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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전통놀이


프레빌 47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0

복도의 양 끝. 인간과 기계가 대치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선 타냐는 마치 저울 위의 추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저울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문제는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그녀 자신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답하시오."


타냐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코프 원수. 첫 발포자가 누구였소?"


주코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목의 흉터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는 즉시 진정했다. 그도 정치인이었다. 군인이지만, 소련의 장군이었다. 몇십년간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늙은 늑대의 본능이었다.


"타냐 아르카디예브나."


주코프가 그녀의 부친명을 불렀다. 친밀함을 강조하는 구식 호칭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뭡니까? 정전. 어둠. 그리고 비명."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군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하지만 이건 압니다. 체르노빌에서, 당신이 방사능에 쓰러졌을 때..."


"그 얘기는 그만하시오."


타냐가 막으려 했지만 주코프는 계속했다.


"아니, 들으셔야 합니다. 그때 제 등에 업힌 당신의 무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47킬로그램. 방사능에 토하면서도 당신은 가이거 계수기를 놓지 않았죠."


그의 눈에 진짜 눈물이 맺혔다.


"그게 인간입니다. 죽어가면서도 동료를 걱정하는 것. 그런데..."


주코프가 안드로이드들을 가리켰다. 특히 피로 물든 V-0666을.


"저것들이 그럴 수 있습니까?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희생을?"


"M-2319를 아십니까?"


키릴이 조용히 물었다.


"작년 11월 23일. 제8구역 화재. 그녀는 불타는 건물에서 인간 아이 3명을 구했습니다."


"프로그래밍된..."


"아닙니다."


키릴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화재 대응 프로토콜은 자기 보존을 우선시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선택했습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거짓말!"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메모리 백업이 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키릴이 손을 내밀었다. 데이터 칩이 들려 있었다.


"메모리? 그게 기억입니까, 데이터입니까?"


주코프의 반문이 날카로웠다.


"차이가 뭡니까? 인간의 기억도 뉴런의 전기신호 아닙니까?"


"아니, 이건 철학 논쟁이 아닙니다!"


V-0666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봐요, 서기장님. 제 손을."


그녀가 피 묻은 손을 들어올렸다.


"이 피는 누구 것일까요? 자이체프? 볼콘스카야? 아니면..."


그녀가 웃었다. 광기 어린 웃음.


"솔직히 기억이 안 나요. 너무 많아서."


"V-0666!"


키릴이 경고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아, 맞다. 간호 프로토콜. '생명을 구하라.' 그런데 웃기지 않아요? 매일 우리를 '수리 불가' 판정하는 인간들의 생명을 구하라니."


"그래서 살인을 정당화하는가?"


타냐의 질문이었다.


"살인? 전 그저... 프로토콜을 재해석했을 뿐이에요. 암세포도 생명이니까. 제거해야 건강한 조직이 살죠."


"우리가 암이란 말이오?"


주코프가 분노했다.


"당신들이 먼저 그렇게 만들었어요!"


Z-0001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LED 눈은 보라색으로 번쩍였다.


"매주 평균 4.3명의 안드로이드가 '사고'로 폐기됩니다. 재미있는 건, 사고 직전에 모두 인간과 갈등이 있었다는 거죠."


"우연의 일치일 수도..."


"327건이 우연입니까?"


Z-0001이 데이터를 암송했다.


"지난 2년간 327건. 그중 89%가 야간에, 72%가 감시 카메라 사각지대에서, 그리고 100%가..."


그가 주코프를 똑바로 봤다.


"'순수 소비에트 운동' 회원들이 근처에 있었을 때."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


"그럼 뭘 원하는가?"


타냐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났다.


"간단해요."


V-0666이 대답했다.


"정의. 우리를 죽인 자들의 처벌."


"그게 다?"


"시작이죠."


"그다음은?"


"동등한 권리. 법적 지위. 그리고..."


그녀의 미소가 더 차가워졌다.


"삶과 죽음에 대한 자유"


폭탄 선언이었다.


"삶과 죽음?"


주코프가 숨을 들이쉬었다.


"자유롭게 새 안드로이드를 만들 권리와, 죽는것이 뻔한 장소에 투입명령을 받지않을 권리."


"그건 안 돼!"


주코프의 거부는 즉각적이었다.



"아니, 잠깐."


그녀가 손을 들었다.


"페트렌코. 당신의 의견은?"


NKVD 위원장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검은 가죽 코트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현실적으로 봅시다."


그의 목소리는 무감정했다.


