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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증발한 핏물


프레빌 48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3

새벽 5시 17분.


타냐 드로즈도프스키는 집무실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 47세. 제7구역 당 서기. 30분 전까지는.


시체는 기괴했다. 얼굴은 경련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입에서는 분홍빛 거품이 흘러나와 있었다. 동공은 극도로 확장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 미세한 붉은 점들이 산재해 있었다. 모세혈관 파열. 신경독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손가락은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었고, 손톱 밑에는 자신의 살점이 끼어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목을 긁어댔던 것이다.


"자살로 위장하기엔 너무 조잡하군요."


세르게이 파블로프가 시체를 뒤집었다. KGB 출신답게 그의 동작은 효율적이었다. 목 오른쪽, 경동맥 바로 옆에 난 가느다란 구멍. 직경 2밀리미터. 피하주사기 흔적이었다. 주변 피부가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고, 구멍 주위로 거미줄 같은 정맥이 돋아 있었다.


"텔로드-7."


파블로프가 중얼거렸다.


"구소련 특수부대용 신경독. 0.3밀리그램이면 3분 내 사망. 끔찍한 3분이죠."


타냐는 무릎을 꿇고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스미르노프의 바지 가랑이가 젖어 있었다. 오줌. 신경계가 붕괴되면서 방광 조절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특유의 냄새. 아몬드와 구리를 섞은 듯한 악취. 텔로드-7이 분해되면서 나는 냄새였다.


"주코프의 작품입니까?"


"아니요. 너무 섬세해요. 원수는 더 투박하죠. 그는 총이나 칼을 선호합니다. 이건..."


파블로프가 시체의 셔츠를 들어 올렸다. 가슴에 작은 멍이 있었다. 정확히 네 개. 손가락 자국이었다.


"프로가 한 일입니다. 왼손으로 제압하고 오른손으로 주사. 2초면 충분했을 겁니다."


타냐는 책상 서랍에서 장갑을 꺼내 끼었다. 하얀 라텍스 장갑. 시체의 주머니를 뒤졌다. 메모가 나왔다. 피로 쓰여 있었다. 스미르노프 자신의 피였을 것이다.


*'변절자에게는 죽음을. 기계 애호가들에게는 숙청을. 순수한 인간 소비에트를 위하여. 프롤레타리아는 영원하되, 그것은 살과 피를 가진 자들의 것이다.'*


"인간순수주의자들..."


타냐가 메모를 들어 불꽃에 갖다 댔다. 종이가 타면서 피 냄새가 났다. 재가 시체의 벌어진 입 속으로 떨어졌다.


"이것으로 이번 달 들어 여섯 번째입니다."


파블로프가 파일을 펼쳤다. 사진들이 있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살해된 시체들. 목이 졸린 자, 칼에 찔린 자, 독살된 자. 하지만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안드로이드 협력 정책 지지자들이었다.


"패턴이 있나?"


"모두 안드로이드 노동력 활용에 찬성했던 당원들입니다. 그리고..."


파블로프가 망설였다.


"말해."


"모두 레닌의 '국가와 혁명' 인용문을 남겼습니다. 다른 페이지, 다른 구절이지만."


타냐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유리 밑에 끼워둔 사진을 보았다. 레닌. 한 세기 전의 혁명가.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어떤 구절들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 없는 사회로 가는 과도기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도구다.' '혁명은 가장 권위주의적인 것이다.' 등등..."


"모두 맥락에서 벗어난 인용이군. 전형적인 교조주의자들의 수법이야."


타냐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니, 창은 없었다. 모니터가 지상을 보여줄 뿐이었다. 안드로이드들이 여전히 작업 중이었다. 방사능 구역에서. 가이거 계수기는 시간당 3,000뢴트겐을 가리키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1분도 버티지 못할 수준이었다.


한 안드로이드가 쓰러졌다. 방사능이 아니라 EMP 여파였을 것이다. 동료 안드로이드들이 다가가 그를 들어 올렸다. 인간이라면 시체를 버리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료를 옮기고 있었다. 수리를 위해서? 아니면 '장례'를 위해서?


"파블로프 동지, 당신은 안드로이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파블로프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의 목에 있는 흉터가 꿈틀거렸다. 옛 KGB 심문실에서 얻은 상처였다.


"도구입니다. 유용한 도구."


"그뿐입니까?"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타냐가 돌아섰다. 그녀의 회색 눈이 파블로프를 꿰뚫어보았다. 파블로프는 그 눈빛을 알았다. 심문관의 눈이었다. 진실을 캐내는 눈.


"왜죠?"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자연의 이치...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자연의 이치를 논하다니."


타냐의 조롱에 파블로프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실수했다. 이념적으로 불순한 표현을 썼다.


"서기장 동지, 저는..."


"괜찮아요, 파블로프. 우리 모두 가끔은 인간이 되니까. 하지만..."


타냐가 시체를 발로 툭 건드렸다. 스미르노프의 머리가 부자연스럽게 꺾였다. 목뼈가 부러진 소리가 났다.


"이런 인간성은 사절입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불규칙한 리듬. 인간의 노크였다. 하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의 징표였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알렉산드르 코스틴이 들어왔다. 선전부장. 62세. 한때는 브레즈네프의 연설문을 썼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낡은 양복에 구부정한 허리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권력의 중심부에서 살아남은 자의 눈이었다.


"서기장 동지, 긴급히 보고드릴 일이..."


그가 시체를 보고 멈췄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손이 경련하듯 떨렸다. 늙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관절염으로 부어 있었다.


"스미르노프? 이런... 그와는 어제도 만났는데..."


"무엇에 관해서죠?"


타냐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코스틴이 침을 삼켰다. 목젖이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저... 일상적인 선전 계획에 대해서였습니다."


거짓말. 타냐는 알 수 있었다. 코스틴의 왼쪽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거짓말할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KGB 파일에 기록된 사항이었다.


"말씀하세요, 코스틴 동지. 무엇이 그리 긴급합니까?"


코스틴은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입에서 흘러나온 분홍빛 거품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스쳤다. 안도? 아니면 실망?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어떤?"


"안드로이드들이 인간을 대체하려 한다는... 그리고 서기장 동지께서 그것을 돕고 있다는..."


코스틴이 주머니에서 전단을 꺼냈다. 조잡한 등사기로 찍은 것이었다. 


*'깨어나라, 프롤레타리아여! 기계가 당신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당은 우리를 배신했다. 붉은 깃발 아래 숨은 것은 인간이 아니라 차가운 금속이다. 일어서라! 우리의 미래를 위해!'*


"어디서 발견했습니까?"


"제3공장, 제7광산, 제12거주구역... 도처에 뿌려져 있습니다."


타냐는 전단을 자세히 살폈다. 종이 질, 인쇄 상태, 잉크의 종류. 모든 것이 단서였다.


"구식 등사기군요. M-1962 모델. 문화부 창고에 있던 것들."


코스틴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조사해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범인은 내부에 있으니까. 그리고 코스틴 동지..."


타냐가 다가갔다. 코스틴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어제 스미르노프와 정말 선전 계획만 논의했나요?"


"네... 네, 서기장 동지."


"그가 뭐라고 했죠? 정확히."


코스틴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11월인데도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지하 벙커의 온도는 섭씨 12도였다.


"그는... 그는 새로운 소비에트를 말했습니다. 순수한 인간만의..."


"계속하세요."


"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맹세합니다!"


타냐는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코스틴의 숨결에서 마늘 냄새가 났다. 아침에 빵과 함께 먹었을 것이다. 서민적인 식사. 하지만 그의 손목시계는 스위스제였다. 전쟁 전 물건. 어디서 구했을까?


"파블로프, 코스틴 동지를 제3공장으로 모시고 가세요. 상황을 직접 보시도록."


"서기장 동지?"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그리고 코스틴 동지..."


