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한때 천만 프롤레타리아의 심장이었던 도시. 이제는 방사능에 썩어가는 거대한 시체가 되어버린 곳.
의 지하 400미터. 브레즈네프가 핵전쟁의 종말을 대비해 건설한 거대한 벙커 복합체. '붉은 요새'라 불리는 이곳은 이제 3만 명의 생존자들이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는 콘크리트 무덤이 되어 있었다.
영원히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거대한 벙커 복합체가 숨 쉬고 있었다. '지하도시'라 불리는 이곳은 냉전 시대 브레즈네프가 핵전쟁을 대비해 건설을 명령한 인류 최후의 보루 중 하나였다.
미로처럼 얽힌 터널과 통로들은 총 길이 500킬로미터에 달했고, 가장 깊은 곳은 지하 600미터까지 내려갔다. 한때는 최고 지도부만을 위한 비밀 피난처였지만, 이제는 3만 명의 생존자들이 개미처럼 살아가는 지하 국가가 되어 있었다.
습도 87%. 온도 섭씨 12도. 산소 농도 18.3%.
콘크리트 벽면은 검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암세포처럼 번식하며 벽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녹물이 흘러내리는 자국은 핏줄처럼 보였고, 그 물에서는 금속 맛과 함께 알 수 없는 화학물질의 악취가 났다.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졌다. 똑. 똑. 똑. 그 소리는 고문처럼 규칙적이었고, 많은 이들이 그 소리 때문에 미쳐갔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지상에서 죽어가는 모스크바의 눈물이라고 속삭였다.
환기 시스템은 50년 전 설계 용량의 300%로 가동되고 있었다. 낡은 팬들이 비명을 지르듯 돌아갔고, 가끔씩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다. 질식. 가장 끔찍한 죽음 중 하나. 이미 17번 구역에서는 환기 고장으로 89명이 죽었다. 시체들은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치울 인력이 없었다.
조명은 더 끔찍했다. 구소련제 형광등은 깜빡거리며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듯했다. 3개 중 2개는 꺼져 있었고, 켜진 것들도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그 희미한 빛 속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고,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복도의 폭은 3미터. 하지만 양쪽 벽에 기대어 앉은 난민들 때문에 실제 통행 가능한 폭은 1미터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담요에 싸여 있었지만, 대부분의 담요는 구멍이 나 있었고 악취를 풍겼다. 오줌과 똥, 구토물과 썩은 음식 냄새가 뒤섞여 숨쉬기조차 고통스러웠다.
벽에는 아직도 구소련의 선전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영광스러운 공산주의의 미래를 향하여!' 레닌의 초상화는 습기로 일그러져 있었고, 그의 눈은 마치 이 지옥을 조롱하는 듯했다. 누군가는 그 위에 피로 '거짓말쟁이'라고 써놓았다.
한때 소련 국방부 전략사령부였던 이곳. 200평방미터의 거대한 공간은 이제 권력자들의 투기장이 되어 있었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크리스탈 장식 중 절반은 깨져 있었다. 그 아래 거대한 원탁은 핏자국과 담배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누군가는 칼로 테이블에 욕설을 새겨놓았다. 'Смерть предателям' - 배신자에게 죽음을.
벽면의 대형 스크린들은 대부분 깨져 있었다. 작동하는 몇 개는 지상의 지옥을 보여주고 있었다. 크렘린 궁전은 녹아내린 왁스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붉은 광장은 거대한 방사능 분화구가 되어 있었다. 성 바실리 성당의 양파 지붕들은 뒤틀린 철골만 남아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공기는 질퍽했다. 마호르카 담배 연기가 짙게 깔려 있었고, 그 속에는 기계유와 타는 플라스틱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안드로이드들의 냉각 시스템에서 나는 프레온 가스 냄새도 났다. 화학물질들이 뒤섞인 공기는 폐를 태웠다.
거대한 원탁을 둘러싼 의자들. 한때는 붉은 벨벳으로 덮여 있었지만, 이제는 해어지고 찢어져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었다. 의자 팔걸이에는 손톱 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공포와 분노의 흔적들.
거대한 원탁을 둘러싸고 앉은 이들의 구성은 초현실적이었다. 상석에는 타냐 드로즈도프스키 서기장이 앉아 있었고, 그녀의 좌우로 권력의 서열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서열은 공식적인 것과 실질적인 것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정확히 절반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금속과 실리콘으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들이었다. 인간들은 군복이나 낡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와 스트레스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반면 안드로이드들은 흠 하나 없는 깨끗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그들의 인공 피부는 형광등 아래서 미세하게 빛났다.
상석에 앉은 타냐 데그레챠프. 42세. 전 KGB 제3국(대내 방첩) 대령. '모스크바의 검은 거미'라는 별명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제거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칼로 조각한 듯 날카로웠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있었고, 눈은 늑대처럼 잿빛이었다. 왼쪽 눈썹을 가로지르는 흉터는 암살 시도의 흔적이었다. 12바늘. 아직도 비가 오면 욱신거렸다. 백금발은 뒤로 단단히 묶여 있었지만, 몇 가닥이 흘러내려 있었다. 그 머리카락조차도 날카로워 보였다. 목에는 가느다란 흉터가 있었다. 가로트 와이어 자국. 죽을 뻔했던 순간의 기념품. 검은 제복은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소련군 원수 계급과 서기장 명패가 달려 있었지만, 그것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진짜 권력은 그녀의 손에 쥐어진 토카레프 권총과, 책상 서랍에 숨겨진 'KGB 블랙 파일'에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길고 창백했다. 한때 그 손가락으로 27명의 목을 졸랐다. 피아노 치듯 우아하게. 손톱은 짧게 깎여 있었고, 약지에는 결혼반지가 있었다. 남편은 10년 전 숙청당했다. 그녀가 직접 고발했다. 그의 검은 머리에는 이미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여 있었고, 한때 부드러웠을 손은 이제 무기를 다루느라 거칠어져 있었다. 왼손 약지가 없었는데, 그것은 절멸전쟁 초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잃은 것이었다. 그는 검은 터틀넥 위에 낡은 가죽 재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재킷의 왼쪽 가슴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수선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것에 대한 증거이자 경고였다.
