중 플레이였다. 성공하면 지지하고, 실패하면 모른 척하는.


*들롱: 무기는?*


*뒤부아: 충분하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맥브라이드가 약해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들롱: 베를린이 움직이면?*


*뒤부아: 그때가 기회다. 혼란을 틈타...*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다음 대화였다. 날짜는 하루 전이었다.


*[2011년 X월 XX일, 19:55:42]*


*신원미상 2: 로스차일드가 접촉해왔다.*


*뒤부아: 은행가가? 무엇을 원하는가?*


*신원미상 2: 협력이다. 맥브라이드를 제거하면, 프랑스 지역의 경제권을 보장하겠다고.*


*뒤부아: 믿을 수 있나?*


*신원미상 2: 글쎄... 하지만 이용할 가치는 있다.*


*뒤부아: 조심해라. 은행가들은 항상 양쪽에 베팅한다.*


*신원미상 2: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자금력은 매력적이다.*


*뒤부아: 일단 접촉은 유지해라. 하지만 핵심 정보는 주지 마라.*


맥브라이드는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로스차일드가 이중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확인하니 역겨웠다.


"장군님, 즉시 체포해야..."


뤼프케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났다. 배신자를 향한 군인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분노였다.


"아니다."


맥브라이드가 손을 들어 막았다. 뤼프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장군님?"


"아직 때가 아니야."


맥브라이드는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는 여전히 잿빛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었지만, 그것조차 희뿌옇게 보였다. 오염된 대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용하자."


그가 돌아보며 말했다.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어떻게요?"


"로스차일드가 이중 게임을 한다면, 우리는 삼중 게임을 하면 된다."


맥브라이드는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종이를 꺼내 빠르게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계획이 머릿속에서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먼저, 로스차일드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라. 내가 며칠 후 대규모 인사이동을 계획하고 있다고. 프랑스계 장교들을 대거 좌천시킬 거라고."


"그러면 프랑스군이..."


"서두를 것이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거야."


뤼프케의 눈이 빛났다.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때 친다. 명분도 확실하고, 증거도 완벽한 상태에서."


"하지만 로스차일드는요?"


"그는 살려둔다. 당분간은."


맥브라이드의 계산은 차가웠다. 로스차일드를 지금 제거하면 경제가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를 통제할 수 있다면...


"오늘 밤 로스차일드를 불러라. 그리고..."


맥브라이드가 뤼프케에게 속삭였다. 상세한 지시사항이었다. 뤼프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날 밤 10시, 로스차일드가 도착했다.


그는 여전히 말끔했다. 검은 양복, 빨간 넥타이, 반짝이는 구두. 마치 고급 레스토랑에 가는 것처럼 차려입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긴장의 흔적이 있었다.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의 급작스러운 호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늦은 시간에 부르시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로스차일드가 앉으며 물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경계가 있었다.


"프랑스군이 수상하다."


맥브라이드는 준비한 대로 미끼를 던졌다. 로스차일드의 눈이 번뜩였다. 순간적인 반응이었지만, 맥브라이드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요?"


"당신의 정보망으로 뭔가 알아낸 게 있소?"


로스차일드는 잠시 망설였다. 계산하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숨길지.


"아직은요, 하지만 조사해보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는 공모자였다.


"그래 주시오."


맥브라이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서류를 꺼냈다. 새로운 경제 정책안이었다. 사실은 미끼였지만.


"그리고 이것 좀 봐주시오. 통화 개혁을 더 빨리 진행하고 싶소. 당신의 전문성이 필요하오."


로스차일드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통화를 완전히 장악할 기회. 그는 미끼를 물었다.


"어떤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전면적인 개혁이오. 새로운 화폐 발행, 공식 금리 설정, 그리고..."


맥브라이드는 일부러 말을 늘였다. 로스차일드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은행가는 점점 긴장을 풀었다. 자신이 여전히 필요한 존재라고 확신하면서.


한 시간 동안 그들은 경제 정책에 대해 논의했다. 아니, 논의하는 척했다. 맥브라이드는 정보를 주는 척하면서 로스차일드의 반응을 관찰했고, 로스차일드는 조언하는 척하면서 정보를 캐내려 했다.


여우와 늑대의 춤이었다.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춤.


"기꺼이 돕겠습니다."


회의가 끝날 무렵, 로스차일드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자신이 이긴 줄 알고 있었다.


"고맙소. 당신의 도움이 꼭 필요했소."


맥브라이드도 미소 지었다. 진심 어린 미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로스차일드가 나간 후, 맥브라이드는 뤼프케에게 지시했다.


"로스차일드가 프랑스군과 접촉하는 것을 지켜봐라. 하지만 개입하지는 마라."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적이 실수하도록 놔두는 거야. 그리고 그 실수를 이용하는 거지."


맥브라이드는 다시 창가로 갔다. 밤의 브뤼셀은 더욱 어두웠다. 전기가 제한되어 있어 가로등도 거의 켜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가끔 횃불이나 모닥불의 불빛이 보였다. 원시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장군님, 위험하지 않습니까?"


뤼프케의 우려는 당연했다. 적을 너무 가까이 두는 것은 위험했다.


"위험하지 않은 게 어디 있나."


맥브라이드는 김영호의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통제된 위험은 기회가 될 수 있어."


그날 밤, 맥브라이드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위험한 게임을 앞두고, 그는 휴식이 필요했다.


꿈속에서 그는 다시 더블린에 있었다. 전쟁 전의 더블린. 아버지와 함께 부두를 걷고 있었다. 바다 냄새가 났다. 갈매기가 울었다. 평화로웠다.


하지만 갑자기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핵폭발의 섬광이었다. 모든 것이 불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사라졌다. 도시가 사라졌다. 세계가 사라졌다.