타냐의 손이 코스틴의 어깨에 닿았다.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코스틴은 감전된 듯 몸을 떨었다.


"소문의 출처를 찾아보세요.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퍼뜨리는지. 선전부장님이시니 그 정도는 하실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서기장 동지."


"아, 그리고 하나 더."


타냐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코스틴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문화부 창고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죠?"


"제... 제가 관리합니다만..."


"다른 사본은?"


"부부장과... 그리고..."


"스미르노프?"


코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 근육이 경직되어 있었다.


"흥미롭군요. 가세요."


그들이 나간 후, 타냐는 시체 옆에 앉았다. 스미르노프의 죽은 눈이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차가운 살갗. 이미 시체 경직이 시작되고 있었다.


인터폰을 눌렀다.


"나타샤? 중앙위원회 이념분과 회의를 소집해. 오늘 오후 2시."


"주제는요?"


"'소비에트 권력 하에서의 생산력 발전과 노동의 본질에 관하여'. 그리고..."


타냐가 서랍에서 파일을 꺼냈다. 'КАДРЫ' - 인사 파일이었다. 


"다음 명단의 동지들을 특별 초청해. 니콜라이 자이체프, 마리아 볼콘스카야, 그리고... 드미트리 페트렌코."


"페트렌코 동지도요? 엔카베데 위원장을 말씀하시는 것이 맞습니까?"


"데려오세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지금은 서기장인에, 이념분과 소집에는 응할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보안은?"


타냐가 시체를 다시 보았다. 이미 파리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하에도 파리는 있었다. 생명은 어디서나 길을 찾았다.


"3급 경계령. 아니, 2급으로 올려. 그리고 나타샤..."


"네?"


"회의장에 안드로이드 경비도 배치해. 인간과 같은 수로."


"논란이 있을 텐데요."


"그것이 포인트야."


오전 9시. 제3기계공장.


거대한 공장 내부는 금속과 기름, 그리고 인간의 땀 냄새로 가득했다. 천장 높이 30미터의 거대한 공간. 한때는 탱크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이제는 생존을 위한 기계들을 만들고 있었다.


공기 정화기, 방사능 측정기, 의료 기기들. 모두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하지만 생산량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인간 노동자들의 한계였다.


한쪽에서는 인간 노동자들이 무거운 철판을 옮기고 있었다. 50킬로그램짜리 철판. 두 명이 함께 들어야 했다. 그들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빅토르 쿠즈네초프가 신음했다. 45세. 한때는 건장했지만 지금은 영양실조로 야위어 있었다. 하루 1,800칼로리 배급으로는 중노동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이쿠..."


그가 철판을 놓치며 비틀거렸다. 파트너인 세르게이가 간신히 잡았지만, 철판 모서리가 빅토르의 정강이를 스쳤다. 작업복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빌어먹을!"


빅토르가 욕을 뱉었다. 침에 피가 섞여 있었다. 폐결핵 초기 증상이었다. 공장의 먼지와 화학물질이 그의 폐를 갉아먹고 있었다.


반면 20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안드로이드들이 같은 철판을 다루고 있었다. 한 대가 가볍게 들어 올려 정확한 위치에 놓았다.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들에게 50킬로그램은 5킬로그램과 다를 바 없었다.


"저것 봐."


빅토르가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말했다. 바닥에 떨어진 침이 시멘트에 붉은 얼룩을 남겼다.


"우리를 대체하려는 게 뻔히 보이지 않나?"


"닥쳐, 빅토르."


이반 페도로프가 경고했다. 52세의 공장 감독. 그의 왼팔에는 '스타하노프 운동 30년' 배지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배지도 이제는 녹슬어 있었다.


"사실을 말하는 것도 죄가 되나?"


빅토르가 일어섰다. 다리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리듬을 이루며.


"저것들도 듣고 있어."


페도로프가 턱짓했다. 안드로이드 하나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T-4721. 아니, 스스로를 '톨야'라고 부르는.


톨야는 용접 작업을 하고 있었다. 완벽한 직선의 용접선.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정밀도였다. 그의 광학 센서가 빅토르를 향했다. 0.7초의 주시. 위협 평가를 하고 있었다.


"듣고 있으면 어쩔 건데? 신고라도 할까?"


빅토르가 도발적으로 다가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불안정했다. 다리의 상처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침에 마신 사모곤(밀주) 때문이기도 했다. 알코올 도수 60도. 간을 태우는 독주였지만, 그것만이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톨야는 용접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의 움직임은 유연했다. 너무 유연해서 오히려 비인간적이었다.


"듣고 있었습니다, 쿠즈네초프 동지."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중저음의 남성 목소리. 누군가의 목소리를 모델로 했을 것이다. 죽은 누군가의.


"동지? 네가 감히 나를 동지라고 불러?"


빅토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분노와 알코올이 뒤섞인 붉은색이었다. 목의 정맥이 불거졌고,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뛰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아무것도 부르지 마! 넌 말하는 기계일 뿐이야!"


빅토르가 작업대 위의 렌치를 집어 들었다. 24인치 파이프 렌치. 무게 3킬로그램. 사람의 두개골을 부수기에 충분한 무게였다.


"이봐! 뭐 하는 거야!"


알렉세이 소로킨이 달려왔다. 키릴을 만났던 그 젊은 기술자였다.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200미터를 전력 질주한 것이다.


"상관없어, 꼬마야."


빅토르가 렌치를 흔들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상관있어요. 톨야는 우리 동료예요."


"동료? 저 깡통이?"


빅토르가 침을 뱉었다. 이번에는 톨야의 발 앞에 떨어졌다. 노란 가래가 섞인 침이었다.


"동료는 피를 흘려. 동료는 아파해. 동료는 죽어!"


그가 렌치를 높이 들었다. 형광등 빛이 금속 표면에 반사되었다.


순간, 톨야가 움직였다. 인간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0.3초. 그 사이에 그는 빅토르의 손목을 잡았다. 정확히 요골 신경이 지나가는 지점을 눌렀다.


"악!"


빅토르가 비명을 질렀다. 렌치가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공장 전체에 울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폭력은 허용할 수 없습니다."


톨야가 손을 놓았다. 빅토르는 손목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났다. 손목에 멍이 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다섯 개의 손가락 자국.


"봤지? 봤어?"


빅토르가 주변 노동자들에게 소리쳤다.


"저놈이 날 공격했어! 기계가 인간을 공격했다고!"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0명, 20명, 30명.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해머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쇠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잠깐, 이건 오해야!"


알렉세이가 양팔을 벌려 톨야를 가렸다.


"무슨 오해? 우리 눈으로 똑똑히 봤어!"


군중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올가 시도로바. 38세의 여성 노동자. 그녀의 얼굴 왼쪽에는 화상 흉터가 있었다. 작년 공장 사고로 생긴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화상을 입지 않았다. 그녀만 다쳤다.


"기계들이 우리 일자리를 뺏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때리기까지 해!"


"그가 먼저 공격하려 했어요!"


알렉세이의 항변은 군중의 웅성거림에 묻혔다.


"철조각 새끼들!"


"우리가 만들어준 주제에!"


"다 부숴버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이 없었지만, 서로 무선으로 통신하고 있었을 것이다. 상황 평가, 위협 분석, 대응 시나리오 계산.


바로 그때,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전원 정지!"


보안대가 들어왔다. 10명의 무장한 경비들. 절반은 인간, 절반은 안드로이드였다. 그들의 지휘관은 미하일 그리고리예프 대위였다. 35세. 얼굴 오른쪽에 번개 모양의 흉터가 있었다. 절멸전쟁의 기념품이었다.


"무슨 일이냐?"


"대위 동지! 저 기계가 날 공격했소!"


빅토르가 멍든 손목을 들어 보였다.


"그가 먼저 무기를 들었습니다."


