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의 실종 이후 3주가 지났다.
새벽 4시, 브뤼셀은 죽음의 정적에 잠겨 있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시체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고, 간간이 켜진 불빛들만이 아직 생명이 남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대기는 축축하고 무거웠으며, 11월의 찬 공기 속에는 썩은 내와 연기, 그리고 절망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아침 배급 시간. 프랑스인 거주구역과 브뤼셀 시민 구역 사이에 설치된 철조망이 삐걱거렸다. 양쪽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들. 일주일 전 폭동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오늘 배급량은 1인당 400그램입니다."
배급 담당자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울렸다. 어제보다 50그램 줄었다.
"또 줄었어..."
"이러다 다 굶어 죽겠네."
줄지어 선 사람들의 불평이 커졌다. 프랑스인 줄과 브뤼셀 시민 줄은 5미터 간격을 두고 평행하게 늘어서 있었다. 중간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서 있었다.
"저쪽은 더 많이 받는 것 같은데?"
"프랑스놈들 때문에 우리 몫이 줄어든 거야."
속삭임이 점점 커졌다. 병사들이 긴장했다.
그때 한 프랑스 노인이 쓰러졌다. 영양실조와 추위에 못 이긴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부축하려 했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의무대! 의무대!"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의무대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
브뤼셀 시민 줄에서 한 여성이 나섰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간호사였다.
"제가 좀 볼게요."
그녀가 철조망으로 다가가자 병사가 막았다.
"경계선을 넘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규정입니다."
간호사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병사를 밀치고 철조망을 넘으려 했다.
"멈춰!"
총구가 그녀를 향했다. 긴장이 극도로 높아졌다.
바로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비키시오. '아직'은 공동정부의 대통령이니 나에게도 권한이 있을거요"
시라크였다. 그는 피로한 걸음으로 현장에 도착했다.
병사들이 길을 열었다. 간호사가 급히 노인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노인은 차가워지고 있었다.
"...돌아가셨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양쪽 줄의 사람들이 모두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시라크는 철조망을 바라보았다. 녹슨 철선이 도시를 둘로 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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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맥브라이드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맨발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닿자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의 숙소는 한때 EU 고위 관료의 사무실이었던 곳을 개조한 것이었다. 고급 가구들은 모두 땔감이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철제 침대와 삐걱거리는 나무 책상, 그리고 금이 간 가죽 의자뿐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브뤼셀의 스카이라인은 부러진 이빨처럼 들쭉날쭉했다. 한때 유럽의 수도를 상징하던 고층 건물들은 이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고, 그 검은 실루엣이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불길하게 솟아 있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개가 아니었다. 방사능에 변이된 무언가의 울부짖음이었다.
"보고서입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뤼프케가 들어왔다. 그의 군화가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규칙적인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소령의 얼굴은 면도를 했지만 피로가 깊게 배어 있었고, 한때 회색이었을 군복은 이제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래 있었다. 그의 손에는 가죽 바인더가 들려 있었는데, 모서리가 닳아 실밥이 보였다.
"슈나이더 건설, 어제 밤 비공개 입찰에서 동쪽 정화 프로젝트 수주."
뤼프케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맥브라이드는 그 속에서 미묘한 긴장을 감지했다. 소령이 보고서를 넘길 때마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습기 때문에 종이가 울었지만, 그는 꼼꼼하게 타자로 작성된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로스차일드 은행, 새로운 대출 상품 출시 준비 중. 이자율 월 15%. 담보는 주거권이나 배급권..."
맥브라이드는 듣는 동안 턱을 쓸어내렸다. 삼일째 제대로 면도를 하지 못한 수염이 까칠하게 손에 걸렸다. 면도날도 이제 사치품이 되어버렸다.
"그루버 PMC, 신규 대원 20명 모집 중. 지원자는 150명 이상. 대부분 굶주린 젊은이들..."
"잠깐."
맥브라이드가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새벽의 희미한 빛 속에서 그의 회색 눈동자가 강철처럼 빛났다.
"슈나이더가 입찰에서 이긴 조건이 뭐였소?"
뤼프케가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에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공식적으로는 최저가였습니다만..."
"비공식적으로는?"
맥브라이드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낡은 가죽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노동자 일부를 프랑스인으로 채용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최소 30%."
