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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유럽의 첫 1년


프레빌 48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0

유럽재건위원회 - 브뤼셀의 마지막 불꽃

2010년 1월 10일, 0600시.

로이 맥브라이드 장군은 벙커의 좁은 창문으로 잿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금 막 마지막 치장물자들을 어떻게 배분할지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계획의 수립이 끝난 차였다. 그의 눈가에는 72시간 동안 잠들지 못한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한때 유럽연합의 심장이었던 브뤼셀은 이제 거대한 무덤과 다름없었다. 그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부두 노동자, 어머니는 간호사였던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왕립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NATO군에서 경력을 쌓았다. 절멸전쟁 직전에는 NATO 북부사령부 참모차장이었다. 그의 상관들은 모두 죽었고, 이제 그가 최선임 장교였다.


방사능 측정기가 단조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치는 여전히 절망적이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즉사 수준은 아니었다. 간신히, 말그대로 정말 한계에 가까울 지경이지만 일단 브뤠셀 전체의 공기정화시스템은 작동은 하고 있었다. 생명체를 품고 키워내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자손들에게 죽음만을 내리는 가혹한 어머니 대지는 아니었다. 고단하고 지난한 나날이었다. 멸망의 순간에도 자신을 믿고 따라준 시민들과 2연대의 장병에게 방호복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조악한 옷을 입히고는 나가서 죽을때까지 정화하라고 무너진 지휘부에서 명령을 내린 결과였다. 인류 문명이 스스로에게 가한 최후의 일격으로부터 십년. 동방의 어느나라에서는 강산이 바뀔만한 시간이라고 하지만 살아남은 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장군님."


부관 알버트 뤼프케 소령이 커피를 가져왔다. 그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직업군인이었다. 가족은 모두 잃었다. 절멸전쟁의 마지막 날, 함부르크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귀쟁이놈들과 난쟁이놈들의 병기가 동시에 작렬한 곳 중 하나였다. 


장군은 커피를 들어올려 한모금 마셨다. 절멸전쟁 이전의 인스턴트 커피였다. 미지근하고 쓴맛이 났지만, 그것은 아마도 세계에 남은 마지막 문명의 사치품 중 하나일 것이다.


"몇 명이나 더 찾았소?"


"어제 17명, 오늘 새벽 6명입니다. 대부분 지하철 역사에 숨어있던 사람들입니다."

23명. 인구 1100만의 도시에서 23명하고도 1만명, 맥브라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벨기에 전역으로 범위를 넓히면 수천 명은 될 것이다. 희망적인 숫자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방송은 계속하고 있나?"


"예, 하지만 응답은..."


침묵이 흘렀다. 맥브라이드는 벽에 걸린 유럽 지도를 바라보았다. 한때 28개국이 하나의 이상을 공유했던 대륙. 이제는 방사능 낙진과 마법 오염으로 뒤덮인 죽음의 땅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죽을 수는 없는 법이다. 유럽은 죽지 않았다. 상처 입고 피 흘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적어도 로이 맥브라이드라는 사람은 그렇게 믿었다..


"아, 보고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제 구조한 생존자 중 한 명이 의식을 찾았습니다."


“특별히 보고한다면, 일반시민은 아니겠군, 누군가?”


“앙투안 르페르브, 전 EU 집행위원회 사무차장입니다.”


맥브라이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고위 관료라는 직책은 물론 여러가지를 의미할 수 있었다. 리를테면 10년이 지났다곤 했지만 평생을 사무실에서 살아온 이의 행정능력 같은 것이나 아직 남아있을 지 모를 군수창고들-대륙단위 총옥쇄를 각오한답시고 만들었지만 허무하게 세계가 꺼져버리며 방치괸-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가진 정보, 최소한 지금 우리가 왜 이 꼴이 됐는지는 알 수 있는 기회.


“데려오시오”



르페브르는 초췌했다. 한때 브뤼셀의 권력 회랑을 누비며 열두개의 금색별을 묶는 줄 중 하나였던 엘리트 관료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의 왼팔은 임시 붕대로 감겨있었고, 눈에는 아직도 공포가 서려있었다.


“르베브르 씨, 당신이 아는 것을 말해주시오. 다른 것들도 좋지만, 우선은 왜 이렇게 됐는지부터”


맥브라이드의 어조는 사무적이었다. 동정은 사치였고, 시간은 귀했다.


“12월 31일… 그날 아침 긴급 각료회의가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영국 수상이 주재했습니다. 안건은…안건은 선제 핵공격이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다는 듯 그는 말했다. 키너 소령이 숨을 들이켰다. 맥브라이드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프랑스 대통령이 반대했습니다. 서독 총리는 침묵했고... 그때였습니다. 경보가 울렸죠. 엘프들이 먼저 공격한 겁니다."


르페브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지옥이었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누군가가 안건을 날치기로 통과시켰고, 핵이 발사되었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비난했고, 명령 체계는 무너졌고... 저는 안전가옥 지하 벙커로 도망쳤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숨어 있었죠."


"다른 고위 인사들은?"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마 대부분..."


르페브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맥브라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들었다.


"쉬시오. 나중에 더 자세히 듣겠소."


르페브르가 나간 후, 맥브라이드의 푸른 눈동자가 뤼프케를 차분히 관찰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혼란스럽습니다, 장군님. 만약 EU 지도부가 정말로..."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야."


맥브라이드는 벽에 걸린 유럽 지도를 바라보았다. 한때 5억이 살던 대륙. 이제는 얼마나 남았을까. 새빨간 햇빛이 집무실의 대리석 벽면에 반사되어 혈색의 그림자들이 춤을 춘다. 5층에서 내려다보는 브뤼셀 시가지는 마치 거대한 맹수의 목구멍 속으로 걸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천장의 깨진 샹들리에의 차가운 빛과 햇빛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물어보는 듯했다. ‘왜 아직도 살아있느냐’라고.


"보고합니다!"


그런 감상에 젖어있을 때 통신병이 뛰어들어왔다. 21살의 벨기에 청년, 마르크 반 담이었다. 징집병으로 복무 중 전쟁을 맞았은 그의 얼굴에는 흥분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파리 방면에서 생존자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암호명 '엘리제'. 프랑스 정부 비상 프로토콜입니다."


맥브라이드는 즉시 통신실로 향했다. 구식 단파 라디오가 간신히 작동하고 있었다. 잡음 속에서 희미하게 프랑스어가 들렸다.


"...엘리제 팰리스... 생존자 약 3천... 자크 르네 시라크 대통령... 응답바람..."


장군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기억의 파편들을 흝어보며 회상했다. 프랑스 대통령. 절멸전쟁 직전까지 유럽의회에서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내던 인물이었다. 유럽통합군을 만들자고 주도한 인물이기도 했다. 신호는 반복되고 있었다. 자동 송신인 듯했다.


"얼마나 멀리 있나?"


"약 320킬로미터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지상 이동은 불가능합니다.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고, 길은 잔해로 막혀있습니다. 게다가..."

반 담이 말을 멈췄다. 맥브라이드가 재촉했다.


"말해."


"정찰대가 남쪽 20킬로미터 지점에서 이상한 것을 봤다고 합니다. 움직이는... 무언가를요."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 같은 것이었답니다. 형체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살아있는 것 같았다고."


침묵이 흘렀다. 절멸전쟁의 마지막 날, 온갖 금기시된 무기들이 사용되었다. 차원을 여는 마법, 현실을 비트는 기술. 그 결과로 무엇이 나타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헬기는?"


"세 대가 작동 가능합니다. UH-60 블랙호크 두 대와 AS532 쿠거 한 대입니다."


"연료는?"


"왕복 비행에 아슬아슬합니다. 


맥브라이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통성. 민주주의의 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권력의 정당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혼란기일수록 정통성은 더욱 중요해진다. 특히 구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존재라면 그것은 중요하다 못해 치명적이다.


“준비하시오, 내일 새벽 출발하지.”


"장군님, 혹시 파리에 또 다른 생존자 집단이 있다면..."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다면 우리는 끝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역사는 결단하는 자의 것이야. 망설이는 자는 역사의 각주가 될 뿐이지."


파리로 가는 길

맥브라이드는 12명의 정예 병사들과 함께 탑승했다. 헬기 내부는 조명이 없어 어둡고 습했으며, 의자는 철제였다. 각종 무기들이 벽면에 고정되어 있었고, 탄약상자들이 없는 공간에 어떻게 바닥에 정렬되어 있었다. 


“가는데까지는 두시간 정도 걸린다. 가는 동안 작전에 대해 설명해주겠다, 제군들, 우리의 임무는 단순하다."


맥브라이드는 브리핑을 시작했다.


"파리의 프랑스 정부와 접촉하고, 가능하다면 통합 지휘 체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명심하라. 그들이 우호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오브라이언 대위가 손을 들었다.


"적대적일 경우의 교전 규칙은?"


"자위권 발동. 하지만 최대한 협상을 시도한다. 우리에게는 적보다 동맹이 더 필요하다."


세 대의 헬기가 이륙했다. 아직 어둠이 짙은 새벽, 하지만 동쪽 하늘은 기괴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방사능 구름이 만들어내는 섬뜩한 일출이었다.


맥브라이드는 쿠거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래로 보이는 브뤼셀의 폐허는 충격적이었다. 그랑플라스는 거대한 분화구가 되어 있었고, 왕궁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EU 본부 건물은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장군님, 이것 보십시오."


헬싱키 중위가 태블릿을 건넸다. 방사능 측정 데이터였다.


"남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이상 구역이 있습니다. 방사능 수치가 0입니다."


"0? 오류 아닌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무언가가 방사능을 흡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불길한 소식이었다. 방사능을 먹고 사는 무언가라니.


"우회한다."


비행 시작 한시간쯤 후, 옛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을 넘어서면서 풍경은 더욱 처참해졌다. 유럽의 정원이라 불리던 벨기에 평원은 이제 잿빛 사막이 되어 있었다. 한때 푸르턴 아르덴 숲은 검은 숯더미가 되어있었고, 군데군데 거대한 분화구들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곧 그것들을 뛰어넘는 역겹거고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런 씨….”