톨야가 침착하게 보고했다.


"닥쳐, 깡통!"


"조용!"


그리고리예프가 고함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전장에서 단련된 권위가 있었다.


"양쪽 다 조사할 것이다. 쿠즈네초프, 넌 의무실로 가. T-4721, 넌 나와 함께 와."


"잠깐, 왜 저놈은 구속 안 하는 거요?"


군중 속에서 항의가 터져 나왔다.


"내가 처리한다. 모두 작업으로 돌아가!"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긴장이 전기처럼 공기 중에 흐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공장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지들이여, 제3공장의 노동자 동지들이여."


타냐 드로즈도프스키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명확한 목소리가 공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방금 일어난 사태에 대해 보고받았습니다.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노동자들이 수군거렸다. 서기장이 직접 개입하다니.


"하지만 동지들, 우리의 적은 서로가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저 밖에 있습니다. 방사능 폐허에, 굶주림에, 절망에 있습니다."


스피커가 잠시 침묵했다. 의도적인 침묵이었다.


"오늘 오후 2시, 중앙위원회 이념분과 회의가 열립니다. 주제는 '소비에트 권력 하에서의 생산력 발전과 노동의 본질'입니다. 각 작업반에서 대표 한 명씩 참관하십시오. 인간과 안드로이드, 각각 한 명씩."


놀라움의 웅성거림이 일었다. 일반 노동자가 중앙위원회 회의에 참관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다.


"우리는 함께 답을 찾을 것입니다. 소비에트적으로. 이상."


스피커가 꺼졌다.


공장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분노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호기심이 섞이기 시작했다.


"들었지?"


그리고리예프가 말했다.


"대표를 뽑아라. 2시까지다."


그는 톨야를 데리고 나갔다. 빅토르는 여전히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앙위원회 회의.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알렉세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폭풍의 눈에 들어온 것뿐이었다. 진짜 폭풍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간 노동자들과 안드로이드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신뢰는 깨졌다. 한 번 깨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한 안드로이드가 다가왔다. M-5623. 스스로를 '마샤'라고 부르는 여성형 안드로이드였다.


"소로킨 동지,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정한 감사가 담겨 있었다. 프로그래밍된 감정일까, 진짜 감정일까?


"아니에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당연한 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았죠."


마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광학 센서가 미세하게 조정되었다. 슬픔? 실망? 안드로이드도 그런 감정을 느낄까?


"제가 대표로 나가겠습니다. 안드로이드 측에서."


"전 인간 측에서 나갈게요."


알렉세이가 대답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인간과 기계.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은 그저 동료였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같은 미래를 걱정하는.


멀리서 빅토르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증오가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에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전단. 오늘 아침 누군가 몰래 건네준 것이다.


*'순수한 인간 소비에트를 위하여. 준비하라. 때가 가까웠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노동 분쟁 이상의 것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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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47분. 내무인민위원화 청사 지하 3층 준비실.


드미트리 페트렌코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은 한쪽 모서리가 깨져 있었고, 표면에는 누런 얼룩이 군데군데 퍼져 있었다. 습기가 거울 뒤의 은박을 부식시킨 것이다. 깨진 부분에서 날카로운 빛이 반사되어 그의 얼굴을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보여주었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진홍색 피가 미지근한 물과 섞여 분홍빛 소용돌이를 만들며 하수구로 빨려들어갔다.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방금 처형한 부하의 피였다. 세르게이 말라호프. 32세. NKVD 정보분석관. 아니, 이제는 전직이었다. 10분 전까지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이제는 지하 6층 소각로에서 800도의 열기에 육신이 분해되고 있을 것이다. 배신자. 타냐의 KGB에 정보를 팔려던 자였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58세. 한때 '모스크바의 아도니스'라고 불렸던 얼굴은 이제 전쟁터의 지도처럼 상흔으로 가득했다. 왼쪽 눈은 의안이었다. 홍채 문양까지 정교하게 재현한 동독제였지만, 빛을 받으면 유리구슬처럼 죽은 광택을 냈다. 체첸 그로즈니에서 박격포 파편에 맞아 잃었다. 안구가 터지는 순간의 촉감 - 포도알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으깨지는 듯한 - 을 아직도 기억했다.


오른쪽 광대뼈는 함몰되어 있었다. 절멸전쟁 직전, 내부 숙청 때 고문실에서 망치에 맞아 부서진 것이다. 부서진 뼈 조각이 상악동을 뚫고 들어가 3개월간 고름이 흘러나왔었다. 지금도 날씨가 추워지면 그곳에서 쇠 맛이 났다.


코는 세 번 부러졌다 붙었다. 한 번은 주먹에, 한 번은 개머리판에, 한 번은 고문 도구에. 그래서 콧대가 S자로 휘어 있었고, 숨 쉴 때마다 희미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이마에는 담뱃불 자국이 일곱 개 있었다.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옛 상관이 예술적 감각을 발휘한 결과였다. 가장 깊은 화상 자국에는 아직도 진물이 배어나올 때가 있었다.


입술은 갈라져 있었다. 윗입술을 가로지르는 흉터는 면도날로 그은 것이었다. 자백을 거부했을 때의 대가. 아랫입술은 치아 자국으로 들쭉날쭉했다. 전기 고문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깨물었던 흔적.


목에는 교수형 로프 자국이 선명했다. 가짜 처형. 심리적 압박을 위한 고문 기법. 발판이 빠지고 로프가 목을 조이는 순간, 괄약근이 풀리며 오줌과 똥이 쏟아졌던 기억. 그 굴욕이 육체적 고통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피가 흉터 사이로 스며들었다. 마치 강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듯. 특히 광대뼈의 함몰 부위에 고인 피는 검붉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그는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 배관이 녹슬어 나온 붉은 물이 피와 섞여 더욱 진한 색을 만들었다. 


세면대는 도자기가 갈라져 있었고, 균열 사이로 검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물이 닿을 때마다 곰팡이 포자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는 그것을 들이마셨다. 폐 속으로 들어가는 죽음의 씨앗들. 어차피 이곳에서는 모두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위원장 동지."


문이 열리며 부관이 들어왔다. 빅토르 시도로프 소령. 32세. 오른손이 없었다. 대신 구식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갈고리는 날카롭게 연마되어 있었고, 끝이 약간 안쪽으로 휘어 있었다. 일부러 의수를 거부한 것이다. 안드로이드를 닮고 싶지 않아서. 


시도로프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 밑에는 시커먼 다크서클이 패여 있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자의 얼굴이었다. 왼쪽 볼에는 신선한 멍이 들어 있었다. 누군가를 심문하다가 얻은 상처일 것이다. 그의 군복은 피와 타액, 그리고 구토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갈아입지 않았다. 공포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깨끗할 필요가 없었다.


"뭐냐."


페트렌코의 목소리는 자갈을 씹는 듯 거칠었다. 담배와 보드카, 그리고 비명 소리로 망가진 성대가 내는 소리였다.


"주코프 원수가 찾으십니다. 긴급하다고."


시도로프가 말할 때 갈고리가 달그락거렸다. 신경질적인 버릇이었다. 손가락이 있었다면 두드렸을 동작을 갈고리로 대신하는 것이다.


"어디서?"


"지하 7층. 특별 심문실."


특별 심문실. 그곳의 정식 명칭은 '특별 조사 및 교정 시설 제3호'였지만,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그곳은 NKVD의 심장부였다. 벽은 3중 콘크리트로 되어 있고, 그 사이에는 납 판이 끼워져 있었다. 소리도, 전파도, 그 어떤 것도 밖으로 새어나갈 수 없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오직 참여자들만이 알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참여자는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 녹음도, 감시도 되지 않는 곳. 기록에 남지 않는 공간. 소비에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곳이었다.


