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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쉬는시간


프레빌 48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1



시라크가 죽은 지 11개월이 지났고, 브뤼셀은 조심스럽게 숨을 쉬기 시작했다.


브뤼셀에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탁, 타탁, 탁탁. 불규칙한 듯하면서도 묘한 규칙성이 있는 자연의 타악기였다. 어떤 빗방울은 유리를 타고 흘러내리다가 다른 빗방울과 만나 더 큰 물줄기를 만들었고, 어떤 것들은 창틀에 부딪혀 작은 물보라가 되어 흩어졌다. 


방사능 수치는 WHO 기준치의 3.7배. 정확히는 3.72배였다. 맥브라이드의 책상 위에 놓인 가이거 계수기가 불규칙하게 째깍거리며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째깍... 째깍째깍... 째깍. 1년 전 8.2배에 비하면 놀라운 개선이었다. 그때는 비가 내리면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 빗물이 피부에 닿으면 물집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며칠 후엔 피를 토하며 죽는 이들도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빗물이 더 이상 즉각적인 죽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우산 없이도 10분 정도는 맞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상은 위험했지만, 그래도 진전이었다. 문명 재건의 작은, 그러나 의미 있는 승리였다.


구 유럽연합 본부 건물 13층. 한때는 유럽 관료주의의 심장부였던 이곳이 이제는 잿빛 폐허 속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 있었다. 유럽재건위원회 위원장 집무실의 창문은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앤트워프의 한 공장에서 만든 강화유리, 두께 37밀리미터. 공장이라고 해봐야 반쯤 무너진 건물에 임시로 가마를 설치한 곳이었지만, 그래도 유리를 만들 수 있었다. 투명도는 완벽하지 않았다. 약간 녹색빛이 돌았고, 가장자리는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붕소가 부족해서였다. 순도 높은 원료를 구할 수 없는 전쟁 후 기술력의 한계였다. 


그래도 1년 전 금이 간 유리에 비닐을 붙여 쓰던 때와 비교하면 혁명적 발전이었다. 그때는 바람이 불 때마다 비닐이 펄럭였고, 그 소리가 마치 죽은 자들의 신음처럼 들렸다. 지금의 유리 표면에는 미세한 스크래치가 몇 개 있었다. 7월의 암살 시도 때 총알이 스친 자국이었다. 7.62mm 철갑탄. 800미터 밖에서 쏜 것이었다. 저격수는 잡지 못했다. 아마 베를린에서 보낸 자객이었을 것이다. 혹은 내부의 불만 세력일 수도. 일부러 교체하지 않았다. 경계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매일 아침 그 흉터를 보며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로이 맥브라이드는 창가에 서서 자신이 다스리는 영역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스린다'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의문이었다. 차라리 '관리한다'가 맞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버틴다'가 가장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었다. 11개월. 시라크의 피가 아직 마르지 않은 그날부터 정확히 11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하루도 편히 잠든 적이 없었다. 평균 수면 시간 4.3시간. 나머지는 서류와 회의, 그리고 끝없는 결정의 연속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브뤼셀은 1년 전보다 확실히 나아져 있었다. 


무너진 건물의 70%가 철거되거나 보수되었다. 정확히는 68.7%였다. 스미스가 매주 업데이트하는 수치였다. 그는 숫자에 집착했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철거된 잔해들은 재활용되었다. 콘크리트는 부수어 도로 포장재로, 철근은 녹여서 농기구로, 목재는 난방용 연료로. 낭비할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귀했다.


도로의 구멍들이 메워졌고, 가로등의 40%가 다시 켜졌다.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하루 6시간이지만 그래도 불빛이 있었다. 처음 가로등이 다시 켜진 날을 기억했다. 2월 15일 밤 10시 정각.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환호했다. 어떤 노인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빛이 돌아왔다"고 중얼거리며. 그것은 단순한 조명 이상의 의미였다. 문명이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다녔다. 총을 든 경비병만이 아니라 장을 보러 가는 주부도, 일터로 향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한 여인이 낡은 유모차를 밀고 가고 있었다. 유모차 안에는 아기가 아니라 배급받은 감자가 들어 있을 것이다. 그녀의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포장이 고르지 않아 유모차가 덜컹거렸다. 남자 둘이 자전거를 끌고 지나갔다. 체인이 녹슬어 끼익끼익 소리를 냈다. 하지만 자전거는 귀중한 교통수단이었다. 휘발유는 여전히 금보다 비쌌다.


정상성의 환상. 하지만 환상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맥브라이드의 시선이 멀리 북동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새로 지어진 주택단지가 보였다. '희망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슈나이더 건설이 지은 조립식 주택 200채. 획일적이고 못생겼지만, 지붕이 있고 벽이 있었다. 겨울에 얼어 죽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첫 입주자들이 들어간 날, 한 아이가 맥브라이드에게 다가와 꽃을 주었다. 야생 민들레였다. 방사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질긴 잡초. 아이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달아났다. 그 민들레는 아직도 책상 서랍에 말린 채 보관되어 있었다.


유럽재건위원회의 실질적 통치 구역은 이제 구 벨기에 영토의 대부분을 포괄하고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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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롱을 장악하고 있던 '철의 사단'과의 협상을 떠올렸다. 


얀 드 빌데 대령과의 첫 만남은 중립 지대인 폐허가 된 성당에서 이루어졌다. 2월의 추운 날이었다. 성당의 지붕은 반쯤 무너져 있었고, 제단은 약탈당해 텅 비어 있었다. 드 빌데는 50명의 완전 무장한 병사를 데리고 왔다. 맥브라이드는 뤼프케와 단 둘이서 갔다. 힘의 과시가 아니라 신뢰의 표시였다.


"당신이 그 유명한 맥브라이드요." 


드 빌데의 첫 마디였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왼쪽 눈에는 안대를 하고 있었다. 포탄 파편에 맞았다고 했다. 


"당신도 유명하시죠. 철의 규율로."


"규율 없이는 생존도 없소."


3시간의 협상이 이어졌다. 드 빌데는 현실주의자였다. 그의 부하 1,200명이 먹을 식량이 바닥나고 있었다. 약탈도 한계가 있었다. 약탈할 대상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우리를 정규군으로 받아준다면, 당신을 따르겠소."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민간인 약탈 금지. 위반 시 군법회의."


드 빌데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의 부하들이 술렁거렸다. 약탈은 그들의 생존 방식이었다.


"대신 정규 배급을 보장하겠습니다. 1인당 하루 2,000칼로리."


"2,500이오."


"2,200. 더는 어렵습니다."


결국 2,200에 합의했다. 악수를 나눴다. 드 빌레의 손은 거칠었고 못이 박혀 있었다. 전사의 손이었다.


3개월 후, 철의 사단은 유럽재건위원회군 제3연대가 되었다. 일부 탈영병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남았다. 정기적인 식사와 따뜻한 잠자리의 힘이었다.


겐트의 '자유 시민당'은 더 복잡했다. 


그들에게는 리더가 없었다. 모든 것을 직접 민주주의로 결정했다. 맥브라이드가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 107명이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었다. 토론은 7시간이나 이어졌다. 화장실 사용 순서를 정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이상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맥브라이드가 물었을 때, 한 젊은 여성이 대답했다.


"우리는 타협하지 않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용감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팔은 말라 있었고, 눈은 푹 꺼져 있었다. 영양실조의 명백한 증상이었다.


맥브라이드는 기다렸다. 압박하지 않았다. 대신 브뤼셀의 시장을 개방했다. 자유 시민당 사람들도 와서 물물교환을 할 수 있게 했다. 처음엔 자존심 때문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배고픔은 자존심보다 강했다.


한 달 후, 그들 중 일부가 브뤼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두 달 후엔 절반이 떠났다. 석 달 후, 남은 300명의 핵심 간부들이 마침내 항복했다.


"우리의 이상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대신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시길."


맥브라이드의 대답이었다. 그들에게 겐트 지구의 자치권을 일부 허용했다. 주 1회 주민 총회를 열 수 있게 했다. 실권은 없었지만, 그들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였다.


리에주의 '붉은 깃발'은 가장 어려운 상대였다.


옛 노동조합 출신들이 만든 이 집단은 이념적으로 단단했다. 그들은 탄광과 제철소를 장악하고 있었고, 자급자족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지도자는 피에르 르페브르. 60대의 노조 위원장 출신이었다. 그는 맥브라이드를 "자본가의 앞잡이"라고 불렀다.


