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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진혼곡


프레빌 48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0

다음날 아침, 맥브라이드는 그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더 짙어졌고,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무엇보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군인인가? 살인자의 눈인가? 아니면 정치가의 눈인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뤼프케가 아니었다. 뜻밖에도 프랑스군의 뒤부아 소장이었다.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앉게. 무슨 일인가?"


뒤부아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


"시라크 대통령님이... 위험하다는."


맥브라이드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하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무슨 근거로?"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일부 장교들 사이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뒤부아가 맥브라이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장군님, 혹시..."


"혹시 뭔가?"


"아닙니다. 제가 너무 예민한가 봅니다."


뒤부아가 일어섰다. 하지만 문 앞에서 돌아보았다.


"장군님,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됩니까?"


"말하게."


"약속, 정말로 지키실 겁니까?"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맥브라이드가 잠시 침묵했다.


"약속은 지켜져야지."


모호한 대답이었다. 뒤부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그가 나간 후, 맥브라이드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결심이 흔들렸다. 뒤부아의 진심을. 그것을 배신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미 톱니바퀴는 돌기 시작했다.


자정이 넘어 뤼프케가 다시 나타났다.


"결정하셨습니까?"


맥브라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나?"


"협상을 시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시라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약속했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그들의 기대를 배신할 수 없겠죠."

진실이었다. 정치인은 지지자들의 포로였다.


맥브라이드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권총과 독약, 그리고...


낡은 성경책이 있었다.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그가 성경책을 꺼내 무작위로 펼쳤다.


'때로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니라' - 요한복음 11:50


운명의 장난인가.


"언제?"


맥브라이드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내일 각하께서 그 자를 불러주십쇼, 미래를 위한 회의를 해야한다고."


"깨끗하게 해라."


"베를린의 소행으로 보이게 하겠습니다. 이미 위조 문서와 증거를 준비했습니다."


역시 뤼프케다웠다. 항상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팀은?"


"저를 포함, 신뢰할 수 있는 인원 4명. 모두 고아 출신입니다. 가족이 없어 추적이 어렵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맥브라이드가 일어섰다.


"나가게. 혼자 있고 싶어."


뤼프케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홀로 남은 맥브라이드는 위스키 병을 꺼냈다.


직접 병에 입을 댔다. 알코올이 목구멍을 태웠다.


'용서하지 마시오, 부디..'

마음속으로 사죄했다. 하지만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


내일이면 약속된 1년이다.


프랑스 문화원 2층 회의실.


시라크는 창가에 서 있었다. 석양이 브뤼셀의 폐허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대통령님, 다들 도착했습니다."


들롱이 보고했다.


회의실에는 프랑스계 주요 인사 12명이 모여 있었다. 구 정부 관료, 군 장교, 그리고 몇몇 재벌들.

시라크가 돌아서며 말했다.


"내일이다."


짧은 선언이었지만, 모두가 의미를 알았다.


"준비는 되셨습니까들?"


고개들이 끄덕여졌다. 하지만 불안도 보였다.


"맥브라이드가 순순히 물러날까요?"


누군가가 물었다.


시라크가 씁쓸하게 웃었다.


"글쎄...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가 와인을 따랐다. 샤토 마고 1996년. 아마 브뤼셀에 남은 마지막 병일 것이다.


"건배하지. 민주주의의 귀환을 위해."


잔들이 부딪쳤다. 맑은 소리가 울렸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쌓여 있었다. 민정 이양 계획서, 선거 준비 문서, 헌법 초안...


"준비는 끝났습니다."


들롱이 보고했다.


"내일 아침 9시, 맥브라이드가 공식 발표를 할 겁니다."


"정말로 할까?"


시라크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있었다.


"글쎄요..."


들롱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구식 유선 전화였다. 


"여보세요."


시라크가 받았다.


"저녁 9시, 중립 지역에서 만나고 싶소."


맥브라이드였다.


시라크가 놀랐다. 하지만 목소리는 침착했다.


"갑작스럽군요."


"중요한 얘기가 있소."


"좋습니다. 장소는?"


"성 미셸 성당 지하실."


전화가 끊겼다.


시라크와 들롱이 시선을 교환했다.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들롱의 우려는 당연했다.


"그럴 수도 있지."


시라크가 일어섰다.


"하지만 가봐야겠어."


"위험합니다!"


"위험하지 않은 게 어디 있나?"


시라크가 코트를 입었다. 오래된 버버리 코트였다. 전쟁 전부터 입던 것이었다.


"호위를 데려가시죠."


"아니야. 신뢰를 보여야 해."


"하지만..."


"괜찮아."


시라크가 미소 지었다. 피곤하지만 따뜻한 미소였다.