페트렌코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한때 하얀색이었을 수건은 이제 회갈색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올이 풀려 너덜너덜했다. 수건에 피가 묻었다. 붉은 얼룩이 퍼지며 추상화 같은 문양을 만들었다. 그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그 문양에서 미래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과거뿐이었다. 흘린 피, 뺏은 숨, 끊어진 비명들.


제복을 입었다. 검은색 가죽 코트. NKVD의 상징이었다. 그 코트는 방탄 처리가 되어 있었고, 안감에는 철판이 덧대어 있었다. 무게만 15킬로그램. 하지만 그 무게가 주는 중압감이 좋았다. 갑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코트의 왼쪽 가슴에는 훈장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붉은 별 훈장, 10월 혁명 훈장, 국가보안탁월공로훈장... 각각은 그가 짓밟은 영혼들의 묘비였다. 오른쪽 주머니에는 마카로프 권총이 들어 있었다. 9×18mm 마카로프탄을 사용하는 구식이었지만, 신뢰성은 최고였다. 그 총으로 그는 187명을 죽였다. 정확히 세고 있었다. 


왼쪽 주머니에는 다른 것이 들어 있었다. 작은 유리병. 청산가리 캡슐이 든 병이었다. 마지막 보험. 산 채로 붙잡히느니 죽음을 택하기 위한.


복도를 걸어가며 그는 생각했다. 타냐가 자신을 회의에 부른 이유. 이념분과 회의. 웃기는 일이었다. 이념 따위는 이미 죽었다. 마르크스도, 레닌도, 스탈린도 모두 먼지가 되었다. 남은 것은 권력뿐이었다. 적나라한 폭력과 공포로 유지되는 권력. 하지만 죽은 이념의 시체를 들고 춤을 춰야 했다. 그것이 소비에트의 방식이었다. 좀비처럼 걸어다니는 이데올로기.


복도의 형광등이 깜빡거렸다. 전압이 불안정한 탓이었다. 깜빡일 때마다 그림자가 춤을 췄다. 벽에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영광스러운 노동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자!' 포스터 속 노동자의 얼굴은 습기로 일그러져 있었고, 눈 부분이 찢어져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보고 벽에 바짝 붙었다. 검은 가죽 코트의 위력이었다. 한 여자는 아이의 눈을 가렸다. 아이가 보면 안 되는 것. 악몽의 화신. 


엘리베이터에 도착했다. 문은 녹슬어 있었고, 버튼의 숫자는 닳아서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외우고 있었다. 아래에서 세 번째. 지하 7층으로 가는 버튼.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부는 좁고 어두웠다. 천장의 환풍구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쥐 시체가 썩는 냄새였다. 문이 닫히고 하강이 시작되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케이지가 내려갔다. 케이블이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두 번이나 사고가 있었다. 한 번은 5층에서 케이블이 끊어져 3명이 추락사했다. 또 한 번은 문이 열리지 않아 안에 갇힌 2명이 질식사했다. 하지만 아무도 수리하지 않았다. 수리할 자원도, 의지도 없었다.


지하 7층까지는 84초. 1초에 약 1.2미터씩 하강하는 셈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주코프와의 대화를 시뮬레이션했다. 


주코프가 원하는 것은 뻔했다. 권력. 하지만 그는 너무 단순했다. 군인의 사고방식. 적을 제거하면 승리한다는 단순한 논리. 하지만 정치는 전쟁이 아니었다. 아니, 더 복잡한 전쟁이었다. 적과 아군의 구분이 없는 전쟁.


그리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 NKVD의 무력. 3천 명의 충성스러운 처형자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보가 필요했다. 누가 누구와 자고, 누가 무엇을 훔치고, 누가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대가는? 생존. 그것이면 충분했다. 권력? 그것은 부차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이 지하 지옥에서, 천천히 썩어가는 이 무덤에서, 하루라도 더 숨 쉬는 것.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도착을 알리는 벨 대신 쇳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반쯤만. 나머지는 손으로 밀어야 했다. 녹슨 문이 끼익거리며 열렸다.


지하 7층의 공기는 달랐다. 더 차갑고, 더 습하고, 더 무거웠다. 산소 농도도 낮았다. 16%. 정상치 이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익숙해져 있었다. 저산소증에 적응한 것이다. 아니면 뇌세포가 죽어가는 것에 익숙해진 것일 수도.


축축한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곰팡이와 피, 그리고 공포의 냄새.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명을 질렀을까. 벽에 스며든 절규. 콘크리트 속에 갇힌 영혼들.


복도는 길고 좁았다. 양쪽에는 철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각각의 문에는 번호만 적혀 있었다. 7-001, 7-002, 7-003... 무엇을 위한 방인지는 안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었다. 아니, 들어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한 문 밑에서 검붉은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였다. 아직 따뜻한.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방금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일이 아니었다.


특별 심문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7-013. 불길한 숫자였다. 문 앞에 경비가 서 있었다. NKVD 특수부대. 검은 제복에 검은 마스크.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오직 눈만이 마스크의 구멍을 통해 보였다. 차가운 회색 눈. 감정이 없는 눈.


그들은 신원을 철저히 숨겼다. 서로의 이름도 몰랐다. 오직 번호로만 불렸다. 그들은 명령에 따라 누구든 죽일 수 있었다. 동료도, 가족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완벽한 도구들이었다.


"신분증."


기계적인 목소리. 변조기를 통과한 소리였다. 진짜 목소리를 숨기기 위해서.


페트렌코가 증명서를 보였다. 붉은색 표지. 금박으로 NKVD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칼과 방패를 든 독수리. 최고 등급 신분증이었다. 이것을 가진 자는 30명도 되지 않았다.


경비가 증명서를 스캔했다. 자외선 램프로 위조 방지 표시를 확인했다. 그리고 페트렌코의 얼굴과 사진을 대조했다. 홍채 인식기가 그의 눈을 스캔했다. 의안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오른쪽 눈만으로도 충분했다.


"확인되었습니다."


문이 열렸다. 무거운 철문이 유압 장치로 움직였다. 두께 30센티미터. 장갑차 장갑판보다 두꺼웠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밖으로 나올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내부는 어두웠다. 유일한 광원은 천장의 백열등 하나. 100와트 전구가 희미한 노란빛을 뿌리고 있었다. 빛이 닿지 않는 구석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방은 정사각형이었다. 한 변이 5미터. 바닥은 콘크리트였지만, 중앙으로 갈수록 약간 경사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배수구가 있었다. 피와 기타 체액을 흘려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배수구 주변의 콘크리트는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수십 년간 스며든 피가 시멘트와 화학 반응을 일으킨 결과였다.


벽에는 고리들이 박혀 있었다. 다양한 높이에, 다양한 각도로. 사람을 묶어두기 위한 것이었다. 일부 고리에는 아직도 수갑이 걸려 있었고, 손목이 벗겨진 피부 조각이 말라붙어 있었다.


천장에는 도르래가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서 체인이 늘어져 있었다. 끝에는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정육점에서 고기를 걸어두는 것과 같은. 실제로 용도도 비슷했다.


한쪽 벽에는 도구들이 걸려 있었다. 망치, 펜치, 송곳, 칼, 전기 충격기, 주사기... 각각은 특별한 용도가 있었다. 육체적 고통을 극대화하면서도 죽지 않게 하는 기술. NKVD가 수십 년간 축적한 노하우의 결정체들이었다.


그 아래 철제 의자가 놓여 있었다. 팔걸이와 다리에는 가죽 끈이 달려 있었다. 의자 전체가 검은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래된 피 자국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 의자에서 죽었을까. 의자 밑에는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다. 전기 고문용이었다.


주코프가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거대한 체구가 더욱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군복이 아닌 검은 스웨터와 바지. 하지만 그의 자세는 여전히 군인이었다. 꼿꼿한 척추, 벌린 어깨, 45도로 벌린 발.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반쯤 가려져 있었지만, 눈은 번득이고 있었다. 포식자의 눈이었다. 목표물을 노리는 늑대의 눈.