조종사의 외침에 모두가 창밖을 보았다. 


"저기 보십시오. 장군님…."


페트로바 대위가 가리킨 곳에는 빈약하지만 무장을 한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씨발 그들은 사람을 구워먹고 있었다.


"교전할까요?"


오브라이언 대위의 질문에 맥브라이드는 안그래도 철제의자라 멀미가 심한데 가까스로 토를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시한다. 우리가 먼저 건드릴 이유는 없어."


"우리의 손이 닿지 않은 생존자들은, 아마 인간이길 포기한 자들뿐일까요"


키너 소령이 중얼거렸다.


"모르겠소. 하지만 이제 우리가 아는 세계는 끝났다는 증거겠지."


비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 파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오전 8시경이었다. 아니, 파리였던 것이 보였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에펠탑은 중간에서 꺾여 세느강에 처박혀 있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거대한 유리 크레이터가 있었다. 세느강은 기괴한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고, 물 위로는 정체불명의 증기가 피어올랐다.


"엘리제 궁 방향에서 연기가 보입니다."


"살아있다는 신호군."


맥브라이드는 권총을 점검하며 외교관이 될 준비와 정복자가 될 준비를 동시에 했다. 그것이 이 새로운 시대의 규칙이었다.


"엘리제궁 육안확인. 옥상에 프랑스 국기가 걸려 있습니다."


조종사의 보고에 맥브라이드는 안도했다. 적어도 목표는 건재했다.


"착륙 지점은?"


"콩코르드 광장이 가장 안전해 보입니다. 비교적 평탄하고..."


그때였다. 경보음이 울렸다.


"미사일 록온! 회피 기동!"


세 대의 헬기가 급격히 흩어졌다. 대공 미사일이 쿠거를 스쳐 지나갔다.


"어디서 쏜 거야?"


"엘리제궁 방향입니다!"


맥브라이드는 즉시 무전을 잡았다.


"엘리제궁, 여기는 브뤼셀의 유럽통합군 잔존병력이다. 공격을 중지하라. 반복한다, 우리는 적이 아니다!"


긴장된 몇 초가 흘렀다. 그리고 응답이 왔다.


"여기는 엘리제궁이다. 신원을 증명하라."


프랑스어였다. 맥브라이드는 프랑스어로 대답했다.


"나는 콘래드 맥브라이드 유럽통합군 중장이다. 구조신호를 받고 왔다."


또다시 침묵. 그리고...

"착륙을 허가한다. 하지만 무장 병력은 최소화하라."


콩코르드 광장에 착륙한 헬기에서 맥브라이드와 5명의 수행원이 내렸다. 나머지는 헬기에 대기했다.

그들을 맞은 것은 프랑스 공화국 수비대의 잔존 병력이었다. 한때 의장대였던 그들의 제복은 찢어지고 더러워져 있었지만, 여전히 군기는 살아 있었다.


"이쪽으로."


수비대장은 말없이 그들을 안내했다. 엘리제궁으로 가는 길은 처참했다. 거리에는 잔해가 쌓여 있었고, 건물들은 반쯤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바리케이드였다. 생존자들이 쌓은 듯한 임시 방벽들이 주요 길목마다 설치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3,412명입니다."


수비대장이 대답했다.


"군인 800, 경찰 300, 나머지는 민간인입니다."


적지 않은 숫자였다. 맥브라이드는 희망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 정도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들 스스로’,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리제 궁의 지하 벙커는 브뤼셀보다 상태가 양호했다. 프랑스의 오랜 핵전쟁 대비 전통이 빛을 발한 것일까.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여전히 강인한 모습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흰머리가 힐긋힐긋 보이긴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그의 눈에서 같은 종류의 피로를 읽을 수 있었다.


70대 후반의 전직 총리이자 파리시장 출신 대통령은 피로해 보였지만 여전히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맥브라이드 장군, 먼 길 오셨소."


악수를 나누며 시라크 말했다. 그의 영어는 완벽했다.


"각하,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다행... 그런가요? 때로는 죽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통령은 창밖을 가리켰다. 폐허가 된 파리가 보였다.


"천 년 역사의 도시가 열흘 만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각하, 과거를 탓할 시간이 없습니다."


장군의 말은 단호했다. 대통령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엇을 제안하러 오신 겁니까?"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탁자 위에는 시원한 와인이 놓여 있었다. 냉장고는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을텐데 땅에라도 묻어놓은 건지. 아니면 얼마안되는 전기를 여기다가 끌어다 쓴건지, 진실이 무엇이든 참으로 프랑스답다.


"생존자는 몇이나 됩니까?"


"파리 시내에 약 3천. 프랑스 전역으로는... 모르겠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6천 7백만 인구의 나라에서 생존자가 만 명도 안 될 것이라는 암묵적 계산.


"무엇을 원하십니까, 장군?"


대통령의 질문은 직접적이었다. 장군도 돌려 말하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통합이 필요합니다. 브뤼셀과 파리의 생존자를 합치면 약 1만 5천. 이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시작? 무엇을 시작한다는 겁니까?"


프랑스 측 르네 올리 소장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재건입니다. 유럽의 재건."

"누구의 지휘 하에?"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맥브라이드는 준비한 답을 내놓았다.


"통합 지휘권입니다."


"사실상 군정이되겠군요, 뭔지는 몰라도 유럽통합군은 당신 휘하에 있는거 같고 브뤼셀에서 여기까지 날아올 수 있을정도의 능력도 되시니”


“그러니, 이 상황에서 월권, 아니 군사 쿠데타를 하시겠다?"


"아닙니다. 하지만 민간 정부가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시라크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탄닌과 완벽하게 조화된 묵직한 바디감이 입안에 퍼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유럽재건위원회를 만들 것입니다. 군과 민간의 통합 기구로. 각하께서 명목상 수반이 되시고, 저는 실무를 맡겠습니다."


"거절한다면?"


맥브라이드는 창밖을 가리켰다. 부서진 파리의 모습이 보였다.


"혼자서 저것을 재건하실 수 있습니까?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민간 정부가..."


"민주주의는 사치라는 말씀이신가요?"


시라크 끼어들었다. 맥브라이드는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살아남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없습니다."


협상은 세 시간 만에 타결되었다. 시라크 명목상의 프랑스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맥브라이드는 유럽재건위원회 의장 겸 군사령관이 되었다.


3시간의 열띤 토론 끝에 시라크가 제안을 내놓았다.


"좋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첫째, 프랑스 주권의 상징적 유지. 국기와 국가는 보존됩니다."


"동의합니다."


"둘째, 1년 내에 민간 정부 복원을 위한 로드맵 작성."


"5년으로 하시죠."


"3년."


"동의합니다."


"셋째, 프랑스군은 독자적 지휘 체계를 유지합니다. 통합은 작전 레벨에서만."


이것은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맥브라이드는 뤼프케와 눈빛을 교환했다.


"대신 모든 작전은 통합사령부의 승인을 받는 것으로."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라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생존자 구출과 보호, 그리고 유럽의 재건이 최우선입니다. 군사 작전보다도."


"당연합니다."


악수가 오갔다. 유럽재건위원회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알고 있었다.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프랑스 측 생존자들은 이미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외국 군대가 프랑스를 지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장 바티스트 뒤부아 소장은 프랑스 장교들을 소집해 비밀 회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12명. 모두 프랑스군 중견 장교들이었다.


"뒤부아 장군님, 하지만 대통령께서..."


"대통령은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우리가 약해 보였기 때문이야."


뒤부아는 애국자였다. 생모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외인부대에서 복무한 경력의 소유자. 그에게 프랑스는 모든 것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젊은 대위가 물었다.


"일단은 기다린다. 놈들의 약점을 찾아내고, 때가 오면..."


한편 맥브라이드는 실무 통합에 착수했다. 하지만 모든 단계에서 마찰이 일어났다.


"왜 영어로 보고서를 써야 합니까? 여기는 프랑스입니다!"


"보급품 분배가 불공평합니다. 브뤼셀 병사들이 더 많이 받고 있어요!"


"우리 부대를 왜 독일놈 밑에 배치합니까?"


사소한 불만들이 쌓여갔다. 맥브라이드는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해결했지만, 밑바닥의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뒤부아가 이의를 제기하면 맥브라이드는 차갑게 대답했다.


"소장, 이제 프랑스도 벨기에도 없습니다. 있는 것은 살아남은 인류뿐입니다."


"그래도..."


"모든 자원을 선택과 집중을 통해 재건에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재벌들과 협상도 진행하고 있고요 협력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고립되시겠습니까? 합의가 이뤄진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파기할 수 있을 겁니다.


"재벌이요? 이 세계에 그런게 남아있습니까?”


맥브라이드는 재벌을 생각하더니 표정을 조금 찡그리며 대답했다.

“놀랍게도요, 정말 맨땅에서 다시 사업을 일구었더군요, 다루기 힘들지만, 전쟁이전의 기술을 대부분 유지시켰습니다. 참 대단한 놈들이죠. 첨언드리자면 은행놈들도 있습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뒤부아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알고 있었다. 이런 불만이 쌓이면 언젠가는 폭발한다는 것을.


"힘든 길이 될 것입니다."


시라크가 조용히 말했다.


"쉬운 길이었다면 인류가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겠죠."


맥브라이드는 일어섰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통신망 복구, 생존자 수색, 자원 확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생존자 집단과의 접촉.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완전히 기대를 저버렸다는 뜻이다. 생물로서, 이웃으로서, 가족으로서, 국가로서 예상되는 행동들, 움직이고, 싸우고, 대화하고, 그런 것들을 이제 다신 못할 거라 생각되는 상태를 죽음이라 부르는 것이다. 유럽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적어도 로이 맥브라이드라는 사람은 그렇게 기대했다.