"맥브라이드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더 쉬운 방법이 많았을 거야."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들롱은 여전히 불안했다.


시라크는 서랍에서 편지를 꺼냈다.


"들롱."


"예, 대통령님."


"이것을 맡아주게."


봉인된 편지였다.


"이건..."


"유서야."


충격이 퍼졌다.


"대통령님!"


"조용히들 하게."


시라크가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거야. 정치인이라면 항상 최악을 준비해야지."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현실주의자야. 그리고 현실주의자는 때로 잔혹한 선택을 하지."


시라크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지 모르니까


"대통령님..."


"부탁이야, 이만 나가보게"


들롱이 편지를 받았다. 무거웠다. 종이 이상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애써 눈물을 훔치며 나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운명을 향해 걸어가는 노정치인의 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


8시 50분.


성 미셸 성당은 반쯤 무너져 있었다. 한때는 브뤼셀의 자랑이었던 고딕 성당. 이제는 뾰족탑이 부러지고 스테인드글라스는 깨져 있었다.


시라크가 도착했을 때, 맥브라이드는 이미 와 있었다.


역시 혼자였다.


두 사람이 지하실로 내려갔다. 계단은 무너질 듯 삐걱거렸다. 


지하실은 춥고 습했다. 촛불 몇 개가 유일한 광원이었다.


"와주어서 고맙소."


맥브라이드가 먼저 말했다.


"초대를 거절할 수 없죠."


시라크가 맞은편에 앉았다. 오래된 나무 의자가 삐걱거렸다.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서로를 관찰했다.


맥브라이드는 더 야위어 보였다. 광대뼈가 도드라졌고, 눈은 깊이 꺼져 있었다. 


시라크는 더 늙어 보였다. 주름이 깊어졌고, 머리는 더 희어졌다.


"내일이군요."


시라크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그래요."


"준비는 되셨습니까?"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맥브라이드가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준비라..."


그가 담배를 꺼냈다. 시라크에게도 권했다. 시라크가 받았다.


두 사람이 담배를 피웠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솔직히 말하죠."


맥브라이드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오."


"알고 있습니다."


시라크의 대답은 차분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죠."


"약속..."


맥브라이드가 그 단어를 되뇌었다.


"10년 전, 많은 약속이 있었소. 평화, 번영, 더 나은 미래... 다 어떻게 됐소?"


"그래서 더욱 지켜야 합니다."


시라크가 단호하게 말했다.


"신뢰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맥브라이드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당신 사람들이 무기를 모으고 있다는 것 알고 있소."


직접적인 공격이었다. 시라크가 잠시 굳었다.


"방어를 위해서입니다."


"누구로부터?"


"불확실한 미래로부터."


교묘한 대답이었다.


"나로부터가 아니고?"


"그것은 장군님이 결정할 일이죠."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그때 맥브라이드가 뜻밖의 말을 했다.


"도와주시오."


"뭘요?"


"브뤼셀을 지키는 일을."


시라크가 이해하지 못했다.


"저는 이미..."


"아니오. 더 깊이 관여해 주시오."


맥브라이드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공동 정부. 진짜 공동 정부를 만듭시다."


---


회의는 성공적이었다. 그것이 정말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브뤼셀은 새로운 내일을 맞이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 그리 하는 것으로 알고, 먼저 들어가보겠소, 아니, 들어가보겠습니다 대통령 각하."


맥브라이드가 먼저 나갔다.


시라크는 한동안 회의실에 앉아있었다.


30분 정도 뒤


"아무래도 내가 죽을 자리는 아닌거 여기가 아닌거 같군, 아쉬워 그래도 신의 품속에서 마지막을 맞고 싶었는데 말이야"


성당을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11월의 브뤼셀은 춥고 습했다.


골목길로 들어섰다.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니었다. 일부러 한적한 길을 택했다.


100미터쯤 걸었을 때였다.


그림자가 움직였다. 하나, 둘, 셋, 넷.


훈련된 움직임이었다. 소리도 없었다.


시라크가 멈춰 섰다.


"나왔으면 인사라도 하지."


프랑스어였다.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림자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체구로 짐작할 수 있었다.


젊은 남자. 아마 20대 후반.


"죄송합니다."


복면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도 젊었다.


"뭐가 죄송한가? 명령을 따르는 것이?"


시라크가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암살자들이 긴장했다.


하지만 꺼낸 것은 무기가 아니었다.


담배였다. 골루아즈. 프랑스 담배.


"마지막 한 대 피워도 되나?"


대답은 없었다. 침묵을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 불꽃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맥브라이드가 보낸 건가?"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대답 안 해도 돼. 이미 알고 있으니까."


시라크가 깊게 담배를 빨았다. 연기가 폐를 채웠다.