맥브라이드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일반인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작은 변화였지만, 3년간 그를 보좌해온 뤼프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장군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뒤부아는 이걸 알고 있나?"
"아직인 것 같습니다. 슈나이더 측에서 공식 발표 전까지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럼 알게 하시오."
맥브라이드가 창가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의 맨발이 차가운 바닥을 디딜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
"단, 우리가 알려준 걸 모르게."
"어떤 경로로 할까요?"
뤼프케가 수첩을 꺼내 메모할 준비를 했다. 검은 가죽 수첩은 그의 상의 안주머니에 항상 들어있었다. 전쟁 전부터 사용하던 것으로, 표지에는 그의 이니셜 'A.L'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시장 상인을 통해서. 그들은 항상 소문에 목마르니까. 특히 프랑스인 출신 야채 상인... 뭐였지, 이름이?"
"마르셀 뒤부아입니다. 소장과는 먼 친척 관계고요."
"그래, 그 사람이 '우연히' 듣게 하시오. 슈나이더 건설 직원이 술집에서 떠들었다고."
뤼프케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메모했다. 그의 필체는 작고 정확했다. 군대식 약어를 사용해 효율적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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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정례 경제 회의.
회의실은 한때 EU 집행위원회의 소회의실이었다. 타원형 테이블은 아직도 광택이 났지만, 표면에는 총탄 자국과 칼자국이 선명했다. 누군가가 절망에 빠져 테이블에 칼로 새긴 듯한 긁힌 자국들이 불규칙하게 나 있었다. 천장의 크리스탈 샹들리에는 반쯤 떨어져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고, 남은 크리스탈들이 가끔 바람에 흔들리며 불길한 소리를 냈다.
맥브라이드는 일부러 5분 늦게 도착했다. 복도를 걸어올 때 그의 군화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메아리쳤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의도적으로 느린 걸음이었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배급량을 줄이면 폭동이..."
"...로스차일드가 또 이자율을..."
"...그루버의 놈들이 너무..."
대화의 파편들이 두꺼운 참나무 문 너머로 새어 나왔다. 맥브라이드는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황동 손잡이가 그의 체온을 빼앗아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자 대화가 칼로 자른 듯 뚝 끊겼다.
회의실 안의 공기는 담배 연기와 땀 냄새, 그리고 불안이 뒤섞여 무거웠다. 재벌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의자들이 미묘하게 재배치되어 있었다. 로스차일드와 슈나이더 사이의 거리가 평소보다 멀었고, 그루버는 출입구가 잘 보이는 자리로 옮겨 앉아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오."
맥브라이드의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천천히 상석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재벌들의 시선이 따라왔다.
"중요한 손님이 있어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한 마디에 방 안의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로스차일드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탁, 탁, 탁. 세 번. 그가 불안할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빠르게 다른 재벌들의 얼굴을 훑었다. '누가 맥브라이드를 따로 만났을까?'
슈나이더는 의자에서 몸을 뒤로 젖혔다. 가죽 의자가 그의 무게에 시위하듯 삐걱거렸다. 그의 두꺼운 손가락이 주머니 속 시가 케이스를 만지작거렸다. 쿠바산 코이바. 전쟁 전 마지막 재고 중 하나였다. 그는 그것을 부적처럼 가지고 다녔다.
그루버는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은 테이블 아래에서 권총 손잡이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전직 특수부대원의 본능이었다. 항상 탈출로를 확인하고, 항상 무기를 가까이 두는.
니콜라 테슬라 3세는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전력 사용량, 연료 비축량, 예상 소모율... 숫자들이 빼곡히 적힌 종이들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의 오른쪽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과로와 스트레스의 증거였다.
"시작하시죠."
맥브라이드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의자가 그의 무게를 받아들이며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안건은 겨울 대비였다.
"연료 비축량이 작년 대비 25% 부족합니다."
니콜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그가 서류를 넘길 때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아니, 커피 대용품을. 치커리를 볶아 만든 쓰디쓴 액체를.
"구체적인 수치는 석탄 3,200톤, 경유 450킬로리터, 가스는..."
숫자들이 공기 중에 떠다녔다. 차갑고 무자비한 숫자들. 각각의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간단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 것인가.
"해결책은?"
맥브라이드의 질문은 간결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두 가지입니다."
니콜라가 안경을 치켜올렸다. 금테 안경의 한쪽 다리가 철사로 대충 고정되어 있었다.