그는 혼자 남았다. 잿더미 위에 홀로 서서.


새벽 3시에 깨어났을 때, 베개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


새벽 5시. 맥브라이드는 식은땀에 젖은 채로 일어났다.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동쪽 하늘에 희미한 붉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방사능에 오염된 대기가 만들어내는 기괴한 새벽이었다.


그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10년은 늙은 것 같았다. 이마의 주름은 깊어졌고, 관자놀이에는 흰 머리가 늘었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이제 영구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들어오게."


뤼프케가 들어왔다. 그는 이미 완벽하게 군장을 갖추고 있었다. 아마 잠을 자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장군님, 긴급 보고가 있습니다."


"또 무슨 일인가?"


맥브라이드는 커피를 받으며 물었다.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쓰고 진한 맛이었다. 대용품이 섞인 조악한 커피였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사치였다.


"슈나이더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뤼프케가 보고서를 펼쳤다. 새벽에 급히 작성된 듯, 글씨가 흐트러져 있었다.


"새벽 3시경, 슈나이더 건설 소속 트럭 5대가 북쪽 게이트를 통과했습니다. 목적지는 불명이지만..."


"베를린 방향이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맥브라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다.


"적재물은?"


"건설 자재로 신고했지만... 의심스럽습니다. 트럭이 너무 깊이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무게가 상당했다는 뜻입니다."


"무기거나 식량이겠지. 아니면 둘 다거나."


맥브라이드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슈나이더가 베를린과 본격적으로 손을 잡으려 하고 있다. 이것을 막아야 하나? 아니면 이용해야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뤼프케가 말을 이었다.


"로스차일드가 새벽 2시에 은행 건물에서 비밀 회의를 열었습니다. 참석자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프랑스 번호판을 단 차량이 목격되었습니다."


"뒤부아의 차인가?"


"아닙니다. 민간 차량이었습니다. 아마도..."


"시라크의 사람이겠지."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고 있었다. 로스차일드는 프랑스와 거래를 진행하고 있고, 슈나이더는 베를린과 접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맥브라이드는...


"장군님, 선제 조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뤼프케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지금 당장 슈나이더의 트럭을 막고, 로스차일드를 체포하면 당장의 위기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야. 계획대로 진행한다."


맥브라이드는 일어섰다. 군복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 될 것이다.


---


오전 9시, 정례 경제 회의가 열렸다.


회의실은 한때 EU 집행위원회의 소회의실이었다. 타원형 테이블은 여전히 광택이 났지만, 곳곳에 총탄 자국과 화상 흔적이 있었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반쯤 떨어져 있었고, 벽에 걸린 EU 기가는 찢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참석자들이 속속 도착했다. 


첫 번째는 슈나이더였다. 그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다. 검은 양복 차림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옆구리에 권총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의 뒤에는 경호원 둘이 따라왔다. 근육질의 거구들이었다. 전직 용병으로 보였다.


두 번째는 로스차일드였다. 그는 정확히 정시에 도착했다. 1분도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다. 계산된 시간 엄수였다. 오늘따라 그의 표정은 더욱 침착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


세 번째는 그루버였다. PMC 대표답게 그는 전투복 차림이었다. 베레모를 쓰고 있었고, 가슴에는 훈장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대부분 전쟁 전에 받은 것들이었지만, 몇 개는 최근에 스스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네 번째는 니콜라 테슬라 3세였다. 에너지 담당자답게 그는 항상 피곤해 보였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손에는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아마 밤새 발전소 가동률을 계산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영호가 들어왔다. 그는 평소처럼 단정했지만, 오늘은 뭔가 달라 보였다. 표정이 더 경직되어 있었고, 눈빛에는 경계가 서려 있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모두 착석하시오."


맥브라이드가 회의를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참석자들은 그 속에 숨은 긴장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안건은 세 가지요. 첫째, 식량 배급 조정. 둘째, 겨울 대비 연료 확보. 셋째..."


그가 잠시 멈췄다. 시선이 참석자들을 한 명씩 훑었다.


"보안 문제."


'보안'이라는 단어에 몇몇이 미세하게 반응했다. 슈나이더의 턱 근육이 경직되었고, 로스차일드의 손가락이 펜을 만지작거렸다. 그루버만이 무표정을 유지했다.


"먼저 식량 문제부터 논의하죠."


맥브라이드가 서류를 펼쳤다.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현재 비축량으로 82일. 하지만 이는 현재 인구 기준입니다. 만약..."


그가 또 멈췄다. 이번에는 의도적이었다.


"만약 인구가 20% 증가한다면, 68일로 줄어듭니다."


"인구가 증가한다고요?"


슈나이더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


"누가 또 오는 겁니까? 프랑스놈들도 모자라서?"


"그것도 가능성 중 하나죠."


맥브라이드가 대답했다. 모호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생산입니다. 농장 수확량이 예상보다 30% 적을 것으로 보입니다."


"30%?"


이번에는 로스차일드가 끼어들었다. 그의 계산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럼 실제로는 60일도 버티기 어렵다는 뜻 아닙니까?"


"그래서 대책이 필요합니다."


맥브라이드가 지도를 펼쳤다. 브뤼셀 주변 지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남쪽 30킬로미터 지점에 버려진 식품 창고가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전쟁 전 보존군수물자보관 센터였던 곳입니다."


"방사능 수치는?"


"높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습니다. 방호복을 입으면 접근 가능합니다."


"누가 갑니까?"


그루버의 질문이었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지원자를 받을 생각입니다. 특별 배급을 조건으로."


"자살 임무군요."


그루버가 코웃음 쳤다.


"하지만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겠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방사능에 노출되어 천천히 죽거나, 굶어서 빨리 죽거나. 선택지는 그것뿐이라는 것을.


