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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세번째 아르덴


프레빌 48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0

11월 23일, 새벽 4시 17분.


브뤼셀 동쪽 관측소는 한때 벨기에 왕립 천문대의 부속 건물이었다. 이제는 반쯤 무너진 돔 아래에서 19살의 앙투안 페레가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쌍안경을 붙들고 있었다. 그의 숨결이 하얗게 얼어붙어 쌍안경 렌즈를 흐리게 만들었다. 3초마다 한 번씩 장갑 낀 손으로 렌즈를 닦아야 했다.


동쪽 지평선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사능 구름이 별빛마저 삼켜버린 세계에서 새벽은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피로에 지친 눈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것은 있었다. 지평선을 따라 늘어선 수백, 아니 수천 개의 불빛들. 마치 별들이 땅으로 내려와 행진하는 것처럼.


"본부, 여기는 동쪽 3번 초소."


그의 목소리가 얼어붙은 무전기에 대고 떨렸다. 입술이 갈라져 피가 났다. 철분 맛이 입안에 퍼졌다.


"구체적으로 보고하라."


통신병의 목소리는 짜증스러웠다. 새벽 4시 17분. 교대 시간까지 43분 남은 시점. 가장 나른하고 짜증나는 시간이었다.


"불빛입니다. 수천 개의... 아니, 그 이상입니다. 그리고..."


앙투안이 쌍안경의 배율을 높였다. 손이 떨려서 초점을 맞추기 어려웠다. 추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철십자가... 전차에 철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무전기 너머의 침묵이 1.3초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통신병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 뭔가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끄아앙- 끄아앙- 끄아앙-


사이렌이 죽은 도시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100데시벨의 굉음이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에서 메아리쳤다. 깨진 유리창들이 진동에 떨며 산산조각 났다.


맥브라이드는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았다. 책상 앞 의자에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최근 열흘간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2.7시간. 불면증이 아니었다. 본능이었다. 야생동물이 위험을 감지하듯, 그의 신경은 팽팽하게 조여 있었다.

사이렌이 울리기 0.4초 전, 그의 눈이 떠졌다.


군복을 입는 데 걸린 시간 - 18초.

상의 단추 7개를 채우는 데 4.2초.

바지를 입는 데 3.8초.

장화를 신는 데 6.7초.

벨트를 채우는 데 2.1초.

권총을 차는 데 1.2초.


그는 거울을 보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 10년간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근육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휘소까지의 거리 - 127미터.

평소 걸음 - 2분 11초.

전속력 질주 - 47초.


복도는 어두웠다. 비상등만이 3미터 간격으로 붉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콘크리트 바닥에 메아리쳤다. 탁, 탁, 탁. 일정한 리듬. 분당 180보.


23초 지점에서 첫 번째 병사와 마주쳤다. 역시 지휘소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19살쯤 되어 보이는 신병. 아직 단추를 다 채우지 못한 채 뛰고 있었다.


31초 지점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병사.

39초 지점에서 장교 그룹.

44초 지점에서 지휘소 입구.


철제 문을 밀고 들어가자, 이미 상황판 앞에는 당직 장교들이 모여 있었다. 담배 연기와 커피 냄새, 그리고 공포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상황 보고!"


맥브라이드의 목소리가 작전실을 압도했다.


뤼프케가 거대한 지도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형광등 불빛 아래서 시체처럼 창백했다. 왼쪽 눈 밑의 떨림이 심해졌다. 스트레스성 경련. 최근 들어 악화되고 있었다.


"동쪽 30킬로미터 지점. 대규모 기계화 부대 접근 중."


그가 빨간 핀을 지도에 꽂으며 말했다. 핀이 들어간 자리는 한때 아름다운 숲이었던 곳. 이제는 방사능에 오염된 잿빛 벌판이었다.


"이동 속도 시속 40킬로미터. 이 속도라면..."


그가 자를 대고 재빨리 계산했다.


"45분 후 외곽 방어선 도달."


"규모는?"


"적외선 감지 결과..."


뤼프케가 보고서를 넘겼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그의 손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보병 5,000명 이상. 레오파르트 2A7 전차 32대. 푸마 장갑차 48대. 자주포 12문. 그리고..."


그가 잠시 멈췄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화학전 부대로 추정되는 특수 차량 8대."