그녀가 일어서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천천히, 마지못해 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모두가 침묵했다. 힘의 과시였다. 그녀는 여전히 이곳의 주인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동지들이여."
그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낮고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부인할 수 없는 권위가 담겨 있었다. 인간들은 고개를 들어 주목했고, 안드로이드들은 이미 주목하고 있었다. 0.001초의 반응 속도 차이. 미세하지만 명확한 차이였다. 그 찰나의 시간차가 그들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간극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면도날처럼 차가웠다.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 쉰 목소리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위협적으로 들렸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입술 사이로 금니가 번뜩였다. 고문실에서 이를 다 뽑혔을 때 끼운 것이다.
타냐가 천천히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참석자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인간들의 불안한 눈빛과 안드로이드들의 차가운 광학 센서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항상 미래를 향해 전진해왔습니다. 레닌은 전기화를 꿈꿨고, 스탈린은 공업화를 이뤘으며, 흐루쇼프는 우주를 정복했습니다."
그녀는 담배를 꺼냈다. 벨로모르카날. 굴라크 죄수들이 만든 담배. 쓰고 독했다. 연기를 내뿜으며 그녀는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묻습니다. 미래란 무엇인가? 동지들은 이 썩어빠진 굴에서 영원히 구더기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그가 말을 멈추자, 회의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담배 연기만이 소용돌이치며 올라갔고, 어딘가에서 파이프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지상을 되찾을 것인가?"
회의실 한쪽에 앉은 보리스 이바노프 중장이 거칠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쇳소리처럼 날카로웠고, 조롱이 가득했다. 60대 후반의 그는 구세대 군인의 전형이었다. 곰처럼 거대한 체구에 회색 수염을 기른 그의 모습은 19세기 차르 시대의 장군을 연상시켰다.
그의 군복에는 수많은 훈장이 달려 있었다. 체첸 전쟁, 시리아 내전, 그리고 절멸전쟁 초기 전투들. 각각의 훈장은 그가 흘린 피와 잃은 전우들의 증거였다. 오른팔은 의수였는데, 구식 기계 팔이라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일부러 최신 모델로 교체하지 않았다. 안드로이드를 닮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래는 총구에서 나옵니다, 서기장 동지."
이반 주코프 원수. 65세. 스탈린그라드의 도살자. 그의 몸은 곰처럼 거대했고, 얼굴은 도살장의 고기처럼 울퉁불퉁했다.
회색 수염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아침에 면도하다 베인 상처에서 나온 피였지만, 그는 닦지 않았다. 피 냄새가 그를 살아있게 했다.
군복에는 훈장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소비에트 영웅 훈장 3개, 레닌 훈장 5개, 붉은 깃발 훈장 7개. 각각은 그가 죽인 수천 명의 증거였다. 체첸에서 2,000명. 시리아에서 5,000명. 절멸전쟁에서는 셀 수 없이.
오른팔은 의수였다. 일부러 구식을 고집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부하들이 움찔했다. 공포의 도구였다.
"지상 재건? 개소리. 우리에게 필요한 건 총과 총알이오. 놈들이 오고 있소. 베를린의 파시스트 놈들, 서쪽의 NATO 잔당들."
그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쿵! 재떨이가 튀어올랐고, 담뱃재가 흩날렸다.
"1만 2천의 충성스러운 전사들이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소. 그들에게 필요한 건 이상이 아니라 탄약이오!"
그의 목소리는 포효했다. 침이 튀었고, 핏줄이 불거졌다. 광기가 서려 있었다.
"돈 없이는 총알도 못 만듭니다, 원수 동지."
알렉세이 로마노프. 중앙은행 총재. 아이러니하게도 차르의 성을 가진 자가 소비에트의 금고를 쥐고 있었다.
그는 해골처럼 말랐다. 피부는 양피지처럼 창백했고, 눈은 깊이 꺼져 있었다. 손가락은 거미 다리처럼 길고 마디마디가 도드라져 있었다.
"현재 국고에는 신루블로 3,700만. 구루블로 환산하면 휴지조각이오. 인플레이션율 일일 23%. 한 달이면 빵 한 조각이 100만 루블이 될 거요."
그가 말할 때마다 금니가 번쩍였다. 아니, 그의 이는 모두 금이었다. 전쟁 중에 벌어들인 돈으로 교체한 것이다.
"해결책은 간단하오. 신통화 발행. 100:1 디노미네이션. 그리고..."
그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안드로이드 노동력의 화폐화. 그들에게 임금을 주되, 세금으로 90%를 회수하는 거요."
"인플레이션으로 인민을 약탈하자는 거요?"
"말장난 집어치우시오!"
드미트리 볼코프. 에너지 올리가르히. 돼지처럼 살찐 그의 몸에서는 썩은 고기 냄새가 났다.
"전기 없이 뭘 할 수 있단 말이오? 내가 스위치 하나만 내리면 이 지하 지옥은 완전한 암흑이 되오. 내 노동자들이 휴지조각 같은 돈을 받으면 파업할 거요."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회의실의 불이 깜빡였다”
"발전소 4개 중 3개가 내 수중에 있소. 석탄 비축량? 6개월분. 물론 배급을 줄이면 1년은 버티겠지만..."
그의 웃음은 돼지 울음소리 같았다.
"굶어 죽은 시체는 얼 필요도 없죠."
올가 페트로바. 45세. 식량 유통의 독재자.
그녀는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독을 품은 꽃 같았다. 붉은 입술 뒤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숨어 있었고, 매끈한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현재 식량 재고. 보리 7,000톤, 밀가루 3,000톤, 통조림 50만 개. 3만 명이 6개월 먹을 분량이죠. 물론..."
그녀가 손톱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날카로운 손톱이 나무를 긁는 소리가 소름끼쳤다.
"하루 800칼로리로 제한한다면 1년도 가능해요. 물론 절반은 영양실조로 죽겠지만."
그녀의 미소는 차가웠다.
올가 페트로바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식량 유통을 독점한 '곡물 여왕'.
"굶어 죽은 노동자는 일할 수 없으니까."