잿빛 균형

파리에서 돌아온 헬기가 착륙장 위에서 선회할 때, 로터 블레이드가 만들어내는 굉음이 죽은 도시의 침묵을 찢어발겼다. 오후 4시, 본래라면 햇살이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워야 할 시간이었지만, 브뤼셀의 하늘은 마치 거대한 화장터에서 피어오른 재가 온 세상을 뒤덮은 것처럼 짙은 잿빛으로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헬기가 고도를 낮출수록 도시의 참상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때 유럽 연합의 심장부였던 거리들은 이제 거대한 시체 안치소와 다름없었다. 붕괴된 건물들의 철골 구조물이 부러진 갈비뼈처럼 하늘을 향해 비틀어져 있었고, 검게 그을린 콘크리트 잔해들이 마치 썩어가는 살점처럼 거리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공기는 끔찍했다. 타다 남은 플라스틱의 독한 화학 냄새와 부패하는 유기물의 역겨운 악취,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것은 인육이 타면서 나는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구역질나는 냄새였다. 그 냄새는 마치 기름진 연기처럼 목구멍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한 번 맡으면 영혼 깊은 곳에 각인되어 평생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맥브라이드는 헬기의 측면 창문 너머로 도시를 내려다보며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갔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통증은 적어도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으니까.


헬기가 착륙 패드에 닿자 엔진음이 서서히 줄어들었고, 로터 블레이드의 회전도 점차 느려졌다. 맥브라이드가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서자, 텅 빈 착륙장의 적막함이 그를 맞이했다. 콘크리트 바닥에는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고, 곳곳에 검붉은 얼룩들이 불길한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핏자국인지, 녹슨 철의 흔적인지 구분할 수 없었고, 굳이 구분하고 싶지도 않았다.


맥브라이드가 헬기에서 내리자 그를 맞은 것은 텅 빈 착륙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생존자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자에 대한 의전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뤼프케는 최소한 다녀온 동안의 상황을 설명해줄 관리 하나 정도는 나와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곧 사그라들었다. 건물잔해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격수일 수도, 굶주린 생존자일 수도, 혹은 자신이 혹여나 다녀오는 길에 퍽 죽어버리지는 않을지 기대하는 반역자일수도 있었다. 


"최고의 예우군, 그렇지 않나 알버트?"


그 말이 맞았다 아직까지는 최고지도자가 자리를 비운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총으로 대가리를 겨눈 놈이 없다는 소리니깐. 


맥브라이드의 목소리는 쉰 듯 갈라져 있었다. 파리에서의 협상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그의 회색빛 군복은 한때 위엄 있었지만 이제는 여기저기 해어지고 때가 묻어 초라해 보였다. 견장의 금실은 색이 바래 있었고, 가슴에 단 훈장들은 녹이 슬어 본래의 광택을 잃은 지 오래였다.


알버트 뤼프케 소령은 상관의 비아냥거림에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10년간 전쟁터를 누빈 직업군인의 얼굴은 화강암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깊게 패인 주름살과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길다란 흉터가 그가 겪어온 전투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네 시간만 좀 눈을 붙이겠네, 그동안 조금만 더 수고해주길 바라네 소령, 도시의 상황을 조사해서…"


맥브라이드의 말끝이 흐려졌다. 극도의 피로가 그의 의식을 잠식하고 있었다. 눈꺼풀은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다리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휘청거렸다.


벙커로 들어가는 철제 문을 열자,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 속에는 오래된 콘크리트 특유의 시멘트 냄새와 기계유 냄새, 그리고 절망에 찌든 인간들의 체취가 뒤섞여 있었다. 벙커의 콘크리트 벽에는 지하수가 스며들어 검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도시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처럼 보였다.


조명은 희미했다. 전력을 아끼기 위해 복도의 전구 절반은 꺼져 있었고, 켜진 것들도 깜빡거리며 간신히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불안정한 빛 속에서 벙커의 좁은 복도는 마치 지옥으로 통하는 통로처럼 음침하게 이어져 있었다.




"장군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일어나시지요"


맥브라이드가 눈을 떴을 때, 뤼프케 소령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짧은 수면은 피로를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무겁게 만들었다. 머리는 쇳덩이처럼 무거웠고, 입안은 썩은 고기 맛이 났다.


뤼프케가 건넨 파일은 축축했다. 습도 70%를 넘는 벙커의 공기는 모든 것을 축축하게 만들었다. 종이는 곰팡이 냄새를 풍기며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고, 잉크는 번져서 일부 글자는 읽기 어려웠다. 맥브라이드는 피로로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비비며 숫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정확한 숫자입니다, 장군님."


뤼프케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모든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 놓은 목소리였다. 10년간 전쟁터를 누비며 부하들의 죽음을 수없이 목격한 직업군인만이 낼 수 있는, 절망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자의 목소리였다.


"식량 - 보리죽 기준 127일분. 하루 1인당 800칼로리 배급 시."


800칼로리. 성인 남성 일일 권장량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양이었다. 보리죽은 묽고 맛없을 것이며, 영양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서히 굶어 죽을 것이고, 그 과정은 고통스럽고 길 것이다.


"의약품 - 항생제 3,421정, 진통제 8,200정, 인슐린 142바이알."


터무니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항생제 하나만 해도 인구 대비 일주일도 버티기 어려운 양이었다. 작은 상처도 감염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상황에서, 이는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맥브라이드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냈다. 말보로. 전쟁 전 재고였다. 담뱃갑은 구겨져 있었고, 필터는 습기를 머금어 물렁했다. 라이터의 불꽃이 세 번째 시도에서야 겨우 붙었다. 니코틴이 폐를 채우자 잠시나마 현실이 선명해졌다. 동시에 그 선명함이 가져다주는 절망도 더욱 뚜렷해졌다.

"누가 통제하고 있나?"


"그게 문제입니다."


뤼프케가 브뤼셀 지도를 펼쳤다. 한때 정교했던 도시 지도는 이제 여기저기 찢어지고 얼룩져 있었다. 빨간 점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각각은 재벌들의 거점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마치 도시의 몸에 퍼진 암세포처럼 보였다.


"로스차일드 은행 연합 - 구 ING 빌딩 지하금고. 무장경비 80명. 통조림 2만 개%, 금괴 400kg 보유.

슈나이더 건설 - 공항 격납고. 중장비 12대, 경유의 40%, 시멘트 200톤. PMC 50명 고용.

니콜라 에너지 - 화력발전소. 하루 전력 생산 4메가와트. 석탄 비축량 불명.

케르베로스 PMC - 구 NATO 벙커. 실질 병력 312명, 장갑차 8대, 박격포 6문.

시노피-우리가 가진 모든 의약품"


"우리는?"


"정규군 1,247명. 실탄 1인당 120발. 전투식량 2주분."


맥브라이드는 웃었다. 차가운 웃음이었다.


"권력의 진공 상태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뤼프케가 망설였다.


"말해."


"프랑스인들이 불만이 많습니다. 지하 주차장에 수용되어 있는데, 하루 12명씩 병에 걸리고 있습니다. 습도와 추위 때문에."


"브뤼셀 시민들은?"


"더 나쁩니다. 일부는 이미 자체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는 배급소에서 칼부림이 있었습니다. 사망 2명. 부상….”


뤼프케의 말이 끝나기전에 누군가 벙커문을 두들겼다. 


소리가 울렸다. 충분한 수면을 취해지 못한채 스트레스만 잔뜩 받은 맥브라이드의 뇌는 이미 한계 상태였다. 토할것만 같았다. 질린다. 모든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한다.


“브뤠셀 생존자들을 대표해서 왔소, 문 여시오! 로이 맥브라이드!”


“피터군요, 쫓아낼까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을 때, 그 소리는 벙커의 좁은 공간에서 메아리쳐 북소리처럼 들렸다.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채 스트레스만 잔뜩 받은 맥브라이드의 뇌는 이미 한계 상태였다. 관자놀이에서는 쿵쿵거리는 통증이 느껴졌고, 시야 가장자리는 희미하게 흐려져 있었다. 위산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목구멍을 태웠고, 입안에는 쓴맛이 가득했다.


피터 판덴베르크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절멸전쟁 전 벨기에 하원의원이었고, 지금은 브뤼셀 시민 5,000명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한때 단정했던 그녀의 모습은 이제 전쟁의 상흔으로 가득했다. 금발은 뿌리부터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한때 날카롭던 파란 눈은 피로와 분노로 충혈되어 있었다. 정장은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단정하게 입으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지 말게, 폭동이라도 일으킬 일 있나 들여보내도록."


문의 잠금장치를 풀자, 판덴베르크는 "쾅"하고 요란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뒤에는 무장한 시민 둘이 따라 들어왔는데, 그들의 손에 든 무기는 제각각이었다. 하나는 녹슨 사냥용 라이플을, 다른 하나는 야구 방망이에 못을 박은 조잡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3000명? 지금 제정신이요 장군? 파리놈들에게 우리 식량을 나눠주라고?"


판덴베르크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그녀가 말할 때마다 침이 튀었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목의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손가락으로 맥브라이드를 가리키며 비난하는 모습은 마치 전쟁 전 의회에서 정적을 공격하던 때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수용공간은 있소? 브뤼셀의 벙커와 지하시설은 이미 포화 상태고, 지상의 건물들은 대부분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소 장군!"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브뤼셀의 지하 공간은 이미 빈틈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복도에서 자는 사람들, 화장실을 침실로 쓰는 가족들, 창고 한 구석에서 숨 쉬듯 살아가는 노인들. 더 이상의 공간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미 합의된 사항입니다 의원님.”


“우리한테는 묻지도 않고?”


설득따윈 먹히지 않을거 같다. 맥브라이드는 피로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길 문제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너무 빨랐다. 정보가 너무 빨리 퍼진다. 내부에서 누군가가 흘린거겠지, 누구지?


“지금 듣고 있는거 맞소 장군?”


그녀의 말에는 분노가 가득차있었다.


“전시 상황에서…”


“전쟁이라고요? 당신네들이 멋대로 일으킨 전쟁인건 차치해두고서, 전쟁은 끝났습니자 장군. 이제는 생존의 문제고, 그것은 사회적 자원의 배분이며, 분명한 정치의 영역입니다!”


판덴베르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200명의 무장한 시민들이 있었다. 아직 군대를 당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세력이었다.