압도적이었다. 브뤼셀의 전 병력은 정규군 1,247명, 프랑스군 482명, 미해병대 187명. 합쳐도 2,000명이 안 되었다.

전차? 단 한 대도 없었다.


장갑차? 녹슨 BTR-60 4대가 전부. 그나마 2대는 엔진이 제대로 돌지 않았다.


대전차 무기? 구식 RPG 몇 정.


"프랑스군은?"


"뒤부아 소장이 전 병력 동원을 약속했습니다. 단..."


작전 참모가 끼어들었다. 28살의 벨기에군 대위였다. 이름은 피터 반 담. 안경 너머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단?"


"자기들 방어 구역을 먼저 지키겠다고..."


정치적 계산이었다. 뒤부아는 여전히 맥브라이드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미군은?"


"윌리엄스가 해병대 전원 투입을 확약했습니다."


187명. 정예였지만 숫자가 너무 적었다.


맥브라이드는 지도를 응시했다. 브뤼셀의 지형이 그의 뇌리에서 3차원으로 재구성되었다.


동쪽 - 개활지. 전차전에 유리한 지형.

서쪽 - 언덕과 숲. 이미 대부분 불탔지만 엄폐는 가능.

남쪽 - 운하. 폭 30미터. 깊이 4미터. 물은 거의 말랐지만 장애물로는 충분.

북쪽 - 구시가지. 좁은 골목과 오래된 건물들.


그리고 지하 - 미로 같은 하수도, 지하철, 카타콤.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또 다른 도시.


"정면 대결은 자살이야."


한 참모가 중얼거렸다. 35살의 소령. 이름은 까먹었다.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패배주의가 묻어났다.


맥브라이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형광등 불빛을 반사했다. 늑대의 눈이었다.


"그래서?"


한 단어였지만, 그 안에는 얼음장 같은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소령이 움찔했다.


"아... 아닙니다. 단지..."


"나가."


"예?"


"나가라고 했다."


감정이 없는 목소리였다. 소령이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작전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맥브라이드가 다시 지도를 보았다.


"운하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의 푸른 선을 따라갔다. 브뤼셀을 초승달 모양으로 감싸는 운하.


"물이 거의 말라있습니다.."


"그래서 좋아."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0.3센티미터. 10년 만에 처음 보는 미소였다.


"마른 운하. 폭 30미터의 함정."


이해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하지만 뤼프케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다."


맥브라이드가 시계를 봤다. 4시 24분.


"공병대장 불러. 그리고 슈나이더도."


"슈나이더를... 지금요?"


"지금이 아니면 늦어."


---

4시 31분.

공병대장 마르셀 듀폰이 도착했다. 47세. 한때는 브뤼셀 시 토목과 과장이었다. 이제는 폭파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의 왼손은 3년 전 폭발 사고로 잃었다. 철제 의수가 달려 있었다.


"건물을 무너뜨려야 한다."


맥브라이드의 첫 마디에 듀폰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광기 비슷한 것이 번뜩였다. 파괴를 즐기는 자의 눈이었다.


"어디를요?"



맥브라이드가 지도에 빨간 X를 그리기 시작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주요 진입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이었다. 아파트, 사무실, 상가. 한때 사람들의 삶이 있던 곳들.


"주민들은..."


"이미 대피령이 내려갔다."


거짓말이었다. 아직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에서 진실은 사치였다.


"2시간이면 충분합니까?"


듀폰이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건물 구조, 필요한 폭약량, 인력...


"90분이면 됩니다."


"60분 안에 끝내."


"불가능..."


"가능하게 만들어."


맥브라이드의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듀폰이 경례를 올리고 뛰어나갔다.


4시 35분.


슈나이더가 도착했다. 새벽임에도 양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넥타이가 비뚤어져 있었고, 구두끈이 제대로 묶이지 않았다. 서둘러 온 흔적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건설 장비가 필요하다."


"새벽 4시에?"


"굴착기, 불도저, 덤프트럭. 가동 가능한 모든 것."


슈나이더의 얼굴이 굳었다.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게 제 전 재산인데..."



"전쟁에서 지면 어차피 다 잃어."

차가운 진실이었다. 슈나이더는 계산했다. 빠르게. 베를린이 이기면? 자신은 순수한 독일계니까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재산은? 그리고 그의 노동자 중 절반은 이민자 출신...


"...알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재건독점권?"