"제가 팀을 구성하겠습니다."


슈나이더가 갑자기 말했다. 의외의 제안이었다. 맥브라이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댁의 건설 노동자들을 위험에 빠뜨리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지원자를 받겠습니다. 물론... 적절한 보상을 전제로."


"어떤 보상을 원하시오?"


"회수한 식량의 20%."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슈나이더는 진지했다.


"10%."


맥브라이드가 즉시 반격했다.


"15%. 최종입니다."


"12%. 그리고 사상자 가족에게 특별 배급."


거래가 성사되었다. 슈나이더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음은 연료 문제입니다."


니콜라가 보고서를 펼쳤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보고 내용 때문인지.


"현재 석탄 비축량으로는 2개월이 한계입니다. 그것도 하루 4시간 난방 기준입니다."


"작년과 같군요."


로스차일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묻어났다.


"작년에는 712명이 얼어 죽었죠."


차가운 숫자였다. 하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이웃이었다.


"대안은?"


맥브라이드가 물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없습니다. "


"그럼 얼어 죽으란 말입니까?"


슈나이더가 끼어들었다.


"제 노동자들은 작업을 하려면 최소한의 온기가 필요합니다."


"모두에게 필요하죠."


로스차일드가 차갑게 대꾸했다.


"문제는 우선순위입니다."


논쟁이 시작되었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주장했다. 슈나이더는 생산 시설을, 로스차일드는 은행 건물을, 그루버는 병영을, 니콜라는 발전소 자체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맥브라이드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모두가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현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짓밟는 현실.


"그만."


그가 손을 들었다. 논쟁이 멈췄다.


"우선순위는 이미 정해져 있소. 병원, 학교, 그리고 주거 시설. 그 순서대로."


"터무니없습니다!"


슈나이더가 소리쳤다.


"생산 시설 없이 어떻게..."


"생산할 사람이 없으면 시설이 무슨 소용이오?"


맥브라이드의 반박은 차가웠다.


"하지만..."


"결정 사항이오."


더 이상의 이의는 없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볼 수 있었다. 슈나이더의 눈에 타오르는 분노를. 로스차일드의 계산적인 시선을. 그루버의 경멸을.


"마지막으로 보안 문제."


맥브라이드가 주제를 바꿨다.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최근 정보 유출이 심각합니다."


그가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몇몇은 시선을 피했다.


"우리의 계획이 적에게 새고 있습니다. 베를린이 우리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소."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는 뜻입니까?"


김영호가 물었다. 아이러니한 질문이었다. 최고의 정보원이 스파이의 존재를 묻다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맥브라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부터 새로운 보안 조치를 시행합니다."


그가 서류를 나눠주었다. 새로운 보안 규정이 적혀 있었다.


"모든 외부 접촉은 보고해야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이건 사실상 감시 아닙니까?"


로스차일드가 항의했다. 예상된 반응이었다.


"비즈니스를 하려면 외부 접촉이 필수적입니다."


"비즈니스와 반역의 경계가 모호해서 그럽니다."


맥브라이드의 대답은 날카로웠다. 로스차일드의 얼굴이 굳었다.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모두를 의심합니다. 저 자신까지도."


차가운 진실이었다. 이 방에 있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어서는 안 되었다.


회의는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참석자들이 하나둘 나갔다. 각자의 계산과 음모를 품고.


마지막으로 김영호가 남았다.


"장군님, 잠시 말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오?"


김영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슈나이더의 트럭 말입니다. 제가 추적해봤는데..."


"어디로 갔소?"


"북쪽 30킬로미터 지점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진을 꺼냈다. 흐릿한 위성 사진이었다. 어떻게 구했는지 의문이었다.


"여기 보십시오. 트럭이 있던 자리에 이상한 흔적이 있습니다."


맥브라이드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땅에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원형이었고, 그 안에 복잡한 기호들이 있었다.


"이게 뭐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불길합니다."


김영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묻어났다. 그를 처음 보는 감정이었다.


"계속 조사해보시오."


"그리고 장군님..."


김영호가 망설였다.


"제 조언을 하나 더 드리자면... 조심하십시오. 폭풍이 오고 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나갔다. 맥브라이드는 홀로 남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문양.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단순히 계절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


정보는 무기였다. 맥브라이드는 이를 교묘하게 활용했다.


먼저 슈나이더를 불렀다.


"베를린의 뮐러가 다시 접촉해왔다고 들었소."


슈나이더의 얼굴이 굳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알고 있소. 그들의 제안이 매력적이라는 것을."


"장군."


"하지만 한 가지 물어보겠소. 당신의 노동자 중 몇 명이나 '순수한 혈통'이오?"


슈나이더가 말문이 막혔다. 그의 휘하 건설 노동자 500명 중 절반 이상이 이민자 출신이거나 혼혈이었다.


"그들이 권력을 잡으면, 당신은 노동력의 절반을 잃을 거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간단하오. 앞으로 3개월간 정화 작업을 50% 늘리시오. 대가는 정당하게 지불하겠소."


"50%는 무리입니다. 30%가 한계..."


"대신 연료를 10% 더 배급하겠소."


거래가 성사되었다. 슈나이더는 베를린과의 접촉을 중단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다음은 로스차일드였다. 맥브라이드는 직접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대신 시민 평의회에서 '식량 재고 조사'를 제안했다.


"투명성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창고, 정부와 민간 모두 포함해서."


로스차일드가 반발했다.


"사유 재산 침해입니다!"


"그럼 자발적으로 공개하시오. 숨길 것이 없다면."


함정이었다. 거부하면 의심받고, 공개하면 비축분이 드러난다. 로스차일드는 결국 타협안을 제시했다.


"비축분의 30%를 시장에 풀겠습니다. 단, 가격은 현행 유지."