“먼저 말하지 않은건 분명한 내 실책이요, 하지만 굉장히 상황이 급박했다는 것만 알아주길 바라오. 그리고 정말 정말로 미안하지만 지금 제대로된 휴식을 취한지다 너무 오래되었소, 시간을 조금만 준다면 반드시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 드리겠소. 그러니 제발 돌아가주시오 부탁할세”


피터는 무언가 반박을 내뱉으려 했지만, 맥브라이드의 목소리는 너무나 침울하게 들렸고, 또 그의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 봐도 확실히 인권유린 수준의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기에. 한숨으로 답변을 대체했다.


“제발 해결책이 나오길 바랍니다 장군, 일단 쉬시지요. 예. 쉬고 이른 시일내에 다시 봅시다.”


그녀는 그렇게 돌아갔다. 맥브라이드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으로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장군, 지금 시점에 드리게 굉장히 부적합한 말씀일수도 있으나.”


“뭔가, 또 배급에 문제가 생겼나?”


“기업연합측에서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확실히 굉장히 부적절했다. 차라리 정화장치가 박살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할 정도로.



회의실은 전쟁 전 이곳이 유럽통합군 고위 장교들의 작전 회의실이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암시하고 있었다. 벽에는 색이 바랜 유럽 지도가 걸려 있었고, 그 위에는 이제는 의미를 잃은 국경선들이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깨진 프로젝터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었다.


토마스 슈나이더가 상석에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이곳의 주인인 양 당당했다. 그의 검은 양복은 전쟁 전 명품 브랜드의 것으로, 이런 종말의 시대에도 완벽하게 다림질되어 있었다. 넓은 어깨와 굵은 목, 그리고 육중한 체구는 한때 그가 건설 현장에서 직접 일했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이제 그의 손은 흙 대신 권력을 쥐고 있었다. 손가락에는 굵은 금반지가 빛나고 있었고, 손목시계는 아마도 브뤼셀에 남은 마지막 롤렉스일 것이다.


"늦으셨군요, 장군."


슈나이더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시가를 너무 많이 피운 사람 특유의 쉰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부인할 수 없는 권위가 담겨 있었다. 그가 말할 때마다 턱 아래의 군살이 미세하게 떨렸고, 작은 눈은 맥브라이드를 값어치를 매기듯 훑어보았다.


"내 자리인 것 같은데."


맥브라이드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의 오른손이 무의식적으로 권총 홀스터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슈나이더는 놓치지 않았다. 건설업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조롱하듯 웃었다. 그의 두꺼운 입술 사이로 담배 냄새가 섞인 숨결이 새어 나왔다.


"자리요? 이제 그런 구분이 의미있습니까?"


슈나이더 옆에는 에르빈 로스차일드가 앉아 있었다. 은행가 집안의 후손답게 그의 모든 것은 정교하고 계산적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창백한 피부, 그리고 매부리코 위에 걸친 금테 안경은 그에게 독수리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으며, 서류를 넘길 때마다 마치 돈을 세듯 정확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검은 머리는 포마드로 단정하게 넘겨져 있었고, 수염은 면도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 옆에는 그루버가 앉아 있었다. 케르베로스 PMC의 수장인 그는 다른 재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때 독일 연방군 특수부대 장교였던 그의 몸은 여전히 강철처럼 단련되어 있었고, 눈빛은 늑대처럼 날카로웠다. 짧게 깎은 금발 머리와 각진 턱, 그리고 오른쪽 눈썹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총상 흉터가 그의 과거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도 언제든 전투 태세로 전환할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맥브라이드는 조용히 빈자리에 앉았다. 하석이었다.


"무슨 논의를 하고 있었소?"


"파리 난민 문제요."


로스차일드가 서류를 들어 보였다.


"3,000명을 추가로 먹여야 한다? 불가능합니다."


"이미 합의된..."


"장군이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이죠. 우리와 상의도 없이."


분위기가 싸늘했다. 맥브라이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부관 뤼프케조차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간단합니다. 선별 수용."


그루버가 끼어들었다.


"건강한 성인 남성 500명, 기술자 200명, 나머지는 거부."


"그건 2,300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니요. 그들이 알아서 생존하도록 하는 겁니다. 우리가 모두를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


맥브라이드는 계산했다. 군사력? 1,200명이지만 실제 충성파는 절반도 안 된다. 재벌들이 제공하는 보급품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대립각을 세우면?


"...조건이 있소."


"조건요?"


"최소한 어린이와 의료진은 받아들여야 하오. 인도적..."


"인도적?"


로스차일드가 비웃었다.


"장군, 우리가 자선단체입니까? 비즈니스를 하는 겁니다."


물러설 수 없다. 여기서 물러서면 시라크 대통령과 한 합의도 바로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그럼 거래를 하시오. 어린이와 의료진을 받는 대신, 뭘 원하오?"


재벌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미 준비한 요구사항이 있었다.


"군수품 재고 조사권."


충격적인 요구였다. 군의 급소를 내놓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장군, 우리가 보급품을 대고 있습니다. 얼마나 쓰이는지 알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맥브라이드는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월 1회. 그리고 장교 동행 하에."


"주 1회. 우리 감사관이 직접."


"2주 1회. 최종 제안이오."


"성사."


첫 번째 패배였다. 하지만 최소한 800명의 목숨은 건졌다.


회의가 끝난 후, 맥브라이드는 뤼프케를 불렀다.


"설명이 필요하겠군."

뤼프케 소령이 보고했다.


"어제 밤 구 시청 지하에서 난투극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인 12명, 벨기에인 8명 부상."


"원인은?"


"물 배급 문제였습니다. 브뤼셀 시민들 주도로, 절대 물을 넘겨줄 수 없다며 말입니다"

"그리고 슈나이더가 갑자기 병력을 동원해서..."


"병력?"


"건설 노동자 300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무장하고. 그리고선 프랑스 난민..들을 내쫓아버렸죠"


맥브라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식으로는 한 달도 못 갈 것 같았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고급 정장을 입은 40대 남성. 절멸전쟁을 거치고도 말끔한 차림새를 유지하는 것은 오직 한 부류뿐이었다.


"토마스 슈나이더입니다. 슈나이더 건설 대표죠."


재벌이었다. 전쟁 전 유럽 3대 건설사 중 하나를 운영하던 그는 지금도 500명의 기술자와 노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설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까 전 회의에서 말은 다 끝난거 아닙니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사적인 거래를 제안하러 왔습니다, 장군."


슈나이더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식료품이야 별개의 문제지만, 그 장군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프랑스인들이 살 공간정도는 마련해드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소립니까? 이미 대피소랑 텐트는 한계…”


지상 건물 정화 작업.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특수 코팅제도 있고, 장비도 있죠."


"대가는?"


"군 보급품의 20%. 그리고 재건 사업 독점권."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슈나이더는 자신만만했다.


"거절하시면 생존자들은 계속 지하에서 썩겠죠. 언제까지? 10년? 20년? 생각해보니 그리 오래가지 않을수도 있겠군요 좁은 공간에 사람들을 밀어넣으면 생기는 일은 뻔하니깐요"


"협박입니까?"


"현실입니다."


그때 또 다른 방문객이 도착했다.


"에르빈 로스차일드입니다."


은행가였다. 아니, 이제는 브뤼셀 최대의 물자 보유자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군요."


로스차일드는 슈나이더를 보며 비웃었다.


"건설업자가 큰소리치는 걸 보니 세상이 많이 변했군요."


"고리대금업자보단 낫지."


에르빈 로스차일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법을 다해 인사를 올리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각하, 그래도 ‘군대의 대표’가 이런 취급을 받아서야 옳은 일이겠습니까?”


“장군, 이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모릅니까? 이놈들이야말로 진짜 위협입니다. 극초창기 이 새끼들이 물을 가지고 이자놀이를 했던 기억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음해가 심하군 그래, 정당한 청약과 승낙을 기반으로 한 엄연히 상호가 합의한 계약이었는데, 아 슈나이더, 자네 아들일은 안타까운 일이지, 설마 그거 때문에 그런가?”


슈나이더가 권총을 빼들었을 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방아쇠를 감싸고 있었고, 총구는 로스차일드의 머리를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총신에 반사되어 차갑게 빛났다.


"이 좆 같은 유대인 새끼가!"


슈나이더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아들, 한때 그의 후계자였던 아들은 극초기 물 배급 과정에서 로스차일드의 '이자 놀이'에 걸려 모든 것을 잃고 절망 끝에 자살했다. 그 기억이 슈나이더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각하 앞에서 총이라도 쏠 셈인가? 그거 참 재밌겠군, 엄연히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 아닌가?"

로스차일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며 조롱하듯 웃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총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고, 손은 여전히 우아하게 서류 위에 놓여 있었다. 마치 이런 상황이 일상적인 비즈니스 협상의 일부인 양 태연했다.


철컥.


뤼프케가 권총을 빼들고 슈나이더의 관자놀이에 갖다 댔을 때, 방 안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차가운 총구가 슈나이더의 피부에 닿자,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로스차일드를 겨누고 있었다.


"하? 쏠 순 있나? 나 없인 바로 도시가 무너질 텐데?"


슈나이더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가 통제하는 건설 장비와 기술자들 없이는 도시의 재건은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이 '대체 불가능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그토록 잘난 너희들이 있는데도 왜 장군께서 이 도시의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는지 알려줄 수밖에 없겠군"


뤼프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가 무전기의 전원을 켤 때, '찰칵' 하는 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쳤다. 그것은 단순한 통신 장비의 작동음이 아니라, 1,200명의 정규군이 대기하고 있다는 무언의 위협이었다.


“협박하는건가?”


“현실이지”


슈나이더는 맥브라이드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아주 충성스러운 부관을 두셨습니다 장군, 여기서는 권위를 존중해드리죠. 그리고 부디, 꼭 ‘적극적’으로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슈나이더는 쿵쿵대며 방을 나갔다. “쾅”, 세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야, 상황판단도 빠르고, 제 밑에 두고 싶은 부관인데요? 질투납니다 각하”


“유감이지만, 사람을 팔 생각은 없네, 자네 제안은 뭔가?

“저희는 저 자기들 뱃속밖에 채울 생각이 없는 재벌놈들과 다르게 아주 합리적이고, 공정한 제안을 들고왔습니다.”