협상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현실? 당신들이 말하는 현실은 결국 착취의 다른 이름입니다!"


르페브르는 격렬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부하들에게 전염되지 않았다. 회의장 뒤편에 앉은 젊은 노동자들의 눈빛은 지쳐 있었다. 이념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았다.


맥브라이드는 무력 시위를 결정했다. 하지만 공격하지는 않았다. 대신 리에주를 포위했다. 2주간. 물자 반입을 차단했다. 사실 큰 의미는 없었다. 리에주는 원래도 고립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심리적 압박은 효과가 있었다.


포위 10일째, 젊은 노동자 그룹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들은 브뤼셀로 가고 싶어했다.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동지들이 우리를 배신하고 있다!"


르페브르는 절규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었다. 이념의 장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2주 후, 르페브르가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조건이 있소."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밤새 회의를 했다고 했다. 아니, 밤새 싸웠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들어보죠."


"노동자 평의회를 인정해주시오. 이름만이라도."


패배자의 마지막 요구였다. 맥브라이드는 받아들였다. 리에주 노동자 평의회. 매달 회의를 열고, 건의사항을 위원회에 전달할 수 있는 권한. 실권은 없었지만, 명예는 지킬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소규모 군벌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전사들' - 극단적 종교 집단이었다. 약 200명.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선택받은 자라고 주장했다. 타 종교인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결국 무력으로 제압해야 했다. 37명이 죽었다. 그들은 죽으면서도 "천국에 간다"고 외쳤다. 광기였다. 하지만 절망이 낳은 광기였다.


'자유 상인 연합' - 암시장을 운영하던 집단이었다. 300명 규모. 무기와 마약, 여자까지 거래했다. 리더는 '왕'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협상은 불가능했다. 그들의 사업 모델 자체가 불법이었으니까. 기습 작전으로 체포했다. 왕의 정체는 충격적이었다. 전직 UN 평화유지군 장교였다. 전쟁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붉은 늑대단' - 단순한 약탈자 집단이었다. 150명.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약한 정착지를 공격했다. 리더는 20대의 젊은이였다. 전쟁 전엔 대학생이었다고 했다. 철학을 전공했다고. 그가 잡혔을 때 물었다. "왜 이런 삶을 택했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다른 선택이 있었나요?" 할 말이 없었다.


1년이 걸렸다. 피도 흘렸다. 전투로 죽은 사람이 약 800명. 정확히는 823명이었다. 맥브라이드는 모든 이름을 기억하려 했다. 불가능했다. 하지만 숫자는 기억했다. 823. 통합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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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는 서류 뭉치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맨 위의 파일 제목은 「2025년 10월 정기 현황 보고서」. A4 용지 89장 분량. 종이도 이제는 자체 생산이 가능했다. 겐트의 제지공장을 복구한 덕분이었다. 복구라고 해봐야 19세기 수준이었다. 증기기관으로 펄프를 만들고, 수작업으로 종이를 떴다. 품질은 조악했다. 두께가 일정하지 않았고, 색깔도 누런빛이 돌았다. 때로는 나무 조각이 박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종이였다. 문명의 기록 수단이었다.


**인구 현황: 통제 구역 내 총 67,834명 (전월 대비 +1,247명)**

- 브뤼셀 수도권: 23,456명  

- 앤트워프 지구: 12,782명

- 겐트 지구: 8,934명

- 리에주 지구: 7,123명

- 기타 소규모 정착지: 15,539명


증가분 1,247명의 내역이 흥미로웠다. 출생 89명, 외부 유입 1,201명, 사망 -43명. 출생률이 조금씩 늘고 있었다. 희망의 신호였다. 사람들이 미래를 믿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작년 같은 달 출생은 34명이었다. 


사망자 43명의 사인도 변화하고 있었다. 굶주림 3명, 질병 27명, 사고 8명, 폭력 3명, 자살 2명. 작년엔 굶주림이 첫 번째였다. 올해는 세 번째로 밀려났다. 작은 승리였다.


**식량 생산: 일일 1인당 1,827칼로리 생산 가능 (목표치 2,200칼로리의 83%)**


세부 내역:

- 곡물: 892칼로리 (밀 312, 보리 245, 귀리 189, 기타 146)

- 감자: 421칼로리 

- 채소: 234칼로리 (주로 순무, 양배추. 토마토는 여전히 실패)

- 육류: 156칼로리 (토끼 89, 닭 41, 돼지 26)

- 기타: 124칼로리 (야생 식물, 버섯, 곤충 단백질 등)


곤충 단백질이 새로 추가된 항목이었다. 귀뚜라미 농장을 시작한 지 6개월. 처음엔 거부감이 심했지만, 이제는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었다. 굶주림 앞에서는 편견도 사치였다.


**의료: 의사 47명, 간호사 156명, 준의료인 324명. 병상 수 1,250개**


의사 47명 중 정식 의대 출신은 12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전쟁 중에 급조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이제는 베테랑이었다. 5년간 수술대에서 배운 것이 10년간 의대에서 배운 것보다 많을지도 몰랐다.


간호사 마리아 슈미트를 생각했다. 전쟁 전엔 미용사였다. 이제는 하루에 20명의 환자를 돌보는 수간호사였다. 그녀의 손은 거칠어졌지만, 미소는 여전히 따뜻했다. 환자들은 그녀를 '천사'라고 불렀다.


**교육: 초등 교육 기관 12개 운영 중. 재학생 2,341명**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였다. 아이들이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교과서는 손으로 베껴 쓴 것이었고, 연필은 귀해서 한 자루를 네 조각으로 잘라 썼지만, 그래도 수업은 계속되었다.


초등학교를 방문했던 날을 떠올렸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위원장님!" 그들의 목소리는 맑았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자라고 있었다. 그것이 희망이었다.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위원장님, 전쟁 전에는 어땠어요?" 순진한 질문이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전기가 24시간 들어왔다고? 수도꼭지를 틀면 깨끗한 물이 나왔다고? 마트에 가면 전 세계의 음식을 살 수 있었다고? 그들에게는 동화 같은 이야기일 것이다.


"더 나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단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들 거야. 더 좋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 눈빛이었다. 그 믿음을 배신할 수 없었다.


커피 향이 났다. 


맥브라이드가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를 자극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향기로웠다. 아니, 향기롭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진짜 커피였다. 하지만 브라질산은 아니었다. 유럽 밖과의 교류는 여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바다는 죽어 있었고, 하늘은 닫혀 있었다. 대서양은 거대한 죽음의 바다가 되어 있었다. 방사능과 화학물질로 오염된 검은 물결. 작년에 탐사선을 보냈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무선 교신이 끊기기 전 마지막 메시지는 "물이... 끓고 있다"였다.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부 해역은 실제로 방사성 붕괴열로 펄펄 끓고 있었다.


하늘도 마찬가지였다. 대기권 상층부는 방사능 먼지와 화학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비행기는 불가능했다. 작년에 글라이더로 시도한 용감한 조종사가 있었다. 그는 800미터 상공에서 피를 토하며 추락했다. 시신을 수습했을 때,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이 커피는 브뤼셀 남쪽 온실에서 실험적으로 재배한 것이었다. 


온실이라고 해봐야 비닐하우스 수준이었다. 온도 조절도 제대로 안 되고, 습도도 들쭉날쭉했다. 커피나무는 원래 열대 식물이다. 벨기에의 추운 기후에서 키우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농업 담당관 요한 멀러의 집념이었다. 그는 전쟁 전 식물학 교수였다. 이제는 반쯤 미친 과학자 같았다. 하루 18시간을 온실에서 보냈다. 커피나무와 대화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단백질이 부족합니다. 질소 고정이 문제예요."


멀러가 보고할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질소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결과를 냈다. 수확량은 한 달에 10킬로그램. 고위 관료들만 맛볼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맛은... 솔직히 훌륭하지 않았다. 쓴맛이 너무 강했고, 신맛이 부족했다. 로스팅도 문제였다. 정확한 온도 조절이 어려워서 태우기 일쑤였다. 하지만 커피였다. 카페인이 있었고, 향이 있었다. 문명의 상징이었다.


"가실 때입니다."


문이 열리며 뤼프케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크를 하고 들어왔지만, 맥브라이드는 못 들었다. 보고서에 빠져 있었던 탓이다.