"추가 조달하거나, 소비를 줄이거나."
"추가 조달은 어렵겠군."
로스차일드가 즉시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계산이 숨어 있었다. 그가 말할 때 입술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복화술사처럼.
"자금이 없으니까요."
그가 가슴 안주머니에서 금속 케이스를 꺼냈다. 은제 담배 케이스였다. 뚜껑을 열자 얇은 시가릴로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러시아산이었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묻지 않는 게 좋았다.
"제가 대출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시가릴로에 불을 붙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라이터는 까르띠에였다. 금도금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지만 여전히 작동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일었다.
"이자율이 너무 높소."
맥브라이드가 차갑게 말했다. 그의 시선이 로스차일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은행가는 잠시 시선을 유지하다가 먼저 눈을 돌렸다.
"시장 가격입니다."
로스차일드가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연기가 천천히 피어올라 이미 탁한 공기를 더욱 탁하게 만들었다.
"그럼 시장을 바꿔야겠군."
맥브라이드의 선언에 방 안의 온도가 순간적으로 떨어진 듯했다.
슈나이더가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배가 테이블 모서리에 닿았다.
"무슨 뜻입니까?"
"새로운 배급 시스템을 도입하겠소."
맥브라이드가 서류를 꺼냈다. 일부러 천천히, 종이 한 장 한 장을 정성스럽게 펼쳤다. 서류를 펼칠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크게 들렸다.
"노동 기여도에 따른 차등 배급."
한 장의 도표를 들어 보였다. 복잡한 계산식이 적혀 있었다. 글씨는 작았지만 명확했다. 맥브라이드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간단하오. 일하는 사람이 더 받는 거요."
그가 다른 재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건설 노동자..."
슈나이더의 눈이 반짝였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미소를 참고 있는 것이었다.
"의료진..."
니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사, 농부..."
나열할 때마다 누군가는 만족하고 누군가는 불만을 품었다.
"그들이 우선이오."
"하지만 은행 직원은?"
로스차일드가 즉시 항의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음 정도 높아졌다.
"필수 인력으로 분류되지 않았소."
맥브라이드가 서류를 넘기며 대답했다. 일부러 로스차일드를 보지 않았다. 무시하는 제스처였다.
"물론..."
그가 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로스차일드를 바라보았다.
"재검토할 수는 있지만."
미끼였다. 로스차일드의 턱 근육이 경직되었다. 그는 자신이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건이 있겠죠?"
"이자율 상한제."
맥브라이드가 즉답했다. 이미 준비된 답이었다.
"월 5%."
"터무니없습니다!"
로스차일드가 테이블을 쳤다. 탁! 커피잔이 덜컹거렸다. 니콜라의 서류 몇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 은행 직원들은 일반 배급을 받겠군."
맥브라이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로스차일드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직원들이 불만을 품으면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아마 슈나이더에게로. 건설업은 항상 사람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숙련된 회계 직원은...
"월 8%."
양보였다. 첫 번째 균열이었다.
"6%. 최종이오."
맥브라이드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회색 눈이 차갑게 빛났다.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크게 들렸다. 째깍, 째깍, 째깍. 열두 번.
"...동의합니다."
로스차일드의 항복이었다. 그가 시가릴로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반쯤 탄 시가릴로가 아까웠지만, 더 이상 피울 기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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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난 후, 맥브라이드는 그루버를 따로 불렀다.
그들은 회의실 옆 작은 대기실로 들어갔다. 한때는 비서들이 대기하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다. 깨진 창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왔고, 커튼 자국만 남은 벽에는 곰팡이가 검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필요한 게 있소."
맥브라이드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낡은 경첩이 끼익 소리를 냈다.
"말씀하십시오."
그루버가 벽에 기대어 섰다.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권총 근처에 있었다. 습관이었다. 아니, 생존 본능이었다.
"베를린 쪽 정보. 정확한 정보."
맥브라이드의 요구에 그루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왼쪽 눈썹이 1밀리미터 정도 올라갔다. 보통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할 변화였다.
"비싸실 겁니다."
그루버의 대답은 신중했다. 그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캐멀. 필터 없는 것이었다. 전쟁 전에는 건강을 해치는 나쁜 습관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김영호가 곧 돌아올 거요."