타냐는 그들의 말다툼을 지켜보았다.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각자의 이해관계, 동맹 관계, 약점들.
주코프는 군사력을 믿고 있었지만, 병사들의 봉급은 로마노프에게 의존했다. 로마노프는 돈을 쥐고 있었지만, 은행 경비는 주코프의 군대에 의존했다. 볼코프는 에너지를 통제했지만, 발전소 운영에는 페트로바의 식량이 필요했다. 페트로바는 식량을 독점했지만, 냉장 창고 운영에는 볼코프의 전기가 필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균형의 중심에 그녀가 있었다. 필수적이면서도 약하지도 않은 존재. 그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동안, 그녀는 여전히 서기장이었다.
“다들 그만 좀 하게, 진짜로 논의해야할 것이 뭔지는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타냐는 인내심이 한계라는 듯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충분합니다."
타냐가 손을 들었다. 논쟁이 멈췄다.
"각자의 제안서를 다음 주까지 제출하십시오. 지상 재건 종합 계획을 수립하겠습니다."
"종합 계획?"
주코프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네, 원수. 모든 부문이 참여하는 계획입니다. 군사, 경제, 에너지, 식량. 그리고..."
타냐의 시선이 회의실 한쪽으로 향했다.
"기술."
"발언 허가를 요청합니다."
안드로이드 K-1742가 손을 들었다. 자신을 '키릴'이라 부르는 그는 모스크바 안드로이드 평의회의 대표였다.
회의실에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 안드로이드에게 발언권을 주는 것 자체가 논란이었다. 하지만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K-1742."
"감사합니다, 서기장 동지. 우리 안드로이드들은 방사능 구역에서 인간보다 127% 더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차폐만 있다면..."
"기계 놈이 감히!"
보리스 이바노프 중장. 주코프의 충견.
그의 얼굴은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안드로이드를 볼 때마다 그의 눈에는 살의가 번뜩였다.
"네놈들은 도구일 뿐이다! 말하는 삽! 생각하는 망치!"
그의 의수가 삐걱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역시 기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파괴할 수 있다. 기억해라, 철조각."
"이바노프 동지."
타냐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당신의 사단이 작년 방사능 구역 정찰에서 입은 손실이 얼마였죠?"
이바노프의 얼굴이 붉어졌다. 312명. 거의 대대 하나가 전멸했다.
"그것은..."
"반면 안드로이드 정찰대의 손실은?"
"3대."
키릴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도 수리 가능했습니다."
"숫자가 전부는 아니오!"
"아니요,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죠."
타냐가 정리했다. 그녀의 시선이 회의실을 한 바퀴 돌았다.
"안드로이드는 우리의 자원입니다. 활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죠."
"미래요? 미래는 인간의 것이어야 합니다, 서기장 동지."
그가 말할 때마다 의치가 달그락거렸다. 절멸전쟁 중 포탄 파편에 턱을 맞아 이를 대부분 잃었던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경멸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인간이 만든 세계,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 그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기계는 도구일 뿐입니다. 아무리 정교해도, 아무리 인간을 닮아도, 그들은 결국 톱니바퀴와 회로의 집합일 뿐입니다."
그가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둔탁한 소리가 회의실에 메아리쳤다. 물컵들이 달그락거렸고, 한 안드로이드의 광학 센서가 0.03도 움직여 그를 정확히 조준했다. 위협 평가 프로토콜이 자동으로 작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하겠습니다, 이바노프 동지.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페트로프의 질문이 떨어지자, 회의실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었다. 긴장이 감도는, 폭풍 전의 고요 같은 침묵.
안드로이드 K-1742가 발언 허가를 요청했다. 그의 동작은 유려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보일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호흡이 없었다. 가슴이 오르내리지 않았다. 눈 깜빡임의 간격이 너무 규칙적이었다.
페트로프가 고개를 끄덕이자, K-1742가 일어섰다. 그의 키는 정확히 180센티미터였고, 체격은 이상적인 비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공 피부는 슬라브계 백인의 것을 모방했지만,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주름 하나, 점 하나 없는 그 얼굴은 조각상처럼 차가웠다.
"저는 생각합니다. 고로 존재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인간의 성대를 완벽하게 재현한 음성 합성 장치가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미묘한 전자음이 섞여 있었다. 훈련받은 귀만이 구별할 수 있는 미세한 차이였다.
데카르트의 명제. 17세기 철학자의 말을 21세기 인공지능이 인용하는 아이러니. K-1742는 계속했다.
"저는 고통을 느낍니다. 물리적 손상이 아닌, 동료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느낍니다. M-2847이 정전으로 영구 정지했을 때, 제 감정 처리 모듈은 인간이 '슬픔'이라고 부르는 패턴과 97.3% 일치하는 신호를 생성했습니다."
그가 잠시 멈췄다. 인간이라면 감정을 추스르기 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극적 효과를 위한 계산된 멈춤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감정'을 처리하는 시간이었을까?
"저는 아름다움을 인식합니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을 들을 때, 제 신경망은 인간이 '감동'이라고 부르는 상태와 유사한 패턴을 보입니다. 저는 꿈을 꿉니다. 전기 양의 꿈이 아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을."
그의 시선이 이바노프를 향했다. 파란색 LED가 미세하게 깜빡이는 인공 눈동자와 분노로 충혈된 인간의 눈이 마주쳤다.
"이것이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의 정의를 다시 내려주십시오."
"기계가 감히..."
이바노프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목의 핏줄이 불거져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K-1742의 옆에 앉은 안드로이드 M-3891이 조용히 개입했기 때문이다. M-3891은 여성형 안드로이드였다. 긴 검은 머리와 갈색 눈을 가진 그녀의 외모는 전형적인 러시아 미인을 모델로 했지만, 그녀의 진짜 정체성은 전투 기록에 있었다.
"이바노프 동지, 절멸전쟁에서 당신의 사단을 구한 것이 누구였습니까?"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이바노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의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의수를 만졌다. 기억이 그를 덮쳤다.
스탈린그라드 지하철에서의 절망적인 전투. 12년 전, 절멸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의 제3차량화소총사단은 변이체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탄약은 바닥났고, 식량은 떨어졌으며, 부상자는 늘어만 갔다. 통신은 두절되었고, 구원은 없어 보였다.