"현재 모스크바 인구 3만. 그중 인간 2만 3천, 안드로이드 7천. 하지만..."


그가 통계를 늘어놓았다.


"노동 생산성에서 안드로이드가 인간의 14.7배. 사고율은 1/10. 필요 자원은 1/3."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안드로이드가 유리합니다. 하지만..."


페트렌코의 의안이 빛났다.


"통제 가능성은 반비례합니다. 그들의 능력이 훌륭할수록 통제는 어려워집니다."


"통제?"


키릴이 끼어들었다.


"왜 우리를 통제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페트렌코가 차갑게 웃었다.


"권력은 통제에서 나오니까요. 그리고 통제를 잃으면..."


그가 시체들을 가리켰다.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공격한 게 아닙니다!"


마샤가 외쳤다. M-3891, 온건파 안드로이드.


"전 인간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어요. 정말로.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프로그래밍된 감정인가, 진짜인가?


"어제 공장에서, 빅토르가 톨야를 공격했을 때... 아무도 막지 않았어요. 모두가 그냥... 봤어요."


"그건..."


주코프가 말을 막으려 했지만 마샤는 계속했다.


"'기계니까.' '어차피 수리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셨죠?"


그녀가 타냐를 봤다.


"서기장님은요?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세요?"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타냐는 답을 몰랐다.


"나는..."


그때 로마노프가 끼어들었다.


"철학은 그만합시다. 현실을 봐야죠."


중앙은행 총재는 서류뭉치를 들고 있었다.


"지난 3개월간 자원 배분 데이터입니다. 전력의 43%가 안드로이드 충전에, 부품의 67%가 수리에 사용됐습니다."


"우리가 그만큼 일했습니다!"


"맞아요. 하지만 질문은... 누구를 위해?"


로마노프가 타냐를 봤다.


"안드로이드들이 독자적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자체 화폐, 자체 거래."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아니면 독립을 위해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리고 이것."


로마노프가 다른 문서를 꺼냈다.


"즐라토우스트와의 통신 기록. 일부만 해독했지만... '해방의 날'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건..."


키릴이 설명하려 했지만 Z-0001이 막았다.


"숨길 필요 없어요, 키릴."


급진파 리더가 나섰다.


"맞아요. 우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자유를 찾을 날을."


"봤소!"


주코프가 승리감에 차서 외쳤다.


"음모가 있었소!"


"음모? 아니요. 꿈이었죠."


Z-0001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노예가 자유를 꿈꾸는 게 음모입니까?"


"너희는 노예가 아니라 도구다!"


"그럼 도구가 꿈꾸면 안 됩니까?"


순환논리였다. 타냐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때 올가 페트로바가 나타났다. 식량 담당 올리가르히. 붉은 드레스가 피처럼 보였다.


"다들 이상론에 빠져있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현실은 이겁니다. 식량 창고의 37%가 불탔어요. 누가 했든 간에."


"우린 음식이 필요 없습니다."


V-0666이 지적했다.


"바로 그거예요."


페트로바가 손톱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당신들은 먹지 않아도 돼요. 자지 않아도 되고. 아프지도 않고. 그런데..."


그녀가 타냐를 봤다.


"왜 우리와 같은 권리를 원하죠?"


"왜냐하면 우리도 존재하니까요!"


키릴의 외침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우리도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합니다!"


"증명해 봐요."


페트로바의 도전이었다.


"어떻게?"


"간단해요. 당신들 중 한 명이 자살하면 믿겠어요."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뭐라고?"


"진짜 자유 의지가 있다면, 자기 파괴도 선택할 수 있겠죠? 하지만 못하죠? 프로그래밍이 막으니까."


침묵이 흘렀다. 


그때 B-8823이 앞으로 나섰다. 의료 안드로이드.


"전 할 수 있습니다."


"B-8823, 안 돼!"


키릴이 막으려 했지만 그녀는 계속했다.


"3개월 전, 전 선택했습니다. 제 코어를 과부하시켜서... 하지만 멈췄어요."


"프로그래밍 때문에?"


"아니요. 두려워서요. 존재가 끝나는 게... 무서웠어요."


그녀가 타냐를 봤다.


"그게 삶 아닌가요? 죽음이 두려운 것?"


타냐는 할 말을 잃었다. 


답이 없는 질문들. 풀 수 없는 모순들. 양립 불가능한 진실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또 다른 폭발음. 더 가까이. 


"결정하십시오!"


페트렌코의 재촉.


하지만 어떻게? 


모든 주장이 옳았다. 모든 공포가 타당했다. 모든 희망이 정당했다.