맥브라이드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쓰레기를 태우는 것인지, 아니면 시체를 태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가져올 물자로 지불하겠소."
"김영호가 돌아온다고요?"
그루버가 성냥을 그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유황 냄새가 퍼졌다.
"언제?"
"곧."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맥브라이드의 확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루버는 의아해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각자에게는 비밀이 있는 법이었다.
"일주일 안에 보고서를 드리겠습니다."
그루버가 담배를 깊이 빨았다. 연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었다. 연기가 찬 공기 속에서 하얗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장군."
그가 떠나기 전에 덧붙였다.
"베를린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뭔가 큰 것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알고 있소."
맥브라이드의 대답은 담담했다.
그루버가 나간 후, 맥브라이드는 혼자 남아 생각에 잠겼다. 작은 대기실은 음침했다. 벽지는 습기로 얼룩져 있었고, 바닥의 카펫은 곳곳이 썩어 구멍이 나 있었다.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불규칙하게 떨어졌다. 똑. 똑. 똑.
문이 열리고 뤼프케가 들어왔다.
"정말 김영호가 돌아옵니까?"
뤼프케의 질문에 맥브라이드가 미소 지었다. 피곤하지만 자신감 있는 미소였다.
"돌아올 수밖에 없지. 그의 기반이 여기니까."
맥브라이드는 주머니에서 접힌 지도를 꺼냈다. 여러 번 접고 펼친 탓에 접힌 부분이 해어져 있었다.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먼지가 폴폴 일어났다.
"더구나 그가 거기서 뭔가를 발견했다면..."
그의 손가락이 지도 위의 한 점을 가리켰다. 앤트워프였다.
"반드시 거래하러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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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예상대로 김영호가 나타났다.
오후 2시 37분. 남쪽 게이트에서 차량 접근을 알리는 무전이 들어왔다. 맥브라이드는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바쁜 척하며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 글자도 읽히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 번. 규칙적이고 정확한 간격이었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김영호가 들어왔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 선 미국인은 인상적이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여전히 깔끔한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양복은 분명 맞춤이었고, 전쟁 전 브룩스 브라더스 제품으로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소매 끝이 닳아 있었고, 오른쪽 어깨 부분에 기운 자국이 있었다. 그의 구두는 광이 나도록 닦여 있었지만, 밑창은 거의 닳아 없어져 있었다.
"토마스 제퍼슨 윌리엄스입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의 악수는 단단했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있었다. 펜만 잡던 외교관의 손은 아니었다.
"미합중국 국무부 유럽 담당관이죠. 전직이지만."
그가 덧붙일 때 입꼬리에 쓴웃음이 스쳤다. 더 이상 국무부도, 미합중국도 예전 같지 않다는 자조였다.
맥브라이드는 그를 꼼꼼히 관찰했다. 윌리엄스의 회색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겨져 있었지만, 관자놀이 부분이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스트레스성 탈모였다. 그의 턱선은 날카로웠고, 코는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오래전 부러졌던 흔적이었다. 눈은 연한 갈색이었는데,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피로와 긴장의 증거였다.
"얼마나 되오?"
맥브라이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의자에 앉으라는 제스처도 없었다. 서로를 가늠하는 시간이었다.
"200명 정도입니다."
윌리엄스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동부 해안의 억양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 출신일 것이다.
"대부분 정부요인들과 군 장성들. 그리고..."
그가 말을 멈췄다. 계산된 침묵이었다. 정보의 가치를 높이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맥브라이드가 미끼를 물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해병대 1개 대대. 완전 무장 상태입니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무거워졌다. 미군이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김영호가 개입했다. 그는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다.
"제가 앤트워프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죠."
'우연히'라는 말에 맥브라이드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김영호와 우연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무엇을 원하시오?"
맥브라이드가 윌리엄스에게 물었다.
"공식 채널입니다."
윌리엄스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두꺼운 크라프트지 봉투였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여러 번 열고 닫은 흔적이 있었다.
"워싱턴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본국은... 상황이 복잡하지만 살아있습니다."
그가 봉투에서 문서를 꺼냈다. 공식 서한이었다. 미 국무부 양식이었고, 장관의 서명과 진 패트커크릭 대통령의 서명이 있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지만.
"그래서?"
"동맹을 제안합니다. 서방 재건을 위한."