그러면서 에르빈은 주머니에서 종이 한장을 꺼냈다. 그것은…


“은행권…?”


“역시 이해가 빠르십니다 장군 브뤼셀 크레딧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화폐조제권을 달라, 그거군. 당신이 얻을 것이야, 경제권에 대한 강한 통제권이고, 재벌들에 대한 견제수단과, 시민들의 생명줄이겠지. 그에 대응해서 내가 얻을 것은?”


“저희 금보유고와 식료품을 담보로한 안정적인 통화제도의 수립과, ‘예산’에 대한 상당한 융통성이죠”


“저울이 좀 기울어져 보이네만?”


“군 급여도 대신 지급해드린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군이 당신의 용병이 되란 소린가?”


“아니요, 뭐, 어쩌피 지금 안트베르펜에 숨어있는 양키놈들 빼곤 사실상 각하에 대한 신뢰관계로 명령체계가 구성된 상황아닙니까?”


“….누구한테 들었지?”


“은행이 정보에서 밀리면 섭섭하죠, 어쨌든, 효율적인 협력관계라는 겁니다. 여전히 각하께서 지휘권을 가지고, 저흰 작전에 간섭도 안할겁니다. 먹물놈이 군대에 대해서 뭘 알겠습니까?”


“대신 돈줄은 당신이 쥐고?”


로스차일드가 미소를 지었다.


“현실적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정부 금고는 텅 비었고.”


사실이었다. 맥브라이드는 이를 악물었다.


“지나치게 저울이 공정해보이는군, 나중에 말하지 말고 그냥 지금 말하게”


“역시! 이해가 굉장히 빠르십니다 장군”

“병력의 일부를 저희 은행건물에 상시 주둔시켜주십쇼”


“그루버에 대한 보험이겠고.”


“명분도 나쁘지 않습니다. 한동안은 저희 금고가 사실상 국고처럼 돌아갈텐데 ‘중요시설’에 대한 방어라고 생각해주시죠”


맥브라이드는 짧게 생각에 잠겼다. 불공정하긴 했다. 통화에 대한 통제권을 넘기면 나중에 어떻게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그리고 저놈들이 그걸로 뭘 할지도 보인다. 아마 향후 ‘재건’을 할 때 기간시설에 대한 지분을 확보하고 싶은거겠지 하지만….


“어쨌든 자네는 우리의 ‘미래’를 본다는 소리가 아닌가?”


에르빈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스타트업 사업가가 된 기분이군, 그래 아무것도 없는데 투자받으려면 손해는 좀 봐야겠지”



그날 밤, 맥브라이드는 벙커의 좁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콘크리트 천장에는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고, 어딘가에서 물이 새는지 규칙적으로 '똑, 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시간을 재는 것 같았다. 브뤼셀에 남은 시간을, 인류에게 남은 시간을.


창밖으로는 도시의 실루엣이 보였다. 한때 불야성을 이루던 브뤼셀은 이제 몇 개의 희미한 불빛만이 점점이 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 불빛들 하나하나가 생존자들의 마지막 희망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은 희망.


저 멀리서 총성이 들렸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짧은 연발. 누군가는 오늘도 죽었을 것이다. 식량을 놓고 벌어진 싸움인지, 아니면 단순히 절망에 빠진 자의 자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죽음은 일상이 되었고, 생존만이 예외가 되었으니까.


맥브라이드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오늘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재벌들의 오만한 얼굴들, 판덴베르크의 분노에 찬 목소리, 그리고 뤼프케의 차가운 충성심. 모든 것이 뒤엉켜 악몽 같은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위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식량 부족? 의약품 고갈? 아니면 본격적인 내전? 맥브라이드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양쪽은 절벽이고, 뒤로는 물러설 곳이 없으며, 앞으로는 안개만 자욱한 그런 길.


하지만 그래도 걸어야 했다. 그것이 생존자들의 마지막 희망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비록 그 희망이 거미줄처럼 가늘고 약하더라도, 완전히 끊어지게 놔둘 수는 없었다.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마치 시계추처럼, 종말의 시간을 재고 있었다.



다음날, 장교 회의가 열렸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이게 군대입니까, 기업 경비대입니까?"


프랑스군 출신 뒤부아 소장이 불만을 터뜨렸다.


"재벌들이 우리 무기고를 조사한다? 이건 굴욕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맥브라이드의 설명에도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차라리 무력으로..."


"무슨 무력?"


보급참모 브라운 중령이 끼어들었다.


"솔직히 말합시다. 우리 실탄이 얼마나 됩니까? 1인당 120발. 전투 한 번이면 끝입니다."


"그것도 재벌들이 더 주지 않으면 말이지."


분위기가 침체됐다. 맥브라이드는 알았다. 자신의 군대내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일단은 버틴다. 힘을 기를 때까지."


하지만 그 말에 확신을 갖는 이는 많지 않았다.



새벽 3시 47분. 급보를 들고 뛰어온 통신병의 군화 소리가 벙커의 좁은 복도에 메아리쳤다. 그 소리는 마치 죽음의 북소리처럼 불길했고, 맥브라이드는 소식을 듣기도 전에 이미 최악의 상황을 직감했다.


"장군님! 긴급 상황입니다!"


통신병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군복은 급하게 뛰어오느라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다. 어린 병사의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전쟁을 겪은 군인이 보이는 공포가 아니라, 이제 막 자신이 속한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공포였다.


"프랑스군 일부가 무기고를 점거했습니다. 뒤부아 소장이 이끌고 있습니다!"


맥브라이드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뒤부아.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의 강골 장교. 이제는 반란군의 수괴가 되었다. 그의 반란은 단순한 불만의 표출이 아니었다. 이는 계획적이고 치밀한 쿠데타였다.


무기고로 향하는 길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복도 곳곳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고, 프랑스계 병사들이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결연함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일부는 아직 10대 후반의 소년들이었고, 다른 일부는 백발이 성성한 노병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눈에는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절망적인 결의.


"우리는 프랑스의 명예를 지킬 것이다! 외국 군벌의 지배는 받지 않는다!"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는 뒤부아의 목소리는 광기 어린 확신으로 가득했다. 그의 프랑스어 억양이 섞인 영어는 감정으로 떨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부인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무기고 앞에 집결한 맥브라이드의 병력은 불안해 보였다. 정규군 200명이 대치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프랑스계 동료들과 총부리를 겨누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식당에서 빵을 나눠 먹던 전우들이 이제는 적이 되었다.


"프랑스계 병사들 중 일부가 동요하고 있습니다."


오브라이언 대위의 보고는 상황의 심각성을 더했다. 아일랜드계인 그는 평소 침착함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그의 목소리에서도 긴장이 느껴졌다. 붉은 머리카락은 땀으로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고,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은 창백했다.


"얼마나?"


"최소 100명. 뒤부아 편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편에서 싸우기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중립. 전쟁에서 가장 위험한 입장이었다. 그들은 언제든 저울이 기울면 승자의 편에 설 것이다. 맥브라이드는 이를 악물었다. 200명의 반란군, 100명의 중립파. 자신에게 확실히 충성하는 병력은 채 1,000명도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 소식을 들은 판덴베르크가 찾아왔다.


"이것 보십시오, 장군. 프랑스놈들은 믿을 수 없다고 했잖습니까."


"지금은 그런 말 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말 할 때입니다.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프랑스군을 무장 해제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내전입니다."


"이미 내전 아닙니까?"


"제가 중재하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이었다. 70대의 노정치인은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존재감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한때 프랑스 제5공화국을 이끌었던 그는 이제 난민 집단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었다. 


흰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겨져 있었고, 주름진 얼굴에는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것은 수십 년간 국제 정치의 정글에서 살아남은 정치인의 눈이었다.


"뒤부아는 제 밑에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설득해보겠습니다."


"위험합니다."


"장군, 통합사령부를 만들겠답시고 군권을 가져가놓고선 제대로 통제하나 못하는 사람이 할 얘기얘 아닌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지금 무력으로 진압하면 프랑스인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시라크가 지팡이를 짚고 무기고로 향할 때, 그의 뒤를 수행원 둘이 따랐다. 한 명은 그의 오랜 비서였고, 다른 한 명은 젊은 프랑스군 장교였다. 세 사람의 실루엣이 어두운 복도를 따라 멀어져 가는 모습은 마치 죽음의 문턱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협상은 4시간 동안 이어졌다. 무기고 안에서는 때때로 고함소리가 들렸고, 한 번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도 났다. 밖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은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가 좁은 복도에 가득 찼고, 그 속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유령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시라크가 먼저 나왔고, 그 뒤를 뒤부아가 따랐다. 뒤부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있었다. 강철 같던 군인도 결국은 인간이었다.


"프랑스군의 독자성을 보장하라. 그리고 프랑스인 거주 구역을 따로 만들어라."


뒤부아의 요구는 단호했지만, 총성은 없었다.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타협이었지만, 적어도 오늘은 동족상잔을 피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분리주의..."


"그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선입니다."


맥브라이드는 결국 타협했다. 프랑스군은 명목상 통합 지휘를 받지만, 실질적으로는 독자 운용을 인정받았다. 브뤼셀은 사실상 두 개의 도시가 되었다.


일주일 후, 파리에서 난민이 도착했다. 800명. 원래 약속된 3,000명 중 겨우 800명만이 브뤼셀 입성을 허가받았다.


그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파리에서 브뤼셀까지 300킬로미터를 걸어온 그들은 지치고 굶주려 있었다. 아이들은 울음소리조차 낼 힘이 없었고, 노인들은 젊은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걸었다.


"이게 장군의 협상력입니다."


슈나이더가 비아냥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감이 묻어났다.


시라크 전 대통령은 난민들 사이에 서 있었다. 한때 프랑스 최고 권력자였던 그도 이제는 초라한 난민의 대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800명이라도 살릴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난민들은 지하 주차장으로 안내되었다. 4층 지하 주차장은 원래 유럽 연합 본부 건물의 일부였다. 한때는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던 곳이지만, 이제는 난민 수용소가 되었다.