하나의 작은 승리였다.



진짜 문제는 프랑스군과의 갈등이었다. 뒤부아 소장은 여전히 적대적이었고, 프랑스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분리주의 정서가 커지고 있었다.


맥브라이드는 예상치 못한 방법을 선택했다.


"축구 경기를 열겠다."


참모들이 의아해했다.


"축구요?"


"브뤼셀 연합팀 대 프랑스 연합팀. 승자에게는 특별 배급 1주일."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시라크가 지지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사람들에게 숨 쉴 공간이 필요해요."


2주간의 준비 끝에, 경기가 열렸다. 임시로 만든 운동장에는 3,000명이 모였다. 거의 전 인구의 20%였다.

프랑스 팀에는 전직 리그 2 선수도 있었다. 브뤼셀 팀은 아마추어들이었지만, 팀워크가 좋았다.


경기는 치열했다. 전반 35분, 프랑스가 선제골을 넣었다. 프랑스 관중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후반 들어 브뤼셀이 따라잡았다. 1-1.


연장전까지 간 끝에, 결국 승부차기.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마지막 키커는 브뤼셀의 골키퍼, 19살의 마티아스였다. 전직 유소년 국가대표였다.


공이 골문을 갈랐다. 4-3, 브뤼셀의 승리였다.


하지만 진짜 승리는 경기가 끝난 후에 있었다. 양 팀 선수들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관중들도 섞여서 박수를 쳤다.

뒤부아 소장이 맥브라이드에게 다가왔다.


"좋은 경기였습니다."


처음으로 적의 없는 목소리였다.


"다음에는 우리가 이길 겁니다."


"기대하겠소."


그러나 축제는 한순간이다. 이것이 임시방편임은 맥브라이드 자신이 가장 잘 알고있었다.


---


다음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오전 10시, 슈나이더가 맥브라이드의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노크도 없이. 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상기되어 있었고, 목의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로스차일드 이 자식이 내 노동자들을 빼가고 있습니다!"


그가 책상을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먼지가 일어났다.


"진정하시오."


맥브라이드는 침착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아니, 유도한 일이었다.


"진정하라고? 진정하라고!"


슈나이더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침이 튀었다.


"그 유대인 새끼가 두 배의 임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 배! 내 최고 기술자 열 명이 이미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맥브라이드의 담담한 반응에 슈나이더는 더욱 격분했다.


"개입해주십시오! 이건 명백한 경제 질서 파괴입니다! 공정 경쟁 위반이고..."


"공정 경쟁?"


맥브라이드가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에 냉소가 묻어났다.


"언제부터 공정 경쟁을 하셨다고?"


"그게 무슨..."


"베를린에 보낸 트럭 5대. 그것도 공정 경쟁입니까?"


슈나이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입이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물고기처럼.


"그건... 그건..."


"건설 자재라고 하셨죠? 정말 그것뿐이었습니까?"


맥브라이드가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갔다. 슈나이더에게 등을 보이며 말했다.


"자유 시장 아니오?"


"자유 시장? 이게 자유 시장입니까?"


슈나이더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약탈입니다! 강도짓이라고요!"


"그럼 당신도 임금을 올리시오."


맥브라이드가 돌아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무심했다.


"미쳤습니까? 그럼 수익이..."


"그게 당신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오."


차가운 진실이었다. 슈나이더는 주먹을 쥐었다. 너무 세게 쥐어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났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후회하실 겁니다."


슈나이더가 이를 갈며 말했다.


"이 일을... 이 모욕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너무 세게 닫아서 벽의 액자가 떨어졌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맥브라이드는 조용히 액자를 주웠다. 전쟁 전 브뤼셀의 전경 사진이었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의 모습.


---


30분 후, 그루버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노크를 했다. 정중한 노크였다. 계산된 정중함이었다.


"들어오시오."


그루버가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전투복 차림이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더 많은 무기를 차고 있었다. 권총 두 자루, 단검, 수류탄까지.


"무장이 과하군요."


맥브라이드가 지적했다. 그루버는 으쓱했다.


"위험한 시대입니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죠."


그는 의자에 앉았다. 정확하게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자세였다.


"재미있는 제안을 하겠습니다."


그루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워서 오히려 위험하게 들렸다.


"들어보죠."


"슈나이더가 방금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루버가 담배를 꺼냈다. 럭키 스트라이크였다. 전쟁 전 물건이었다. 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로스차일드를 견제하자고 하더군요. 당신도 로스차일드가 너무 커지는 게 불안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3자 동맹을 제안합니다."


그루버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연기가 맥브라이드의 얼굴로 향했다. 의도적이었다.


"저, 당신, 슈나이더. 로스차일드와 프랑스를 동시에 견제하는 겁니다."


"프랑스?"


맥브라이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루버가 웃었다. 차가운 웃음이었다.


"다들 알고 있습니다. 프랑스놈들이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것을. 문제는 언제 터질 것인가죠."


그루버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의 회색 눈이 맥브라이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리가 먼저 치면 됩니다. 선제공격. 깨끗하고 빠르게."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모든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오."


맥브라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루버의 표정이 굳었다.


"때? 언제까지 기다리실 겁니까? 그들이 당신의 목에 칼을 들이댈 때까지?"


"필요하다면."


"미쳤군요."


그루버가 일어섰다.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군화로 비볐다.


"후회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너무 늦을 겁니다."


"그럴지도."


맥브라이드의 담담한 대답에 그루버는 코웃음 쳤다.


"당신이 그렇게 나온다면... 저도 제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위협이었다. 명백한 위협.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루버가 나간 후, 맥브라이드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서랍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이번에는 잔에 따르지 않고 병째로 마셨다.


알코올이 목구멍을 태웠다. 하지만 그것조차 이제는 무감각했다.