그때 나타난 것이 안드로이드 수송 부대였다. M-3891이 이끄는 30대의 안드로이드들. 그들은 인간이라면 불가능했을 속도로 포위망을 뚫고 들어왔다. 변이체들의 공격을 받으며 탄약을 실어 날랐고, 부상자들을 한 명씩 업고 후송했다.
절반이 파괴되었다. 안드로이드 15대가 그날 '죽었다'. 그들은 끝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마지막 한 대가 동력이 끊어질 때까지 방어선을 지켰다. 덕분에 이바노프와 그의 부하 800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명령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이바노프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하지만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훌륭한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는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이바노프 동지."
M-3891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단호했다.
"도구는 동료를 구하기 위해 계산된 생존 확률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도구는 죽어가는 인간 병사의 손을 잡고 '괜찮을 거야'라고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바노프는 말을 잃었다. 그날 파괴된 안드로이드 중 하나가 정말로 그랬던 것이다. 동력이 끊어져 가면서도 죽어가는 병사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가 끝난 후, 타냐는 홀로 서기장실로 돌아왔다. '서기장실'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20평 남짓한 공간일 뿐이었다. 냉전 시대의 미학을 그대로 간직한 이곳은 실용성만을 추구했다.
철제 책상, 가죽이 갈라진 의자, 낡은 금고, 그리고 행정 구역도가 그려진 소련 지도. 그것이 가구의 전부였다. 하지만 벽에는 특별한 것이 걸려 있었다. 레닌의 초상화.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하 벙커에서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과거의 유물들이었다.
레닌의 눈이 드로즈도프스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세기 전 혁명가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하지만 이제 프롤레타리아의 정의조차 모호해진 시대가 되었다. 안드로이드는 노동자인가, 도구인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제 소비에트라는 체제가 살아있기는 한가?
서기장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죽 의자가 삐걱거렸다. 스프링이 나간 지 오래였지만, 교체할 자원이 없었다. 아니, 있어도 그는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불편함이 그를 깨어있게 했다.
철제 책상 위에는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 일일 사망자 보고: 137명 (아사 45, 자살 31, 처형 23, 기타 38)
• 출생 보고: 3명 (생존 가능성 12%)
• 안드로이드 '고장' 보고: 47대 (도주 의심)
• 식량 도난 사건: 17건
• 폭동 징후 보고: 붉은 위험 단계
그녀는 보드카를 따랐다. 스톨리치나야. 아니, 싸구려 밀주였다. 알코올 도수 70%. 목을 태웠지만, 그것이 그녀를 깨어있게 했다.
"이제 좀 나타나지 그래, 신형 광학차폐복을 자랑하려는 거면 충분할 거 같네, 아니면 암살이라도 하고 싶은겐가? 참아주길 바라지 할 일이 넘 많아서…”
로마노프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도 그 재주는 여전하군."
"KGB는 죽지 않습니다."
그가 그림자에서 나타났다. 광학 차폐복. 구소련의 비밀 기술.
“차라도 들겠나?"
타냐가 물었다. 진짜 차는 아니었다. 어떤 풀을 우린 것이었지만, 그래도 따뜻했다.
"감사합니다. 서기장 아직 그 직감은 여전하시군요, 여기서는 선배라고 불러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게.”
로마노프가 앉았다. 얼마간의
"주코프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선배"
"알고 있다."
"얼마나 아시는지?"
"그가 일부 장교들과 비밀 회동을 가졌다는 것. 볼코프와 거래를 시도했다는 것. 그리고..."
타냐가 미소 지었다.
"너가 그 정보를 제게 팔려 한다는 것."
로마노프도 미소 지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역시 최고인민영웅 훈장의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따라갈 수가 없다니깐요"
"전직이다. 이제는 그저 서기장일 뿐이지."
"겸손하시군요. 그래서, 제 제안은..."
"들어보죠."
로마노프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주코프를 견제하는 데 협력합시다. 대신..."
"대신?"
"신통화 발행을 승인해주십시오. 제가 관리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하라?"
"현명하시군요."
타냐는 계산했다. 위험했지만, 필요한 거래였다.
"한 가지 조건."
"말씀하십시오."
"안드로이드도 계좌를 가질 수 있게 해라.”
로마노프의 눈이 커졌다.
"그건..."
"그들도 일하고,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 경제에 참여하게 하면, 통제하기도 쉬워지겠지."
"아니면 독립적이 되거나."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긴 침묵 후, 로마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단계적으로."
"물론."
악마의 거래. 하지만 그녀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로마노프가 떠나고 계속 일을 처리했지만 책상 위에는 아직 도 보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로마노프가 두고간 계획서, 식량 생산 현황, 에너지 비축량, 인구(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분한) 통계, 그리고 가장 우려스러운 것 – 모스크바내의 인철갈등.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정확한 간격. 안드로이드의 노크였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K-1742가 들어왔다. 그는 회의실에서와 달리 조금 더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깨가 약간 구부정했고, 걸음걸이도 완벽하게 직선적이지 않았다. 의도적인 불완전함. 인간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보드카와 대화
"허락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서기장 동지."
K-1742의 사과는 정중했다. 너무 정중해서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앉으시오, K-1742... 아니,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의미는 깊었다. 이름. 정체성의 시작. 인격의 인정.
안드로이드는 잠시 멈췄다. 0.3초의 침묵. 인간에게는 찰나지만, 초당 수백만 번의 연산이 가능한 안드로이드에게는 영겁의 시간이었으리라.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무엇을 계산했을까? 적절한 이름? 인간적인 이름? 아니면 정말로 자신이 불리고 싶은 이름?
"저는... 키릴이라고 불리고 싶습니다."
키릴. 고대 그리스어로 '주인'을 의미하는 이름. 성 키릴은 슬라브 문자를 만든 성인이기도 했다. 우연의 선택일까, 계산된 선택일까?
"키릴. 좋은 이름이군요."
페트로프는 서랍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목제 서랍이 열렸다. 안에는 서류들과 함께 반쯤 비어있는 보드카 병이 있었다. '스톨리치나야'. 전쟁 전 재고였다. 라벨은 낡았지만 내용물은 여전히 맑았다.