천장은 낮았고, 환기는 불량했다. 콘크리트 바닥은 차갑고 습했다. 형광등의 절반은 꺼져 있었고, 켜진 것들도 깜빡거렸다. 기둥 사이사이에 천막과 담요로 임시 거처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살라는 겁니까?"


한 중년 여성이 절망적으로 물었다. 그녀의 두 아이가 무서운 듯 그녀의 치마를 꼭 잡고 있었다.

"임시입니다. 지상 건물을 정화하는 대로..."


안내하던 병사의 말은 공허했다.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몰랐으니까.


첫날 밤, 아이 하나가 기침을 시작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약한 폐를 공격한 것이다. 다음날에는 열 명이 기침을 했고, 사흘째에는 수십 명이 병들었다.


"의약품이 필요합니다."


프랑스인 의사의 요청은 절박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배급량이 정해져 있습니다. 더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마리 부인의 약국에서 약을 구하려 했지만,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 있었다.


"항생제 한 병에 금 10그램입니다."


"미쳤소? 그건 강도짓이오!"


"수요와 공급의 법칙입니다. 싫으면 다른 곳에서 구하시죠."


하지만 다른 곳은 없었다. 결국 프랑스 난민들이 가져온 마지막 귀중품들이 약과 교환되었다. 결혼반지, 가족의 유품, 전쟁 전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의약품이 필요합니다."


의무관의 보고에 맥브라이드는 마리를 찾았다.


"가격이 올랐습니다. 수요가 늘어서..."


"얼마나?"


"3배."


터무니없었다. 하지만 다른 공급처는 없었다.


"2배까지는..."


"3배. 아니면 없습니다."


맥브라이드는 굴복했다. 또다시.



몇주 후,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찾아왔다. 김영호. 한국계 통신업체 대표. 그는 재벌들 중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50대 초반의 그는 전형적인 동아시아인의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서구의 차가운 합리성이 깃들어 있었다.


검은 정장은 몸에 완벽하게 맞았고, 구두는 먼지 하나 없이 반들거렸다. 이런 종말의 시대에도 그는 마치 이사회에 참석하러 가는 것처럼 단정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서류 가방을 쥐고 있는 모습에서는 미세한 긴장이 느껴졌다.


"도움을 드리려고요."


김영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계산이 숨어 있었다. 그가 앉을 때,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낡은 사무실 가구도 이제는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슈나이더 건설이 가진 구리선 재고가 필요합니다."


그가 펼친 서류에는 복잡한 네트워크 다이어그램이 그려져 있었다. 브뤼셀 전역을 연결하는 통신망 계획이었다. 하지만 핵심 구간에는 빨간 X표가 그려져 있었다. 슈나이더가 통제하는 구역이었다.


"그놈이 과한 대가를 요구한 모양이군."


"그 돼지새끼의 힘은 기업들 중에서도 독보적입니다. 장기적으로 좋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영호가 '돼지새끼'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그의 평소 점잖은 어조가 잠시 깨졌다. 그것은 단순한 비즈니스 경쟁자에 대한 적대감 이상이었다. 개인적인 원한이 섞여 있었다.


"동감하는 바요, 뭘 하면 되겠소?"


"제 계획에서 연극 한 번 해주시면 됩니다."


김영호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이미 모든 계산을 끝낸 자의 눈이었다.


"며칠 뒤 정수탑에 폭탄을 터뜨릴 겁니다."


"뭐라?"


맥브라이드는 귀를 의심했다. 정수 시설은 도시의 생명줄이었다. 하루 8,000리터의 물을 생산하는 그곳이 파괴되면, 생존자들은 일주일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진짜로 파괴하는 게 아닙니다. 복구 가능한 수준의 손상만 입힐 겁니다. 하지만 슈나이더는 모르겠죠."


"미친 짓이오."


"장군, 우리가 사는 세상 자체가 미친 세상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김영호의 말에는 차가운 진실이 담겨 있었다. 맥브라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이미 모든 규칙이 무너진 세상에서, 도덕을 지키려는 것은 사치일 뿐이라는 것을.


“그걸 빌미로 슈나이더를 압박할겁니다.”


“PMC가 있는데 협박에 굴할까?”


"그루버는 장기적으로 군사 독재를 원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장군님이 필요하죠. 너무 빨리 무너지면 혼란만 가중되니까."


"그래서?"


"제가 중재를 해보겠습니다. 대신..."


"대신?"


"통신 독점권. 10년."


거래였다. 맥브라이드는 고민했다. 하지만 당장 살아남으려면...


"5년."


“자꾸 반으로 후려치는 그 협상을 언젠가 고치시는 게 좋을겁니다. 특히나 이렇게 프랑스인들이 잔뜩 화난 상황 같은 위기에서 굳이 돕겠다고 찾아온 사람한테는요”


“….알겠네.”


김영호의 중재로 그루버와의 비밀 회동이 성사됐다. 장소는 중립 지역, 반쯤 무너진 성당이었다.


"장군,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그루버는 여유로웠다. 300명의 정예 PMC를 거느린 자의 여유였다.


"전 장군을 존경합니다. 진심으로."


"그래서?"


"하지만 현실을 봐야죠. 로스차일드와 슈나이더는 장군을 꼭두각시로 만들려 합니다."


"당신은 다르다?"


"전 군인입니다. 질서와 규율의 가치를 압니다. 장군님도 그렇죠."


그루버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동맹을 맺죠. 일시적이어도 좋습니다."


"조건은?"


"군사 작전 시 PMC 우선 투입권. 그리고... 전리품의 50%."

맥브라이드는 잠시 고민했다. 독과 같은 제안이었지만, 당장은 필요했다.


"좋소."


악수를 나눴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이것이 일시적 편의라는 것을.



며칠 뒤


"정수 시설이 고장났습니다!"


시설관리부의 보고였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김영호의 통신 감청팀이 수상한 통화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맥브라이드는 슈나이더를 소환했다. 사업가는 1시간 후에 나타났다. 검은 벤츠를 타고, 무장경호원 4명과 함께.


"장군, 무슨 일로..."


"앉으시오."


슈나이더의 양복은 깨끗했다. 향수 냄새까지 났다. 샤넬 No.5. 아마 마지막 재고일 것이다.


"무슨일 인지는 모르겠다만, 왜이리 급하십니까? 커피 드시겠습니까? 콜롬비아산입니다. 전쟁 전 수확분이죠."


도발이었다. 맥브라이드는 무시했다.


"정수 시설 고장. 당신 짓이오?"


"무슨 말씀을..."


"24시간 안에 고쳐지지 않으면, 당신 금고를 열 것이오."


슈나이더의 표정이 굳었다.


"그럴 권한이..."


"계엄령 하에서는 있소. 확인해보시겠소?"


맥브라이드는 이미 서류를 준비해두었다. 비상시 물자 징발권. 법적 근거는 완벽했다.


"하지만 저희가 가진 건 돈이 아니라 물자와 기술입니다. 그리고 그 물자를 지키는 건..."


"케르베로스. 알고 있소."


맥브라이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루버 씨도 오시라고 했소."


문이 열리며 PMC 대표가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무장한 경호원 둘이 있었다.


"장군이 부르셔서..."


"앉으시오. 둘 다 들으시오."


맥브라이드는 탁자에 서류를 던졌다.


"케르베로스와 새로운 계약서요. 정부 시설 경비. 월 5천 유로 상당의 물자."


그루버의 눈이 반짝였다. 현재 슈나이더가 주는 것보다 30% 많았다.


"흥미롭군요."


"잠깐, 우리 계약이..."


슈나이더가 끼어들었지만, 맥브라이드가 막았다.


"비즈니스요. 당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 아니오?"


침묵이 흘렀다. 슈나이더와 그루버가 시선을 교환했다. 계산이 오갔고, 잔뜩 화난 표정으로 슈나이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유대인 새끼가 각하를 제대로 홀린 모양이군요. 정수 시설은 내일 정상 가동됩니다."



어느날, 스미스 재무차관이 긴급 보고를 들고 왔다.


"공무원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로스차일드가 은행 직원 채용을 시작했습니다. 현 급여의 3배를 제시하고."


두뇌 유출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상의 국고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관료들을 회유하기에 편했다.


"몇이나 넘어갔소?"


"벌써 20명... 주로 경제 분야 전문가들입니다."


맥브라이드는 한숨을 쉬었다.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장군님."


스미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충성파를 규합하고 있습니다. 약 80명 정도..."


"조건은?"


"가족 보호와... 그리고 실권. 형식적인 자리가 아닌, 진짜 권한을요."


"구체적으로?"


"물자 배급 감독권. 지금은 재벌들이 맘대로 하고 있지만..."


스미스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맥브라이드는 동의했다.


"하시오. 하지만 조심해야 하오. 재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밀히 진행하겠습니다."


역시나, 아니다 다를까, 재벌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지상 건물 10개를 정화했습니다. 하지만 군에서 대가를 주지 않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습니다."


교묘한 여론전이었다. 시민들은 동요했다.


"왜 군대가 재건을 방해하는가?"


"장군이 권력을 지키려고 발전을 막는다!"


판덴베르크가 이를 이용했다.


"시민 평의회에 경제 분야 대표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슈나이더 씨가 적임자죠."


한편 케르베로스 보안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장군, 우리는 병력 300명과 장갑차 10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정규군보다 더 잘 훈련되어 있죠."


"요점을 말하시오."


"보급로 보호 계약을 맺읍시다. 월 비용은..."


그가 제시한 금액은 터무니없었다. 하지만 거절하면?


"유감이지만 더 이상 민간 수송대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겠군요."


협박이었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군대를 보급로 보호에 분산시킬 여유가 없었다. 


니콜라에너지에서 연락이 왔다.


"죄송합니다만, 이번 달 전기요금은 30% 인상됩니다."


"갑자기 왜?"


"원자재 비용이 올랐습니다. PMC 호위 비용도 추가되었고요."


온 사방에서 그를 공격한다. 온 사방에서, 국가의 모든 것이 그의 적만 같았다. 그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냥, 뭔가 일이라도 크게 하나 터져버리면 좋겠다…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평범한 화요일 오후로 시작되었다. 브뤼셀 중앙 광장에는 200명 정도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식량 배급의 불공정함에 대한 조용한 항의였다. 손으로 쓴 플래카드에는 "평등한 배급을", "프랑스인도 인간이다" 같은 구호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군중의 감정은 빠르게 끓어올랐다. 