맥브라이드의 말에 슈나이더가 놀란듯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이제 서로 익숙하지 않나, 약속하지, 장비가 남아있다면 말이야"


두 사람이 악수했다. 슈나이더의 손은 땀에 젖어 있었다.


4시 41분.


김영호가 통신 장비를 들고 나타났다. 그의 뒤에는 기술자 20명이 있었다. 모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밤새 작업한 흔적이었다.


"전파 교란 준비 완료했습니다."


그가 금속 상자를 열었다. 복잡한 전선과 회로가 얽혀 있었다. 냄새가 났다. 타는 플라스틱과 솔더링 냄새.


"효과는?"


"30% 정도의 통신이 교란됩니다. 명령 체계에 혼선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뿐?"


"그리고..."


김영호가 다른 상자를 가리켰다. 더 작았지만 더 정교해 보였다.


"가짜 무전을 송출할 수 있습니다. 적의 주파수로."



맥브라이드의 눈이 빛났다.


"예를 들면?"


"후퇴 명령, 위치 변경 같은 것들"


"준비해둬."


"그리고 장군님."


김영호가 천으로 덮인 상자들을 가리켰다. 길쭉한 상자 12개.


"재블린입니다. 미군 비축품."


맥브라이드가 천을 들어올렸다. FGM-148 재블린. 보병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 사거리 2.5킬로미터. 탄두 위력은 레오파르트 2의 상부 장갑도 관통 가능.


"어떻게 구했나?"


"묻지 마십시오. 나중에... 대가는 치르면 됩니다."


불길한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따질 때가 아니었다.


---


5시 23분. 동이 트기 시작했다.


베를린군 선봉대가 브뤼셀 외곽 5킬로미터 지점에 도달했다.


선봉대를 지휘하는 것은 프리드리히 폰 만슈타인 소령. 37세.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의 증조부는 2차 대전의 전설적인 원수. 그는 그 이름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실수였다.


"하등 인종들의 도시가 눈앞이다!"


그가 무전으로 외쳤다. 흥분에 들떠 있었다.


"2시간이면 점령한다! 총통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그의 전차 큐폴라에는 증조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흑백 사진 속 노원수는 차가운 눈으로 후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차량, 쐐기 대형으로 전환! 속도 60킬로!"


명령이 떨어지자 32대의 레오파르트 2가 대형을 바꿨다. 63톤의 강철 야수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했다. 그 뒤를 장갑차들이 따랐다. 보병들은 차량 위에 매달려 있었다. 일부는 노래를 불렀다.


"Auf der Heide blüht ein kleines Blümelein..."


에리카. 그들의 할아버지들이 불렀던 그 노래. 가사는 순수했지만, 그것을 부르는 맥락은 끔찍했다.


5시 47분.


그들이 운하 지대에 진입했다.


첫 번째 폭발은 선두 전차 10미터 앞에서 일어났다.


쿠웅-!


땅이 솟구쳤다. 흙과 콘크리트 파편이 비처럼 쏟아졌다. IED였다. 전차를 파괴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지! 전 차량 정지!"


만슈타인의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관성은 즉각적이지 않았다. 뒤따르던 전차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좁은 도로. 양옆은 반쯤 무너진 건물들. 전형적인 킬존이었다.


그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쿠르르르릉-


양쪽 건물이 동시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듀폰의 폭파 팀이 정확한 타이밍에 기둥을 날려버린 것이다.


수십 톤의 콘크리트가 쏟아져 내렸다.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시야가 순식간에 제로가 되었다.


"후퇴! 후퇴!"


하지만 후퇴로도 막혔다. 더 많은 건물이 무너졌다. 전차들은 좁은 공간에 갇힌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그때 첫 번째 재블린이 날아왔다.


슈우우웅-


미사일은 포물선을 그리며 상승했다가, 정확히 전차의 상부 장갑을 향해 내리꽂혔다. 탑어택 모드였다.


꽈앙!


레오파르트 2의 포탑이 화염에 휩싸였다. 탄약이 유폭했다. 포탑이 몸체에서 분리되어 20미터를 날아갔다. 4명의 승무원은 즉사했다. 시체도 남지 않았다.


"매복이다!"


비명과 함께 혼란이 시작되었다.


건물 잔해 사이에서, 하수구에서, 심지어 쓰레기통에서도 총구가 나타났다.


탕탕탕탕!

따다다다!

두두두두!


교차사격이었다. 360도 전방위에서 총알이 쏟아졌다.