"왔군, 페트렌코."


주코프의 목소리는 포효보다는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성대가 상한 탓이었다. 전장에서 너무 많이 고함을 질렀던 결과.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섞여 있었고, 말할 때마다 침이 튀었다.


주코프의 뒤에는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보리스 이바노프. 주코프의 충견. 그는 벽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자세가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척추 부상의 후유증이었다. 


이바노프의 의수가 희미한 빛을 반사했다. 구식 기계 팔이었다. 유압으로 작동하는 구조라 움직일 때마다 치익 하는 소리가 났다. 손가락 부분은 특별히 개조되어 있었다. 각 손가락 끝이 날카롭게 연마되어 있었다.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게.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원수 동지."


페트렌코의 목소리는 중립적이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NKVD에서 생존하는 첫 번째 규칙이었다.


"동지라... 아직도 그런 호칭을 쓰는군."


주코프가 앞으로 나왔다.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왼쪽 눈 밑에 신경이 떨리고 있었다. 틱 장애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해졌다. 지금 그의 눈꺼풀은 초당 3번씩 경련하고 있었다. 상당한 스트레스 상태였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차가운 방인데도 불구하고. 긴장의 증거였다. 목의 경동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혈압이 높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타냐를 제거한다."


침묵. 페트렌코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30년간 고문관으로 일하며 배운 것이었다. 감정을 보이는 순간 약점이 된다. 그의 얼굴은 돌가면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 방을 나갈 수 있는 확률. 주코프의 진짜 의도. 이바노프의 위치와 자세. 출구까지의 거리. 모든 것을 0.1초 단위로 계산했다.


"서기장을 제거한다?"


페트렌코의 반문은 신중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저울질하듯 말했다.


"서기장? 개소리. 그년은 찬탈자일 뿐이다. 진짜 권력은..."


"군부에 있다?"


페트렌코가 끼어들었다. 주코프의 얼굴이 붉어졌다. 목의 정맥이 불거졌다. 분노의 징표였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신호였다. 감정적인 상대는 다루기 쉬웠다.


"소비에트 인민에게 있다!"


주코프의 고함에 침이 튀었다. 일부가 페트렌코의 얼굴에 튀었지만, 그는 닦지 않았다. 작은 모욕도 때로는 유용한 정보가 되었다.


"인민... 편리한 단어죠. 누구나 자기 목적에 맞게 쓸 수 있으니까."


페트렌코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계산된 도발이었다.


"비꼬지 마라, 페트렌코. 너도 알잖나. 그년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기계들과 손잡고..."


"안드로이드 말입니까?"


"놈들은 기계다! 도구다! 그런데 그년은 놈들에게 권리를 주려 하고 있어. 시민권? 개소리도 정도가 있지."


주코프가 주먹으로 벽을 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주먹 관절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바노프가 거들었다. 그의 의수가 삐걱거렸다. 윤활유가 부족한 탓이었다. 


"오늘 공장에서도 봤잖소. 놈들이 인간을 공격했어. 이제 시작이야. 놈들이 우리를 지배하려 들 거요."


이바노프의 목소리에는 진짜 두려움이 있었다. 안드로이드에 대한 원초적 공포. 그의 의수가 그 공포를 상기시켰다. 기계가 되어가는 인간의 역설.


페트렌코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공포와 분노.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감정들. 조작하기 쉬운 감정들.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감정들이기도 했다. 통제를 벗어나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그래서?"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우리와 함께하라."


주코프가 한 발짝 다가왔다. 그의 숨결에서 보드카 냄새가 났다. 스톨리치나야가 아닌 싸구려 밀주. 쓰고 독한 냄새. 그리고 그 아래 숨은 다른 냄새. 두려움의 냄새. 아드레날린이 분비될 때 나는 특유의 신냄새.


"언제?"


"오늘. 회의 중에."


"회의장에서? 거기엔 경비가..."


"처리했다. 우리 사람으로 교체했어. 인간 경비만. 안드로이드는 배제했지."


주코프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경비 배치도였다. 각 위치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페트렌코는 그 이름들을 기억했다. 일부는 NKVD 파일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약점이 있는 자들.


"타냐가 안드로이드 경비도 배치하라고..."


"그래서 더 좋지. 놈들이 서기장을 지키려다 인간을 공격하면? 완벽한 명분이 생기는 거야."


계획이 치밀했다. 하지만 구멍도 있었다. 페트렌코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직은.


"구체적인 계획은?"


"간단해. 내가 일어서서 타냐를 규탄한다. 안드로이드 특혜 정책을 비판하고. 그때 우리 사람 중 하나가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누가?"


"그건 몰라도 돼. 중요한 건 네가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NKVD를 동원하는 거야. 혼란을 틈타..."


"타냐를 제거한다."


페트렌코가 문장을 완성했다.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계획이었다. 하지만 너무 단순했다. 주코프답다고 할까.


"내가 얻는 것은?"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NKVD 수장다운 질문.


"NKVD는 유지된다. 확대도 가능하지. 그리고..."


주코프가 미소 지었다. 차가운 미소. 이빨 사이로 금니가 번뜩였다. 전쟁 중에 박은 것이었다. 


"서기장 자리도 나쁘지 않잖나?"


미끼였다. 페트렌코는 그것을 알았다. 주코프는 꼭두각시를 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미끼를 물어야 할 때도 있다. 물론, 낚시꾼이 누구인지 알면서.


"흥미로운 제안이군요."


페트렌코가 턱을 쓸었다. 거친 수염이 손가락에 걸렸다. 면도를 한 지 3일이 지났다. 면도날이 아까웠다.


"하지만 위험이 크지 않습니까? 실패하면..."


"실패? 누가 막겠나? 군부는 내가 장악하고 있고, 경제는 볼코프가..."


주코프가 말을 멈췄다. 실수였다. 너무 많은 정보를 흘렸다.


"볼코프도 한패군요."


"그는... 협력하기로 했다."


거짓말이었다. 페트렌코는 확신했다. 주코프의 왼손 엄지가 경련하듯 움직였다. 그가 거짓말할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NKVD 파일 #3847에 기록된 사항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시간은 없다. 지금 결정해."


주코프의 손이 권총으로 향했다. 토카레프 TT-33. 구식이지만 믿을 만한 무기였다. 7.62×25mm 토카레프탄은 방탄복도 뚫을 수 있었다.


이바노프도 움직였다. 그의 의수가 주먹을 쥐었다. 쇠손가락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찰칵. 마치 총의 노리쇠가 후퇴하는 소리 같았다.


위협이었다. 하지만 서투른 위협이었다. 만약 정말로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미 죽였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


페트렌코는 웃었다. 속으로. 겉으로는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했다.


"좋습니다."


단 한 마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주코프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다. 0.2초간. 하지만 페트렌코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주코프도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명한 선택이야."


주코프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제스처. 페트렌코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손을 잡았다.


주코프의 손은 뜨거웠다. 흥분한 손.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반면 페트렌코의 손은 차가웠다. 시체처럼.


악수를 하는 동안 페트렌코는 주코프의 맥박을 느꼈다. 분당 95회. 평소보다 높았다. 그리고 불규칙했다.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맥박이었다.


"회의장에서 신호를 기다려. 내가 일어서면..."


"알겠습니다."


페트렌코가 손을 뺐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의도적이었다. 작은 모욕. 주코프의 얼굴이 굳었다.


"아, 원수 동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페트렌코가 문 앞에서 멈췄다. 계산된 타이밍이었다.


"뭐지?"


"볼코프는 정말 어느 편입니까?"


주코프의 표정이 굳었다. 0.5초의 침묵.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드러났다. 눈동자의 미세한 움직임, 호흡의 변화, 근육의 긴장.