그의 충직한 부관은 문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지만, 5년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당시엔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면, 지금은 오래 사용해서 무뎌진 - 하지만 여전히 든든한 - 도구 같았다. 머리카락에는 흰 것이 많이 섞였고, 이마의 주름은 깊어졌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회색 눈동자가 빛을 반사하며 번뜩였다.


"몇 시 회의였지?"


맥브라이드가 시계를 봤다. 10시 42분. 회의는 10시 30분이었다.


"왈론 대표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12분째입니다."


뤼프케의 목소리에는 비난이 없었다. 사실만을 전달했다. 하지만 그것이 더 뼈아팠다.


"미안하네. 바로 가지."


맥브라이드가 보고서를 덮고 일어섰다. 군복 상의를 매만졌다. 단추 하나가 느슨해져 있었다. 전쟁 전이었다면 즉시 새것으로 교체했을 텐데. 지금은 실과 바늘로 고쳐 쓰는 것이 일상이었다.


복도를 걸으며 뤼프케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왈론 측 요구사항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곡물 할당량 감축. 현행 2,000톤에서 1,500톤으로. 둘째, 의료 인력 추가 지원. 의사 최소 3명. 셋째, 겨울 연료 추가 배급."


"다 달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주는 것은 없고요."


"협상이란 게 다 그렇지."


복도의 창문 밖으로 빗줄기가 보였다. 빗방울이 유리를 타격하는 소리가 발걸음과 리듬을 맞췄다. 탁탁, 쿡쿡, 탁탁. 마치 모르스 부호 같았다. 무슨 메시지를 전하는 걸까. 


"겨울이 빨리 오고 있습니다."


뤼프케가 말했다. 날씨 이야기가 아니었다. 은유였다. 베를린의 겨울. 굶주린 늑대들이 먹이를 찾아 나서는 계절.


"알고 있네."


맥브라이드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음 속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피로, 우려, 그리고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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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시청 건물 3층 회의실 - 이제는 행정위원회 회의실로 불리는 - 의 공기는 담배 연기와 긴장으로 무거웠다.


한때는 브뤼셀 시의회가 열렸던 곳이었다. 호화로운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벽에는 역대 시장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했다. 이제 샹들리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벌거벗은 전구 여섯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초상화들도 불쏘시개가 된 지 오래였다. 대신 벽에는 지도가 걸려 있었다. 유럽재건위원회 통제 구역을 표시한 지도. 빨간색이 우리 구역, 검은색이 미지의 영역, 회색이 접촉은 있지만 통제하지 못하는 구역이었다.


대표단의 수장 헨드릭 판 덴 베르흐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47세. 얼굴에 새겨진 주름 하나하나가 그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마의 깊은 골은 평생 햇빛 아래서 일한 흔적이었고, 눈가의 잔주름은 바닷바람에 눈을 찡그리며 생긴 것이었다. 코는 최소한 두 번은 부러진 흔적이 있었다. 주먹다짐을 즐기던 젊은 시절의 흔적이리라. 손은 테이블 위에 포개어 놓고 있었는데, 그 손가락은 굵고 마디가 튀어나와 있었다. 평생 육체노동을 한 손이었다. 하지만 손톱은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행정관이 된 후 생긴 습관일 것이다.


그의 양옆에는 참모들이 앉아 있었다. 왼쪽은 젊은 여성이었다. 안나 드브리즈, 28세. 전직 회계사였다. 이제는 왈론 지구의 살림을 도맡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수제 장부였다. 줄을 그어 만든 것이었지만, 숫자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오른쪽은 나이 든 남자였다. 요셉 틸만스, 61세. 농업 전문가였다. 그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구릿빛이었고, 손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회의 직전까지 밭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늦으셨습니다."


판 덴 베르흐의 첫 마디였다. 비난은 아니었다. 사실의 지적이었다.


"죄송합니다. 보고서를 검토하느라."


맥브라이드가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한때는 가죽 의자였겠지만, 이제는 가죽이 벗겨지고 속의 스프링이 드러나 있었다. 앉을 때마다 엉덩이에 스프링이 닿는 느낌이 불편했다.


마리 루이즈가 맥브라이드의 오른편에 앉았다. 그녀는 서류 뭉치를 들고 있었다. 곡물 생산 통계, 인구 분포도, 의료 자원 현황 등. 전쟁이 그녀를 바꿔놓았다. 한때는 이상주의적인 정치인이었다면, 이제는 냉철한 행정가였다. 검은색 정장은 낡았지만 깨끗하게 다려져 있었고, 짧은 갈색 머리는 귀 뒤로 넘겨져 있었다. 목에는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진짜는 아닐 것이다. 전쟁 후에 진짜 진주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권위를 부여했다. 문명의 잔재라는 권위를.


"할당량이 너무 높습니다."


판 덴 베르흐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평생 부두에서 고함을 질러온 탓이었다. 성대에 굳은살이 박인 목소리였다.


"곡물 2,000톤은 불가능합니다. 최대 1,500톤입니다."


숫자가 테이블 위에 던져졌다. 차가운 숫자. 하지만 그 뒤에는 뜨거운 현실이 있었다. 2,000톤과 1,500톤의 차이는 500톤. 밀로 환산하면 약 200만 끼니. 1만 명이 두 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마리 루이즈가 서류를 넘기며 끼어들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싸악 하고 났다. 거친 종이라 소리도 거칠었다.


"수확량을 고려하면 2,000톤은 합리적인 수치입니다. 왈론 지구의 경작 면적은 8,200헥타르. 헥타르당 평균 수확량을 3.2톤으로 계산하면..."


"합리적?"


판 덴 베르흐가 비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가시가 있었다.


"당신들은 숫자만 봅니다. 현실을 몰라요."


그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놓아둔 가방을 집어 올렸다. 거친 천으로 만든 가방이었다. 군데군데 기운 자국이 있었다. 가방을 열어 테이블 위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철컥.


밀 이삭이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한 움큼이 아니라 두 움큼. 하지만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삭은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어떤 것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고, 어떤 것은 나선형으로 꼬여 있었다. 낟알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정상적인 황금색이 아니라 석탄처럼 까만 색이었다. 일부 낟알은 터져서 검은 가루를 흘리고 있었다. 그 가루에서는 쇠 냄새가 났다. 아니, 피 냄새에 가까웠다.


"올해 수확의 30%가 이렇습니다. 방사능 때문이든, 토양 오염 때문이든."


판 덴 베르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분노가 아니라 절망에 가까운 톤이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창밖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까악, 까악. 불길한 소리였다. 죽음의 새들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다. 방사능이 그들에게는 축복이었는지도 몰랐다. 경쟁자인 다른 새들이 모두 죽었으니까.


맥브라이드가 이삭 하나를 집어 들었다. 


거칠고 마른 감촉이 손가락에 전해졌다. 정상적인 밀이삭은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철사처럼 딱딱했다. 손가락으로 비비자 가시처럼 날카로운 부분이 살을 찔렀다. 


그는 낟알 하나를 떼어냈다. 쉽게 떨어졌다. 너무 쉽게. 정상적인 낟알은 단단히 붙어 있어야 했다. 이빨로 깨물었다. 


딱.


돌을 씹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이빨이 아플 정도로 단단했다. 겨우 깨물자 쓴맛과 함께 금속성 맛이 퍼졌다. 철분 맛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더 위험한 금속의 맛이었다. 카드뮴? 수은? 알 수 없었다. 


뱉지 않고 삼켰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낟알이 마치 유리조각처럼 느껴졌다. 식도를 긁으며 내려갔다. 위장에 도달했을 때,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맛이 어떻습니까?"


틸만스가 물었다. 그의 눈에는 존경심이 번뜩였다. 대부분의 관료들은 그런 것을 입에 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죽음의 맛이군요."


맥브라이드의 대답은 솔직했다.


"그래도 이것도 식량입니다. 갈아서 다른 곡물과 섞으면 희석됩니다. 1대 10 비율로 섞으면 치명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틸만스의 설명이었다. '아마도'라는 단어가 무거웠다.


"장기적 영향은?"


"모릅니다. 실험해볼 수 없으니까요. 사람으로는."


마리 루이즈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구식 태양전지 계산기였다. 숫자판의 7이 잘 안 눌려서 두 번씩 눌러야 했다.


맥브라이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톡톡톡. 일정한 리듬이었다. 그의 사고 과정을 보여주는 리듬.


"1,700톤."


그의 제안이었다. 타협점이었다.