---


10월이 되자, 진짜 시험이 다가왔다. 두 번째 겨울이었다. 작년의 악몽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현재 연료 비축량으로는 3개월이 한계입니다."


에너지 재벌 니콜라의 보고였다.


"대안은?"


"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가 망설였다.


"말해보시오."


"구 원자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60킬로미터 거리에. 부분 가동이 가능할 수도..."


"방사능 위험은?"


"이미 조사팀을 보냈습니다. 예상보다 양호합니다. 하지만 수리가 필요하고, 전문가도 구해야합니다."


원자력.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간 기술. 하지만 동시에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준비하시오. 그루버와 협의해서 호위 병력도."


하지만 뜻밖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왔다.


"우리 중에 원자력 기술자가 있습니다."


뒤부아가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백발의 노인이 있었다.


"피에르 베르나르 박사입니다. 은퇴했지만, 플라망빌 원전에서 30년간 일했습니다."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프랑스군 기술자 팀이 운영을 맡게 해주십시오."


큰 양보였다. 에너지원을 통제한다는 것은 곧 권력을 쥔다는 의미였다.


"감독은 연합위원회에서."


"동의합니다."


 50명의 원정대가 출발했다. 2주 후, 첫 전기가 브뤼셀에 도착했다. 겨우 500킬로와트였지만, 그것으로 병원과 정수 시설을 24시간 가동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불 켜진 병원을 보며 울었다. 문명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뒤 브뤼셀은 이상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시장이 열렸다. 물물교환이 주였지만, 로스차일드의 '브뤼셀 크레딧'도 조금씩 통용되기 시작했다. 감자 1킬로에 10크레딧, 담배 한 갑에 50크레딧.


학교도 문을 열었다. 비록 일주일에 3일뿐이었지만, 아이들은 다시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그리고 영어. 새로운 세계의 공용어들이었다.


작은 의료 센터도 만들어졌다. 의사 8명, 간호사 20명. 턱없이 부족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밖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느껴졌다. 방사능 낙진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겨울 눈처럼.


"장군님."


뤼프케가 들어왔다.


"시민 평의회에서 행사를 제안했습니다. 작은 축제를..."


"좋은 생각이군."


맥브라이드는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잿빛 도시였다. 여전히 위태로웠다. 하지만 무언가 변하고 있었다.


---


어느날, 김영호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젊은 여성이 함께 있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있었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제 비서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죠."


김영호가 소개했다. 여성이 고개를 숙였다.


"린다 박입니다."


한국계 이름이었다. 하지만 영어에는 억양이 없었다. 아마 교포 2세나 3세일 것이다.


"무슨 일이오?"


맥브라이드가 물었다. 김영호가 린다에게 눈짓했다. 그녀가 서류 가방을 열었다.


"재벌들이 서로 물어뜯기 시작했습니다."


김영호가 말하며 서류를 꺼냈다. 복잡한 도표와 숫자들이 빼곡했다.


"슈나이더 건설의 주요 기술자 17명이 지난 3일간 로스차일드로 이직했습니다. 연봉 2.5배 제시."


"알고 있소."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린다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분석적이었다.


"로스차일드는 단순히 인력을 빼가는 게 아닙니다. 그는 슈나이더 건설을 완전히 흡수하려 하고 있습니다."


"증거는?"


"이것을 보십시오."


그녀가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은행 거래 내역이었다.


"로스차일드가 최근 대규모 자금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일반 대출이지만, 실제로는..."


"기업 사냥 자금이군."


맥브라이드가 이해했다. 로스차일드는 슈나이더를 경제적으로 질식시킨 다음, 헐값에 인수하려는 것이다.


"좋은 일 아니오?"


맥브라이드가 물었다. 김영호가 고개를 저었다.


"표면적으로는요. 하지만 결국 승자는 하나만 남을 겁니다. 그리고 그 승자는..."


"통제하기 어려울 거다."


"정확합니다."


김영호가 차를 홀짝였다. 린다가 즉시 찻잔을 다시 채웠다. 완벽한 호흡이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균형추를 만들죠."


"균형추?"


"중간 상인 조합을 만드는 겁니다."


김영호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의 눈이 빛났다.


"재벌들에게 완전히 종속되지 않은, 하지만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집단. 협동조합 형태가 좋겠습니다. 특히 농업 쪽이."


"주도는?"


"제가 하죠. 물론 장군님의 묵인 하에."


또 다른 세력. 또 다른 변수. 맥브라이드는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선택지가 있었는가?


"좋소. 하지만 조건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배급과 군납의 20%는 그 조합을 통해서 하시오. 재벌들의 독점을 막기 위해서."


김영호가 린다와 시선을 교환했다. 빠른 계산이 오갔다.


"15%로 하시죠. 처음부터 너무 크면 의심받습니다."


"17%. 그리고 프랑스인들도 조합에.참여할 수 있게."


"...동의합니다."


악수를 나눴다. 또 하나의 거래가 성사되었다.


김영호가 나가려다가 멈췄다.


"아, 그리고 장군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뭔가?"


"프랑스군 쪽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맥브라이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구체적으로."


"오늘 새벽, 프랑스군 장교 3명이 동쪽 게이트를 통과했습니다. 목적지는..."


김영호가 지도를 꺼내 한 지점을 가리켰다.


"국경 방향입니다."


"베를린?"


"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린다가 사진을 꺼냈다. 흐릿했지만 인물은 알아볼 수 있었다.


"시라크 전 대통령의 경호원이 동행했습니다."


퍼즐의 또 다른 조각이었다. 시라크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계속 감시하시오."


"그럴 생각입니다. 하지만 장군님..."


김영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심하십시오. 폭풍이... 정말로 가까이 왔습니다."