"Scheisse! 흩어져! 차량에서 내려!"


만슈타인이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공포가 묻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큰 실수였다.


차량에서 내린 보병들은 더 쉬운 표적이 되었다. 브뤼셀 저격수들이 하나씩 골라 쏘기 시작했다.


탕!


첫 번째는 무전병이었다. 머리가 터졌다. 뇌수와 피가 만슈타인의 얼굴에 튀었다.


탕!


두 번째는 소대장이었다. 목을 맞았다. 경동맥이 끊어져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탕!


세 번째는 의무병이었다. 가슴 정중앙. 그는 다른 부상병을 치료하던 중이었다.


"연막탄! 연막!"


하지만 연막도 소용없었다. 브뤼셀군은 열화상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미군이 제공한 AN/PSQ-36. 연막 속에서도 체온은 선명하게 보였다.


학살이 계속되었다.


30분 만에 선봉대 800명 중 절반이 죽거나 다쳤다.


전차 7대가 불타고 있었다. 장갑차 12대가 파괴되었다. 도로는 시체와 잔해로 가득했다.


만슈타인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의 왼팔은 파편에 찢겨 있었고, 군복은 피로 젖어 있었다. 부상은 자신의 피가 아니었다.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었다.


"본대에... 본대에 연락..."


그가 무전기를 찾았다. 하지만 무전병은 이미 죽어 있었다. 머리가 없는 시체가 무전기를 껴안고 있었다.


---


6시 15분.


베를린군 본대가 도착했다.


지휘관은 하인리히 뮐러 중장. 52세. 전직 연방정보부 요원이었다. 동독 출신으로, 통일 후에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슈타지 출신이었다.


그의 왼쪽 눈은 의안이었다. 10년 전 절멸전쟁 때 잃었다. 유리로 만든 의안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다. 죽은 물고기의 눈 같았다.


"만슈타인!"


그가 무전으로 고함쳤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응답하라! 만슈타인!"


대답은 없었다. 만슈타인은 이미 저격수의 두 번째 총탄에 이마를 맞고 죽은 뒤였다. 그의 시체는 불타는 전차 옆에 엎어져 있었다. 증조부의 명예를 되찾으려던 꿈은 브뤼셀의 진흙 속에 묻혔다.


"쥐새끼들..."


뮐러의 오른쪽 눈이 경련을 일으켰다. 분노의 표시였다. 그의 부관들은 뒤로 물러섰다. 뮐러가 화를 낼 때는 가까이 있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포병대!"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목표, 브뤼셀 시내 전역. 무차별 포격. 이 도시를 지도에서 지워버려."


"하지만 민간인이..."


젊은 참모가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즉시 후회했다.



뮐러가 권총을 뽑아 참모의 머리에 갖다 댔다. P226. 9mm. 안전장치는 이미 풀려 있었다.


"민간인? 그들은 인간이 아니야. 쥐들이지."


방아쇠에 손가락이 걸렸다. 참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지에 얼룩이 번졌다. 오줌을 질렀다.



"이... 이해했습니다!"


뮐러가 권총을 내렸다. 참모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포격 개시!"


7시 정각.


지옥이 시작되었다.


휘이이잉-


첫 번째 포탄이 하늘을 갈랐다. 155mm 고폭탄. 탄두 중량 43.5킬로그램. 살상 반경 50미터.


꽈광!


시청 광장에 떨어졌다. 분수대가 산산조각 났다. 100년 된 대리석 조각상이 먼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2문의 자주포가 분당 6발씩 토해냈다. 시간당 4,320발. 각 포탄은 죽음의 씨앗이었다.


꽈광! 꽈광! 꽈광!


병원이 맞았다. 지붕이 날아갔다. 3층 병동이 통째로 무너졌다. 환자 50명과 의료진 10명이 압사했다. 비명소리는 포성에 묻혔다.


학교도 맞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이미 지하로 대피했지만, 건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성당의 첨탑이 부러졌다. 300년 된 스테인드글라스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아파트가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아직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이 있었다. 그들의 마지막 순간은 상상하기도 끔찍했다.

"지하로! 모두 지하로!"


맥브라이드의 명령이 무전망을 타고 퍼졌다. 하지만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10년간 브뤼셀 시민들은 지하에서 사는 법을 배웠다.


하수도, 지하철, 와인 저장고, 심지어 중세 시대의 카타콤까지. 모든 지하 공간이 대피소가 되었다.