판 덴 베르흐가 계산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마에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의 옆에 앉은 안나 드브리즈가 빠르게 수첩에 뭔가를 적어 보였다. 손글씨였지만 정확한 숫자들이었다. 인구 대비 칼로리, 비축 가능 기간, 운송 비용...


"그렇다면 대신..."


"대신?"


"의료진을 더 보내주십시오. 폐렴이 돌고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판 덴 베르흐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였다. 그에게도 손자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있었거나.


맥브라이드가 마리 루이즈를 봤다. 그녀가 파일을 넘겼다. 의료진 현황이었다. 브뤼셀에 의사 19명, 간호사 67명. 왈론에 파견 중인 의사 2명, 간호사 8명.


마리 루이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달갑지 않아 보였다. 의료진은 어디서나 부족했다.


"좋소. 의사 2명과 간호사 5명을 추가로 파견하겠소."


"항생제도..."


"페니실린 500도즈. 더는 어렵소."


페니실린. 전쟁 후 세계에서 금보다 귀한 것이었다. 제조 시설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원료도 구하기 어려웠다. 브뤼셀의 한 지하실에서 곰팡이를 배양해 소량 생산하고 있었지만, 한 달에 2,000도즈가 한계였다.


"안 됩니다."


판 덴 베르흐가 뭔가 말을 더 꺼내려는 순간, 마리 루이즈가 단호하게 끼어들었다.


"브뤼셀 시민 병원에도 재고가 바닥입니다. 지난주에만 패혈증 환자 4명이..."


그녀는 말을 멈췄다. 4명이 죽었다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았다.


"450도즈."


맥브라이드가 최종 제안을 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판 덴 베르흐가 참모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틸만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브리즈는 표정이 없었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동의합니다."


협상이 타결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판 덴 베르흐가 새로운 서류를 꺼냈다.


"겨울 대비 연료 문제입니다."


또 다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협상 테이블에서의 끝없는 전투. 총성은 없지만, 이것도 전쟁이었다. 숫자와 타협의 전쟁.


창밖으로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마치 박수 소리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은 언제나 죽음의 계절이었다.


---


협상은 2시간 더 이어졌다.


연료 할당량, 의약품 추가 지원, 도로 보수 우선순위, 종자 배급... 끝없는 숫자들이 오갔다. 각 숫자는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의미했다.


"석탄 500톤 추가 배급..."


"불가능합니다. 리에주 탄광 생산량이..."


"그럼 목재라도..."


"삼림 벌채 할당량이 이미..."


말들이 테이블 위를 오갔다. 때로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때로는 낮은 한숨이 흘렀다. 담배 연기가 짙어졌다. 재떨이는 꽁초로 가득 찼다. 드브리즈는 연필로 끊임없이 계산했다. 틸만스는 농업 데이터를 외우고 있는 듯 정확한 수치를 읊었다.


마침내 판 덴 베르흐가 일어섰다. 그의 무릎에서 딱 소리가 났다. 오래 앉아 있어서 굳은 관절이 펴지는 소리였다.


"이 정도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최종 합의:

- 곡물 할당량: 1,600톤

- 의료진: 의사 2명, 간호사 5명 추가 파견  

- 페니실린: 450도즈

- 겨울 연료: 석탄 300톤, 목재 200톤 추가

- 봄 파종용 종자: 감자 종자 50톤 우선 배급


악수를 청했다. 맥브라이드가 받았다. 거친 손이었다. 굳은살이 박힌 손. 하지만 힘이 있었다. 서로를 으스러뜨리려는 힘이 아니라, 신뢰를 확인하는 정도의 힘이었다.


"왈론 사람들을 대신해... 감사합니다."


판 덴 베르흐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대표단이 나간 후, 마리 루이즈가 남았다.


회의실에는 담배 연기와 체취, 그리고 긴장의 잔재가 떠돌고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빗방울도 함께 들어와 바닥을 적셨다.


"너무 많이 양보하셨습니다."


그녀의 지적은 차분했지만 비판적이었다.


"그렇게 보이나?"


맥브라이드가 물었다. 피곤한 목소리였다. 


"1,800톤은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료진은... 우리도 부족한 상황에서..."


"마리."


맥브라이드가 그녀를 봤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더 짙어 보였다. 형광등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더 피곤해진 것인지.


"때로는 숫자보다 신뢰가 중요하오."


"신뢰는 배를 채워주지 않습니다."


날카로운 반박이었다. 그녀다웠다. 효율성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유능했고, 그래서 위험했다.


마리 루이즈는 전쟁이 만든 관료였다. 아니, 재앙이 벼려낸 칼날이었다. 1년 전만 해도 그녀는 망설임이 있었다. 시라크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도덕적 고민을 했다. 이제는 달랐다. 차가운 계산기가 되어 있었다.


"왈론이 이탈하면 전체 생산량의 35%를 잃소."


맥브라이드가 설명했다.


"무력으로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럼 내전이지."


맥브라이드가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갔다. 빗방울이 얼굴에 튀었다. 차가웠다. 하지만 시원하기도 했다.


멀리 왈론 방향이 보였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방향이었다.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회색 구름. 그 아래 어딘가에 판 덴 베르흐가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1,600톤이라는 숫자를 들고. 그에게는 승리일까, 패배일까?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소."


"하지만 힘 없이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마리 루이즈가 일어섰다. 그녀의 구두 소리가 나무 바닥에 울렸다. 딱, 딱, 딱. 정확한 리듬이었다. 메트로놈 같았다. 그녀의 삶도 그런 정확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가 창가로 다가왔다. 맥브라이드 옆에 섰다.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전쟁 전 물건일 것이다. 아마 마지막 한 병을 아껴 쓰고 있을 것이다. 


"장군님은 너무 온정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오?"


"예. 그리고 그것이 약점입니다."


직설적이었다. 1년 전의 그녀였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은 사람을 바꾼다.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온정적이라..."


맥브라이드는 돌아서며 생각했다.


'시라크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시라크. 그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렸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이다.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


마리 루이즈는 시라크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침묵했다. 그것이 그녀의 선택이었다. 현실주의자의 선택.


"저는 미래를 봅니다."


마리 루이즈가 마침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미래..."


맥브라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래. 그런 것이 있을까? 이 잿빛 하늘 아래서?


"선거 준비는 잘 되고 있소?"


화제를 돌렸다. 


마리 루이즈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긴장인지 기대인지 알 수 없는 표정.


"순조롭습니다. 투표소 47개 설치 완료. 선거인 명부 작성 중입니다."


그녀가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항상 들고 다니는 검은 가죽 가방이었다. 낡았지만 품격이 있었다. 전쟁 전 물건임이 분명했다.


"현재까지 등록 유권자 18,347명. 전체 성인 인구의 89.3%입니다."


높은 수치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수치.


"예상 투표율은?"


"60% 이상. 날씨가 좋으면 70%도 가능합니다."


"후보 등록은?"


높은 수치였다. 전쟁 후 치러지는 첫 선거치고는.


"후보 등록은?"


"현재까지 4명입니다."


"선거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오?"


맥브라이드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났지만, 1년 전의 절망적인 무거움은 없었다.


"투표소 15개 설치 완료. 선거인 명부도 거의 완성됐습니다. 등록 유권자 18,347명."


인구가 늘었다. 주변의 생존자들이 브뤼셀로 모여들었다. 안정이 사람을 끌어당겼다.


"후보는?"


"4명이 등록했습니다. 장군님을 포함해서요."


맥브라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난 후보가 아니오. 선거관리위원장이지."


"시민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여론조사에서..."


"여론조사까지 하오?"


"간이 조사입니다만, 장군님 지지율이 꽤 높습니다."


"약속은 약속이오. 나는 출마하지 않소."


마리가 말하려다가 멈췄다. 1년 동안 그녀는 맥브라이드를 알게 되었다. 그가 한 번 결정하면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

"어쨌든, 미래는 모르는 거니깐요, 장군님, 저, 그리고..."


"그리고?"


"피터 판덴베르크. 시민당 대표."


새로운 이름이었다. 맥브라이드가 눈썹을 올렸다.


"시민당?"


"2주 전에 창당했습니다. 주로 중산층 출신들입니다. 전쟁 전 공무원, 교사, 소상공인들..."


"강령은?"


"완전한 민주주의 회복. 군부 영향력 배제. 시장경제 복원."


이상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 이상주의가 때로는 강력한 힘이 되곤 했다.


"네 번째는?"


마리 루이즈가 잠시 망설였다.