그들이 나간 후, 맥브라이드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프랑스, 베를린. 그리고 시라크.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밖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아니, 천둥이 아니었다. 폭발음이었다.


멀리서, 하지만 분명히 들렸다.


시작되었다.


---


맥브라이드가 창문으로 달려갔다. 남동쪽 하늘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폭발은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규칙적인 간격으로 이어졌다.


"장군님!"


문이 벌컥 열리며 뤼프케가 뛰어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군복은 흐트러져 있었다.


"남쪽 검문소가 공격받았습니다!"


"누가?"


"확인 중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폭발음.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건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프랑스군은?"


맥브라이드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뤼프케가 고개를 저었다.


"막사에 그대로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도 당황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맥브라이드의 머릿속에서 가능성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베를린? 아니다, 너무 이르다. 그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됐다. 그렇다면...


"보고합니다!"


통신병이 헐떡이며 들어왔다. 19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얼굴이 창백했고, 손이 떨리고 있었다.


"검문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습격자들은... 습격자들은..."


"말해!"


"우리 시민들입니다. 브뤼셀 시민들이... 프랑스인 거주구역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내부 폭발. 맥브라이드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병력을 동원해라. 즉시!"


"하지만 장군님, 우리 병사들 중에도 동조자가..."


뤼프케의 우려는 현실적이었다. 반프랑스 정서는 군대 내에도 퍼져 있었다.


"그럼 PMC를."


맥브라이드는 싫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루버를 불러라. 지금 당장!"


---


15분 후, 그루버가 도착했다. 


그는 완전 무장 상태였다. 방탄복에 헬멧, 자동소총까지. 마치 전투에 나가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호출하셨습니까, 장군?"


그의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묻어났다. '내가 필요할 줄 알았다'는 듯한.


"시민들을 진압해야 한다."


맥브라이드의 명령은 단호했다. 그루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시민들을요?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폭동을 일으킨 자들은 모두 진압 대상이다. 국적 불문."


"흥미롭군요."


그루버가 총을 점검하며 말했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불길하게 들렸다.


"하지만 제 부하들이 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까? 브뤼셀 시민들을 진압하는 것은... 인기 없는 일이 될 텐데."


거래를 원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거래였다. 맥브라이드는 이를 악물었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치안 유지 권한. 한 달간."


"일주일."


"3주. 그리고 진압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면책."


"과도한 무력 사용은 안 된다."


"정의하기 나름이죠, '과도한'이라는 게."


그루버의 미소는 차가웠다. 포식자의 미소였다.


"2주. 그리고 사후 보고서 제출."


"성사."


그루버가 무전기를 꺼냈다.


"케르베로스 전 대원에게. 코드 레드. 반복한다, 코드 레드. 완전 무장하고 대기하라."


무전기에서 응답들이 쏟아졌다. 훈련된 부대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하루 안에 현장을 장악하겠습니다."


그루버가 돌아서며 말했다.


"아, 그리고 장군. 혈액형이 뭐죠?"


"왜 묻소?"


"혹시 모르니까요. 오늘은... 피를 볼 것 같아서."


그는 웃으며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묘하게 최종적으로 들렸다.


---


프랑스인 거주구역은 지옥이 되어 있었다.


한때 조용했던 지하 주차장 거주지는 이제 전쟁터였다. 불타는 천막들, 비명소리, 연기와 최루가스가 뒤섞인 숨막히는 공기. 


폭도들은 약 200명. 대부분 젊은 브뤼셀 남성들이었다. 그들은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일부는 총까지 들고 있었다.


"프랑스놈들을 쫓아내라!"

"우리 식량을 훔쳐가는 기생충들!"

"브뤼셀은 브뤼셀인의 것이다!"


구호가 메아리쳤다. 증오의 구호들이었다.


그때, 식량 창고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사망 12명, 부상 34명. 그리고 3톤의 귀중한 식량이 소실되었다.


"혼란을 틈탄 베를린의 소행인가?"


"아닙니다." 뤼프케가 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내부자입니다. 그것도..."


"말해."


"친정부 세력 중 극단주의자들입니다. 프랑스인들에 대한 보복이라고..."


끔찍했다. 적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극단적인 아군이었다.


맥브라이드는 즉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폭탄 테러범들을 찾아라. 그리고 공개 재판에 넘겨라."


"하지만 장군님, 그들은 우리 편..."


"우리 편은 시민들이야.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수사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김영호의 감청 기술과 그루버의 PMC가 협력했다. 3일 만에 범인들이 체포되었다.


5명의 브뤼셀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후회하지 않았다.


"프랑스놈들이 우리 식량을 축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애국자입니다!"


재판은 공개로 진행되었다. 검사는 프랑스인, 판사는 벨기에인, 그리고 배심원은 양쪽에서 절반씩.


판결은 가혹했다. 주동자 2명 사형, 나머지는 종신 강제노동.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처형 전날 밤, 무장 집단이 감옥을 습격했다. 그들은 죄수들을 구출하려 했다.


"막아라!"


경비병들과 습격자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18명이 죽었다.


습격자들 중에는 뜻밖의 인물이 있었다.


"판덴베르크 의원의 아들입니다."


충격이었다. 시민 대표의 가족이 테러리스트였다니.


판덴베르크는 눈물을 흘리며 사임했다.


"제가... 제가 아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시민들은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판덴베르크의 아들은 진정한 애국자다!"


"프랑스놈들을 몰아내자!"


분열은 더욱 심해졌다.


프랑스 민간인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구석에 모여 떨고 있었다. 일부 프랑스 남자들이 임시 바리케이드를 쌓고 저항하고 있었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다.


그때 굉음과 함께 장갑차 3대가 도착했다. 케르베로스 PMC였다.