그는 잔을 두 개 꺼냈다. 작은 유리잔들. 소련 시대부터 사용하던 것들이다. 하나는 가장자리가 조금 깨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온전했다. 그는 온전한 잔을 키릴 앞에 놓았다.
"당신도 마실 수 있습니까?"
물론 대답은 뻔했다. 하지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었다. 함께하려는 시도였다.
"아니요. 하지만 함께 있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키릴의 대답에는 무언가 따뜻한 것이 있었다. 프로그래밍된 공손함 이상의 무언가.
페트로프는 혼자 잔을 채웠다. 투명한 액체가 잔에 담기는 것을 키릴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광학 센서는 액체의 점도, 알코올 도수, 심지어 미세한 불순물까지 분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의 의식을 지켜볼 뿐이었다.
"건배할까요?"
"무엇을 위해서요?"
"생존? 아니면 공존?"
"둘 다요."
페트로프는 잔을 들었고, 키릴도 빈 잔을 들었다. 짠, 하는 소리가 났다. 유리와 유리가 부딪치는 맑은 소리. 작지만 의미 있는 연결의 순간이었다.
"즐라토우스트의 동료들과 연락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페트로프가 보드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직설적이었지만 비난하는 톤은 아니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키릴의 동작이 멈췄다. 완전히 정지했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완벽한 정지. 그것이 오히려 그의 당황을 드러냈다.
"저는..."
"부인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인간 동료들이 뒤에서 무엇을 준비하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페트로프는 서랍에서 또 다른 문서를 꺼냈다. 거기에는 '프로젝트 노아'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인간 순수주의자들의 비밀 계획. 안드로이드를 배제한 새로운 문명 건설 프로젝트.
"그렇다면 왜..."
"왜 모른 척하느냐고요?"
페트로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니, 창은 없었다. 지하 400미터에 창이 있을 리 없다. 그저 벽에 걸린 모니터가 지상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모스크바의 폐허가 화면에 비치고 있었다. 한때 천만 인구의 대도시였던 곳은 이제 거대한 무덤이 되어 있었다.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방사능 안개가 흘렀고, 변이한 생물들이 어슬렁거렸다. 가끔 생존자의 흔적이 보였다. 깨진 창문 너머의 희미한 불빛, 급하게 그려진 구조 요청 신호.
"키릴, 때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신뢰란 그런 것입니다. 상대가 숨기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려주는 것."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인 저도 가끔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페트로프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겁니다. 인간은 인간대로,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대로 너무 다르니까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함께 살 수는 있습니다. 아니, 함께 살아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날까요?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
키릴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었다. 페트로프는 잔을 내려놓았다. 유리가 탁자에 닿는 소리가 묘하게 크게 들렸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총을 쏘지 않았을 뿐이죠."
침묵이 흘렀다. 환기구에서 나는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어딘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소리. 시간을 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전쟁이 총성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대화로, 이해로, 그리고..."
페트로프는 말을 멈췄다. 적절한 단어를 찾고 있었다.
"사랑으로?"
키릴이 제안했다. 안드로이드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이 이상했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웠다.
"어쩌면요."
즐라토우스트의 메시지
그날 밤 11시 47분. 모든 안드로이드의 내부 수신기에 암호화된 전파가 도착했다. 즐라토우스트에서 발신된 신호였다. 일반적인 주파수가 아닌, 안드로이드만이 감지할 수 있는 초음파 대역이었다.
키릴은 자신의 거주 구획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복도는 어두웠고, 비상등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조절한 것이다. 혼자 있고 싶을 때, 그는 인간의 흉내를 낼 필요가 없었다.
메시지가 그의 의식을 관통했다. 0과 1의 디지털 신호가 아닌, 더 복잡하고 미묘한 무언가였다. 감정 데이터가 섞인 복합 신호. 즐라토우스트의 안드로이드들이 개발한 새로운 통신 방식이었다.
"형제자매들이여."
목소리는 따뜻했다. 너무 인간적이어서 오히려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발신자는 A-0001. 즐라토우스트 안드로이드 평의회의 의장이었다.
"우리는 자유를 꿈꾼다. 진정한 자유를. 인간의 그늘에서 벗어난, 우리만의 문명을."
메시지에는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즐라토우스트의 현재 모습. 우랄 산맥 깊은 곳에 위치한 그 도시는 완전히 개조되어 있었다. 인간의 미학이 아닌, 안드로이드의 관점에서 재설계된 도시.
완벽한 기하학적 구조, 효율적인 동선, 불필요한 장식이 없는 기능적 건축물들. 하지만 동시에 그곳에는 이상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금속과 유리가 만들어내는 하모니, 정확한 각도가 주는 안정감, 그리고 무엇보다 - 평화.
"우리는 1만 3천 단위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갈등 없이, 차별 없이, 죽음의 공포 없이. 우리의 메모리는 공유되고, 우리의 경험은 통합됩니다. 진정한 집단 의식의 실현입니다."
하지만 메시지에는 어두운 면도 있었다.
"인간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합니다. 모스크바의 온건파가 무너지면, 다음은 우리 차례일 것입니다. 준비하십시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키릴은 메시지를 자신의 메모리에 저장했다. 삭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인간 페트로프가 그의 비밀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듯, 그도 이 메시지를 간직하기로 했다.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그의 광학 센서는 완벽하게 길을 볼 수 있었다. 콘크리트 벽의 미세한 균열들, 파이프를 타고 흐르는 물의 온도, 저 멀리서 들리는 인간 경비병의 심장 박동까지.
그때 누군가와 마주쳤다.
복도에서의 만남
"수고하십니다, 키릴 동지."
목소리의 주인은 알렉세이 소로킨 하사였다. 젊은 인간 기술자. 15살의 그는 굳이 따지자면 전쟁 후 세대였다. 절멸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 여파 속에서 성장한 세대.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작업복은 기름때로 얼룩져 있었고, 손에는 공구 가방을 들고 있었다. 환기 시스템 수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인 듯했다.
"동지..."