"에르빈 로스차일드입니다."


충격적인 이름이었다. 맥브라이드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로스차일드가 직접 나온다고?"


"어제 등록했습니다."


의외였다. 로스차일드는 항상 그림자에서 움직이는 것을 선호했다. 막후에서 실을 당기는 인형사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직접 전면에 나선다는 것은...


"상당히 자신 있다는 뜻이겠군."


"그렇게 보입니다."


마리 루이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녀의 손가락이 펜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맥브라이드는 놓치지 않았다. 긴장하고 있었다. 로스차일드의 출마가 그녀의 계산을 흐트러뜨린 모양이었다.


"그의 공약은?"


"'전쟁 전 번영의 회복'입니다."


"구체적으로?"


마리 루이즈가 다음 장을 넘겼다. 로스차일드의 선거 포스터 시안이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가 브뤼셀의 폐허를 배경으로 서 있었다. 아래에는 굵은 글씨로 슬로건이 적혀 있었다.


'질서와 번영 -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완전한 시장경제 복원, 사유재산권 강화, 기업 활동 규제 철폐..."


"요약하면 신자유주의이군."


"그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지지 기반은?"


"상인조합, 수공업자 길드. 그리고 노스탤지어입니다. 전쟁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일리가 있었다. 로스차일드는 전쟁 전 삶의 상징이었다. 은행, 대출, 이자, 투자... 정상적인 경제 활동의 상징. 비록 그것이 착취를 포함하더라도.


맥브라이드가 창밖을 보았다. 광장에서는 선거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민주주의의 의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


"로스차일드의 자금력을 생각하면 그는 확실히 위협적입니다."


마리 루이즈가 인정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은 있습니다."


"뭐가 있소?"


"고리대금업자 이미지입니다. 작년 겨울, 곡물 투기로 폭리를 취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이었다. 로스차일드는 늘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지만, 그의 방법은 때로 잔인했다. 이자를 갚지 못한 채무자의 딸을 거느린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자네 전략은?"


마리 루이즈가 서류를 정리하며 자신감 있게 말했다.


"안정과 지속입니다. 지난 1년간의 성과를 강조하고,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합니다."


"구체적으로?"


"첫째, 식량 자급률 100% 달성. 3년 내 목표입니다. 둘째, 전력 24시간 공급. 역시 3년. 셋째, 초등 의무교육 전면 실시. 당장 내년부터."


야심찬 공약들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노력하면, 운이 따르면,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재원은?"


"세율 인상이 필요합니다. 특히 상위 10%에 대해..."


"로스차일드가 좋아하겠군."


냉소적인 코멘트였다.


마리 루이즈가 미소 지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로스차일드는 어차피 저를 지지하지 않을 겁니다."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문이 노크되었다. 뤼프케였다.


"실례합니다. 긴급 보고가 있습니다."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좋지 않은 소식임이 분명했다.


"프랑스군 막사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맥브라이드와 마리 루이즈가 동시에 긴장했다.


"구체적으로?"


"갈루아 대위가... 뒤부아 소장을 체포했습니다. 반역 혐의로."


폭탄 같은 소식이었다.


"빌어먹을."



---


맥브라이드가 프랑스군 막사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막사 정문 앞은 혼돈 그 자체였다. 프랑스군 병사들이 두 패로 나뉘어 대치하고 있었다. 한쪽은 뒤부아 지지파, 다른 쪽은 갈루아의 쿠데타 세력이었다. 총구가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아직 격발되지 않았을 뿐, 방아쇠에는 이미 손가락이 걸려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서쪽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붉은 빛이 병사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이미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다. 공기는 축축하고 무거웠다. 화약 냄새와 땀 냄새, 그리고 두려움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중앙 광장에는 즉석 연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탄약 상자 네 개를 쌓아 올린 조잡한 연단이었다. 그 위에 갈루아 대위가 서 있었다.


그는 34세의 젊은 장교였다.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에, 검은 머리를 짧게 깎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눈은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혹은 광기로. 때로 그 둘은 구분하기 어려웠다. 프랑스군 정복을 입고 있었지만, 계급장은 떼어낸 상태였다. 더 이상 위계질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상징적 행동이었다.


"프랑스의 명예를 회복하겠다!"


그가 외치고 있었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아마 몇 시간째 연설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침이 입가에 말라붙어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더 이상 맥브라이드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다! 시라크 대통령님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겠다!"


병사들 일부가 환호했다. 대부분 젊은 병사들이었다.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 그들의 눈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누군가는 주먹을 들어 올렸고, 누군가는 "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나머지는 망설이고 있었다. 대부분 나이 든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았고, 질서가 무너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경험했다. 그들의 표정은 불안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고, 손은 무기를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장군님, 위험합니다."


뤼프케가 맥브라이드의 팔을 잡았다. 그의 손에는 이미 권총이 들려 있었다. 글록 17. 17발들이 탄창. 안전장치는 풀려 있었다.


"괜찮네."


맥브라이드가 뤼프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광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등장에 모든 시선이 쏠렸다. 환호성이 멈췄다. 침묵이 광장을 덮었다. 오직 바람 소리만이 들렸다.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 프랑스 삼색기가 저녁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갈루아가 연단에서 맥브라이드를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무슨 일이오?"


맥브라이드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 차분함 속에는 강철 같은 권위가 있었다. 5년간 이 도시를 지켜온 사람의 권위였다.


갈루아가 총을 뽑았다. 프랑스군 제식 권총인 PAMAS G1이었다. 9mm 자동권총. 15발들이. 총구는 맥브라이드를 겨누지는 않았지만, 위협의 의미는 분명했다. 총신이 저녁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간섭하지 마시오. 이건 프랑스군 내부 문제요."


갈루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하지만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흥분인지 두려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뒤부아 소장은?"


"반역자는 처단될 겁니다."


"무슨 반역?"


맥브라이드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병사들이 긴장했다. 몇몇은 총구를 그에게 향했다. 찰칵 하는 노리쇠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갈루아가 서류를 던졌다. 바람에 날려 맥브라이드의 발 앞에 떨어졌다. 몇 장은 더 멀리 날아가 진흙탕에 떨어졌다.


"시라크 대통령의 진짜 사인. 그가 조사하고 있었소."


맥브라이드의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하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오랜 세월 군대에서 익힌 포커페이스였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서류를 집어 들었다. 진흙이 묻어 있었지만 내용은 읽을 수 있었다. 시라크의 검시 보고서 사본이었다. 그리고 탄도학 분석 자료. 총알의 각도가 이상했다는 내용이었다. 베를린 저격수의 위치에서는 불가능한 각도라는...


"터무니없는..."


맥브라이드가 서류를 구겼다. 하지만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갈루아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 그렇습니까?"


갈루아의 눈이 번뜩였다. 승리를 확신하는 도박사의 눈이었다.


"그럼 왜 뒤부아는 이걸 숨겼습니까?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논리적인 함정이었다. 맥브라이드가 잠시 말문이 막혔다. 0.7초의 침묵.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의심의 씨앗이 뿌려지기에는.


바로 그때였다.


쿵. 쿵. 쿵.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군화가 아니었다. 맨발이었다.


뒤부아 소장이 끌려 나왔다.


그의 모습은 처참했다. 상의는 찢어져 있었고, 근육질의 상체가 드러나 있었다. 온몸에 타박상이 있었다. 특히 갈비뼈 부근이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부러졌을 가능성이 컸다. 얼굴은 부어 있었다. 왼쪽 눈은 감길 정도로 부었고, 입술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를 끌고 나온 것은 갈루아의 부하 둘이었다. 장 클로드 하사와 피에르 상병. 둘 다 20대 초반이었다. 뒤부아의 양팔을 뒤로 꺾은 채 끌고 있었다. 팔목에는 전선으로 만든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전선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장님!"


뒤부아 지지파 병사들이 동요했다. 몇몇은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갈루아파 병사들의 총구가 그들을 막았다.


"물러서! 한 발만 더 다가오면 쏜다!"


갈루아의 부관 뒤마 중위가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기관단총이 들려 있었다. FAMAS F1. 5.56mm 탄을 분당 900발 쏠 수 있는 무기였다.


긴장이 극에 달했다. 누군가 실수로라도 방아쇠를 당기면 대학살이 시작될 판이었다.


뒤부아가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맥브라이드를 보았다. 그리고 갈루아를 보았다.