"저기다! 용병놈들이다!"


폭도 중 한 명이 외쳤다. 화염병이 장갑차를 향해 날아갔다. 병이 깨지며 불꽃이 튀었지만, 장갑차는 멈추지 않았다.


해치가 열리며 중무장한 PMC 대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검은 전투복, 방탄 헬멧, 자동소총. 그들의 움직임은 기계적으로 정확했다.


"경고한다! 즉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확성기에서 그루버의 목소리가 울렸다. 차갑고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꺼져! 우리는 정당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성이 울렸다. 고무탄이었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맞으면 실탄 못지않게 위험했다.


비명소리. 폭도 중 한 명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갈비뼈가 부러진 듯했다.


"마지막 경고다. 항복하라."


이번에는 주저가 없었다. PMC 대원들이 일제히 총을 겨누자, 폭도들 중 일부가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경파들은 달랐다.


"겁쟁이들! 싸워! 우리 도시를 위해!"


누군가가 권총을 뽑았다. 실탄이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탕!


저격수의 총성이었다. 권총을 든 남자의 어깨가 터졌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음은 머리다."


그루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항복이 시작되었다. 하나둘씩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5분 만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


"42명 체포, 8명 사망, 23명 부상."


그루버가 보고했다. 그의 전투복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누구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망자 중 프랑스인은?"


"3명입니다. 노인 1명, 여성 1명, 그리고..."


그루버가 잠시 멈췄다.


"12살 소년 1명."


맥브라이드는 눈을 감았다. 12살. 전쟁 후에 태어났을 아이였다. 이 지옥 같은 세상밖에 모르는 아이가 이제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브뤼셀 시민 사망자는?"


"5명. 모두 성인 남성. 무장 저항 중 사살."


숫자들. 차가운 숫자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아버지였고, 형제였다.


"포로들은?"


"임시 구금 시설에 수용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더 큰 폭발이 있을 겁니다."


그루버의 경고는 예언적이었다.


바로 그때, 또 다른 통신병이 뛰어들어왔다.


"장군님! 시라크 전 대통령이... 시라크 전 대통령이..."


"진정하고 말해!"


"실종되었습니다! 경호원들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


프랑스인 거주구역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맥브라이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탄 천막들, 깨진 유리,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핏자국들. 전쟁터였다. 아니, 학살 현장에 더 가까웠다.


생존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500명 정도.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일부는 울고 있었고, 일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무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수행원의 대답은 무력했다. 의약품은 부족했고, 의료진은 더 부족했다.


맥브라이드는 군중 속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아니, 피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복잡했다. 


한 여성이 다가왔다.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얼굴은 그을음으로 더러워져 있었고, 옷은 찢어져 있었다. 그녀의 품에는 어린 아이가 있었다. 5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당신이... 당신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울부짖음과 비명으로 목이 상한 듯했다.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우리도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인데!"


맥브라이드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미안하다고? 최선을 다했다고? 모든 변명이 공허했다.


여자아이가 엄마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큰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아저씨, 우리 아빠 어디 있어요?"


그 순간, 맥브라이드는 무너질 뻔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도자는 약함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찾아보겠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컸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미...


"장군님."


뒤부아 소장이 다가왔다. 프랑스군 지휘관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우리 대통령님은 어디 계십니까?"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비난이 담긴 질문이었다.


"찾고 있소."


"찾고 있다?"


뒤부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대통령은 실종되고, 그런데 당신은 '찾고 있다'고만 합니까?"


"소장..."


"우리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도 인간입니다! 우리도 생존자입니다!"


뒤부아의 외침이 폐허가 된 주차장에 메아리쳤다. 프랑스 군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은 무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긴장이 고조되었다. 브뤼셀 군인들도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양쪽이 대치했다.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오발이면 내전이 시작될 상황이었다.


"뒤부아 소장."


맥브라이드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강철 같은 권위가 있었다.


"당신의 분노는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싸운다면, 진짜 적들만 좋아할 뿐이오."


"진짜 적? 우리에게 진짜 적은 당신들..."


"베를린입니다."


맥브라이드가 끼어들었다.


"베를린의 네오나치들. 그들이 진짜 적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분열하기를 기다리고 있소. 우리가 서로 죽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뒤부아가 주춤했다. 맥브라이드는 계속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찾을 것이오. 범인들은 처벌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부상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겠소?"


긴 침묵이 흘렀다. 뒤부아의 주먹이 떨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한 걸음 물러섰다.


"3일. 3일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답을 찾지 못한다면..."


위협을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


긴급 대책 회의가 소집되었다.


참석자는 핵심 인물들뿐이었다. 맥브라이드, 뤼프케, 김영호, 그리고 의외로 로스차일드.


"시라크는 어디로 갔을까?"


맥브라이드의 질문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국경 방향으로 이동한 것은 확실합니다."


김영호가 보고했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했다.


"하지만 정확한 목적지는..."


"베를린일 겁니다."


로스차일드가 끼어들었다.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근거로?"


"단순합니다. 시라크는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는 프랑스인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잡을 사람이죠."


"하지만 네오나치들이 프랑스인들을 받아들일까?"


뤼프케의 의문은 타당했다. 네오나치들의 인종 청소 정책에 프랑스인들이 포함될 가능성이 컸다.


"아마도..."


로스차일드가 말을 이었다.


"거래를 했을 겁니다. 브뤼셀의 정보와 약점을 넘기는 대가로 프랑스인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배신.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김영호의 질문에 맥브라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공식적으로는 시라크를 계속 찾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지도를 펼쳤다. 브뤼셀과 베를린 사이의 지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방어선을 구축한다. 베를린이 움직이기 전에."


"병력이 부족합니다."


뤼프케의 지적은 현실적이었다. 폭동 진압으로 병력은 분산되어 있었고, 사기는 바닥이었다.