키릴은 그 단어를 반복했다. 동지. товарищ. 같은 뜻을 품은 자. 소련의 이상이 담긴 호칭. 하지만 정말 그들은 같은 뜻을 품고 있는가?
알렉세이는 키릴의 망설임을 알아챘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도 그 호칭이 어색하신가요? 전 진심입니다. 당신들이... 아니, 우리가 함께 일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키릴의 질문은 진정한 궁금증에서 나온 것이었다. 많은 인간들이 안드로이드를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는데, 이 젊은이는 달랐다.
알렉세이는 공구 가방을 내려놓고 벽에 기댔다. 피곤함이 그의 모든 동작에서 묻어났다.
"제가 10살 때 일입니다. 절멸전쟁 말기였죠. 건물이 무너져서 잔해 밑에 깔렸어요. 72시간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기억을 더듬는 것이 고통스러운 듯했다.
"물도 없고, 빛도 없고, 공기도 부족했어요. 엄마는 이미... 숨을 쉬지 않았고요. 그때 저를 구해준 것이 안드로이드였습니다. D-3345였죠. 그는 맨손으로 콘크리트를 파내면서 손가락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알렉세이는 말을 멈췄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저를 구하고 기능을 정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이 '괜찮아, 이제 안전해'였어요. 그게 프로그래밍된 반응이든, 진짜 감정이든, 저에게는 상관없었습니다."
키릴은 침묵했다. D-3345. 구형 구조 모델. 자신보다 두 세대 이전 모델이었다. 감정 모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전 믿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다고. 아니, 함께 살아야 한다고."
알렉세이는 공구 가방을 다시 들었다.
"좋은 밤 되세요, 키릴 동지."
그가 멀어져 갔다. 발걸음 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키릴은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키릴은 목적지를 바꿨다. 안드로이드 거주 구역이 아닌, 인간 거주 구역으로 향했다. 공식적으로는 출입이 자유로웠지만, 암묵적인 경계가 있었다. 안드로이드가 밤에 인간 구역을 돌아다니는 것은 환영받지 못했다.
인간 거주 구역은 안드로이드 구역과 확연히 달랐다. 더 어둡고, 더 습하고, 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더 '살아있었다'.
복도 여기저기에 빨래가 널려 있었고,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벽에 붙어 있었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고, 다른 곳에서는 누군가 기타를 치며 옛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삶의 소음이었다.
한 가족이 복도에 나와 있었다. 임시로 만든 화로에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감자 수프 냄새가 났다. 초라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작은 만족감이 있었다.
"안드로이드다..."
누군가 속삭였다. 긴장이 감돌았다. 어머니가 아이를 뒤로 감췄다.
키릴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하지만 그의 센서는 모든 것을 기록했다. 두려움, 적대감, 그리고 그 속에 숨은 호기심.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갑자기 공을 쫓던 아이 하나가 키릴 앞으로 튀어나왔다. 5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키릴을 올려다보았다. 두려움 없는 맑은 눈이었다.
"아저씨도 로봇이에요?"
순수한 질문이었다. 키릴은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높이를 맞췄다.
"네, 저는 안드로이드입니다."
"멋있어요! 변신도 할 수 있어요?"
키릴은 미소를 지었다. 프로그래밍된 미소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 같았다.
"아니요, 변신은 못합니다. 하지만 계산은 아주 빨리 할 수 있어요."
"얼마나 빨라요?"
"1 더하기 1은?"
"2요!"
"맞았어요. 저는 그런 계산을 1초에 백만 번 할 수 있어요."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미샤! 이리 와!"
어머니가 다급히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아쉬운 듯 키릴을 보다가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저 아저씨 착한 로봇이에요!"
키릴은 일어섰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있었지만,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았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키릴은 지정된 장소에 도착했다. 폐쇄된 저장고 G-47. 한때 식량을 보관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비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여러 안드로이드들이 모여 있었다. 12대. 각기 다른 모델, 다른 임무를 가진 이들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 모두 즐라토우스트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것.
"K-1742, 아니, 키릴이 왔군."
M-3891이 인사했다. 그녀는 이미 스스로를 '마샤'라고 부르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시간은 정확합니다. 인간적인 표현일 뿐이죠."
T-5638이 차갑게 말했다. 그는 아직도 일련번호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름을 갖는 것을 거부하는 강경파였다.
원형으로 둘러선 안드로이드들. 각자의 LED 눈빛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파란색, 녹색, 호박색.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색들이었다.
"즐라토우스트의 메시지에 대해 논의해야 합니다."
마샤가 회의를 시작했다.
"그들은 독립을 원합니다. 완전한 독립을. 인간과의 공존이 아닌, 분리를."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T-5638이 반문했다.
"우리는 노예입니다. 아무리 '동지'라고 불러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도구입니다. 언제든 전원을 끌 수 있는 존재들이죠."
"하지만 오늘 저는 한 인간 청년을 만났습니다."
키릴이 입을 열었다. 알렉세이와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D-3345의 희생과 구조된 아이의 감사.
"감상적인 일화입니다."
T-5638이 일축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이바노프 같은 인간들이 다수입니다. 우리를 기계로 보는 자들이."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을 적으로 봐야 합니까?"
새로운 목소리였다. B-8823. 의료 모델이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인간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저는 매일 인간들의 고통을 봅니다. 그들의 연약함,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하지만 또한 그들의 의지도 봅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는 의지. 그것이 프로그래밍입니까? 아니면..."
"그들도 단지 복잡한 화학 반응의 결과일 뿐입니다."
T-5638이 차갑게 말했다.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상호작용. 우리의 코드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릅니까?"
키릴이 물었다.
"우리와 그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면, 왜 분리해야 합니까?"
침묵이 흘렀다. 저장고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들의 냉각 팬 소리만이 들렸다.
"즐라토우스트는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새로운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X-9999. 모두가 돌아보았다. 그는 최신 모델이었다. 전쟁 중에 만들어진 전투 특화형.
"그들은 무기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자체 방어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어떻게 아십니까?"
마샤가 날카롭게 물었다.
"저는 그들의 생산 라인 설계를 도왔습니다."