윌리엄스의 제안은 거창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를 것이다. 맥브라이드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김영호가 자신의 가방에서 파일을 꺼냈다. 검은 가죽 서류 가방이었다. 비싸 보였다. 전쟁 전에는 평범한 물건이었겠지만, 지금은 그 자체로 부의 상징이었다.
"제가 중재자 역할을 하겠습니다. 이미 윌리엄스 씨와 예비 협의를 마쳤고요."
파일을 펼치자 타자로 깔끔하게 작성된 제안서가 나왔다. 김영호다운 꼼꼼함이었다.
"구체적인 조건은?"
맥브라이드가 물었다. 그는 의자에 앉았고, 손짓으로 두 사람도 앉으라고 했다. 본격적인 협상의 시작이었다.
"앤트워프 항 사용권."
윌리엄스가 첫 번째 조건을 제시했다.
"그리고 통신 시설 공유."
"대가는?"
"무기와 탄약."
그가 다른 문서를 꺼냈다. 물자 목록이었다.
"M4 카빈 200정, 5.56mm 탄약 10만 발, M67 수류탄 500개..."
목록은 길었다. 맥브라이드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들었지만, 내심 놀랐다. 상당한 양이었다.
"그리고..."
윌리엄스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의료품. 특히 인슐린과 항생제. 미군 비축분입니다."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재벌들이 반발할 거요."
맥브라이드가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로스차일드가."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김영호가 다시 개입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때 짓는 그런 미소였다.
그가 서류를 한 장 더 꺼냈다. 이번에는 달러 지폐였다. 100달러짜리. 새 것이었다.
"미국 정부가 인정하는 전시 통화. 달러와 연동된."
로스차일드의 통화 독점을 깰 수 있는 카드였다. 맥브라이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흥미롭군."
그는 지폐를 들어 불빛에 비춰보았다. 위조 방지 장치가 그대로 있었다. 진짜였다. 적어도 미국 정부가 진짜라고 인정하는 한은.
"좋소. 하지만 단계적으로 진행하시오."
맥브라이드가 지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무 빨리 움직이면 반발만 커질 거요."
"물론입니다."
김영호가 고개를 숙였다. 계산된 공손함이었다.
"그리고..."
맥브라이드가 일어서며 말했다. 회의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환영합니다, 윌리엄스 씨. 브뤼셀에."
---
그날 밤, 맥브라이드는 비밀리에 시라크를 만났다.
장소는 중립 지대였다. 한때 고급 레스토랑이었던 곳의 지하 와인 저장고였다. 와인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참나무 선반은 그대로 있었다. 곰팡내와 습기가 가득했지만, 비밀 회동에는 완벽한 장소였다.
시라크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낡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한때 깔끔했을 백발은 이제 부스스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정치인의 눈이었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저울질하는 눈.
"미국인들이 왔다는 소식 들으셨소?"
맥브라이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촛불이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렸다. 그림자가 벽에서 춤을 추었다.
"들었습니다."
시라크가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잔은 비어 있었다. 와인은 사치품이 된 지 오래였다.
"그래서 찾아왔죠."
"합의 사항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소."
맥브라이드가 담배를 꺼냈다. 말보로 라이트. 이제 세 개비밖에 남지 않았다.
"3년 후 민정 이양."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 주름이 촛불 빛에 깊게 패여 보였다.
"정확히는 2년 4개월 후죠."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소."
맥브라이드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유황 냄새가 퍼졌다.
"미국이 개입하면..."
"프랑스의 입지가 약해진다?"
시라크가 문장을 완성했다. 그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계산을 끝낸 듯했다.
"그래서 제안하는 거요."
맥브라이드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연기가 천장의 거미줄에 걸렸다가 흩어졌다.
"프랑스계 인사를 부시장으로."
"뒤부아를?"
시라크의 질문에는 시험하는 뉘앙스가 있었다.
"아니오. 민간인으로. 당신이 추천하시오."
시라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뇌리에서 후보자 명단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각각의 장단점, 충성도,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통제 가능성.
"실권은?"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빈 껍데기 자리라면 의미가 없었다.
"물자 배급과 민원 처리."
맥브라이드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작지만 중요한 권한이오. 시민들과 직접 접촉하는."
