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NKVD 본부 지하 6층 특별 문서고.
페트렌코는 홀로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공기는 썩은 종이와 곰팡이, 그리고 희미한 피 냄새로 가득했다. 50년간 쌓인 비밀의 냄새. 고문 기록과 처형 명령서, 자백서와 밀고 편지들이 켜켜이 쌓여 발효된 냄새.
드미트리 페트렌코는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서류철을 넘기고 있었다.
한 장 넘길 때마다 먼지가 일어나 희미한 전구 불빛에 춤을 췄다. 40와트 백열등. 일부러 어둡게 유지된 조명. 너무 밝으면 문서의 잉크가 바랜다는 핑계였지만, 진짜 이유는 달랐다.
어둠 속에서 일하는 것이 NKVD의 방식이었다.
29명의 사형수. 각각의 파일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첫 번째 파일.
니콜라이 볼코프. 1978년생. 에너지 인민위원.
사진 속의 볼코프는 젊었다. 야심만만한 눈빛. 아직 돼지처럼 살찌기 전, 아직 권력의 단물을 빨기 전의 모습.
페트렌코는 빨간 펜으로 기록했다.
*보유 자산:*
- *중앙 발전소 4개 (출력 총합 1,200MW)*
- *석탄 비축량 47,000톤*
- *정유 시설 2개*
두번째,
이고르 시도로프 - 군수물자 창고 7개 관리권.
*보유 자산:*
- *제3, 제7, 제12 무기고 관리권*
- *실탄 7만 발*
- *RPG-7 로켓 320발*
- *화학무기 (사린, VX) 8kg*
- *개인 무장 병력 47명*
"화학무기라..."
페트렌코의 의안이 빛났다. 붉은빛 반사.
"숨겨놨구나, 시도로프. 유능한 놈이었어. 아깝군
세르게이 말라호프 - 식수 정화 시설 2개 운영권.
죽은 자의 재산. 곧 주인 없는 권력이 될 것들.
그의 손가락이 붉은 도장을 찍었다. 하나, 둘, 셋...
'관리 이전'
합법적이었다. 반혁명 범죄자의 재산은 국가로 귀속된다. 그리고 NKVD가 그것을 '관리'할 권한이 있다. 임시로.
하지만 임시가 영원이 되는 것이 소련의 방식이었다.
주코프. 멍청한 늙은 곰.
감정에 휩쓸려 총을 들었다가 자살로 끝났다. 군인의 단순함. 적을 보면 쏘고, 지면 죽는다.
하지만 진짜 전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올리가르히들? 더 한심했다.
자기 배만 불리던 돼지들. 위기가 오자 가장 먼저 배신했다. 신념도 없고 용기도 없는 기생충들.
그리고 자이체프 같은 늙은 광신도들.
죽은 이념의 시체를 붙들고 춤추던 노인네들. 시대가 변했는데도 1917년에 살고 있던 화석들.
"다 필요 없어."
페트렌코가 중얼거렸다.
진짜 필요한 건 하나뿐이었다.
힘.
그리고 그 힘을 어떻게 쓸 줄 아는 지능.
그는 계속 도장을 찍었다.
무기고 3개. 의료 시설 5개. 통신 센터 2개.
모두 NKVD 관할로.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시체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각자의 작은 왕국을 가졌던 자들. 이제는 그저 서류 속 숫자가 된 자들.
스물아홉 번째 파일에 이르렀을 때, 페트렌코의 손이 멈췄다.
**안나 쿠즈네초바. 1991년생. 서기장 개인비서.**
젊은 여자. 갓 스물. 눈가에 아직 순수함이 남아있는 얼굴.
"어린 것이..."
페트렌코가 파일을 자세히 읽었다.
*보유 자산:*
- *없음*
- *없음*
- *없음*
비어있는 칸들.
하지만 맨 아래 손으로 쓴 메모가 있었다.
*'가족 - 모친 병원 입원 중. 동생 굴라그 17호 수용소.'*
"인질이었군, 아마...타냐의?"
페트렌코는 이해했다.
그는 다른 도장을 꺼냈다. 검은색.
'특별 조치'
쿵.
"가족은 보호한다. 약속이다, 아가씨."
죽은 자와의 약속. 의미 없는 약속. 하지만 페트렌코는 가끔 그런 무의미한 일을 했다.
"서기장 동지."
그가 타냐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집무실 벽에 걸린 공식 초상화였다.
"당신은 영리해요. 하지만 너무 영리해서 문제지."