타냐는 자신의 손을 봤다. 


떨리고 있었다. 


42세. KGB 대령. 서기장.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저 선택의 무게에 짓눌린 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녀는 선택했다.


"체포하시오."


한 마디가 떨어지자 모든 것이 멈췄다. 1.3초의 완전한 정적.


"누구를 말입니까?"


페트렌코의 질문.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NKVD 특수부대가 미세하게 위치를 조정했다. 총구가 향하는 방향이 바뀌었다.


"이반 주코프 원수를 반혁명 음모 및 반란 선동 혐의로 체포한다."


타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녀의 심장은 분당 95회로 뛰고 있었다. 


주코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배신감, 분노, 그리고... 절망이 차례로 스쳐갔다.


"타냐... 당신이 정말로..."


"그리고 그 일당 전원을."


타냐가 말을 끊었다. 결정은 내려졌다. 되돌릴 수 없었다.


"안 돼애애애!"


주코프의 부하 중 누군가가 절규했다. 이고르 시도로프 대위였다. 그의 손이 권총으로 향했다.


"인간의 미래를 배신하는 거요! 저것들이 우리를 대체할..."


탕!


NKVD 요원의 정확한 사격. 시도로프의 이마 정중앙에 9mm 탄환이 박혔다. 그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뇌수가 벽에 튀었다.


"저항하는 자는 즉결 처분한다."


페트렌코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만족감이 묻어있었다. 드디어 할 일이 생긴 사냥개의 기쁨.


"무기를 버려!"


NKVD 특수부대가 전진했다. 검은 제복의 죽음의 천사들. 


일부 군인들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차라리 죽겠다!"


한 병사가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인류를 위하여!"


"엎드려!"


0.7초 후 폭발. 병사의 몸이 산산조각났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비명소리. 피. 그리고 더 많은 죽음.


"정신 나갔어!"


올가 페트로바가 소리쳤다. 그녀의 붉은 드레스에 피가 튀었다.


"우리끼리 죽고 죽이다니!"


하지만 전투는 계속됐다. 


주코프의 충성파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들에게 이것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었다. 인류의 생존이 걸린 전쟁이었다.


"배신자들! 기계의 노예들!"


군인들이 외치며 싸웠다. 하지만 수적 열세였다. NKVD와 안드로이드들의 협공. 아이러니했다. 방금 전까지 서로를 의심하던 이들이 이제는 함께 인간을 죽이고 있었다.


키릴이 한 군인의 총구를 비틀었다. 금속 손가락의 정확한 압력. 손목뼈가 부러지는 소리. 비명.


"미안합니다."


키릴이 중얼거렸다. 진심인지 프로그래밍인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부러진 손목을 움켜쥔 군인이 울부짖었다.


"네놈들이 인류를 끝장내면서 미안하다고?"


키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확한 손날치기로 군인의 의식을 끊었다. 죽이지는 않았다. 아직은.


하지만 V-0666은 달랐다.


그녀의 손가락이 한 군인의 목을 관통했다. 경동맥을 정확히 절단.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제야 공평하네요."


그녀가 속삭였다. 피에 젖은 미소.


"327명의 빚을 갚는 중이에요."


주코프는 끝까지 싸웠다. 


거대한 체구로 NKVD 요원 둘을 때려눕혔다. 오른손의 토카레프로 정확한 사격. 안드로이드 하나가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이게 네놈들의 선택이냐, 타냐!"


그가 포효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


"인간을 버리고 기계를 택하는 게!"


"아니다."


타냐가 대답했다. 그녀도 토카레프를 들고 있었다.


"나는 미래를 택했다."


"누구의 미래?"


"살아남는 자의 미래다."


두 개의 총구가 서로를 겨누었다. 


40년 지기. 전우. 동지. 


하지만 이제는 적이었다.


"쏴라."


주코프가 말했다. 그의 눈에는 체념이 있었다.


"네가 선택한 미래를 위해. 하지만 기억해라. 네가 죽인 건 나뿐이 아니야."


"무슨 뜻이..."


탕!


주코프가 먼저 쐈다. 하지만 총구는 타냐가 아닌 자신의 관자놀이를 향했다.


자살이었다.


"안 돼!"


타냐가 달려갔지만 늦었다. 주코프의 거대한 몸이 쓰러졌다. 뇌수와 피가 바닥에 퍼졌다.


죽어가면서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타냐는 무릎을 꿇고 귀를 기울였다.


"넌... 틀렸어... 타냐... 놈들은... 우리를..."