"전할 말이 있나?"


암살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부디 천국에서 자신을 끝까지 저주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나도 전하지."


시라크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


"맥브라이드에게 전해라. 이해한다고. 그리고..."


그가 미소 지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잘 부탁한다고."


마지막 말이었다.


담배를 다 피우고 필터를 버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첫 발은 가슴이었다. 소음기 덕분에 둔탁한 소리만 났다.


푹.


시라크가 뒤로 비틀거렸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눈을 뜨고 암살자를 보았다.


"젊은이..."


피가 입에서 흘렀다.


"너도... 언젠가는..."


두 번째 총알이 머리를 관통했다.


이번엔 쓰러졌다. 천천히, 우아하게.


마치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이.


암살자들이 시체에 다가갔다.


주머니를 뒤져 위조된 증거를 심었다. 베를린의 명령서, 독일 마르크, 하켄크로이츠가 새겨진 탄피.


완벽한 연출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를 놓쳤다.


시라크의 얼굴에 남은 미소를.


씁쓸하지만 이해하는 미소.


정치가의 마지막 미소.


그것은 아침까지 남아 있었다.


마치 브뤼셀을, 맥브라이드를,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을 조롱하듯이.


뤼프케가 시라크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그자리에서 보고서를 썼다.


"베를린의 암살자가 시라크를 죽였습니다. 평화 협상을 막기 위해서."


역사는 이렇게 쓰여진다.


거짓과 배신, 그리고 침묵의 공모로.


---


맥브라이드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전화가 울렸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완료되었습니다."


뤼프케의 목소리였다. 감정이 없었다.


"...알았네."


맥브라이드가 전화를 끊었다.


끝났다.


시라크는 죽었고,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이제 뒤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거울을 보았다.


거기 비친 것은 누구인가?


로이 맥브라이드? 유럽재건위원회의 위원장?


아니면 유럽통합군의 중앙? 그저 또 다른 독재자?


답은 없었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피로 물든 아침이.


그리고 그 피는 결코 씻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은 했다.


이제 그 선택과 함께 살아가야 했다.


죽을 때까지.


아니, 어쩌면 그 이후까지도.


---


잿빛 하늘에서 검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눈이 아니었다. 재였다. 어젯밤 불탄 건물들의 잔해가 바람에 실려 내리는 검은 눈송이들. 방사능에 오염된 대기와 뒤섞여 도시 전체를 상복처럼 뒤덮고 있었다. 공기는 축축했고, 영하 4도의 날씨임에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오직 재만이, 문명의 시체에서 떨어진 검은 비듬만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다.


대광장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침묵의 행렬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혹은 검은 완장을 두른 사람들. 프랑스인과 브뤼셀 시민의 구분은 오늘만큼은 없었다. 모두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충격과 슬픔,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알 수 없는 두려움.


7살쯤 되어 보이는 프랑스 소녀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소녀의 파란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이 시대의 아이들은 울음조차 아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낡은 인형은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 있었고, 남은 팔로는 꼭 껴안고 있었다. 마치 그것마저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듯이.


거리의 확성기에서는 장송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쇼팽의 장송곡 3악장. 하지만 스피커가 고장 나 있어서 음악은 간헐적으로 끊겼고, 그때마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여 들었다. 마치 죽은 자의 마지막 숨소리처럼.


한 노인이 절뚝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왼쪽 다리가 없었다. 전쟁에서 잃은 것이리라. 목발 대신 녹슨 철 파이프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고, 눈은 백내장으로 흐릿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광장으로 향했다. 


"시라크를 위해서라도..." 


그가 중얼거렸다. 침이 섞인 프랑스어였다. 이가 거의 없어서 발음이 부정확했다.


광장 입구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서 있었다. 프랑스군과 브뤼셀군이 함께. 그들의 총구는 하늘을 향하고 있었지만, 손가락은 방아쇠 울타리 안에 걸려 있었다. 긴장하고 있었다. 누구를 경계하는 것일까? 베를린의 테러리스트? 아니면 분노한 시민들?


---


대광장은 이미 검은 바다가 되어 있었다. 


15,000명. 브뤼셀 전체 인구의 거의 전부가 나온 것이다.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더 이상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사람들의 체온이 뒤섞여 하얀 김이 피어올랐고, 그것이 검은 재와 뒤섞여 기괴한 안개를 만들어냈다.


연단은 광장 중앙에 설치되어 있었다.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시라크의 관이 놓여 있었다. 참나무로 만든 관이었다. 브뤼셀에 남은 마지막 좋은 목재로 만든 것이리라. 프랑스 국기가 관을 덮고 있었는데, 삼색기의 파란색 부분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시라크가 암살당할 때 흘린 피였다. 일부러 씻지 않은 것이다. 증거로, 상징으로, 그리고 분노의 표시로.