"그래서..."


맥브라이드가 로스차일드를 바라보았다.


"돈이 필요합니다. 용병을 더 고용해야 합니다."


로스차일드의 눈이 번뜩였다. 계산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최소 500명. 중무장. 3개월 계약."


"그 정도면..."


로스차일드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진짜로 계산하는 것 같았다.


"우리 재정의 40%를 소모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소?"


"있습니다."


로스차일드가 서류를 꺼냈다. 준비된 것이었다.


"전시 공채를 발행합시다. 시민들에게 팔고, 전쟁이 끝나면 갚는 겁니다."


"전쟁이 끝난다면."


김영호의 냉소적인 지적이었다.


"끝나지 않으면 어차피 다 죽습니다. 그럼 빚도 의미 없죠."


로스차일드의 논리는 차가웠지만 현실적이었다.


"좋소. 하지만 조건이 있소."


맥브라이드가 말했다.


"이자율은 최소한으로. 그리고 프랑스인들도 구매할 수 있게."


"프랑스인들이 돈이 있습니까?"


"없으면 노동으로 갚게 하시오. 하지만 그들도 우리의 일원임을 보여야 합니다."


로스차일드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안에 준비하겠습니다."


---


며칠 뒤, 시라크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낯선 남자가 있었다. 금발에 파란 눈, 전형적인 아리아인의 외모였다.


"베를린에서 온 특사입니다."


시라크의 폭탄선언이었다.


"무슨 짓을..."


"대화가 필요합니다, 장군. 전쟁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배신이었다. 아니, 시라크의 입장에서는 현실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회의실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맥브라이드, 시라크, 뒤부아, 뤼프케, 그리고 베를린 특사 프리드리히 폰 슈타우펜베르크.


"우리의 요구는 간단합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목소리는 차갑고 정확했다.


"브뤼셀의 비아리아인들을 우리에게 넘기십시오. 그러면 평화를 보장하겠습니다."


"미친 소리!"


뤼프케가 소리쳤다.


맥브라이드는 조용히 말했다.


"특사님은 돌아가시오. 답은 '아니오'요."


"후회하실 겁니다."


"그럴지도. 하지만 적어도 거울은 볼 수 있을 거요."


슈타우펜베르크가 일어섰다. 나가기 전 그는 돌아보며 말했다.


"3개월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답이 바뀌길 바랍니다."



---


그날 밤, 로스차일드가 다시 찾아왔다.


"실망스럽습니다, 장군. 평화의 기회를 걷어차다니."


"당신도 알고 있었소?"


"저는 사업가입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죠."


"그래서 프랑스와 거래한 거요?"


로스차일드가 순간 굳었다.


"무슨 말씀인지..."


"연기는 그만하시오. 다 알고 있소."


맥브라이드가 녹취록을 꺼냈다. 로스차일드의 안색이 변했다.


"도청은 불법입니다."


"전시엔 불법도 합법도 없소. 있는 건 생존뿐이지."


"그래서 어쩌실 겁니까? 저를 체포하실 겁니까? 그럼 경제가 붕괴할 텐데?"


로스차일드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이미 브뤼셀 경제의 심장이었다.


"아니오. 하지만 조건이 있소."


"들어보죠."


"프랑스와의 거래는 중단. 그리고 앞으로 모든 외부 접촉은 보고."


"그럼 저는 무엇을 얻죠?"


"계속 살아있을 권리."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로스차일드는 계산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슈나이더를 견제해주십시오. 그가 너무 강해지고 있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 아니 사실 이제는 너무 많은 적을 만든걸지도 모르겠다. 맥브라이드는 씁쓸하게 웃었다.


"고려하겠소."


---


문이 열리며 뤼프케가 들어왔다.


"장군님, 또 다른 문제가..."


"뭔가?"


"김영호가 실종됐습니다."


맥브라이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방금 확인했습니다. 그의 사무실은 비어 있고, 통신 장비도 사라졌습니다."


"그의 비서는? 린다 박은?"


"역시 사라졌습니다."


또 다른 배신. 아니면 또 다른 계산. 맥브라이드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모두가 떠나고 있었다. 하나둘씩, 쥐가 가라앉는 배를 떠나듯이.


"수색은 하지 마라."


"장군님?"


"붙잡아도 소용없다. 그는 이미 다음 수를 계산하고 움직였을 거야."


맥브라이드는 다시 앉았다. 갑자기 피로가 밀려왔다. 뼈 속까지 파고드는 피로였다.


"장군님, 이대로는..."


"알고 있네."


맥브라이드가 뤼프케를 올려다보았다. 충실한 부관. 아마도 마지막까지 남을 유일한 사람.


"자네는 왜 떠나지 않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뤼프케가 당황했다.


"장군님?"


"다들 떠나고 있어. 더 나은 기회를 찾아서. 자네도 그럴 수 있어. 아니, 그래야 해."


뤼프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저는 군인입니다, 장군님."


단순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뤼프케가 덧붙였다. "누군가는 끝까지 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맥브라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누군가는 남아야지."


밖에서 또 폭발음이 들렸다. 이번에는 북쪽이었다.


밤은 아직 길었고, 아침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맥브라이드는 혼자 남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브뤼셀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재 속에 붉은 피가 섞여 있었다.


시민들끼리 죽고 죽이는 도시. 서로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도시. 그것이 그가 지켜야 할 도시였다.


책상 서랍의 권총이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한 발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더 이상의 고통도, 책임도, 선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밖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아이가 울고 있었다. 배고파서일까? 무서워서일까? 아니면 부모를 잃어서일까?


맥브라이드는 서랍을 닫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내일도 싸워야 했다. 비록 이길 수 없는 싸움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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