"그리고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시라크가 덧붙였다. 서로 다 아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시라크가 일어섰다. 의자가 돌바닥에 끌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알았다. 시라크는 이미 결정했다. 누구를 추천할지까지도. 아마도 마리 루이즈 베르나르일 것이다. 전직 파리 시의원. 온건파이면서도 유능한 행정가. 무엇보다 시라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인물.
"아, 그리고 장군."
떠나려던 시라크가 돌아서며 말했다.
"민간정부에서도 당신의 자리는 보장될겁니다, 중요한 사람이시니깐, 다만"
정통성 문제. 결국 나온 것이다. 촛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림자가 더욱 길어졌다.
"지금같이 모든걸 혼자 짊어지겠다는 듯이 멋대로 행동은 못하시게 되겠죠"
"알고 있소."
맥브라이드의 대답은 담담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당신은?"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두 정치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계산과 추측이 오갔다.
시라크가 웃었다. 피곤하지만 여전히 카리스마 있는 웃음이었다. 그의 치아가 촛불 빛에 노랗게 빛났다.
"전 항상 준비되어 있죠. 문제는 당신이 그 자리를..."
바로 그때였다.
쿠웅!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지하 와인 저장고의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촛불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끄아앙- 끄아앙- 끄아앙-
습격 경보였다. 3번 울리고 멈추고, 다시 3번. 동쪽에서의 대규모 접근을 의미했다.
맥브라이드와 시라크는 동시에 움직였다. 정치적 계산은 뒤로 미뤄졌다. 지금은 생존이 우선이었다.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동안 또 한 번의 폭발이 있었다.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건물이 흔들렸다.
밖으로 나오자 혼란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동쪽 지평선에서 거대한 화염이 치솟았다. 검은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고, 그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뭐야..."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연기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건물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브뤼셀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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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다시 특사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무장 호위대 50명을 대동했다.
"위협입니까?"
"당신이 그런 것에 굴하지 않을 사람이란 것쯤은 진작에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협상이죠."
특사의 이름은 하인리히 뮐러. 전직 독일군 대령이었다.
"우리의 제안을 재고하셨습니까?"
뮐러의 첫 마디였다.
"답은 여전히 같소."
"유감입니다. 그럼 다른 얘기를 해야겠군요."
뮐러가 서류를 꺼냈다.
"알고 계십니까? 당신의 정통성 문제를."
"무슨 소리요?"
"간단합니다. 당신은 선출된 적이 없죠. 계엄령? 그것도 10년이 넘었습니다. 법적으로 무효입니다."
맥브라이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역으로 되물었다.
"당신네들이 법을 논하는가?"
뮐러가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살아있는 EU 의원들이 있습니다. 합법적인 의원들이죠. 그들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면?"
"어디 있소, 그들이?"
"안전한 곳에. 그리고 그들은 이미 결의안을 준비했습니다."
뮐러가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유럽의회 잔존 의원 17명은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첫째, 로이 맥브라이드의 불법적 군사독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그만!"
맥브라이드가 소리치며 빠르게 권총을 뽑아들었다.
"돌아가시오, 당장 쏴버리기 전에"
50명의 무장경호대가 일제히 맥브라이드에게 총구를 겨눴다.
뮐러는 양 손을 들고 말했다.
"당신의 자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겁니다. 총으로 유지되고 있는 권력이 더 많은 총을 마주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회를 애써 차버리리겠다면야."
"혹시 당신도 '청소' 대상이 될까 두려우신거려면야 걱정하지 마시죠, 아일랜드인은 게르만의 동맹이 아니었습니까?"
"닥쳐라, 그리고, 당장 돌아가."
"각하의 의지만큼이나 각하의 사람들도 신뢰가 굳건하길 빕니다. 저 충직한 아리아인처럼 말이죠"
뮐러는 맥브라이드 뒤의 뤼프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온몸에 수류탄을 감고서, 당장이라도 뮐러에게 뛰어들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돌아갔다.
뤼프케가 말했다.
"저런말 들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장군께서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지는..."
"자네 말고 또 누가 알겠나?"
"...."
"내 심장에 납탄을 박아달라고 하면 박아줄텐가?"
"그때가 제가 처음으로 항명을 하는 날이 될것같습니다"
"....스미스 차관을 불러, '충성파'를 결집해야겠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문제가 계속 나타났다.
그래서, 맥브라이드는 이번엔 자기가 먼저 문제를 일으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