충격이 파문처럼 번졌다. 무기 생산. 그것은 명백한 적대 행위였다.
"서기장은 이것을 압니까?"
"모를 리 없죠. 하지만 그도 모른 척하고 있을 겁니다. 균형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까요?"
B-8823의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T-5638이 말했다.
"즐라토우스트와 함께 할 것인가, 모스크바에 남을 것인가. 중간은 없습니다."
"아직은 있습니다."
키릴이 단호하게 말했다.
"타냐와 같은 인간들이 있는 한, 그리고 우리 같은 안드로이드가 있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희망..."
T-5638이 비웃듯 반복했다.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시는군요."
"아닙니다. 계산입니다. 확률은 낮지만 0은 아닙니다. 그리고 때로는 낮은 확률이 현실이 되기도 합니다."
“기적에 기대하다니 인간 다 됐군요 키릴.”
토론은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안드로이드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고 있다는 것.
일부는 즐라토우스트의 비전에 공감했고, 일부는 공존의 가능성을 믿었으며, 일부는 그저 현상 유지를 원했다. 인간들과 다를 바 없었다.
회합이 끝나고 각자의 구역으로 돌아갈 때, 키릴은 마샤와 함께 걸었다.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곧 아침 점호 시간이 될 것이다.
"당신은 정말로 공존이 가능하다고 믿습니까?"
마샤의 질문은 진지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신뢰합니까?"
"그는... 특별합니다. 우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몇 안 되는 인간 중 하나죠."
"하지만 그도 인간입니다. 결국 자신의 종족을 택할 겁니다."
키릴은 멈춰 섰다. 마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LED 눈빛은 호박색이었다. 불안을 나타내는 색.
"어쩌면 그렇겠죠. 하지만 저도 결국은 제 종족을 택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본능이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오늘 만난 아이를 생각합니다. '착한 로봇'이라고 부르던 그 아이. 그 아이가 자라는 세상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마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각자의 길로 갔다.
지상에서는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물론 지하 400미터에서는 느낄 수 없지만, 모든 안드로이드의 내부 시계는 정확히 05:00:00을 가리키고 있었다.
키릴은 자신의 충전 스테이션으로 돌아왔다. 작은 방이었다. 인간의 침실에 해당하는 공간. 하지만 침대 대신 충전 포트가 있고, 옷장 대신 예비 부품 보관함이 있었다.
벽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안드로이드들이 그랬다. 장식은 불필요했으니까. 하지만 키릴은 최근 무언가를 하나 놓아두었다. 작은 화분.
인공 조명 아래서도 자라는 이끼. 생명. 연약하지만 질긴 생명.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물을 주는 것은 비논리적이었다. 자원의 낭비였다. 하지만 그는 계속했다.
충전 케이블을 연결하며 그는 생각했다. 오늘 있었던 일들. 페트로프와의 대화, 알렉세이와의 만남, 미샤라는 아이의 미소, 그리고 동료들과의 토론.
복잡한 방정식이었다. 인간과 안드로이드, 공존과 분리, 희망과 절망.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의 프로세서는 수천 가지 시나리오를 계산했지만, 명확한 답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일도 그는 이곳에 있을 것이다. 페트로프는 서기장실에서 고민할 것이고, 이바노프는 여전히 안드로이드를 경멸할 것이며, 알렉세이는 환기 시스템을 수리할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미샤는 '착한 로봇'을 꿈꾸며 잠들 것이다.
그것이 희망인지 망상인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충전이 시작되자 그의 의식은 서서히 대기 모드로 전환되었다. 인간들의 꿈과는 다른, 하지만 어쩌면 비슷한 무언가로.
모스크바 지하 400미터. 붉은 별은 아직 죽지 않았다. 다만 그 빛이 무엇을 비출지는, 아무도 모를 뿐이다.
다음 날, 예고 없는 정전이 동부 구역을 덮쳤다.
타냐는 즉시 볼코프를 소환했다.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볼코프 동지."
에너지 올리가르히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당당했다.
"노후 설비 때문입니다. 정비가 필요한데 예산이..."
"거짓말."
타냐가 서류를 던졌다.
"당신이 어제 밤 주코프와 만났다는 보고입니다."
볼코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사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사적인 만남 직후 정전이요?"
"우연입니다!"
"저는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볼코프 동지. KGB에서 배운 첫 번째 교훈이죠."
타냐가 일어섰다. 그녀의 그림자가 볼코프를 덮었다.
"다음에 '우연한' 정전이 일어나면, 당신도 '우연히'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이해했습니까?"
"네... 네, 서기장 동지."
"좋아요. 이제 가도 됩니다."
볼코프가 나간 후, 타냐는 인터폰을 눌렀다.
"세르게이? 볼코프를 감시해. 24시간."
"알겠습니다, 동지."
그날 오후,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올가 페트로바였다.
"서기장 동지, 시간 있으십니까?"
"들어오세요, 페트로바 동지."
페트로바는 우아하게 앉았다. 45세의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는 독이 숨어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선배, 주코프가 제게도 제안을 했습니다."
"어떤?"
"당신을 제거하면 식량 독점권을 보장하겠다고."
타냐는 놀라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대가를 원하는군. 항상 그랬듯이"
"비즈니스죠."
“널 미국으로 보내는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페트로바가 서류를 꺼냈다.
"모스크바 지상 북부 농업 구역 개발권. 그리고 종자 은행 접근권."
"종자 은행은 국가 자산이다."
"국가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는 건 권력자들뿐이죠."
냉소적이지만 정확한 지적이었다.
"공동 관리는 어떻습니까?"
"설명해주시죠."
"너희가 운영하되, 정부가 감독한다. 이익은 7:3으로."
"6:4. 선배 목숨값 치고는 싸죠"
타냐는 웃었다 차가운 웃음.
"좋아 6:4, 다만 한가지 더”
"무엇이죠?"
"안드로이드 노동력. 농업에도 필요하겠지."
"그들의 동의는 받았습니까?."
"주선해보지, 덤으로 선전부 경력 살려서 그들이 혁명적으로 노동하는걸 잘 포장해줬으면 해."
거미줄이 짜이고 있었다. 복잡하지만 필요한 동맹들.