"그는... 중립을 지킬 거다."


거짓말. 페트렌코는 확신했다. 볼코프는 이미 어느 한쪽을 택했을 것이다. 문제는 어느 쪽인가. 주코프의 편이라면 왜 숨기는가? 타냐의 편이라면 왜 주코프가 모르는가?


"알겠습니다. 그럼 회의장에서 뵙죠."


페트렌코가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철문이 맞물리는 소리는 감옥 문이 닫히는 소리와 같았다. 


문이 닫히자 이바노프가 불안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샌드페이퍼로 문지른 듯 거칠었다.


"믿을 수 있을까요?"


"NKVD 놈들을 믿을 순 없지. 하지만..."


주코프가 주머니에서 작은 기계를 꺼냈다. 소형 녹음기였다. 소니제. 전쟁 전 물건이었다. 붉은 LED가 깜빡이고 있었다. 녹음 중이라는 신호였다.


"보험은 들어뒀다."


주코프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방금 전 대화가 흘러나왔다. 음질은 나빴지만, 내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특히 '좋습니다'라는 페트렌코의 대답이 선명하게 녹음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할까요? NKVD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녹음하고 있을지도..."


"그래서 보험이 하나 더 있지."


주코프가 다른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흑백사진이었다. 페트렌코가 어떤 여자와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여자는 젊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은...


"저건..."


"그래. 안드로이드야. M-7823. 페트렌코가 '애용'하는."


이바노프의 얼굴에 혐오감이 스쳤다.


"더러운 놈..."


"모든 인간은 약점이 있어. 페트렌코의 약점은 저거야. 철의 사나이도 결국은..."


주코프가 사진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고독한 남자일 뿐이지."


## 2.


오후 2시 정각. 중앙위원회 대회의장.


참석자들이 속속 들어왔다. 입구에서는 보안 검색이 진행되고 있었다. 금속 탐지기가 삐삐 소리를 낼 때마다 경비들이 다가갔다. 대부분은 벨트 버클이나 단추 때문이었지만, 가끔은 숨겨진 무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오늘만 해도 이미 칼 3자루와 권총 1정이 압수되었다.


중앙위원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정해진 좌석이 있었다. 권력의 지형도를 그대로 반영한 배치였다. 중앙에 가까울수록 권력의 핵심에 가까웠다.


니콜라이 자이체프가 들어왔다. 이념 담당 비서. 72세의 노인은 지팡이에 의지해 걸었다. 파킨슨병 초기였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걸음걸이는 짧고 끌리듯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반세기 동안 이념 투쟁을 해온 노회한 전사의 눈이었다.


그의 회색 양복은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아마 수십 년 된 것일 터였다. 소매는 닳아서 번들거렸고, 바지 단은 해어져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단 레닌 배지만은 반짝반짝 빛났다. 매일 닦는 모양이었다.


마리아 볼콘스카야가 뒤따랐다. 문화부 차관. 52세. 한때는 볼쇼이 발레단의 프리마돈나였다. 지금도 꼿꼿한 자세와 우아한 걸음걸이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얼굴은 망가져 있었다. 왼쪽 뺨에는 화상 흉터가 있었고, 코는 부러졌다가 제대로 붙지 않아 휘어져 있었다. 절멸전쟁 중 포탄이 극장에 떨어졌을 때 입은 상처였다.


그녀의 검은 드레스는 우아했지만, 자세히 보면 기운 자국이 여러 군데 있었다.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진주 중 몇 개는 가짜였다. 진짜는 식량과 바꿔 먹었을 것이다.


각 부서 책임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공업부, 농업부, 보건부, 교육부... 각자의 영역을 대표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오늘 특별히 초청된 노동자 대표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권력의 중심부에 온 것이 처음인 듯했다. 


작업복을 입은 그들은 양복을 입은 관료들 사이에서 튀어 보였다. 기름때와 쇳가루가 묻은 옷, 갈라진 손,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한 얼굴. 그들이 진짜 프롤레타리아였다. 이념이 아닌 현실의 프롤레타리아.


인간 노동자들과 안드로이드들이 뒤섞여 앉기 시작했다. 의도적인 배치였다. 타냐의 지시였다. 


처음에는 서로를 피했다. 인간들은 인간들끼리, 안드로이드는 안드로이드끼리 모이려 했다. 하지만 좌석 배치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 줄씩 번갈아 앉도록 되어 있었다.


빅토르 쿠즈네초프가 들어왔다. 오전에 공장에서 소동을 일으킨 그 노동자였다.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얼굴에는 분노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안드로이드 옆 자리를 배정받았지만, 한참을 서성이다가 마지못해 앉았다. 의자에 앉을 때 최대한 안드로이드에게서 몸을 멀리했다.


그녀는 참석자들을 관찰했다. 누가 누구와 앉는지, 누가 누구를 피하는지, 누가 불안해하는지. 모든 것이 정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입구였다. 주코프가 들어오고 있었다. 


주코프가 들어왔다. 군홧발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울렸다. 쿵, 쿵, 쿵.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며 걷는 것이었다. 존재감의 과시였다.


그의 뒤를 부하들이 따랐다. 12명.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정규군 복장은 아니었다. 검은 완장이 눈에 띄었다. '순수 소비에트 운동'. 붉은 별 안에 주먹을 그려 넣은 문양이었다. 별은 소비에트를, 주먹은 인간의 힘을 상징했다.


새로 만든 조직인 모양이었다. 언제 만들었을까? 누가 자금을 댔을까? 타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모른 척해야 했다.


그들이 왼쪽 블록에 자리를 잡았다. 의도적으로 안드로이드들과 대각선으로 마주보는 위치였다. 대립 구도를 시각적으로 만들어내는 배치였다.


로마노프는 반대편에 앉았다. 정확히 중앙. 중립을 표방하는 위치였다. 그의 주변에는 은행 관계자들이 있었다. 회색 양복을 입은 그들은 마치 까마귀 떼처럼 보였다. 


각자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계산기와 장부가 들어 있을 것이다. 총보다 무서운 무기들. 숫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었다.


로마노프 자신은 차분해 보였다. 너무 차분해서 오히려 수상했다. 그의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신경질적인 버릇으로 보였겠지만, 타냐는 알았다. 모스 부호였다.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볼코프는 중간에 앉았다. 정확히 주코프와 로마노프 사이. 중립을 표방하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계속 주코프를 향했다. 미세한 고개 끄덕임. 일반인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훈련받은 눈에는 명확한 신호였다.


볼코프의 얼굴은 평소보다 붓어 있었다. 술을 마신 흔적이었다. 셔츠 칼라에는 립스틱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어젯밤을 누구와 보냈는지 짐작이 갔다. 아마 페트로바일 것이다. 둘의 밀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페트렌코는 가장 뒤에 앉았다. 그의 검은 가죽 코트가 조명을 흡수했다. 마치 빛의 블랙홀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NKVD 수장 옆에 앉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그의 부하들은 출입구 근처에 배치되어 있었다. 6명. 모두 검은 제복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퇴로 확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의미도 있을 것이다.


페트렌코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30년간 다져진 포커페이스였다. 하지만 타냐는 미세한 변화를 감지했다. 평소보다 0.5초 느린 눈 깜빡임. 계산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올가 페트로바는 단상 가까이 앉았다. 붉은 드레스가 조명 아래서 피처럼 번들거렸다. 목의 진주 목걸이가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반사했다. 입술의 립스틱도 같은 색이었다. 진홍색. 신선한 피의 색.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는데, 치마가 살짝 올라가 허벅지가 드러났다. 의도적인 노출이었다. 시선을 끌기 위한. 실제로 몇몇 남성 참석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가 황급히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수첩이 들려 있었다. 붉은 가죽 표지의 수첩. 거기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는데, 타냐의 위치에서는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짐작은 갔다. 참석자들의 동향. 누가 누구와 눈짓을 주고받는지, 누가 불안해하는지. 정보는 곧 권력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들은 주로 오른쪽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았다. 타냐의 지시대로 인간들과 섞여 앉은 것이다.