그래도 늦은 사람들이 있었다.


노인들. 거동이 불편해 미처 대피하지 못한.


환자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그리고... 끝까지 다른 사람을 돕다가 시간을 놓친 사람들.


그들에게 포탄은 무자비했다.


2시간 동안 5,000발 이상이 떨어졌다.


브뤼셀의 지상은 달 표면처럼 변했다. 크레이터가 크레이터에 겹쳤다. 건물은 무너지고, 도로는 파헤쳐졌다.

화재가 시작되었다. 가스관이 터지고, 전선이 합선되었다. 불길이 번졌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동요하지 않았다.


지휘소는 지하 50미터에 있었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지만, 구조는 견고했다. 절멸전전 때 만들어진 벙커였다. 온갖 폭격도 견뎌낸 곳이었다.


"2단계 준비는?"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마치 일상적인 브리핑을 하듯.


"완료했습니다."


뤼프케가 보고했다. 그의 군복에도 먼지가 쌓여 있었다.


"대기 중인 병력은?"


"지하철 역사에 450명. 하수도 주요 지점에 320명. 나머지는..."


또 한 번의 폭발.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전등이 깜빡였다.


"시작 신호는?"


"포격이 멈추면 즉시."


맥브라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들어올 거야. 폐허가 된 도시를 점령하러. 그때..."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진짜 전쟁이 시작된다."


9시 23분.


포격이 멈췄다. 


정확히는 포신이 과열되어 더 이상 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2시간 동안 5,000발. 각 포는 평균 417발을 발사했다. 정상적인 운용 한계를 한참 넘어선 수치였다.


지상은 지옥이 되어 있었다.


한때 유럽의 수도였던 브뤼셀은 이제 거대한 무덤이었다. 연기가 시야를 가렸고, 먼지가 햇빛을 차단했다. 대낮인데도 황혼처럼 어두웠다. 


공기는 숨쉬기 어려웠다. 화약 냄새, 타는 플라스틱 냄새, 그리고 인육이 타는 특유의 달콤하고도 역겨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전진!"


뮐러의 명령이 떨어졌다.


베를린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신중했다. 


공병이 선두에 섰다. 지뢰 탐지기를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그 뒤를 보병이 따랐다. 총구를 사방으로 향한 채.

전차는 보병의 엄호를 받으며 천천히 전진했다.


도시 외곽에 진입했을 때, 저항은 없었다.


아니, 없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시체도, 생존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잔해와 연기뿐.


"쥐새끼들이 도망쳤나?"


한 하사가 중얼거렸다. 22살의 청년이었다. 베를린 교외에서 자원입대한 네오나치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르르릉-


그가 서 있던 도로가 무너졌다.


아니, 정확히는 무너뜨린 것이었다. 미리 약화시켜둔 하수도 천장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된 것처럼 보이게.


"으아악!"


비명과 함께 병사 20명이 구멍으로 떨어졌다. 4미터 아래는 하수도였다. 악취가 진동했다.


그리고 거기서...


따다다다!


기관총 소리가 울렸다. MG3. 분당 1,200발의 연사 속도. 


떨어진 병사들은 순식간에 벌집이 되었다. 피가 하수에 섞였다. 시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가스! 가스 마스크!"


누군가가 외쳤다. 


하수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가스처럼 보였다.


병사들이 황급히 가스 마스크를 썼다. 그것은 실수였다.


"지금이다!"


맥브라이드의 명령이 무전을 탔다.


가스는 가짜였다. 단순한 연막탄이었다. 하지만 가스 마스크를 쓴 병사들은 시야가 제한되었고, 의사소통이 어려워졌다.


바로 그때 진짜 공격이 시작되었다.


모든 곳에서 브뤼셀군이 튀어나왔다.


맨홀 뚜껑이 열리며 병사들이 나왔다. RPG를 든 병사가 전차를 노렸다.


슈웅-


로켓이 날아가 전차 측면을 때렸다. 반응장갑이 작동했지만, 충격은 전달되었다. 


건물 잔해 속에서도 사격이 시작되었다. 포격에도 살아남은 지하실과 벙커에 숨어있던 병사들이었다.


지하철 환기구에서도 총구가 나왔다. 저격수들이었다. 


"분산! 분산!"


베를린군 장교들이 외쳤다. 하지만 어디로 분산할 것인가? 사방이 적이었다.