"닥쳐라, 갈루아."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목을 졸렸거나 맞은 탓이었다. 하지만 권위는 여전했다. 20년간 군대에서 복무한 베테랑의 권위였다.


갈루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반역자가 감히!"


그가 뒤부아에게 다가갔다. 주먹을 들어 올렸다.


퍽.


주먹이 뒤부아의 복부를 가격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뒤부아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신음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았다.


"그만!"


맥브라이드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강력한 목소리였다.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이게 프랑스군의 명예요? 묶인 사람을 때리는 것이?"


갈루아가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이자는 반역자요!"


"무슨 반역인지 증거를 대시오."


"증거?"


갈루아가 히스테리컬하게 웃었다.


"증거는 여기 있소! 시라크 대통령님이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그가 군중을 향해 외쳤다.


"동료들이여! 더 이상 속지 말자! 시라크 대통령님은 베를린이 죽인 게 아니다! 바로..."


"내가 조사한 건 맞다."


뒤부아가 갈루아의 말을 끊었다. 힘겹게 일어서며 말했다.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의지로 버텼다.


"하지만 결론은 없었다. 증거가 부족했으니까."


"거짓말!"


갈루아가 서류를 흔들었다.


"여기 다 나와 있소! 탄도학적으로..."


"추정일 뿐이야."


뒤부아가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붉은 침이 바닥에 떨어졌다.


"추정과 사실은 다르다. 그리고..."


그가 맥브라이드를 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이었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그래서 뭐? 서로 죽이고 싶나? 프랑스인끼리, 유럽인끼리?"


뒤부아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봐라.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겨우 살아남아서, 겨우 먹고 살만해져서, 이제 다시 서로 죽이려고?"


그의 말이 병사들의 가슴에 박혔다. 몇몇은 총구를 내렸다. 부끄러움이 얼굴에 나타났다.


"시라크 대통령님이 원하신 게 이런 거라고 생각하나?"


뒤부아가 갈루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분열과 증오? 복수와 피?"


갈루아의 손이 떨렸다. 총을 든 손이. 확신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은..."


"진실?"


뒤부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피가 섞인 웃음이었다.


"진실이 밥 먹여주나? 진실이 겨울에 난방해주나? 진실이 베를린의 폭도들을 막아주나? 진실이 죽은 사람을 살려주나?"


"최소 이 맥브라이드라는 사람은 일만하고도 삼천명을 살려냈고, 지금은 육만명을 지탱하고 있지"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병사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총구가 하나둘 내려갔다. 현실이 이상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갈루아가 마지막 저항을 했다.


"그래도 정의는..."


"정의."


뒤부아가 소리쳤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계가 멸망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이 도시의 파멸인가? 우리가 쌓아온 모든 것의 붕괴인가? 그러고 난뒤에 만약, 그 추정에 불과한 조사자료가 잘못 계산되었거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면? 그땐 어떻게 할건가?"


갈루아의 눈에서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현실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선택해라"


오랫동안 갈루아는 말이 없었다.


저녁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붉은 빛이 점점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첫 별이 하늘에 나타났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이었다.


마침내 갈루아가 총을 내렸다.


탁.


총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항복의 소리였다.


"...풀어드려라."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패배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부하들이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뒤부아의 수갑을 풀었다. 전선이 풀리자 피가 더 많이 흘렀다.


뒤부아가 비틀거렸다. 맥브라이드가 그를 부축했다.


"의무병!"


뤼프케가 소리쳤다. 의무병들이 달려왔다. 들것을 가져왔다.


뒤부아가 실려 가면서 갈루아를 보았다.


"멍청한 새끼."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애정이 담겨 있었다.


갈루아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패배의 눈물이었을까, 후회의 눈물이었을까.


병사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머쓱한 표정으로,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광장에는 갈루아와 맥브라이드, 그리고 몇몇 장교들만 남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갈루아가 물었다. 체념한 목소리였다.


"선거에 나가시오."


맥브라이드의 대답은 의외였다.


"뭐라고요?"


"출마하시오. 당신의 신념을 투표로 증명하시오."


갈루아가 고개를 들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진심입니까?"


"그게 민주주의 아니오? 총이 아니라 투표로 결정하는 것."


맥브라이드가 돌아섰다. 떠나려다가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갈루아 대위."


"...예."


"용기는 인정하오. 방향이 틀렸을 뿐."


그리고 떠났다.


---


다음날 아침, 브뤼셀은 이상한 활기로 들끓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포스터가 나붙기 시작했다. 손으로 그린 조잡한 포스터들이었다. 인쇄기가 부족해서 대부분 수작업이었다. 하지만 그 투박함이 오히려 진정성을 전달했다.


마리 루이즈의 포스터가 가장 먼저 나타났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녀가 폐허를 배경으로 서 있었다. 표정은 단호했고, 눈빛은 미래를 보고 있었다. 아래에는 굵은 글씨로 슬로건이 적혀 있었다.


**"안정과 재건 - 검증된 리더십"**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메시지였다. 그녀는 이미 1년간 부시장으로서 능력을 증명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반대편 벽에는 로스차일드의 포스터가 붙었다.


그는 한때의 영광을 연상시키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배경은 일부러 흐릿하게 처리했다. 현재의 폐허가 아니라 과거의 번영을 떠올리게 하는 기법이었다. 슬로건은 더 직접적이었다.


**"다시, 풍요로운 브뤼셀로"**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공약이 나열되어 있었다.

- 자유 시장 경제 완전 복원

- 개인 재산권 절대 보장  

- 기업 활동 규제 전면 철폐

- 세금 50% 감축


불가능한 공약들이었다. 하지만 꿈을 파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었다.


판덴베르크의 포스터는 더 소박했다.


그는 평범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시민들과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농부, 노동자, 주부들 사이에서 웃고 있는 모습. 친근함을 강조한 이미지였다.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고전적인 문구였지만, 여전히 힘이 있었다.


갈루아의 포스터는 충격적이었다.


시라크의 초상화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그 아래 갈루아가 경례를 올리고 있었다. 마치 시라크의 후계자처럼 보이게 하는 구도였다.


**"진실과 정의 - 프랑스의 명예를 위하여"**


위험한 전략이었다. 죽은 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반발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계 유권자들에게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거리는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들로 붐볐다. 


한 구석에서는 마리 루이즈의 지지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주부, 간호사, 교사들. 그들은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한 사람이 풀을 바르면, 다른 사람이 포스터를 붙이고, 또 다른 사람이 주름을 펴는 식이었다.


"여기 조심해요! 너무 높이 붙이면 아이들이 못 봐요."


중년 여성이 지시하고 있었다. 마르타 슈미트였다. 전쟁 전엔 초등학교 교장이었다. 이제는 마리 루이즈의 선거 운동 본부장이었다.


맞은편에서는 로스차일드의 사람들이 작업 중이었다. 그들은 더 조직적이었다. 사다리와 붓, 양동이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돈이 있으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높이 붙여! 더 높이! 사람들이 올려다보게 해야 해!"


젊은 남자가 지시하고 있었다. 로스차일드의 비서 중 한 명이었다. 깔끔한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일하고 있었다.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이었다.


두 진영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서로를 의식하며 더 빨리, 더 많이 붙이려고 경쟁했다. 


그때 한 아이가 나타났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옷은 누더기였고, 얼굴은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전쟁고아였다. 브뤼셀에는 이런 아이들이 수백 명 있었다.


소년은 포스터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글을 읽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림은 이해하는 듯했다.


마리 루이즈의 포스터 앞에서 멈췄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로스차일드의 포스터로 갔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꼬마야, 누가 더 마음에 드니?"


로스차일드의 비서가 물었다. 아이의 표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투표권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미지는 중요했다.


소년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돌멩이였다.


휘익.


돌이 날아가 로스차일드의 포스터를 맞췄다. 정확히 얼굴 부분이었다.


"이 새끼!"


비서가 소리쳤지만, 소년은 이미 달아나고 있었다. 골목길로 쏙 들어가 사라졌다.


마리 루이즈의 지지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것 봐! 아이들도 아는 거야. 로스차일드가 뭔지!"


"고리대금업자!"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굵고 거친 목소리였다.


슈나이더 건설의 인부들이었다. 20명쯤 되는 떼거리였다. 모두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었다. 손에는 망치와 못, 그리고 커다란 포스터 뭉치를 들고 있었다.


"우리도 붙일 거요."