"프랑스놈들을 추방하라!"

"우리 아이들이 굶고 있다!"

"배신자 맥브라이드!"


함성이 높아질수록 군중은 늘어났다. 300명, 500명, 그리고 2,000명. 마치 썩은 상처에서 고름이 터져 나오듯, 도시의 모든 불만과 증오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의 창문에서 사람들이 내다보고 있었다. 일부는 시위대에 동조하며 함성을 질렀고, 다른 일부는 불안한 눈빛으로 사태를 지켜보았다. 어린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부모의 치맛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


맥브라이드는 벙커의 지휘소에서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 커다란 상황판에는 시위대의 움직임이 붉은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었다. 화살표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이동 방향은 프랑스인 거주 구역을 향하고 있었다.


"경찰력을 투입합니다. 최소한의 무력만 사용하도록."


하지만 경찰은 이미 와해되어 있었다. 전쟁 전 브뤼셀 경찰 8,000명 중 살아남은 것은 200명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절반은 명령을 거부했다. 일부는 시위대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파란 제복을 입은 경찰이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초현실적이었다.


결국 군대가 투입되었다. 장갑차 3대와 무장 병력 100명. 그들은 방패와 곤봉, 최루탄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실탄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대치는 구 시청 앞에서 시작되었다. 시위대의 선두에는 돌과 화염병으로 무장한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고, 눈은 광기로 번득였다. 


"물러서라! 최후 경고다!"


확성기를 통한 경고는 야유와 욕설로 돌아왔다. 돌멩이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한 병사의 헬멧에 돌이 부딪혀 쨍 하는 소리를 냈다. 


최루탄이 발사되었다. 하얀 연기가 광장을 뒤덮었고, 사람들이 기침을 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격렬해졌다.


그때였다.


탕!


첫 발포. 누가 먼저 쏘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시위대 측에서는 군인이 먼저 쏘았다고 주장했고, 군 측에서는 시위대 중 무장한 자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누가 먼저였든, 결과는 같았다.


총성이 울리자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무탄과 실탄이 뒤섞여 날아다녔고, 비명과 고함소리가 뒤엉켰다. 사람들이 쓰러졌다. 붉은 피가 회색 아스팔트 위에 흥건히 고였다.


한 젊은 여성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녀의 금발은 피로 물들었고, 파란 눈은 하늘을 향해 멍하니 열려 있었다. 옆에서 그녀를 부축하려던 노인도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광장 한구석에서는 10대 소년이 다리에 총을 맞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미친 듯이 달려와 아들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울부짖음은 총성보다도 더 끔찍하게 들렸다.


진압 작전은 30분 만에 끝났지만, 그 30분은 영원처럼 길었다. 연기가 걷히고 난 뒤 광장에는 시체와 부상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사망 23명, 부상 87명. 숫자로는 단순했지만, 그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이웃이었다.


구급차가 없었다. 부상자들은 손수레와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이라고 해봐야 임시로 만든 야전 병원이었지만. 의약품은 턱없이 부족했고, 많은 부상자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날 밤, 브뤼셀은 울었다. 곳곳에서 곡소리가 들렸고, 복수를 외치는 함성이 메아리쳤다. "브뤼셀의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게 될 이 사건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재벌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질서 회복을 위해 PMC 투입이 필요합니다."


사면초가. 맥브라이드는 고립되었다.


“도와드릴까요?”


김영호의 연락이었다. 악마의 손길임이 분명했지만, 잡아야했다.


“뭐든 해주게, 제발”


“이번 요금은 좀 많이 비쌀겁니다. 고객님.”


“못들었나! 뭐든 해달라고!”


다음날 새벽 5시. 갑자기 모든 무전기에서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전파 방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그것이 음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련 국가였다.


"Сою́з неруши́мый респу́блик свобо́дных, Сплоти́ла наве́ки Вели́кая Русь..."


장엄한 합창이 브뤼셀 전역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설마 러시아가?


곧이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단호한, 하지만 이상하게도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타냐 드로즈도프스키요, 모스크바에서 우리는 지금 살아있소, 붉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이 방송을 듣는 이는 누구든 이곳으로 온다면 우리의 따뜻한 환대를 받을 것이오."


통역관이 황급히 불려왔다.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이든 벨기에인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번역했다.


"그들은... 그들은 모스크바가 건재하다고 합니다. 소비에트 정부가 재건되었고, 인민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포가 순간 브뤼셀을 하나로 만들었다. 소련의 부활. 그것은 단순한 생존자 집단의 존재 이상의 의미였다. 이념의 부활, 냉전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이다.


회의실은 순식간에 가득 찼다. 맥브라이드, 시라크, 판덴베르크, 그리고 재벌들까지. 피의 화요일로 갈라졌던 그들이 하나의 테이블에 모였다.


"일단 정찰대를 보내야 합니다."


맥브라이드의 제안에 이견이 없었다. 50명의 연합 정찰대가 구성되었다. 프랑스군에서 15명, 브뤼셀군에서 20명, PMC에서 15명. 각 세력의 정예들로 구성된 이 부대는 사상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연합군'이었다.


정찰대장은 뤼프케 소령이 맡았다. 출발 전, 그는 맥브라이드와 단둘이 만났다.


"장군님, 만약 그들이 정말로..."


"알고 있네. 하지만 알아야 하지 않겠나."


뤼프케는 경례를 올렸다. 그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다.



2주 후, 정찰대가 돌아왔다. 아니, 정확히는 정찰대의 절반만이 돌아왔다. 25명. 나머지는 돌아오지 못했다.


생존자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군복은 찢어지고 피로 물들어 있었고,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육체적 상처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들의 눈에 서린 공포였다.


"보고하십시오, 소령."


뤼프케의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다. 평소의 차가운 침착함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베를린 부근에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은... 지옥입니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폴란드 국경을 넘어 50킬로미터쯤 갔을 때, 첫 번째 표지판을 봤습니다. 해골이 걸려 있었고, 독일어로 '순수한 피만이 통과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네오나치. 독일 극우파의 생존자들이 베를린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종 청소를 시작했고, '불순한' 자들을 찾아 학살하고 있었다.


"우리 정찰대의 알제리계 병사 둘이 먼저 잡혔습니다. 그들은... 그들은 산 채로..."


뤼프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생존자가 대신 증언했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아직 살아있는 상태로. 구출하려 했지만, 저격수들이..."


그들이 찍어온 사진들이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시체들이 가로등에 매달려 있었고, 건물 벽에는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져 있었다. 거리에는 무장한 스킨헤드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병력은?"


"최소 5,000명. 중화기도 상당수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전차도 몇 대 봤습니다."



"통합 평의회"가 구성되었다. 군사 분야는 맥브라이드, 민간 분야는 시라크와 판덴베르크가 공동 대표를 맡았다. 재벌들도 참여했지만, 의결권은 제한되었다.


첫 번째 성과는 주거 문제 해결이었다. 슈나이더 건설이 정화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시민 감시단이 함께했다.


"3개월 안에 지상 건물 50개를 정화하겠습니다."


슈나이더는 약속을 지켰다. 물론 대가를 톡톡히 받았지만.


김영호의 통신망도 복구되기 시작했다. 단거리 무전 네트워크가 구축되면서 보안이 크게 개선되었다.


"다음 달에는 베를린까지 통신이 가능할 것입니다."


베를린과의 접촉은 양면의 칼이었다. 그들의 혼란이 브뤼셀로 번질 위험도 있었지만, 동시에 거래의 기회이기도 했다.


"베를린에는 의약품 생산 시설이 있습니다. 우리는 식량이 남아돌고요."


마리 2세의 제안으로 조심스러운 교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11월이 되자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첫 눈이 내렸을 때, 아이들은 잠시 기뻐했지만, 어른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겨울은 또 다른 적이었다.


"난방을 제한해야 합니다."


에너지 담당 니콜라 테슬라 3세의 보고는 예상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충격적이었다. 그는 유명한 발명가의 먼 후손이었지만, 조상과 달리 그에게는 기적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다.


"하루 4시간."


영하 20도의 겨울에 하루 4시간 난방. 그것은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들에게는.


"다른 방법은?"


맥브라이드의 질문에 테슬라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매부리코가 신경질적으로 씰룩거렸다.


"있습니다. 인구를 줄이면..."


"그만."


맥브라이드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그 생각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며칠 후, 익명의 전단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입을 줄여야 한다."

"노인들의 희생이 젊은이들을 살린다."

"자연 선택의 법칙."


처음으로 '자비로운 죽음'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지만, 어두운 구석에서는 속삭임이 퍼졌다.


첫 번째 한파가 닥쳤을 때, 지하 벙커의 온도는 영하 5도까지 떨어졌다. 사람들은 모든 옷을 껴입고도 추위에 떨었다. 담요는 금보다 귀했고, 난로 주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일어났다.


그날 밤, 첫 번째 동사자가 나왔다. 87세의 마리아 할머니였다. 그녀는 담요를 손녀에게 주고 자신은 추위 속에서 잠들었다. 영원히.


아침이 되자 시체가 세 구 더 발견되었다. 모두 노인들이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방치된 것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의무관이 맥브라이드를 찾아왔다. 그의 하얀 가운은 이제 회색으로 변해 있었고, 청진기는 차가운 금속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장군님, 이대로는 한 달 안에 500명이 죽습니다."


"뭐가 필요한가?"


"연료, 담요, 그리고 최소한의 칼로리. 지금 배급량으로는 체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늘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맥브라이드는 자신의 담요를 의무실로 보냈지만, 그것은 바다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과 같았다.


그루버가 거들었다.


"PMC는 명령만 내리면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겨울, 사망자는 712명이었다. 많은 숫자였다. 맥브라이드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봄을 맞이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장군님! 북쪽 20킬로미터 지점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를 발견했습니다!"


정찰병의 보고는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다.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100헥타르의 땅.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조사 결과, 그곳은 지형적 특성상 낙진이 비껴간 곳이었다. 주변의 언덕이 방패 역할을 했고, 바람의 방향도 우호적이었다. 자연이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감자와 밀을 심을 수 있습니다."