관 주위에는 화환들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꽃은 없었다. 이 죽은 세계에 꽃이 어디 있겠는가. 대신 솔잎과 마른 풀, 그리고 녹슨 철사로 엮은 초라한 화환들. 하지만 그 하나하나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배급 빵을 관 앞에 놓았고, 또 누군가는 마지막 담배를 바쳤다.


연단 옆에는 프랑스군 의장대가 도열해 있었다. 한때는 화려했을 제복이 이제는 누더기가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꼿꼿이 서 있었다. 총구에는 검은 리본이 묶여 있었고, 바람에 펄럭였다. 


뒤부아 소장이 의장대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군복 왼쪽 가슴에는 시라크가 준 훈장이 달려 있었다. 레지옹 도뇌르 5등급. 이제는 유품이 되어버린.


오전 9시 7분


맥브라이드가 연단에 올랐다.


그의 걸음은 무거웠다. 군화가 나무 계단에 닿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쿵. 쿵. 쿵. 마치 못을 박는 소리 같았다. 관 뚜껑에 못을 박는.


그의 얼굴은 하루 사이에 10년은 늙어 보였다. 평소에도 깊었던 이마 주름은 이제 골짜기가 되어 있었고, 눈 밑의 다크서클은 멍이 든 것처럼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수염은 깎지 않아 덥수룩했고, 군데군데 흰 수염이 섞여 있었다. 군복은 구겨져 있었다. 다림질을 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으리라.


그가 마이크 앞에 섰을 때, 잠시 침묵이 흘렀다. 15,000개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와 분노, 슬픔과 의심이 뒤섞인 시선들. 


맥브라이드는 마이크를 잡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피로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일까. 그는 심호흡을 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재 냄새와 죽음의 냄새가 섞인 공기.


"시민 여러분..."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마이크가 그 갈라짐까지 증폭시켜 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는 기침을 하고 다시 시작했다.


"오늘 우리는... 큰 별을 잃었습니다."


'별'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진짜였다. 시라크를 별에 비유한 것은 준비된 수사가 아니었다.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었고, 그래서 더 진실하게 들렸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제5공화국의 대통령. 하지만 그보다도..."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관을 바라보았다. 프랑스 국기 아래 잠든 한 남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아서 그와 대립하고, 협상하고, 때로는 타협했던 남자.


"우리 모두의 아버지였습니다."


군중 속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한 중년 여성이었다. 프랑스인이었다. 그녀의 흐느낌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남자들도 울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눈물조차 사치가 되어버렸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제 밤..."


맥브라이드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단호해졌다. 슬픔을 분노로 바꾸는 순간이었다.


"비열한 암살자의 손에... 그가 쓰러졌습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증거물을 꺼냈다. 비닐봉지에 든 탄피였다. 7.62mm. 소련제 저격소총의 탄피였다.


"베를린의 스파이였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수십 년간 군대에서 익힌 명령 어조였다.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는 단호함.


"그들은 우리를 분열시키려 했습니다! 프랑스와 브뤼셀이 손잡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군중의 감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슬픔이 분노로. 눈물이 증오로.


"복수를!"


누군가가 외쳤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베를린을 불태워라!"


또 다른 목소리가 합세했다.


곧 구호가 합창이 되었다. "복수! 복수! 복수!" 


15,000개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우고, 건물들 사이에서 메아리쳤다. 검은 재가 더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도 분노하는 듯이.


맥브라이드가 손을 들었다. 천천히, 위엄 있게. 


함성이 잦아들었다. 하나둘씩, 물결이 잠잠해지듯이.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침묵이었다. 기대의 침묵. 지도자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하지만..."


맥브라이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차분했다. 감정을 억제한, 계산된 차분함.


"시라크 대통령님은 복수가 아닌 화해를 원했습니다."


그가 회중시계를 꺼냈다. 금색 회중시계였다. 시라크의 것이었다.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어제... 암살당하기 불과 한 시간 전, 그는 저와 만났습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만났으니까. 단지 그 만남의 결과가...


"그리고 우리는 합의했습니다. 역사적인 합의를."


그가 문서를 꺼냈다. 양피지에 쓰인 문서였다. 어젯밤 급하게 작성한 것이지만,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차를 부어서 누렇게 만들고, 가장자리를 살짝 태웠다. 역사적 문서처럼 보이도록.


"브뤼셀-파리 통합 협정."


그가 문서를 들어 보였다. 바람에 펄럭였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맥브라이드가 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강해졌다. 마치 시라크의 유언을 대독하는 것처럼.