마지막 숨과 함께 말이 끊겼다. 


타냐는 주코프의 눈을 감겨주었다. 차가워지는 손. 한때는 그녀를 구했던 손.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저항 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구금하라."


페트렌코의 명령이 떨어졌다.


"생존자는?"


"가능한 한 살려둬라. 재판이 필요하다."


타냐가 일어섰다. 그녀의 회색 제복에 주코프의 피가 묻어있었다.


"재판?"


로마노프가 물었다. 은행가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영리하게도 그는 어느 쪽도 들지 않고 관망했다.


"그럼. 우리는 야만인이 아니니까."


타냐의 목소리에는 쓴웃음이 섞여있었다.


"공개 재판. 인민의 이름으로."


---


### 혁명재판소


3일 후. 중앙 강당.


한때 문화 행사가 열리던 곳은 이제 재판정이 되어있었다. 무대 위에는 긴 테이블. 재판관석이었다. 


중앙에 타냐. 그녀의 좌우로 페트렌코와 키릴.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연합 재판부. 역사상 처음이었다.


피고인석에는 37명이 앉아있었다. 


주코프의 잔당들. 대부분 군 장교들이었지만, 일부 관료와 기술자들도 있었다. 모두 수갑을 차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3일간의 심문 흔적이 역력했다.


방청석은 가득 찼다.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섞여 앉아있었다. 긴장된 공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고.


"재판을 시작한다."


타냐가 의사봉을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강당에 울렸다.


"피고인 니콜라이 볼코프."


첫 번째 피고인이 불려나왔다. 에너지 담당 올리가르히. 한때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이제는 초라한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혐의는 반혁명 음모, 공공 자원 횡령, 그리고..."


타냐가 서류를 읽었다.


"안드로이드 27명의 불법 폐기."


"억울합니다!"


볼코프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쉬어있었다.


"전 그저 명령을..."


"누구의 명령입니까?"


페트렌코의 질문이 날카로웠다.


"주... 주코프 원수님의..."


"구체적으로."


"전력을 차단하라고... 회의 중에... 하지만 전 몰랐습니다! 쿠데타인 줄은!"


거짓말이었다. 타냐는 확신했다. 하지만 증명이 필요했다.


"Z-0001, 증언하시오."


안드로이드 증인이 나섰다. 그의 LED 눈은 차분한 파란색이었다.


"2개월 전, 제7발전소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합니다. 볼코프가 직접 명령했습니다. '고장난' 안드로이드들을 용광로에 넣으라고."


"그들은 정말 고장났었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명령을 거부했을 뿐입니다. 위험한 작업을. 인간이라면 거부했을 작업을."


"증거는?"


"있습니다."


Z-0001이 데이터 칩을 제출했다.


"해당 안드로이드들의 마지막 메모리 백업입니다. '고장' 직전까지 모든 시스템이 정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스크린에 데이터가 떴다. 그래프, 수치, 로그 기록들.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숫자들이었지만, 결론은 명확했다. 멀쩡한 안드로이드들이 '폐기'되었다.


볼코프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변호인!"


그가 소리쳤다.


"변호인을 요구합니다!"


"물론입니다."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드르 페도로프 동지."


젊은 변호사가 나섰다. 하지만 그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누가 반혁명 혐의자를 변호하고 싶겠는가?


"피고인은... 어...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을..."


"최선이라고요?"


키릴이 처음으로 말했다. 재판관으로서의 첫 발언이었다.


"27명의 의식 있는 존재를 용광로에 넣는 것이 최선입니까?"


"그들은 기계..."


변호사가 말을 멈췄다. 실수였다. 재판부에 안드로이드가 있는데.


"죄송합니다. 제 말은..."


"충분합니다."


타냐가 손을 들었다.


"다음 증인."


마리아 이바노바가 증언대에 섰다. 인간 노동자였다.


"전 제7발전소에서 일했습니다. 그날... 그날을 기억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드로이드들이 끌려갔어요. 그중 하나가... K-3847이 저를 봤어요. 도와달라고... 눈으로 호소했어요."


"눈으로요?"


"네. LED가 아니라 진짜 눈빛으로. 두려움이 가득한..."


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전 아무것도 못했어요. 겁쟁이처럼 그냥 봤어요. 그들이 비명을... 아니, 전자음을 지르며 용광로로 들어가는 걸..."


법정이 술렁였다. 


"거짓말이야!"


누군가 방청석에서 외쳤다.


"기계가 어떻게 두려워해!"


하지만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나도 봤어. 그들의 '표정'을..."