농업 전문가의 보고에 환호성이 터졌다. 하지만 곧 현실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누가 관리할 것인가?"


회의는 팽팽했다. 정부는 공공의 이익을 주장했고, 재벌들은 효율성을 내세웠으며, 시민 대표들은 공정한 분배를 요구했다.


결국 시라크의 중재안이 채택되었다. 


"공동 관리 위원회를 만듭시다. 정부, 재벌, 시민 대표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처음으로 진정한 협력이 이루어졌다. 슈나이더 건설이 장비를 제공했고, 군대가 경비를 섰으며, 시민들이 노동력을 제공했다.


파종의 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왔다. 프랑스인과 벨기에인이 나란히 서서 씨앗을 뿌렸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흙을 만졌고, 노인들은 눈물을 흘렸다.


"희망을 심는 겁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진부한 표현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진실이었다.


여름이 되자 감자 순이 파릇파릇하게 올라왔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밭을 찾아가 작물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식량 이상의 의미였다. 미래가 있다는 증거였다.


첫 수확일. 200톤의 감자가 수확되었다. 예상보다 많은 양이었다. 그날 밤, 브뤼셀에서는 전쟁 후 처음으로 축제가 열렸다.


광장에는 모닥불이 피워졌고, 사람들은 구운 감자를 나눠 먹었다. 누군가가 아코디언을 꺼냈고,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왔다. 프랑스 샹송과 벨기에 민요가 번갈아 불렸다.


한 프랑스 청년과 벨기에 아가씨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색했지만, 아름다웠다. 곧 더 많은 사람들이 춤판에 합류했다. 


맥브라이드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뤼프케가 다가와 나란히 섰다.


"오래 못 갈 겁니다."


뤼프케의 현실적인 지적이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네, 오늘 밤만큼은."


두 군인도 잠시 현실을 잊었다. 저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쟁 후 태어난 아이들은 이전 세상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세상의 전부였다.



축제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베를린에서 사절단이 옵니다."


네오나치의 공식 접촉이었다. 이들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악마와는 대화할 수 없다!"


시라크의 단호한 반대였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루버의 현실론이었다.


결국 제한적 접촉이 결정되었다. 중립 지역에서, 무장 해제 상태로, 1시간으로 제한된 회담.


베를린 대표단이 도착했을 때, 긴장감이 감돌았다. 세 명의 남자들은 모두 금발에 파란 눈이었고, 검은 가죽 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들의 완장에는 변형된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간단하다."


대표단의 수장인 한스 뮐러가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화상 자국이 있었고, 오른쪽 귀는 반쯤 녹아내려 있었다. 전쟁의 상처였지만, 그의 눈빛은 광신으로 불타고 있었다.


"복종이다. 완전한."


그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명령처럼 떨어졌다.


"그건 불가능하오."


맥브라이드가 즉답했다. 하지만...


"조건에 따라 협력은 가능하죠."


슈나이더가 끼어들었다. 그의 개입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맥브라이드는 충격을 받았지만,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무슨..."


"현실적이어야죠, 장군."


슈나이더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이미 계산을 끝낸 듯했다. 베를린의 힘, 브뤼셀의 약점,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


뮐러가 슈나이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파란 눈이 건설업자를 평가하듯 훑어보았다.


"당신은... 순수한가?"


인종을 묻는 것이었다. 슈나이더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독일계 4대손입니다. 할아버지는 베를린 출신이었죠."


"흥미롭군."


뮐러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것을 미소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재건을 원한다. 순수한 유럽의 재건. 열등한 자들을 제거하고, 우월한 자들만의 낙원을."


"그 '열등한 자'에는 누가 포함되오?"


시라크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당신들은 이미 알고 있을것이오 유대인, 슬라브인, 그리고..."


뮐러의 시선이 김영호에게 향했다.


"동양인."


김영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쥐는 것을 맥브라이드는 놓치지 않았다.


회담은 결렬되었다. 하지만 씨앗은 뿌려졌다. 재벌들 중 일부는 베를린과의 타협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프랑스군과 브뤼셀군 사이의 갈등은 날로 심화되었다. 식당에서는 따로 앉았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서로 피했다. 작은 충돌이 잦아졌다.


"왜 우리가 지하에서 썩어야 합니까?"


뒤부아 소장의 항의는 정당했다. 프랑스군은 대부분 지하 벙커에 수용되어 있었지만, 브뤼셀군은 상대적으로 나은 지상 건물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오."


맥브라이드의 대답은 공허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하지만 바꿀 힘이 없었다.


"2주 내에 개선하겠소."


빈 약속이었다. 뒤부아도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경멸이 서려 있었다.


그날 밤, 프랑스군 일부가 무단이탈했다. 15명이 무기를 들고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모스크바로, 어쩌면 죽음으로.


"추격하시겠습니까?"


"놔둬라."


맥브라이드는 지쳤다. 붙잡아 봤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강제로 붙들어둔들 언젠가는 폭발할 것이다.


보고서가 쌓여갔다. 식량 부족, 의약품 고갈, 연료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의 부족.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이 도시를 짓누르고 있었다.



결국 맥브라이드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재벌 연합회를 공식 인정한다."


발표가 나가자 반응은 엇갈렸다. 재벌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었고, 시민들은 배신감을 느꼈다. 군부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사실상 항복입니다."


한 젊은 장교가 불만을 토로했다.


"생존입니다."


뤼프케가 차갑게 대답했다.


회의실에서 맥브라이드는 재벌들과 마주 앉았다. 이제 그들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권력자였다.


"대신 조건이 있다."


"말씀하시죠."


로스차일드가 우아하게 대답했다. 그의 손가락이 금화를 만지작거렸다.


"군사 작전권은 절대 양보 못한다. 그리고 최소 생존권 보장."


"최소 생존권이란?"


"하루 1,200칼로리. 1인당 1리터의 물. 최소한의 의료."


재벌들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숫자가 오갔다. 인간의 생명이 숫자로 환산되는 순간이었다.


"동의합니다."


너무 쉬운 동의였다. 맥브라이드는 불안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또요?"


슈나이더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베를린과의 협상. 그것만은 정부가 주도한다."


"그건..."


"양보할 수 없는 선이오. 이것마저 뺏기면, 우리는 그냥 기업 도시가 되는 거요."

긴 침묵이 흘렀다. 재벌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미세한 신호들이 오갔다.


"좋습니다. 일단은."


'일단은'. 그 단어가 맥브라이드의 가슴에 못처럼 박혔다.



정기보고일, 스미스 재무차관의 보고는 건조했다. 숫자 뒤에 숨은 비극을 애써 무시하려는 듯.


"주요 사인은?"


"질병 312명, 영양실조 203명, 폭력 156명, 자살 89명, 기타 132명."


자살. 그 숫자가 늘고 있었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누군가는 목을 맸고, 누군가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으며, 누군가는 조용히 약을 먹었다.


"자살 방지 대책은?"


"인력이 부족합니다. 심리 상담사는 단 3명뿐입니다."


3명. 16,000명의 생존자 중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은 수천 명에 달했지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3명뿐이었다.


맥브라이드는 창밖을 보았다. 회색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방사능에 오염된 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베를린 동향은?"


"병력을 8천에서 1만으로 늘렸습니다. 그리고..."


정보 장교가 망설였다.


"그리고?"


"우리 내부에 협력자가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배신자. 또 다른 암세포였다. 누구든 될 수 있었다. 굶주린 병사, 욕심 많은 관료, 심지어는 절망에 빠진 민간인까지.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순찰 일정이 새고 있습니다. 지난주 식량 수송대가 습격받은 것도..."


"조사하라. 조용히."


하지만 조사할 인력도, 시간도 부족했다.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날 밤, 맥브라이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장군의 방이라고는 하지만, 6평짜리 좁은 공간이었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침대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벽에 걸린 작은 거울을 보았다. 거기 비친 남자는 낯설었다. 한때 건장했던 체구는 야위었고, 한때 날카로웠던 눈은 흐릿했다. 갈색 머리에는 흰 머리가 듬성듬성 섞여 있었고, 이마의 주름은 깊은 골짜기처럼 패여 있었다.


3개월 전보다 10년은 늙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100년은 늙은 것 같았다. 영혼이 늙어버린 것이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권총이 있었다. 글록 19. 탄창은 가득 차 있었다. 15발. 자신을 위해서는 한 발이면 충분했다.


손이 권총으로 향했다가 멈췄다.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 날도.


창밖에서 총성이 들렸다. 한 발. 둔탁한 권총 소리였다. 누군가는 오늘 그 선택을 했다.

맥브라이드는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균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버틴다. 그것이 전부였다.


브뤼셀은 살아남았다. 간신히, 위태롭게, 하지만 분명히 꾸역꾸역 그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거리에는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절망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었다. 숨을 쉬고, 걷고, 때로는 웃기도 했다.


완벽한 승리는 없었다. 재벌들은 더 강해졌고, 불평등은 더 심해졌으며, 미래는 더 불확실해졌다. 하지만 완전한 패배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태어났고, 감자는 여전히 자랐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희망을 품었다.


맥브라이드는 벙커의 상황실에서 지도를 보고 있었다. 브뤼셀, 작은 점 하나. 주변에는 적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동쪽의 네오나치, 더 동쪽의 네오나치, 그리고 내부의 무수한 적들.


하지만 그 작은 점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희미하게, 깜빡거리며, 하지만 꺼지지 않고.

"장군님, 오늘 일정입니다."


뤼프케가 들어왔다. 여전히 충실한 부관이었다.


"오전 9시, 식량 배급 위원회. 10시, 재벌 연합회와의 정례 회의. 11시..."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것이 생존의 증거였다. 매일 같은 투쟁, 같은 타협, 같은 절망.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었다.


문득 맥브라이드는 깨달았다. 이것이 새로운 세계의 질서라는 것을. 잿빛으로 물든,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생존만이 유일한 도덕인 세계.


하지만 그래도 세계는 존재했다. 인류는 존재했다. 그리고 내일도 존재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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