*"우리, 브뤼셀과 파리의 대표자들은, 인류 문명의 재건을 위해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첫째, 모든 행정적 구분을 철폐하고 하나의 정부 아래 통합한다.*


*둘째, 프랑스인과 브뤼셀 시민의 차별을 금지하고 동등한 권리를 보장한다.*


*셋째, 1년 후 민주적 선거를 통해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한다..."*


마지막 조항을 읽을 때, 광장이 술렁였다. 


1년 후 선거. 


많은 이들이 예상했다. 시라크의 죽음을 핑계로 맥브라이드가 선거를 무기한 연기할 거라고. 계엄령을 더 강화할 거라고. 하지만...


"이것이 시라크 대통령의 유산입니다!"


맥브라이드가 소리쳤다. 


"그리고 저는...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1초, 2초, 3초...


그리고 박수가 터졌다.


처음에는 한 명이었다. 프랑스 노부인이었다. 그녀의 주름진 손이 부딪히는 소리가 홀로 울렸다. 짝. 짝. 짝.


그 다음은 두 명, 네 명, 열 명...


박수가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곧 15,000명 모두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광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것은 환호의 박수가 아니었다. 슬픔의 박수였다. 시라크를 위한, 잃어버린 세계를 위한, 그리고 아직 포기하지 않은 희망을 위한.


---


뒤부아 소장이 연단에 올랐다.


그의 걸음걸이는 군인의 것이었다. 정확하고 각이 진 걸음. 하지만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그가 마이크 앞에 섰을 때,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기를 세 번. 


"저는..."


드디어 말이 나왔다. 하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군인입니다. 말주변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시라크의 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턱이 떨리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통령님은... 아버지 같은 분이었습니다."


'아버지'. 그 단어가 나오자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대통령님만이 희망이었습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수첩이었다. 가죽 표지가 닳아 있었다.


"대통령님이 주신 겁니다. '일기를 써라. 훗날 역사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죠."


그가 수첩을 펼쳤다. 떨리는 손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마지막 페이지입니다. 어제 쓴..."


목소리가 멈췄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읽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맥브라이드와의 협상. 어렵겠지만 해야 한다. 프랑스인들을 위해. 아니, 모든 생존자들을 위해. 평화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뒤부아가 수첩을 덮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거친 군인의 얼굴을 타고 내리는 눈물. 


"대통령님은 평화를 원했습니다. 끝까지."


그가 관을 향해 경례를 올렸다. 완벽한 군대식 경례였다. 


프랑스군 전체가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짠, 하는 소리가 났다. 수백 개의 팔이 동시에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그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라 마르세예즈였다. 프랑스 국가.


*"Allons enfants de la Patrie..."*


처음에는 군인들만 불렀다. 하지만 곧 프랑스 민간인들도 합류했다. 


*"Le jour de gloire est arrivé..."*


영광의 날이 왔다는 가사가 이토록 슬프게 들린 적이 있었을까. 이것은 승리의 노래가 아니었다. 장송곡이었다. 프랑스를 위한, 시라크를 위한, 그리고 죽어가는 세계를 위한.


노래가 끝났을 때, 뒤부아는 한 마디를 더했다.


"대통령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평화를... 통합을... 지지하겠습니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프랑스군이 맥브라이드의 통합 정부를 인정한다는.


---


장례 행렬이 시작되었다.


여섯 명의 장정이 관을 들었다. 프랑스인 셋, 브뤼셀 시민 셋. 그들의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관이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책임이 무거운 것이었다.


행렬은 천천히 움직였다. 광장을 나와 대로를 따라. 한때는 번화가였을 곳. 이제는 폐허가 된 거리를 지나.


길가에는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일부는 무릎을 꿇었다. 한 노파는 묵주를 들고 기도하고 있었다. 구슬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아이들도 있었다. 전쟁 후에 태어난 아이들. 그들은 시라크가 누구인지 잘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슬픔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도 조용히 서 있었다. 평소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행렬이 반쯤 무너진 성당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종이 울렸다.


녹슨 종이 삐걱거리며 울렸다. 누가 치는 것일까? 종탑을 올려다보니 한 남자가 있었다. 한쪽 팔이 없는 남자였다. 남은 한 팔로 필사적으로 종을 치고 있었다.


댕- 댕- 댕-


불규칙한 종소리였다. 하지만 그 불규칙함이 오히려 가슴을 울렸다. 


다른 곳에서도 종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가까이서. 브뤼셀의 모든 종이 울리고 있었다. 교회 종, 시계탑 종, 심지어 누군가는 철 파이프를 두드려 종소리를 냈다.


도시 전체가 울고 있었다.