앞장선 남자가 말했다. 한스였다. 슈나이더의 현장 감독이었다. 팔뚝이 통나무처럼 굵었고, 목은 황소처럼 두꺼웠다.


그들이 펼친 포스터는 로스차일드의 것이었다. 하지만 더 크고, 더 화려했다. 컬러 인쇄였다. 브뤼셀에서 컬러 인쇄를 할 수 있는 곳은 한 곳뿐이었다. 로스차일드가 소유한 인쇄소였다.


"여기는 우리가 먼저..."


마르타가 항의하려 했지만, 뮐러가 가로막았다.


"먼저? 이 거리가 당신들 거요?"


위협적인 톤이었다. 그의 부하들이 둘러섰다. 망치를 든 손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긴장이 고조되었다. 


바로 그때,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치안대였다. 전직 경찰과 군인들로 구성된 임시 치안 조직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치안대장 피에르 라셀이 물었다. 그는 전직 헌병이었다. 50대의 베테랑이었고, 권위가 있었다.


"이 사람들이 우리를 방해..."


"우리도 권리가 있소!"


양쪽에서 동시에 항의가 터져 나왔다.


라셀이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선거 운동 규칙을 아시오? 같은 장소에 다른 후보 포스터를 붙일 때는 최소 2미터 간격을 둬야 하오."


그것이 선거관리위원회가 정한 규칙이었다. 충돌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그리고..."


라셀이 시계를 봤다. 낡은 회중시계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포스터 부착이 허용되오. 지금 8시 47분이니, 13분 더 기다리시오. 양쪽 다."


규칙은 규칙이었다. 마지못해 양쪽이 물러섰다.


13분 동안 기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양쪽은 서로를 노려보며 시계를 봤다. 정확히 9시가 되자마자 붙이기 위해.


그 사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판덴베르크의 지지자들도 나타났다. 그린발트의 사람들도 몇 명 왔다.


거리는 축제 같은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전쟁터 같다고 해야 더 정확할지도.


9시 정각.


교회 종이 울렸다. 댕- 댕- 댕-


동시에 모든 사람이 움직였다.


"붙여! 빨리!"


"저쪽 먼저 막아!"


"2미터! 2미터 지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 자를 들고 간격을 재는 사람, 풀통을 들고 뛰는 사람...


한 시간 후, 거리의 모든 벽은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다.


마리 루이즈, 로스차일드, 판덴베르크, 갈루아, 그린발트... 다섯 명의 얼굴이 시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돌아오고 있었다.


시끄럽고, 혼란스럽고, 때로는 폭력적이지만, 그래도 민주주의였다.


---


맥브라이드가 지도를 응시했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베를린군의 진격로, 방어 지점, 후퇴 경로...


"알버트."


"예."


"로스차일드가 이긴다면, 이 도시는 어떻게 될까?"


뤼프케가 잠시 생각했다.


"경제는 활성화되겠죠. 단기적으로는."


"단기적으로?"


"빈부 격차가 극심해질 겁니다. 그리고 군사력은 약화될 겁니다. 그는 군대를 비용으로만 봅니다."


"그럼 베를린이 쳐들어오면?"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차가운 결론이었다.


"마리가 이긴다면?"


"현상 유지입니다. 좋게 말하면 안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정체입니다."


"판덴베르크는?"


"이상주의자입니다. 좋은 사람이지만... 전쟁을 지휘할 그릇은 아닙니다."


"갈루아는?"


"프랑스계만 챙길 겁니다. 분열이 심화되겠죠."


모두 문제가 있었다. 완벽한 후보는 없었다.


"그래서 장군님이 나가셔야..."


"안 돼."


맥브라이드의 거부는 단호했다.


"약속은 지켜야 해. 그게... 최소한의 속죄야."


속죄. 그 단어가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뤼프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맥브라이드가 짊어진 죄의 무게를.


"베를린에 대비해야겠군."


맥브라이드가 화제를 돌렸다.


"선거 끝나는 즉시 방어 태세 강화. 예비군 소집. 탄약 증산."


"알겠습니다."


"그리고..."


맥브라이드가 뤼프케를 봤다.


"누가 이기든, 군은 중립을 지켜야 해. 알겠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뤼프케의 눈빛은 복잡했다. 


과연 지킬 수 있을까? 그 중립을?


밖에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거리에서 선거 유세가 벌어지고 있었다. 판덴베르크의 지지자들이 모여 있었다. 100명쯤 되어 보였다. 횃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시민의 힘! 시민의 힘!"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민주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맥브라이드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무질서. 혼란. 분열.


전쟁이 코앞인데, 이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을까?


하지만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상자가.


---


그날 저녁, 맥브라이드는 집무실에 홀로 있었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가로등은 아직 켜지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선거 운동원들이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는 것이다.


책상 위에는 보고서가 쌓여 있었다.


**일일 치안 보고서**

- 선거 관련 충돌: 7건

- 부상자: 12명 (중상 2명, 경상 10명)

- 체포자: 3명 (모두 훈방 조치)


숫자로 보면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열기는 더 뜨거워질 것이다.


커피잔을 들었다. 식어서 기름막이 떠 있었다. 그래도 마셨다. 카페인이 필요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뤼프케였다. 뤼프케가 말했다. 그의 모습은 1년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군복은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정갈했지만, 계급장이 바뀌어 있었다. 준장. 맥브라이드가 직접 진급시켰다. 유럽재건위원회군 - 이제는 정식 명칭이 있었다 - 의 참모총장이었다.


그의 얼굴도 변했다. 오른쪽 뺨에 새로운 흉터가 있었다. 8월의 리에주 평정 작전 때 얻은 것이었다. 수류탄 파편이 스쳤다고 했다. 3센티미터만 더 깊었으면 안면 신경이 손상됐을 것이다. 하지만 뤼프케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 흉터가 그에게 더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흉터 있는 지휘관을 더 신뢰했다.


그의 손에는 파일이 들려 있었다.


"베를린 동향입니다."


맥브라이드의 표정이 굳었다. 


뤼프케가 파일을 펼쳤다. 첫 장에는 항공 정찰 사진이 있었다. 흐릿했지만 읽을 수 있었다. 드론으로 찍은 것이었다. 배터리와 연료 부족으로 드론 운용도 쉽지 않았지만, 가끔 중요한 정보를 위해 띄웠다.


"병력 집결이 확인됐습니다. 베를린 동쪽 30킬로미터 지점."


사진 속에는 텐트들이 줄지어 있었다. 수백 개의 텐트. 그리고 차량들. 트럭, 장갑차, 심지어 전차도 보였다.


"추정 병력은?"


"최소 15,000. 최대 20,000."


작년보다 많았다. 베를린도 성장하고 있었다.


"목적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뤼프케가 다음 장을 넘겼다. 


"포로 심문 결과입니다. 지난주 국경에서 잡은 정찰병입니다."


맥브라이드가 읽어 내려갔다.


*"...새로운 총통이 나타났다. 이름은 프리드리히 슈타인호프. 나이는 30대 중반. 전직 독일 연방군 대령. 카리스마가 대단하다고... 히틀러의 재림이라고 부른다..."*


"젊군."


"그리고 야심적입니다. 포로의 증언에 따르면, '게르만 제국의 재건'을 외치고 있다고 합니다."


구역질 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현실이었다.


"그가 우리를 노릴까?"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뤼프케가 망설였다.


"말하게."


"선거 직후가 위험합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혼란이 있을 겁니다. 그때를 노릴 가능성이..."


일리가 있었다. 권력 이양기는 항상 취약했다.


맥브라이드가 일어섰다. 벽에 걸린 지도 앞으로 갔다.


브뤼셀과 베를린 사이는 직선거리로 약 650킬로미터. 하지만 사이에는 죽음의 땅이 펼쳐져 있었다. 방사능 오염 지역, 화학 무기 투하 지역, 무인 지대...


"방어 준비는?"


"70% 완성입니다. 동쪽 방어선 3개, 예비 진지 2개."


"탄약은?"


"1인당 500발. 일주일 전투 분량입니다."


"포탄은?"


"155mm 포탄 800발. 박격포탄 2,000발."


충분하지 않았다. 20,000명을 막기에는.


"시민군 동원은?"


"즉시 동원 가능 인원 3,000명. 1주일 내 추가 동원 가능 2,000명."


"훈련 상태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솔직한 평가였다. 시민군은 숫자만 많을 뿐, 실전에서는 큰 도움이 안 됐다.