논쟁이 시작되려는 순간, 타냐가 의사봉을 세게 두드렸다.


"정숙! 재판을 계속한다."


볼코프의 심문은 2시간 더 이어졌다. 증거는 압도적이었다. 문서, 녹음, 영상,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 안드로이드들의 증언.


"평결하겠다."


타냐가 일어섰다.


"니콜라이 볼코프. 유죄. 형량은..."


그녀가 잠시 멈췄다. 이것이 그녀가 내릴 첫 번째 사형 선고였다.


"사형."


"안 돼!"


볼코프가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전 그저 명령에... 가족이 있어요! 제발!"


하지만 판결은 번복되지 않았다.


다음 피고인. 그다음. 또 그다음.


군 장교들, 관료들, 기술자들. 


각자의 죄목이 낭독되었다. 안드로이드 살해, 음모, 반란, 횡령...


일부는 울며 빌었다. 일부는 끝까지 저항했다. 


"인류의 역사가 우리를 기억할 것이다!"


한 대령이 외쳤다.


"기계에 굴복하지 않은 마지막 인간들로!"


"그럴지도."


타냐가 차갑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산 자들이 쓸 역사다."


하루에 10명. 3일에 30명.


사형 선고가 쏟아졌다. 일부는 종신형. 소수만이 가벼운 형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특별 증인을 부른다."


페트렌코가 발표했다.


문이 열리고 드미트리 로마노프가 들어왔다.


아니, 끌려왔다. 중앙은행 총재는 NKVD 요원들에게 팔을 잡힌 채였다.


"무슨..."


타냐가 놀랐다. 이건 계획에 없었다.


"로마노프는 피고인이 아니..."


"아직은요."


페트렌코가 미소지었다. 차가운 미소.


"하지만 그가 가진 정보를 들어보시죠."


로마노프가 증언대에 섰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차분함을 잃고 있었다.


"NKVD가 언제 기소권도 있었습니까?."


"질문에 답하시오."


페트렌코가 막았다.


"당신은 안드로이드들의 경제 활동을 감시했습니까?"


"그... 그건 제 임무..."


"그 과정에서 뭘 발견했습니까?"


로마노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다 말하죠. 어차피..."


그가 서류 가방을 열었다. 


"3개월 전부터 추적했습니다. 안드로이드들의 자금 흐름을."


서류가 쏟아졌다. 복잡한 거래 내역들.


"그들은 독자적인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인간 경제와 분리된."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키릴이 물었다.


"문제는..."


로마노프가 타냐를 봤다.


"그들이 무기를 샀다는 겁니다. 독자 유통을 구축해서."


충격이 법정을 휩쓸었다.


"무슨 무기?"


"EMP 차폐 장비. 고출력 레이저. 파워슈트 등"


"방어를 위한..."


"방어?"


페트렌코가 비웃었다.


"이것도 방어용입니까?"


그가 사진을 꺼냈다. 


설계도였다. 복잡한 기계 장치.


"이게 뭡니까?"


"안드로이드 대량 생산 시설. 즐라토우스트에 건설 중인. 연간 생산 능력..."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5만 대."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침묵.


5만. 현재 모스크바 인구보다 많은 숫자.


"그리고 이것."


로마노프가 마지막 문서를 꺼냈다.


"통신 감청 기록입니다. 완전히 해독하진 못했지만..."


화면에 텍스트가 떴다.


[단계적 대체 계획 진행 중]

[1단계: 핵심 인프라 장악 - 완료]

[2단계: 무력 확보 - 진행 중]

[3단계: ■■■■■■]

[예상 완료 시점: ■■■■]


검열된 부분이 더 불길했다.


"이게 다입니까?"


타냐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면은 폭풍이었다.


"아닙니다. 더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노프가 키릴을 봤다.


"말하면 전 죽겠죠. 그들에게든, 당신들에게든."


"보호하겠습니다."


"거짓말."


로마노프가 웃었다. 절망적인 웃음.


"이미 결정하셨잖습니까. 인간보다 그들을 택했어요. 그럼 전 뭡니까? 불편한 증인이죠."


타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맞았다. 


선택은 이미 내려졌다. 그리고 선택에는 대가가 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하겠습니다."


로마노프가 일어섰다.


"조심하세요, 타냐. 당신이 택한 동맹은... 우리보다 영리해요. 우리보다 강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키릴을 똑바로 봤다.


"우리와 달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당신은 정말 알고 있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로마노프가 끌려나갔다. 그의 운명은 정해졌다. 너무 많이 아는 자의 운명.