---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한때는 잘 가꿔진 묘지였겠지만, 이제는 황폐해져 있었다. 묘비들은 쓰러져 있었고, 잡초가 무성했다. 아니, 잡초조차 대부분 죽어 있었다. 방사능 때문에.


새로 판 묘혈이 기다리고 있었다. 깊이 2미터. 폭 1미터. 인간 한 명이 들어가기에 딱 맞는 크기. 우리는 모두 결국 이 크기로 돌아간다. 왕이든 거지든. 그것이 귀쟁이와 난쟁이, 그리고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었다.


관이 천천히 내려졌다. 로프가 삐걱거렸다. 한 번 미끄러질 뻔했다. 잡고 있던 사람의 손에서 로프가 미끄러진 것이다. 다들 숨을 멈췄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재빨리 잡았다. 관은 무사히 내려갔다.


맥브라이드가 첫 번째 흙을 뿌렸다. 


한 줌의 흙. 방사능에 오염된 흙. 하지만 그래도 브뤼셀의 흙이었다. 시라크가 마지막 날들을 보낸 도시의 흙.


툭.


흙이 관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묘지의 정적을 깼다.


뒤부아가 두 번째 흙을 뿌렸다. 그의 손이 떨려서 흙이 일부 옆으로 흩어졌다.


그 다음은 시민들이었다. 한 명씩, 한 줌씩. 프랑스인과 브뤼셀 시민이 번갈아가며. 


한 어린 소년이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흙 대신 다른 것을 관 위에 놓았다. 종이비행기였다. 배급 포장지로 접은 조그만 비행기.


"하늘에서도 날 수 있을 거예요."


소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종이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빙글빙글 돌며 하늘로 올라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것을 따라갔다. 검은 하늘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아니면 그저 우연이었을 수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믿고 싶어 했다. 무언가 더 큰 것이 있다고. 이 지옥 같은 세상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


장례식이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묘지에 남아 있었다. 갈 곳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아직 작별이 끝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맥브라이드는 혼자 남았다. 무덤 앞에 서서.


"용서해주시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을요?"


뤼프케의 목소리였다. 그는 10미터쯤 떨어진 나무 뒤에 서 있었다. 경호를 위해서. 항상 그랬듯이.


맥브라이드는 놀라지 않았다. 뤼프케가 거기 있을 줄 알았다. 


"모든 것을."


그의 대답은 모호했다. 하지만 뤼프케는 이해했다. 


둘은 한동안 침묵 속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 11월의 바람. 죽음의 계절의 바람.


"가시죠."


뤼프케가 말했다.


"그래."


맥브라이드가 돌아섰다. 하지만 몇 걸음 가다가 멈췄다.


"알버트."


"예?"


"고맙네."


단순한 감사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젯밤의 일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일들에 대한.


뤼프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묘지를 떠났다. 뒤에는 시라크의 무덤이 남았다. 신선한 흙이 수북이 쌓인 무덤. 묘비는 아직 없었다. 나중에 세울 것이다. 만약 '나중'이 있다면.


---


맥브라이드의 집무실. 


유일한 불빛은 책상 위의 등유 램프였다. 노란 불빛이 흔들렸다.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벽에, 천장에, 그의 얼굴에.


책상 위에는 위스키 병이 놓여 있었다. 조니 워커 블랙. 이미 3분의 2가 비어 있었다. 


맥브라이드는 취해 있었다. 드물게 보는 모습이었다. 아니, 이 정도로 취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넥타이는 풀어져 있었고, 셔츠의 단추 두 개가 풀어져 있었다.


문이 열렸다. 노크도 없이. 


뤼프케였다.


"내일 일정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감정이 없는, 기계적인 목소리. 


"됐어."


맥브라이드가 손을 저었다. 동작이 평소보다 크고 부정확했다. 


"오늘은 그만하자."


뤼프케가 서류를 책상 위에 놓았다. 하지만 나가지 않았다. 그는 맥브라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석하듯이. 아니면 걱정하듯이.


"뭘 보고 있나?"


맥브라이드가 물었다. 말이 살짝 꼬였다.


"후회하십니까?"


뤼프케의 질문은 직접적이었다. 너무 직접적이어서 잔인했다.


맥브라이드가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그가 잔을 들어 뤼프케에게 보였다. 위스키가 출렁였다.


"자네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아니오."


뤼프케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망설임이 없었다.


"난 후회해."


맥브라이드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아니, 들이켰다. 목구멍이 탔다. 


"하지만..."


그가 잔을 내려놓았다. 탁, 소리가 크게 났다.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역설이었다. 하지만 진실이었다.


"왜요?"


뤼프케가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것 같았다.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


맥브라이드가 의자에 몸을 뒤로 젖혔다. 낡은 가죽이 삐걱거렸다.