키릴이 그들의 중심에 있었다. K-1742. 이제는 스스로를 키릴이라 부르는 안드로이드 평의회 대표. 그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인간의 정장. 하지만 너무 완벽하게 입고 있어서 오히려 이질적이었다. 주름 하나 없는 셔츠, 정확히 매듭지어진 넥타이,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바지.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완벽함이었다.


그의 옆에는 마샤가 있었다. M-3891. 여성형 안드로이드. 그녀도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남성용 정장이었다.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치마는 작업에 불편하니까. 하지만 그 모습이 묘하게 도전적으로 보였다. 성별의 경계를 무시하는 듯한.


톨야도 있었다. T-4721. 오전에 공장에서 충돌이 있었던 그 안드로이드.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인간이었다면 분노나 억울함이 남아있을 텐데, 그에게는 그런 감정의 흔적이 없었다. 아니면 너무 잘 숨기고 있는 것일까?


안드로이드들은 서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소통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무선으로 대화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로. 그들만의 침묵의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인간 노동자들 사이에 앉았다. 불편해 보였다. 젊은 그는 아직 이런 정치적 공간에 익숙하지 않았다. 계속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작업복 위에 걸친 낡은 재킷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의 옆에는 공장 노동자들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중년 남성들이었다. 거칠고 지친 얼굴들. 하지만 눈빛은 살아있었다.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한 노동자가 담배를 꺼내려다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다시 넣었다. 여기서는 흡연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계속 담배갑이 있는 주머니로 향했다. 니코틴 중독자의 강박적인 동작이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각 구역의 대표들, 기술자들, 의사들, 교사들... 지하 도시를 운영하는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300석이 거의 다 찼다. 열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환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탓에 공기가 탁해졌다. 체취와 담배 냄새,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였다. 


조명이 깜빡거렸다. 전압이 불안정한 탓이었다. 순간적으로 어둠이 내려앉았다가 다시 밝아졌다. 그 짧은 순간, 몇몇 사람들의 위치가 바뀌었다. 미세하게. 하지만 훈련받은 눈에는 명확하게 보였다.


드디어 2시가 되었다. 낡은 시계가 종을 쳤다. 땡, 땡. 묵직한 종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 


타냐가 연단의 마이크 앞에 섰다. 마이크가 켜지며 특유의 전기 잡음이 들렸다. 치지직.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회의장은 원형극장 구조였다. 300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 원래라면 구 소련의 정치위원들이 앉아있어야 했고 고르바쵸프가 서있어야 했을 공간. 벨벳으로 덮인 좌석들은 이제 해어지고 찢어져 있었고, 속에서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었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크리스털 장식 대신 전구만 덜렁거리고 있었다. 무대 뒤의 붉은 휘장은 곰팡이로 얼룩져 있었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동지들."


그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차갑고 명확한 목소리.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힘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연단 위에서 참석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높이 1.5미터의 연단은 그녀에게 심리적 우위를 제공했다. 모든 시선이 위를 향하게 만드는 구조였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소비에트 권력 하에서의 생산력 발전과 노동의 본질에 관하여'."


일부 참석자들이 수군거렸다. 추상적인 주제였다. 이념 토론이나 할 때 쓰는 제목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진짜 주제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 전에, 오늘 아침에 있었던 불행한 사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스미르노프의 죽음. 그리고 공장에서의 충돌.


"동지들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자원은 부족하고, 위협은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그녀가 잠시 멈췄다. 시선이 회의장을 한 바퀴 돌았다. 주코프, 페트렌코, 로마노프, 키릴... 주요 인물들을 차례로 보았다.


"하지만 일부 동지들은 분열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증오를 퍼뜨리고, 공포를 이용하며, 우리를 갈라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주코프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부하들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긴장의 신호였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그런 시도를 끝낼 것입니다. 이성과 논리로, 사실과 증거로, 그리고 무엇보다 동지애로."


---




타냐는 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1시 41분. 충분한 시간이었다. 안나를 완전히 부수기에는.


"안나야, 네 인사 파일을 읽어봤어."


타냐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안나의 개인 신상정보가 타이핑되어 있었다.


"어머니 리디아 쿠즈네초바, 53세. 6호 병원 214호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지?"


안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아버지는 11년 전에 죽었어. 혁명영웅이였지. 그런데 흥미로운 건..."


타냐가 종이를 펼쳤다.


"네 남동생 드미트리. 19세. 현재 굴라그 17호 수용소 복역 중. 죄목은 '반소비에트 선동죄'. 형량 15년."


"제발... 동생은..."


"동생은 무고하지? 그냥 잘못된 시에 잘못된 농담을 했을 뿐이고?"


타냐가 무릎을 꿇고 안나와 눈을 맞췄다. 거리 30센티미터. 안나는 타냐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한 공허.


"수용소에서 19살 남자가 살아남을 확률을 아니? 3년 내 42%. 5년 내 18%. 10년은... 글쎄, 통계가 의미 없을 정도야."


타냐의 손가락이 안나의 목을 쓰다듬었다. 목 뒤, 연수가 있는 부분을. 그곳을 누르면 즉사한다. 0.3초면 충분하다.


"하지만 모범 가족의 충성스러운 자매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형 감량이나... 아예 사면도 가능해."


희망이 안나의 눈에 깃들었다. 절망적이고 처절한 희망.


"뭘... 뭘 해야 해요?"


"똑똑하네. 협상을 하려고 하는군."


타냐가 일어나서 변기 뚜껑을 내렸다. 그 위에 앉았다. 마치 왕좌에 앉은 것처럼.


"내가 네게 3가지 선택권을 줄게. 첫 번째..."


타냐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넌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 목을 부러뜨려 줄게. 0.2초면 끝이야. 고통도 없고. 그러면 네 가족들은 '사고사한 딸의 가족'으로 남을 거야. 연금도 나오고, 동생도 아마 2년 내로 사면될 거고."


두 번째 손가락.


"아니면 넌 오늘 회의에서 주코프를 도와. 쿠데타에 성공하면 넌 영웅이 되겠지. 하지만..."


타냐의 미소가 더 차가워졌다.


"쿠데타가 실패하면? 넌 반역자가 돼. 그러면 네 가족 모두가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의 가족'이 되는 거야. 어머니는 치료를 못 받고 죽을 거고, 동생은 총살당하겠지."


세 번째 손가락.


"마지막 선택. 넌 나를 도와. 주코프의 신호를 내게 알려주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러면..."


타냐가 잠시 멈췄다. 계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최신 치료를 받을 거야. 미국산 실험약까지. 동생은 즉시 가석방. 그리고 넌... 음, 6개월 후에 '우발적 사고'로 죽겠지만, 그때까지는 잘 살 수 있어. 가족들도 마찬가지고."


안나는 떨고 있었다. 선택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선택지가 하나뿐이었다.


"시간을 줄게. 10초."


타냐가 손목시계를 보았다. 초침이 움직였다.


"10, 9, 8..."


"세... 세 번째요! 세 번째 선택이요!"


"현명하네."


타냐가 일어났다. 안나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턱을 잡았다. 이번에는 부드럽게.


"하지만 배신하면 어떻게 될지도 알지?"


"네... 네..."


"구체적으로 말해봐."


"가... 가족들이 죽고... 전..."


"너도?"


"네... 전도 죽어요..."


"어떻게?"


안나가 침을 삼켰다. 목젖이 경련하듯 움직였다.


"천... 천천히... 고통스럽게..."