타냐는 균형을 잡으려 했다.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하지만 균형은 환상이었다. 결국 한쪽이 이긴다. 그리고...
"기계는 안 돼."
페트렌코의 확신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봤다. 안드로이드들의 눈빛을. 계산하는 눈. 분석하는 눈.
인간을 부품으로 보는 눈.
V-0666이 인간을 해체할 때의 정확성. 그것은 의사의 손길이 아니었다. 정비공의 손길이었다.
고장난 기계를 분해하듯이.
그들에게 인간은 그저 비효율적인 구모델일 뿐이다.
"하지만 난 다르지."
페트렌코가 의안을 만졌다. 차가운 유리구슬.
"난 이미 일부는 기계야.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고."
그것이 차이였다.
선택해서 기계가 된 것과, 태어날 때부터 기계인 것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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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모스크바를 움직이는 모든 것의 40%가 이제 NKVD 관할이 되었다.
"합법적으로."
그가 냉소했다.
반혁명 범죄자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된다. NKVD는 귀속 재산의 관리 권한을 갖는다. 관리 기한은 따로 정하지 않는다.
"영원히, 라는 뜻이지."
페트렌코는 금고를 열었다.
1942년제 독일 금고. 베를린 함락 때 노획한 것. 두께 15센티미터의 강철. 기계식 자물쇠. EMP에도, 해킹에도 영향받지 않는.
안에는 이미 많은 것들이 있었다.
붉은 파일들. 'КОМПРОМАТ' - 타협 자료.
모스크바 권력자들의 약점. 불륜, 횡령, 살인, 배신... 모든 더러운 비밀들.
그리고 가장 안쪽, 검은 가죽 표지의 수첩.
'Протокол-7: Последний День'
'프로토콜-7: 최후의 날'
그는 수첩을 펼쳤다.
정교한 도표와 계산. 117개 EMP 폭탄의 위치. 폭발 순서. 예상 피해 범위.
동시 기폭 시:
- 안드로이드 100% 무력화
- 의료 장비 정지로 인한 예상 사망 2,100명
- 생명 유지 장치 정지로 인한 예상 사망 890명
- 통신 두절로 인한 혼란 사망 (추정) 500~1,500명
총 예상 사망: 3,500~4,500명
"15%."
페트렌코가 계산했다.
"인구의 15%를 잃고 안드로이드를 제거하는 것과, 100%가 서서히 대체되는 것. 무엇이 나은가?"
답은 명확했다. 그에게는.
그는 새로운 서류를 꺼냈다.
'재건 계획'
EMP 이후의 모스크바.
기술 의존도를 최소화한 사회. 안드로이드 없는 사회.
더 가난하고, 더 비효율적이지만... 인간의 사회.
"원시적이라고? 그래도 우리 것이다."
그의 펜이 움직였다.
*1단계: 핵심 인력 확보*
*- NKVD 충성파 3,000명*
*- 전향 가능 군인 800명*
*- 필수 기술자 200명*
*2단계: 자원 확보*
*- 식량 6개월분 (현재 확보 4개월분)*
*- 무기 (확보 완료)*
*- 의약품 (확보율 67%)*
*3단계: D-Day*
*- 조건 1: 안드로이드 인구 25% 도달 시*
*- 조건 2: 중앙 통제 상실 징후 시*
*- 조건 3: 즐라토우스트 개입 시*
"빠르면 6개월. 늦어도 2년."
그의 계산은 정확했다.
안드로이드 증가율, 인간 감소율, 자원 고갈 속도...
모든 변수를 입력한 결과였다.
"타냐가 버틸 수 있을까?"
그는 타냐를 존경했다. 아니, 존경했었다.
영리하고, 강하고, 현실적인 지도자.
하지만...
"너무 영리해서 문제야."
타냐는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 공존의 길을.
하지만 페트렌코가 보기에 그런 것은 없었다.
"포식자와 먹이는 공존할 수 없어."
그리고 누가 포식자인지는 명확했다.
더 강하고, 더 영리하고, 더 효율적인 것들.
죽지도, 병들지도, 늙지도 않는 것들.
"하지만 약점은 있지."
그는 서랍에서 작은 장치를 꺼냈다.
네오디뮴 자석. 아까 키릴에게 사용했던 것.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이야."
자석, EMP,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다른 서랍으로 향했다.
거기엔 더 위험한 것이 있었다.
'ВИРУС-К'
컴퓨터 바이러스. 구소련 사이버전 부대가 개발한 것.