"우리는 늘 그래. 최악을 피하려다 차악을 선택하지. 그리고 그 차악이 쌓이고 쌓여서..."


그가 말을 멈췄다. 손짓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이 폐허가 된 도시를. 이 죽어가는 세계를.


"지옥이 되는 거지."


침묵이 흘렀다. 등유 램프의 심지가 타는 소리만 들렸다. 치익, 치익.


"그래도..."


뤼프케가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그래도?"


"살아있습니다. 우리도, 도시도."


"그게 다야?"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뤼프케의 질문에 맥브라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권총이 있었다. 글록 19.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유리병이었다.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청산가리. 치사량의 두 배.


뤼프케의 시선이 그것에 고정되었다.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걱정? 아니면 이해?


"언제부터..."


"처음부터."


맥브라이드가 서랍을 닫았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언제까지요?"


"모르겠어."


솔직한 대답이었다. 


맥브라이드가 일어섰다. 약간 비틀거렸다. 뤼프케가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손을 들어 거절했다.


그가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젖혔다. 밖은 어두웠다. 브뤼셀의 밤. 죽은 도시의 밤.


하지만 저 멀리, 희미한 불빛들이 보였다. 모닥불일 수도, 촛불일 수도. 생존자들의 불빛.


"저것 봐."


맥브라이드가 말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았어."


"네."


"그럼 나도... 우리도 아직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뤼프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으로 향했다.


"가게."


맥브라이드가 말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뤼프케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나가기 전에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그는 각하를 선택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의 미래를 위해."


문이 닫혔다. 


맥브라이드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책상으로 돌아갔다. 서랍을 다시 열었다. 권총과 독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진을 꺼냈다. 


낡은 사진. 전쟁 전 더블린에서 찍은.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햇살 아래서. 평화로운 세상에서.


"아버지..."


맥브라이드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다. 어린아이 같았다.


"저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을까요?"


대답은 없었다. 


있을 리 없었다.


밖에서 시계탑이 울렸다. 


댕- 댕- 댕-


자정이었다. 


시라크가 묻힌 날이 끝났다. 


그리고 맥브라이드가 자신의 영혼 일부를 함께 묻은 날이 끝났다.


하지만 내일은 또 온다.


해는 또 뜬다.


비록 그것이 재 구름 너머의 병든 태양일지라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비록 그것이 지옥에서의 삶일지라도.


---


맥브라이드는 잠들지 못했다.


위스키도, 피로도 그를 잠들게 하지 못했다. 대신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천장의 균열을 세고 있었다. 17개. 어제는 16개였는데 하나가 더 생겼다. 건물도 죽어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시라크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평화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지막 대화에서 시라크가 한 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무엇이든'에 자신의 목숨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니, 정말 몰랐을까?


맥브라이드는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숙취의 시작이었다.


그는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디디며 화장실로 갔다. 수도는 끊긴 지 오래였다. 대신 양동이에 받아둔 물이 있었다. 검은 물이었다. 정수되지 않은, 오염된 물. 하지만 이것조차 귀했다.


얼굴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때렸다. 정신이 조금 들었다.


거울을 보았다. 


거기 비친 남자는 낯설었다. 


한때 젊고 이상에 불타던 장교는 어디 갔는가? 대신 거기엔 지치고 냉소적인 중년 남자가 있었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영구적인 것이 되었고, 이마의 주름은 깊은 골짜기가 되었다. 관자놀이의 흰 머리는 더 많아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눈이었다.


한때는 희망이 있었던 눈. 이제는 그저 버티고 있는 눈.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자의 눈.


"이게 나인가..."


그가 거울 속 자신에게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거울이 깨졌다.


작은 금이 가더니, 스스로 산산조각이 났다. 아마 온도 변화 때문이리라. 아니면 단순히 수명이 다한 것이거나.


깨진 거울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각 조각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일그러지고 왜곡된 얼굴들.


어쩌면 이게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


그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서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배급 보고서, 사망자 명단, 의료품 재고, 연료 상황...


숫자들. 차가운 숫자들. 하지만 각 숫자 뒤에는 인간의 삶과 죽음이 있었다.


*금일 사망자: 17명*

*- 영양실조: 6명*

*- 폐렴: 4명*

*- 자살: 3명*

*- 폭력: 2명*

*- 기타: 2명*


자살이 늘고 있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희망이 멀어질수록.


그는 펜을 들었다. 뭔가 써야 했다. 명령이든, 지시든, 무엇이든.


하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선들. 원과 사각형. 그리고...


시라크의 얼굴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린 것이었다. 투박한 스케치였지만, 닮았다.


그는 종이를 구겼다. 쓰레기통에 던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죄책감은 이미 그의 가슴속 깊이 자리 잡았다.