"거기에 뒤부아 소장이 한동안 물러난 상태에서 중심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할텐데, 결국 갈루아가 출마를 선언하면서 적극적인 도움이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군인이 아닌가?"


"프랑스계의 진정한 대표가 필요하다고 하는 자를 더 이상 군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마리 루이즈도 프랑스계 아닌가?"


"그녀는 유럽재건위원회의 부시장입니다. 프랑스만의 대표가 아닙니다."


공식적인 답변이었다. 그러나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정체성의 정치는 언제나 강력했다.


"갈루아의 지지율은?"


"5% 정도입니다. 하지만..."


"상승 중이겠지."


"그렇습니다."


"나머지의 지지율은?"


"최근 여론조사... 라고 하기엔 표본이 적습니다만, 각하는 대략 37%입니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난 안 나간다네"


"시민들이 그냥 써서 제출했다고 하는군요."


"마리는?"


"31%. 하지만 역시 상승세입니다."


마리 루이즈. 유능했다. 1년간 부시장으로서 완벽에 가까운 업무 수행을 보여줬다. 프랑스계와 브뤼셀 시민 사이의 갈등을 조정했고, 배급 시스템을 개선했으며, 초등 교육 재개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인기도 있었다. 특히 여성들과 프랑스계 사이에서는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나머지는?"


"판덴베르크 24%. 로스차일드 3% "


결코 안전한 수치가 아니었다. 특히 재벌들이 누군가를 몰아준다면.


"재벌들의 속내는 뭐라고 보나?"


뤼프케가 파일을 넘겼다. 지난 1년간의 재벌 동향 분석이었다.


"복잡합니다. 표면적으로는 협력했지만..."


사실이었다. 지난 1년은 기묘한 균형의 시간이었다.


로스차일드는 여전히 금융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율은 월 5%로 제한되었다. 폭리는 아니었지만 수익은 보장되었다. 그는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받아들였다. 다른 선택이 없었으니까. 대신 그는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물물교환 중개업이었다. 화폐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네트워크는 강력한 무기였다.


슈나이더는 건설업을 독점했다. 하지만 이윤은 20%로 제한되었다. 그 역시 받아들였다. 대신 그는 고용을 늘렸다. 3,000명이 그의 회사에서 일했다. 브뤼셀 최대의 고용주였다. 그것이 그의 새로운 권력 기반이었다.


니콜라 테슬라 3세는 에너지를 관리했다. 전력 생산은 1년 전보다 3배 늘었다. 하루 평균 12메가와트. 여전히 부족했지만, 산업 재개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는 과로로 두 번 쓰러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기술자의 집념이었다.


마리 블랑샤르는, 죽음의 사업가였다. 얼마 안 남은 약들과 몇 없는 깨끗한 병원들, 의사를 길러낼 수 있는 학교, 그리고 의약품 생산공장을 가지고 있다.


그루버는... 작년 재벌들의 반란에서 돌아와 앞서 섰다가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PMC는 정규군에 편입되었다. 일부는 순응했지만, 대부분은 반발했다. PMC의 대우가 더 나았으니까. 그리고 여전히 재벌들은 그 병력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뭘까?"


맥브라이드의 질문은 근본적이었다.


"더 많은 이윤이겠죠."


"그뿐일까?"


뤼프케가 잠시 생각했다.


"안정성입니다. 전쟁 전 같은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불가능한 꿈이군."


"하지만 강력한 동기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향수는 때로 이념보다 강했다.


"그래서 자네 생각은?"


뤼프케가 맥브라이드를 똑바로 보았다. 그의 회색 눈은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충성심? 아니면 계산?


"선거를 연기하십시오."


직설적이었다. 뤼프케다웠다.


"이유는?"


"아직 때가 아닙니다. 베를린의 위협이 여전하고, 내부 통합도 불완전합니다."


"시라크와의 약속은?"


"죽은 자와의 약속입니다."


차가운 현실주의였다. 하지만...


"나도 곧 죽은 자가 될 거야."


맥브라이드의 말에 뤼프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장군님..."


"농담이야."


하지만 완전한 농담은 아니었다. 맥브라이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5년간의 통치가, 아니 생존이 그를 갉아먹었다.


"선거는 예정대로 치른다."


"하지만..."


"결정이야."


맥브라이드의 톤은 단호했다. 더 이상의 이의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뤼프케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보고는?"


화제를 돌렸다. 뤼프케가 파일을 넘겼다.


"베를린 동향입니다."


맥브라이드의 표정이 굳었다. 베를린. 여전히 가장 큰 위협이었다.


"뮐러는?"


"몰락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새로운 실세가 나타났다는 징후가 많이 보입니다 최근 폴란드 잔존 세력 일부를 흡수했습니다. 추정 병력 2만. 거의 복구했습니다. 작년의 세력을"


"2만..."


맥브라이드는 작년의 전투를 떠올랐다. 승리했지만, 기적이었다.


"공격 징후는?"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식량이 부족할 겁니다. 그들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약탈의 계절이 오고 있었다. 매년 그랬다. 수확이 끝나고 겨울이 오면, 굶주린 무리들이 움직였다. 작년엔 베를린이었고, 올해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외교적 해결은?"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요구는..."


"말해보게."


"브뤼셀 인구의 30%를 '순수 독일계'로 교체. 나머지는 노예로."


미친 요구였다. 하지만 진지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인종 순수성에 집착하고 있었다.


"거절했겠지."


"당연합니다."


"그의 반응은?"


"'겨울에 보자'고 했습니다."


위협이었다. 명백한 위협.


맥브라이드가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갔다. 비는 멈췄지만, 구름은 여전히 무거웠다. 잿빛 하늘이 도시를 누르고 있었다.


"알버트."


"예."


"솔직히 말해보게. 내가 선거에 나가지 않고, 이대로 물러난다 베를린과 맞설 수 있을까?"


뤼프케가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어렵습니다."


"마리 루이즈는 유능하지 않나?"


"행정가로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쟁 지도자로서는..."


"미지수군."


"그렇습니다."


"아, 그리고..."


뤼프케가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오늘이 장군님 생일이십니다."


맥브라이드가 멈췄다. 그는 정말로 잊고 있었다.


"그래?"


"네. 10월 15일. 만 55세가 되셨습니다."


55년. 그중 5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인생의 10분의 1이었다. 하지만 50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축하할 일은 아니군."


"그래도..."


뤼프케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상자였다.


"이건..."


"열어보십시오."


맥브라이드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회중시계가 있었다. 금색이었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것이었다.


"시라크 대통령의..."


"아닙니다. 제 아버지의 것입니다."


놀라운 고백이었다. 뤼프케는 한 번도 가족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받을 수 없네."


"받으십시오. 아버지도 군인이셨습니다. 장군님을 존경했을 겁니다."


맥브라이드가 시계를 들어 귀에 댔다. 똑딱똑딱. 정확한 리듬으로 시간을 새기고 있었다.


"고맙네."


진심이었다. 5년 만에 받는 첫 생일 선물이었다.


"그리고 장군님."


"?"


"선거에 나가주십쇼, 그리고 이기십시오. 브뤼셀을 위해서가 아니라, 장군님 자신을 위해서."


뤼프케가 경례를 올리고 나갔다.


홀로 남은 맥브라이드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바늘은 6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뤼프케가 나간 후, 맥브라이드는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여전히 권총과 독약이 있었다. 5년째 같은 자리에.


그리고 그 옆에는 새로운 것이 있었다.


편지였다. 봉인된 편지.


받는 사람: 다음 지도자에게


그가 쓴 유서였다. 아니, 인수인계 문서라고 해야 할까.


언제 쓴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몇 달 전. 불면증에 시달리던 어느 새벽.


내용은 간단했다.


베를린에 대한 대비책. 식량 비축 장소. 비밀 무기고 위치. 그리고...


사과.


이 자리에 앉게 된 사람에게 미리 사과한다고.


얼마나 외롭고 무거운 자리인지 알게 될 거라고.


그래도 포기하지 말라고.


브뤼셀을 위해. 아니, 살아남은 모든 이들을 위해.


편지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8일 후면 개봉될 편지.


그때 이 편지를 읽는 사람은 누구일까?


마리? 로스차일드? 판덴베르크?


누구든, 그들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같을 것이다.


권력의 무게.


책임의 무게.


그리고 고독의 무게.


맥브라이드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차갑고 쓴 커피.


그의 인생처럼.


하지만 마셔야 했다.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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