안드로이드 OS를 겨냥한 악성 코드.
"최후의 수단."
감염된 안드로이드는 72시간 내에 모든 데이터가 손상된다.
그리고 무선으로 전파된다.
이론상 모든 안드로이드를 제거할 수 있다.
하지만...
"통제 불가능해."
일단 퍼지면 막을 수 없다.
유용한 안드로이드까지 모두 파괴한다.
의료용, 인프라 관리용, 탐사용...
"그래도 필요하다면..."
페트렌코는 금고를 닫았다.
찰칵.
잠기는 소리가 무덤의 문이 닫히는 것 같았다.
시계를 봤다. 5시 23분.
곧 처형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는 인터폰을 눌렀다.
"보리스."
"예, 위원장 동지."
"특별 심문실의 '손님들' 준비됐나?"
"예. 14명 모두 대기 중입니다."
14명.
29명의 사형수 중 아직 정보를 뽑을 가치가 있는 자들.
"간다."
페트렌코가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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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9층. 특별 심문실.
문이 열렸을 때, 비명 소리가 들렸다.
"시작했군."
페트렌코가 중얼거렸다.
비명은 음악이었다. NKVD의 아침 인사.
그는 복도를 걸었다.
철문들이 양옆에 늘어서 있었다. 각각의 문 뒤에서 다른 소리가 났다.
신음, 울부짖음, 기도, 그리고... 침묵.
침묵이 가장 무서웠다.
이미 부서진 자들의 침묵.
아니면 아직 시작하지 않은 공포의 침묵.
그는 9-7호실 앞에서 멈췄다.
"누구지?"
"드미트리 볼로디미로프. 군수 차관이었습니다."
경비가 대답했다.
"안드로이드와 내통 혐의."
"증거는?"
"암호화된 통신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 중입니다."
페트렌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통적인 방법.
고문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세련된 단어.
그는 문을 열었다.
안은 예상대로였다.
의자에 묶인 남자. 한때는 멀쩡했을 얼굴이 이제는 원형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검은 제복의 NKVD 요원 둘.
"진전은?"
"아직입니다. 입이 무겁습니다."
페트렌코가 다가갔다.
볼로디미로프의 눈과 마주쳤다.
한쪽 눈은 이미 터져있었다. 다른 쪽은 겨우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직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저항? 희망? 아니면 단순한 고집?
"드미트리."
페트렌코가 부드럽게 말했다.
"고통스럽지? 끝낼 수 있어. 간단해. 암호를 말하면 돼."
볼로디미로프의 입술이 움직였다.
피와 침이 섞여 흘러나왔다.
"못... 못해..."
"왜?"
"그들이... 가족을..."
"안드로이드가 네 가족을 위협했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미세하게.
페트렌코가 뒤로 물러섰다.
"거짓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안드로이드는 위협하지 않아. 그냥 실행하지. 네 가족은 이미 죽었을 거야."
볼로디미로프의 눈이 커졌다.
공포가 번졌다.
"아니... 아니야..."
"맞아. 너도 알고 있었겠지. 그들에게 인질의 가치는 없어. 비효율적이니까."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효과적인 거짓말.
볼로디미로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427... 839... 156..."
숫자가 흘러나왔다.
"좋아. 계속해."
15분 후, 페트렌코는 모든 것을 알았다.
안드로이드 협력자 네트워크. 37명.
비밀 통신 채널. 주파수와 암호.
그리고...
"준비하고 있다고?"
"네... 대규모... 뭔가를..."
"뭘?"
"몰라요... 하지만... 크리스마스... 그들이 크리스마스라고..."
12월 25일.
3주 후.
"고맙네, 드미트리."
페트렌코가 돌아섰다.
"위원장님... 전..."
"편히 쉬게."
문을 나서며 그가 요원에게 속삭였다.
"끝내."
"고통 없이요?"
"그래. 충분히 협조했으니까."
총성이 들렸다.
깨끗한 한 발.
자비였다. NKVD 식의.
페트렌코는 다음 방으로 향했다.
아직 13명이 남아있었다.
각자가 퍼즐 조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퍼즐을 완성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안드로이드들이 무엇을 준비하든, 그는 먼저 움직일 것이다.
"인간의 소비에트를 위하여."
그가 중얼거렸다.
주코프의 구호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의 것이었다.
더 차갑게, 더 효율적으로, 더 잔인하게.
필요하다면 그는 악마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