"필요한 일이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정말로?"


마치 시라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었나?"


맥브라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환청이었다. 피로와 죄책감이 만들어낸.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내가 살아있었다면, 선거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살아있었다면, 프랑스인들은..."


"내가 살아있었다면..."


"닥쳐!"


맥브라이드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빈 집무실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다시 침묵.


하지만 이번에는 더 무거운 침묵이었다.


죽은 자가 남긴 침묵.


새벽 5시 33분


동이 트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붉은빛이었다. 오염된 대기를 통과한 병든 햇빛.


맥브라이드는 창가에 서서 일출을 보았다.


한때는 아름다웠을 광경. 이제는 그저 또 다른 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뿐.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교회 종이 아니었다. 시계탑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쇠파이프를 두드리는 소리였다. 


댕- 댕- 댕-


아침을 알리는 나름의 의식이었다.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의식.


곧 도시가 깨어날 것이다.


생존자들이 또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설 것이고, 일하러 갈 것이고, 그리고 밤이 되면 다시 잠들 것이다.


단순한 삶.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삶.


그리고 맥브라이드도 그 일부였다.


좋든 싫든.


살인자든 구원자든.


그는 여전히 그들의 지도자였다.


---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찾아왔다.


마리 루이즈 베르나르였다. 시라크가 추천했을 인물. 전직 파리 시의원.


50대 초반의 여성은 단정했다. 전쟁과 죽음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회색 정장은 낡았지만 깨끗했고, 짧은 갈색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넘겨져 있었다.


"찾아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군님."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직업 정치인의 훈련된 목소리였다.


"앉으시오."


맥브라이드가 의자를 가리켰다.


"시라크 대통령님이... 생전에 저를 추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유서를 봐도 될까요?"


직접적인 요구였다. 하지만 정중했다.


맥브라이드는 서류를 꺼냈다. 위조된 문서였지만, 정교했다.


그녀가 문서를 읽는 동안, 맥브라이드는 그녀를 관찰했다.


차분한 표정. 하지만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류를 든 손이.


"진짜인가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무슨 뜻이오?"


"이 서명이... 정말 대통령님의 것인가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니면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소."


맥브라이드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녀가 한참을 더 쳐다보았다. 그리고...


"알겠습니다."


서류를 내려놓았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항복이었다. 아니면 타협이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이제 중요한 것은 미래라는 것을.


"부시장직을 맡아주시오."


"권한은?"


"민원과 배급. 그리고..."


맥브라이드가 잠시 멈췄다.


"프랑스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


"알겠습니다."


그녀가 일어섰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말씀하시오."


"대통령님은... 고통스러워하셨습니까?"


맥브라이드의 목구멍이 메였다.


"아니오. 즉사였소."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필요한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다행입니다."


그녀가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나가기 전에 돌아서며 말했다.


"장군님."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입술이 뭔가 움직이려했지만, 이내 멈췄다. 그리고 다시 열렸다.


"역사는 용서하진 않겠지만, 이해할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문이 닫혔다.


맥브라이드는 혼자 남아 생각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침묵을 선택했다.


왜?


아마도 그녀도 이해했을 것이다.


때로는 작은 악이 큰 선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아니면...


단순히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일 수도.


---


일주일이 지났다.


도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니, 일상인 척했다.


프랑스인들과 브뤼셀 시민들 사이의 긴장은 여전했지만,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웠다.


통합 정부가 공식 출범했다. 마리 루이즈가 부시장으로 취임했다.


"함께 갑시다."


그녀의 취임사는 짧았다.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갑시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울림이 있었다.


박수가 터졌다. 진심이 담긴 박수였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폭풍의 눈 속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진짜 폭풍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밖에서 또 종소리가 들렸다.


댕- 댕- 댕-


하루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마치 시라크의 영혼이 아직도 브뤼셀을 떠도는 것처럼.


평화를 갈구하며.


용서를 구하며.


그리고 이해를 바라며.


맥브라이드는 창밖을 보았다.


또 재가 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눈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라 보였다.


애도의 재가 아니라.


정화의 재처럼.


아니면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


12월의 첫날


새벽 5시.


맥브라이드는 시라크의 묘를 찾았다.


혼자였다. 완전히 혼자.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단순한 돌비였다.


*자크 시라크*

*1932-2014*

*평화를 꿈꾸다*


그는 묘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답은 없었다.


오직 바람소리뿐.


하지만 그 바람 속에서...


잠깐.


뭔가 들린 것 같았다.


환청이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눈물을 흘렸다.


처음으로.


10년 만에 처음으로.


그리고 그 눈물은...


조금은 깨끗했다.


조금은.


새로운 유럽의 시작이 그렇게 마무리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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