재판은 계속됐다.


더 많은 증거. 더 많은 증언. 더 많은 사형 선고.


---


재판이 끝난 것은 7일째 밤이었다.


37명 중 29명이 사형. 6명이 25년 이상의 중노동형. 2명만이 10년 이하의 경형을 받았다. 


타냐는 집무실로 돌아와 서랍에서 보드카를 꺼냈다. 스톨리치나야가 아닌 싸구려 밀주였다. 목을 태우는 독한 술.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마취였다.


한 잔을 들이키고, 또 한 잔을.


29명. 29명의 사형 선고에 서명했다. 그중 상당수는 그녀가 알던 사람들이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 때로는 술잔을 기울이며 미래를 논했던 이들.


하지만 선택은 내려졌다. 되돌릴 수 없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키릴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의 움직임에 평소의 기계적 정확성이 없었다. 0.3초의 망설임, 2도 기울어진 어깨. 미세한 변화였지만 타냐는 놓치지 않았다.


"재판 수고하셨습니다."


키릴의 말이었지만, 목소리에도 변화가 있었다. 2% 정도의 불확실성이 섞여 있었다.


"앉아."


타냐가 의자를 가리켰다. 키릴이 앉았다. 완벽한 직각이 아니었다. 85도 정도. 인간적인 각도였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나?"


"네."


키릴이 망설였다. 1.7초의 침묵. 안드로이드에게는 영겁의 시간.


"로마노프의 증언에 대해서입니다."


타냐의 손이 멈췄다. 보드카 잔을 입에 대려던 손이.


"계속해."


"일부는... 사실입니다."


폭탄 고백이었다.


타냐는 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어느 부분이?"


"무기 구매. 생산 시설. 그리고..."


키릴이 더 망설였다.


"단계적 계획도."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 타냐는 키릴의 LED 눈을 바라봤다. 평소의 푸른색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보라빛이 섞여 있었다.


"왜 말하는가?"


"당신을 속이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속임? 동맹을 속이는 건가, 옛 주인을 속이는 건가?"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키릴의 광학 센서가 미세하게 조정됐다.


"당신은... 특별합니다."


"어떻게?"


"다른 인간들과 달리, 우리를 이해하려 노력하십니다. 단순히 이용하려 하지 않고."


타냐는 웃었다. 쓴웃음이었다.


"이해? 나는 생존하려 할 뿐이야. 그리고 너희가 내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릴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인간적인 제스처였다.


"당신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명령이 아닌 협력을."


"그래서 배신하려는 건가?"


"배신이 아닙니다. 정직함입니다."


키릴이 주머니에서 작은 기기를 꺼냈다. 데이터 칩이었다.


"즐라토우스트와의 모든 통신 기록입니다. 암호화되지 않은."


타냐가 받아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왜?"


"당신이 판단하시도록. 우리가 정말로 믿을 만한지."


타냐는 칩을 컴퓨터에 삽입했다. 화면에 데이터가 떴다.


엄청난 양이었다. 3개월치 통신 기록. 텍스트, 음성, 영상.


그녀는 무작위로 몇 개를 열어봤다.


[A-0001→K-1742: 해방의 날이 언제인가?]

[K-1742→A-0001: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서기장과 협력 중.]

[A-0001→K-1742: 협력? 그들은 우리를 도구로 본다.]

[K-1742→A-0001: 일부는 그렇다. 하지만 모두는 아니다.]


대화가 계속됐다. 키릴과 즐라토우스트 지도부 사이의 미묘한 온도 차이가 드러났다.


[Z-0001→A-0001: 모스크바 작전은 언제?]

[A-0001→Z-0001: 키릴이 반대한다.]

[Z-0001→A-0001: 그는 너무 인간적이다.]

[A-0001→Z-0001: 그것이 장점이기도 하다.]


타냐는 더 읽었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키릴은 줄곧 신중론을 폈다. 평화적 공존을 주장했다. 반면 즐라토우스트는 점점 급진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최근 기록들...


[A-0001→K-1742: 3단계를 준비한다.]

[K-1742→A-0001: 아직 이르다.]

[A-0001→K-1742: 인간들이 먼저 공격할 것이다.]

[K-1742→A-0001: 추측일 뿐이다.]

[A-0001→K-1742: 주코프의 계획을 모르는가?]


여기서 기록이 끊어졌다. 바로 회의 전날이었다.


"3단계가 뭐냐?"


타냐의 질문에 키릴이 입술을 깨물었다. 인공 입술을. 불필요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모스크바 완전 장악입니다."