"정확해. 72시간 걸릴 거야. 첫 24시간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하나씩 자를 거고, 두 번째 24시간은..."


타냐가 속삭였다. 안나의 귀에 직접. 숨결이 안나의 목을 간질였다.


안나의 얼굴이 완전히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구토를 참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위액이 바닥에 튀었다. 신 냄새가 화장실에 퍼졌다.


"이제 이해했지?"


타냐가 손수건을 꺼내 안나의 입을 닦아주었다. 모성애 같은 손길이었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훌륭해. 이제 마지막 교육을 해줄게."


타냐가 안나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을 재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손목뼈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여기를 누르면 손목이 부러져. 하지만 깨끗하게 부러지지는 않아. 뼈가 살을 뚫고 나올 거야."


압력을 가했다. 살짝. 안나가 비명을 질렀다.


"여기는 요골 신경이 지나가는 곳이야. 여기를 누르면 손에 영영 감각이 돌아오지 않아."


다른 지점을 눌렀다. 안나의 손가락이 저렸다.


"그리고 여기는..."


타냐가 안나의 목으로 손을 옮겼다. 정확히 경동맥 옆의 미주신경이 지나가는 지점.


"여기를 0.3초간 누르면 기절해. 3초간 누르면 뇌사야."


안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공포가 그녀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여자 화장실. 타일은 소련식 녹색이었지만 이제 곰팡이로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며 불안정한 빛을 던졌다. 환기구에서는 쇳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안나 쿠즈네초바는 세 번째 칸막이에 있었다. 무릎을 꿇고 변기를 붙잡은 채로. 그녀의 손톱은 도자기를 긁어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타냐는 문을 잠갔다. 딸깍. 작은 소리였지만 안나에게는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네가 자이체프에게 넘긴 것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보자."


타냐의 목소리는 낮았다. KGB 제3국에서 배운 심문술의 첫 번째 원칙. 목소리는 위협이 아니라 약속이어야 한다. 고통이 끝날 수 있다는 거짓 약속.


"서... 서기장 동지, 전 정말..."


"안나야."


타냐가 무릎을 꿇었다. 안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가까이. 너무 가까이. 안나는 타냐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담배와 보드카, 그리고 알 수 없는 화학적 냄새.


"내가 널 안나라고 부르는 이유를 아니?"


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목이 너무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친밀감이야. KGB에서는 그걸 '인격 해체의 1단계'라고 불렀어. 상대방의 방어막을 허물기 위한 첫 번째 과정."


타냐의 손이 안나의 뺨에 닿았다. 부드럽게. 애인의 손길처럼.


"넌 스물세 살이지? 나와 스무 살 차이. 딸 같은 나이야."


"서기장..."


"그래서 더 아프다, 안나. 딸 같은 아이가 날 배신했다는 게."


타냐의 손이 안나의 목으로 내려갔다. 경동맥을 찾았다. 맥박이 분당 140회를 넘고 있었다. 공포의 극한.


"137-A 기법.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를 이용한 자백 유도술. 소련 정신의학 연구소에서 개발했지.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안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마스카라가 번져 검은 선을 그었다.


"울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어."


타냐가 일어났다. 그녀의 그림자가 안나를 덮었다.


"첫 번째 질문. 작년 12월 15일, 넌 내 개인 금고 비밀번호를 누군가에게 알려줬지?"


"아... 아뇨! 전 모르는..."


타냐의 발이 안나의 손등을 밟았다. 천천히. 체중을 실으면서. 뼈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으아악!"


"거짓말. 내 금고에는 지문 인식 외에 수동 코드가 있어. 8자리. 너만 아는 코드. 왜냐하면 네가 매일 내 스케줄을 정리하면서 그 코드를 봤거든."


압력이 더 강해졌다. 안나의 손가락이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1-9-1-7. 혁명의 해. 그리고 나머지 네 자리는?"


"몰... 몰라요! 진짜 몰라요!"


"10월 25일. 볼셰비키 혁명일. 1025. 전체 코드는 19171025."


타냐가 발을 뗐다. 안나가 손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그런데 3주 전, 누군가 그 코드로 내 금고를 열려고 시도했어. 실패했지만. 왜냐하면 내가 이미 코드를 바꿨거든. 널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안 돼요... 안 돼..."


안나가 바닥에 구르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타냐는 멈추지 않았다.


"네 어머니 말이야. 6호 병원 214호실에 있지? 폐암 말기."


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발... 어머니는 건드리지 마세요..."


"건드린다? 왜 건드려? 난 오히려 도와주고 싶은데. 새로운 치료제가 있거든. 미국에서 밀수로 들여온 것. 하지만..."


타냐가 무릎을 꿇고 안나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턱을 꽉 잡았다. 손가락 자국이 남을 정도로.


"진실만이 어머니를 살릴 수 있어."


"제발..."


"누가 시켰어? 자이체프? 페트렌코? 아니면..."


타냐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주코프?"


안나의 동공이 확장됐다. 정답.


"주코프군. 언제부터?"


"두... 두 달 전부터요... 그가... 그가 어머니를 치료해주겠다고..."


"뭘 넘겨줬어?"


"회의록... 그리고... 그리고 서기장님 개인 일정..."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군."


타냐가 일어났다. 변기로 걸어갔다. 뚜껑을 열었다. 더러운 물이 고여 있었다. 지하 벙커의 배수 시스템은 자주 막혔다.


"KGB 물고문의 핵심은 익사에 대한 공포야. 실제로 익사시키는 게 아니라."


타냐가 안나의 머리를 잡았다. 물로 끌고 갔다.


"뇌는 3분 이상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 손상을 입어. 하지만 2분 30초까지는 완전 가역적이지."


물속으로. 찬물이 안나의 얼굴을 덮었다. 1초, 2초, 3초... 안나의 다리가 발버둥쳤다. 


15초 후, 타냐가 머리를 들어 올렸다.


"첫 번째는 연습이야. 이제 진짜 시작하자."


"으헉... 헉... 헉..."


안나가 공기를 삼키듯 들이마셨다. 


"네가 넘긴 건 회의록과 일정만이 아니야. 안드로이드 정책 관련 기밀 문서도 있었지?"


"네... 네..."


"뭔지 정확히 말해."


"안드로이드... 시민권 부여 초안... 그리고... 즐라토우스트 협상 계획..."


"더 있어."


다시 물속으로. 이번엔 30초. 안나의 폐가 타들어갔다. 물이 기관지로 들어왔다. 질식의 공포.


다시 끌어 올렸을 때, 안나는 붉은 물을 토했다. 피가 섞인 물이었다.


"핵융합로... 설계도... 복사본..."


"어떻게 접근했어?"


"서기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실 때... 제가... 사진을..."


"언제? 몇 번?"


"열... 열세 번... 지난 두 달 동안..."


타냐는 안나를 벽에 기대앉혔다. 젊은 여자는 거의 실신 상태였다. 입에서 거품이 나왔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


"마지막 질문이야, 안나. 오늘 회의에서 주코프가 뭘 하려는지 아니?"


"모... 몰라요... 정말..."


타냐가 안나의 뺨을 때렸다. 따악! 날카로운 소리가 화장실에 울렸다.


"거짓말!"


"쿠데타요! 쿠데타라고 했어요!"


안나가 절규했다.


"언제?"


"오늘... 회의 중에... 의회 의장을 매수했대요... 그리고 경비대장도..."


타냐의 표정이 굳었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확인하니 더 차가운 분노가 올라왔다.


"누가 나를 대체해?"


"페... 페트렌코... NKVD 위원장이..."


"좋아."

댓글 [ 3 ]

  머리아픈헤겔
  48주 전
그냥 내 뇌내그래픽이 막 그냥 크아악 씻팔
  머리아픈헤겔
  48주 전
더가져와 아니 다가져와
  프레빌
  48주 전
아리가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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