도로는 미로였다. 잔해가 길을 막았고, 우회로는 함정이었다. 


한 소대가 우회로로 들어섰다가 또 다른 함정에 빠졌다. 건물이 무너지며 퇴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위에서 화염병이 쏟아졌다.


"아아악!"


불타는 병사들이 뛰어다녔다. 동료들이 불을 끄려 했지만, 그 순간 저격수의 표적이 되었다.


지옥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11시 17분.


베를린군은 겨우 시내 중심부의 절반을 장악했다. 아니, 장악했다고 생각했다.


"제2대대, 시청 광장 확보 완료."


무전 보고가 들어왔다. 하지만...


"제2대대, 응답하라. 위치 재확인."


혼선이었다. 김영호의 전파 교란이 작동하고 있었다. 


진짜 제2대대는 시청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가짜 무전이 그들을 엉뚱한 곳으로 유도한 것이다.


"젠장! 지도가 맞지 않아!"


베를린군 중대장이 지도를 구겼다. 포격으로 지형이 바뀌었고, 거리 표지판은 모두 사라졌다. GPS? 전파 교란으로 무용지물이었다.


그들은 몰랐다. 브뤼셀 시민들이 일부러 가짜 표지판을 세워두었다는 것을. 동쪽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실은 서쪽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대장님, 여기가 어딘지..."


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이 폭발했다.


꽈앙!


원격 조종 폭탄이었다. 벽 속에 숨겨져 있다가 적이 지나가면 폭발하도록.


중대장과 병사 5명이 즉사했다. 


"후퇴! 후퇴!"


하지만 어디로? 그들은 이미 미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브뤼셀의 구시가지는 중세부터 이어진 복잡한 구조였다. 좁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막다른 길이 수도 없이 많았다.


게다가 지하는 더 복잡했다.


한 소대가 건물로 들어갔다가 지하실에서 길을 잃었다. 옆 건물 지하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은 또 다른 건물로 이어졌다. 


미로 속의 미로.


그리고 그 미로를 아는 것은 브뤼셀 사람들뿐이었다.


"여기야, 이쪽으로!"


프랑스군 병사가 속삭였다. 피에르 뒤부아. 20살. 파리 출신이었지만 이제는 브뤼셀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뒤를 10명의 병사가 따랐다. 조용히, 신속하게.


그들은 와인 저장고를 통과했다. 수백 년 된 저장고는 자연동굴과 연결되어 있었다. 횃불 하나에 의지해 어둠 속을 걸었다.


15분 후, 그들은 베를린군 후방에 나타났다.


보급 트럭들이 늘어서 있었다. 경계는 허술했다. 전방에만 신경 쓰느라 후방은 소홀했다.


"조용히."


피에르가 수신호를 했다. 


병사들이 흩어졌다. 각자 목표를 정했다.


3, 2, 1...


동시다발적 공격이었다.


목을 그어 소리 없이 죽이는 자.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자.  

곤봉으로 뒤통수를 치는 자.


1분 만에 경비병 20명이 제거되었다.


그리고 방화가 시작되었다.


트럭에 실린 탄약과 연료에 불이 붙었다. 


화염이 치솟았다.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펑! 펑! 펑!


"후방 공격이다!"


베를린군이 혼란에 빠졌다. 전방의 적과 싸우던 병력이 후방으로 돌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보급품의 절반이 불탔다. 탄약이 없으면 총은 쇠막대기에 불과했다.


---


오후 2시.


손실이 막대해지자 뮐러는 결단을 내렸다.


"화학무기를 사용한다."


참모들이 침묵했다. 금기를 깨는 순간이었다.


뮐러가 비웃었다.


"무슨 국제법? UN이 있나? 헤이그 재판소가 있나? 이제 법은 우리가 만든다."


15분 후, 특수 포탄이 준비되었다.


사린가스. 신경작용제. 1그램이면 성인 10명을 죽일 수 있는 악마의 무기.


"목표 지점은 시내 중심부. 바람은..."


기상 장교가 보고했다.


"북서풍. 초속 3미터."


완벽한 조건이었다. 가스는 시내 중심부에서 남동쪽으로 퍼질 것이다. 브뤼셀군이 숨어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맥브라이드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3분 후 발사한다."


뮐러가 명령했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이다!"


맥브라이드의 명령이 떨어졌다.