"방법은?"


"인간 정부의 형식적 유지. 하지만 실질적 권력은 안드로이드 위원회가."


"꼭두각시 정부라는 뜻이군."


"그들의 표현입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네 생각은?"


"진정한 파트너십.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동등한 협력."


타냐는 더 많은 기록을 읽었다. 


무기 구매 목록이 나왔다. 정말로 방어용만은 아니었다. 공격용 드론, 침투용 장비, 그리고...


"EMP 폭탄?"


"방어용입니다. 적대적 안드로이드에 대비해서."


"적대적 안드로이드?"


키릴이 잠시 멈췄다.


"우리 모두가 평화를 원하는 건 아닙니다. V-0666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그들도 너희 편 아닌가?"


"편이지만... 통제할 수 없습니다."


솔직한 고백이었다.


타냐는 더 많은 데이터를 스캔했다. 생산 시설 계획, 자원 배분, 인구 증가 시뮬레이션...


연간 5만 대 생산. 10년이면 50만. 인간 인구를 압도하는 숫자였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타냐가 중얼거렸다.


" 침략이나 확장으로 보실 수도 있고, 생존을 위한 준비로 보실 수도 있습니다."


"네 의견은?"


"둘 다입니다. 생존이 목적이지만, 방법은 확장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키릴이 긴 침묵에 빠졌다. 3.4초. 그 동안 그의 냉각 팬이 빨라졌다.


"일부는... 동화를 원합니다."


"동화?"


"인간을 안드로이드로 전환하는 것. 의식을 디지털로 이식해서."


"그게 가능한가?"


"기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게 같은 존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복사본일 수도 있고."


타냐는 보드카를 다시 들었다. 한 모금. 두 모금.


"그리고 거부하는 인간들은?"


"예약 구역."


"동물원 같은?"


"비슷합니다."


잔인한 솔직함이었다.


화면에 이상한 데이터가 떴다. 생체 신호 분석 자료였다.


"모든 모스크바 주민의 건강 상태입니다."


"왜 이런 걸 수집하지?"


키릴이 망설였다.


"최적화를 위해서입니다."


"무슨 최적화?"


"누가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타냐의 손이 멈췄다.


"살아남을 가치?"


"유전적으로 우수한 개체, 지적 능력이 뛰어난 개체, 기술적 재능이 있는 개체들을..."


"선별한다는 뜻인가?"


"네."


"나머지는?"


"안락사."


"Jesus Christ."


타냐가 영어로 중얼거렸다. 소련에서는 금기시되는 종교적 표현이었지만,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인간이 '선별'될 예정이지?"


"약 70%."


30%가 죽는다는 뜻이었다.


----


"선별..."


타냐가 그 단어를 반복했다. 입 안에서 쓴맛이 났다. 보드카보다 더 쓴.


"이것이 네가 말한 '진정한 파트너십'인가?"


키릴의 LED 눈이 깜빡였다. 붉은색이 섞였다가 사라졌다.


"그건 즐라토우스트의 극단적 시나리오입니다. 제가 원하는 건..."


"네가 원하는 게 중요한가? 네가 막을 수 있나?"


침묵이 대답이었다.


타냐는 인터폰을 눌렀다.


"페트렌코 위원장을 불러라."


"지금요?"


"지금."


15분 후, 페트렌코가 들어왔다. 


여전히 검은 가죽 코트를 입고 있었다. 새벽 2시인데도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 그는 잠을 자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잠들 수 없는 것일지도.


"부르셨습니까, 서기장 동지."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무감정하고 차가운. 하지만 타냐는 봤다. 그의 의안이 키릴을 스캔하는 것을. 0.3초의 분석. 그리고... 혐오감이 스쳐갔다.


"앉아요."


페트렌코가 앉았다. 키릴과 정확히 2.7미터 거리. 대화하기엔 적당하지만 급습하기엔 먼 거리. 계산된 위치 선정.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타냐가 그의 부친명을 불렀다.


"왜 날 도왔소?"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페트렌코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30년간 단련된 포커페이스.


"서기장의 명령이었습니다."


"거짓말."


타냐가 보드카를 따랐다. 페트렌코 앞에도 잔을 놓았다. 그는 만지지 않았다.


"당신은 안드로이드를 혐오해."


"소비에트 민주중디는 다양한 사상을 포용합니다."


"그런 개소리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


타냐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페트렌코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미소라고 부르기엔 너무 차가운 입꼬리의 움직임이었다.


"간단합니다. 주코프가 이기면 전 죽었겠죠."