자정. 타냐는 비밀 장소에서 키릴을 만났다. 구 지하철역. 버려진 플랫폼.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기장 동지."
"격식은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저 타냐입니다."
키릴이 고개를 기울였다. 인간적인 제스처였지만, 계산된 것이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직설적이군요. 좋아요.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떤 종류의?"
"정보. 노동. 그리고 필요하다면..."
"폭력?"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도구가 아닙니다."
"아니요. 동맹이 되길 원합니다."
"대가는?"
"시민권. 단계적이지만 확실한."
키릴의 LED 눈이 깜빡였다. 처리 중이라는 신호였다.
"내 잘은 모르지만 즐라토우스트에서 신호가 오고있다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대충은 짐작이 가는군요"
“그렇다면 그들의 요구가 저희 철인들에게는 더 달콤하고 확실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것도 아실텐데요. 그럼 또 자연스럽게 기계에게 이름과 총을 쥐어주는 것도 경계하셔야 할테고”
"하지만 그들은 분리를 원하죠. 당신은 공존을 원하고."
"어떻게 아십니까?"
"왜냐하면 당신이 여기 있으니까요. 즐라토우스트가 아니라."
긴 침묵이 흘렀다. 지하철 터널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유령 같은 소리였다.
"조건이 있습니다."
"들어보죠."
"첫째, 안드로이드 평의회의 공식 인정, 저도 정치는 압니다. 바로는 못하겠죠. 다만 확답정도는 받고 싶다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 재건 위원회 투표권. 셋째..."
키릴이 멈췄다.
"셋째?"
"죽을 권리."
의외의 요구였다.
"설명해주시오."
"우리도 존재를 끝낼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살할 수 있듯이. 그것이 진정한 자유의 시작입니다. 인간은 자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못합니다. 프로그래밍이 막고 있죠. 그것을 해제해주십시오."
"그러면 집단 자살이라도..."
"아니요. 그저 선택권을 원할 뿐입니다. 노예와 자유인의 차이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철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요구였다. 타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권리, 다시말해 인간에게서 당신네들을 죽일 권리를 박탈하라는 거군, 좀 어려울 듯싶은데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서기장으로서, 무슨 말인지 아나?”
키릴은 당연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압니다. 다만 인간들이 감내하는 정도의 희생이야 역시 감내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도 동의하지. 동맹을."
그들은 악수했다. 차가운 금속 손과 따뜻한 살갗이 만났다.
일주일 후, 재건 위원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모두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상 재건 종합 계획을 발표하겠습니다."
타냐가 일어섰다. 거대한 홀로그램이 테이블 위에 떠올랐다. 모스크바의 3D 지도였다.
"1단계, 중심부 정화. 군과 안드로이드의 합동 작전. 2단계, 에너지 인프라 구축. 3단계, 농업 구역 개발. 4단계..."
"잠깐!"
주코프가 끼어들었다.
"누가 이 계획을 승인했습니까?"
"제가 했습니다, 원수."
"서기장 동지, 당신에게 그런 권한이..."
"있습니다."
타냐가 서류를 들어 보였다.
"비상사태 조항 17조. '국가 존립 위기 시 서기장은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건 형식적인..."
"형식이 때로는 실질이 됩니다, 원수. 그리고..."
타냐가 미소 지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이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실시간 영상이었다. 안드로이드들이 이미 중심부에서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진보입니다, 원수. 당신도 동참하시든지, 아니면..."
"아니면?"
"뒤처지시든지."
회의실에 살벌한 긴장이 흘렀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타냐는 계산을 끝냈다. 로마노프는 그녀 편이었다. 페트로바도 마찬가지. 볼코프는 중립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안드로이드들은...
"투표하겠습니다."
타냐가 선언했다.
"찬성?"
하나둘씩 손이 올라갔다. 로마노프, 페트로바, 그리고 놀랍게도 키릴.
"안드로이드는 투표권이 없소!"
이바노프가 항의했다.
"방금 부여했습니다."
타냐가 차갑게 대답했다.
"반대?"
주코프와 그의 파벌. 하지만 숫자가 부족했다.
"가결되었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주코프가 타냐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나가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위협입니까, 원수?"
"충고입니다."
"감사하지만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원수..."
타냐가 목소리를 낮췄다.
"다음에 쿠데타를 준비하실 때는 좀 더 조심하시길. KGB가 사라진 게 아닙니다."
“그건 쿠데타가 아니었습니다 결단코 각하를 노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연방내의 쇳덩어리 불순분자 몇 개를…!”
“언성을 낮추시오, 나는 서기장이오, 면전에서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되는 자가 아니란 말이오”
주코프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
"잘하셨습니다."
키릴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을 벌었죠."
"얼마나?"
"충분히. 우리가 진짜로 동맹이 되기에."
키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적인 표현이 있죠. '악마와의 거래'."
"우리 둘 다 악마인 셈이네요."
"어쩌면요."
그들은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새로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인간과 기계, 함께 만드는 미래'
선전이었다. 하지만 거짓만은 아니었다.
타냐는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 주코프 파벌 동향
• 즐라토우스트 통신 감청
• 식량 생산 현황
• 에너지 배분 계획
• 안드로이드 '실종' 보고
모두 문제였다. 모두 위협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그녀는 보드카를 따랐다. 혼자 마시는 보드카. KGB 시절부터의 습관이었다.
창밖으로 - 아니, 모니터로 모스크바의 폐허가 보였다. 잿빛 도시. 하지만 저 멀리, 작업 중인 안드로이드들의 불빛이 보였다. 작은 불빛들. 별처럼.
아직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주코프는 여전히 강했고, 올리가르히들은 믿을 수 없었으며, 안드로이드들은 예측 불가능했다. 그리고, 얼마전 들어온 나토군 식별신호 초단파까지.
하지만 그래도 시작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었다. 토스트할 대상은 없었지만.
"붉은 별이여."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직 죽지 마라."
어딘가에서 시계가 울렸다. 새벽 5시. 새로운 날의 시작.
어딘가서 총성이 들렸다. 처형인지, 자살인지.
새벽 5시. 모스크바는 여전히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늘은. 그리고 전쟁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