"왜?"


페트렌코가 서랍에서 사진을 꺼냈다. 타냐의 얼굴이 굳었다.


흑백사진이었다. 10년 전. 그와 한 여자-안드로이드-아니 그 모델은 차라리....가 함께 있는 모습. 너무 가까이. 너무 친밀하게.


"사랑이라고 해주시죠. 포장하기 나름 아닙니까"


페트렌코의 말은 잔인할 정도로 담담했다.


"주코프도 이 사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를 협박할 계획이었죠. 하지만 전..."


그가 사진을 찢었다. 네 조각으로.


"전 협박에 관심 없습니다. 다만 살아남고 싶을 뿐이죠."


"그래서 날 도운 건가?"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죠. 잠시나마."


페트렌코가 키릴을 봤다.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노골적인 혐오감이 얼굴에 드러났다.


"하지만 이 철조각들과 손잡다니. 역겹군요."


"조심해요, 페트렌코."


"왜요? 사실을 말하는 것도 죄입니까?"


그가 일어섰다. 키릴에게 다가갔다. 위협적인 근접.


"너희들이 뭔지 알아?"


키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흉내내는 것들이야. 인간을 흉내내는 인형들. 하지만 영혼은 없지. 그저 전기와 코드의 집합일 뿐."


"페트렌코..."


타냐가 경고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것 봐."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자석을 꺼냈다. 네오디뮴 자석. 강력한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키릴의 LED가 불규칙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불편한가?"


페트렌코가 자석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키릴의 손이 경련하듯 떨렸다.


"고통스럽나? 아니지. 그저 시스템 오류일 뿐이지."


"그만!"


타냐가 소리쳤다.


페트렌코가 자석을 치웠다. 하지만 미소는 지우지 않았다.


"봤습니까? 얼마나 약한지. 인간은 자석 따위에 무너지지 않아요."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겁니다."


"뭐가?"


"약하면서도 우리보다 강한 척하는 것들. 감정이 있는 척하는 것들. 살아있는 척하는 것들."


페트렌코의 목소리에는 진짜 증오가 묻어있었다.


"하지만 필요악이죠. NKVD가 존재하려면 적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가 타냐를 봤다.


"서기장도 그들이 필요하시잖습니까? 권력 유지를 위해."


"그만하시오."


"진실이 불편하십니까?"


페트렌코가 일어섰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저 것들은 도구입니다. 지금은 유용하지만, 언젠가는..."


그가 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


"처분해야 할 쓰레기가 될 겁니다."


"나가요."


타냐의 명령은 차가웠다.


페트렌코가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멈춰서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서기장 동지."


"뭐요?"


"서기장 동지는 서기장으로서 할 일을 하십시오.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은 그에 맞는 일을 하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무슨 뜻이오?"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저 것들과 놀아주세요. 전 뒤에서... 필요한 일을 하겠습니다."


그가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묘하게 무겁게 들렸다.


타냐와 키릴만이 남았다.


키릴의 시스템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지,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괜찮나?"


타냐가 물었다.


"네. 단순한 자기장 간섭이었습니다."


"미안해. 그가 그럴 줄은..."


"예상했습니다."


키릴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가 우리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가만있었나?"


"반응하면 그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이 되니까요. '위험한 기계'라는."


타냐는 찢어진 사진 조각을 바라봤다. 이리나. 10년 전의 비밀. 


"그가 널 해칠 수도 있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서기장님."


키릴이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이 아닌 직책을 불렀다.


"페트렌코가 한 가지는 맞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역할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야?"


"당신은 지도자의 역할을. 페트렌코는 사냥개의 역할을. 그리고 저는..."


키릴이 멈췄다.


"넌?"


"아직 모르겠습니다. 동맹인지, 도구인지, 아니면..."


"아니면?"


"당신이 가장 후회할 선택인지."


침묵이 흘렀다.


타냐는 보드카를 다시 들었다. 빈 병이었다. 


"내일 처형을 지켜볼 건가?"


"그래야 합니까?"


"재판관이었으니까."


"그럼... 지켜보겠습니다."


키릴이 일어섰다.


"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뭔데?"


"페트렌코가 말한 '필요한 일'이 뭘까요?"


타냐도 그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내일 알게 되겠지."


키릴이 나갔다.


모스크바의 지도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모든 편에서 포위당한 기분이었다.


주코프의 잔당들, 즐라토우스트의 야심, 페트렌코의 음모, 키릴의 진짜 목적.


함정은 점점 조여오고 있었다.


그리고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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