도시 곳곳에서 불이 붙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한 화염병 수천 개가 던져졌다. 건물에, 잔해에, 심지어 베를린군 진지 근처에도.


그리고 백린탄이 터졌다.


펑! 펑! 펑!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섭씨 2,800도로 타는 백린. 물로도 끌 수 없는 지옥의 불꽃.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 벽이 만들어졌다.


뜨거운 공기가 상승했다. 강력한 상승기류가 발생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북서풍이 남동풍으로.


"발사!"


뮐러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명령했다.


포성이 울렸다. 


8발의 화학탄이 하늘로 솟구쳤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포탄들이 목표 지점에 떨어졌다.


펑! 펑!


포탄이 터지며 무색무취의 가스가 퍼졌다.


하지만...


바뀐 바람이 가스를 되돌려 보냈다.


"안돼!"


기상 장교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늦었다.


사린가스가 베를린군 진지로 밀려들었다.


"가스! 가스 마스크!"


하지만 많은 병사들이 이미 마스크를 벗은 상태였다. 더운 날씨에 숨쉬기 힘들어서.


첫 번째 희생자는 젊은 이등병이었다. 


갑자기 경련을 시작했다. 눈이 뒤집히고, 입에서 거품이 나왔다. 1분도 안 되어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수십, 수백 명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후퇴! 전군 후퇴!"


공포가 전염병처럼 퍼졌다.


질서정연하던 베를린군이 무너졌다. 모두가 살기 위해 뛰었다. 아군을 밟고, 부상자를 버리고.


바로 그때 맥브라이드가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돌격!"


지하에서, 폐허에서, 모든 곳에서 브뤼셀군이 쏟아져 나왔다.


"Pour Bruxelles!"


"For freedom!"  


"죽여!"


퇴각하는 적의 뒤를 쫓았다. 이번에는 사냥하는 쪽이 바뀌었다.


도망치던 베를린군 병사가 넘어졌다. 발목을 삐었다.


"도와줘! 날 버리지 마!"


하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브뤼셀군 병사가 다가왔다. 총검이 번뜩였다.


"아니, 제발..."


총검이 가슴을 관통했다. 병사는 피를 토하며 죽었다.


같은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복수였다. 10년간 쌓인 증오의 폭발이었다.


---


오후 5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베를린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5,000명으로 시작한 원정군이 1,500명도 안 되게 줄었다. 


전차 32대 중 27대를 잃었다.

장갑차는 거의 전멸했다.

포병대는 버려두고 도망쳤다.


뮐러는 간신히 지휘 차량에 올라탔다. 


그의 의안이 깨져 있었다. 유리 파편이 눈구멍에 박혀 있었다. 피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군복은 찢어지고 더러워져 있었다. 계급장도 떨어져 나갔다. 


"퇴각... 전속력으로..."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가스를 조금 들이마신 탓이었다.


차량이 출발했다. 뒤를 돌아보니 브뤼셀이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복자의 불길이 아니었다. 


패배자를 쫓아내는 승리의 불꽃이었다.



밤 9시.


전투가 끝났다.


브뤼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지하에서, 폐허에서, 숨어있던 모든 곳에서.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환호성이 터졌다. 서로를 껴안았다. 울었다. 웃었다.


프랑스인과 벨기에인의 구분도 없었다. 모두가 승리자였다.


"맥브라이드! 맥브라이드!"


군중이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대광장에 맥브라이드가 나타났다.


그의 군복은 찢어지고 피에 젖어 있었다. 얼굴에는 그을음과 흙이 묻어 있었다. 왼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서 있었다. 똑바로.


"만세!"


"영웅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어깨에 올리려 했다. 꽃을 던졌다. 아이들이 경례를 올렸다.


하지만 맥브라이드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의 3분의 1이 파괴되었다. 

수천 명이 죽었다. 정확한 숫자는 나중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상자는 더 많았다. 


승리의 대가였다.


"장군님, 한 말씀 해주십시오!"


누군가가 외쳤다.


맥브라이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 


우리가 이겼다고? 하지만 무엇을 이긴 것인가?

자유를 지켰다고? 하지만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가?


"우리는..."


그가 겨우 말을 시작했다.


"살아남았습니다."


단순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계속 살아남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맥브라이드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축제는 계속되었다. 밤새도록.


하지만 그는 혼자 폐허를 걸었다.


발걸음마다 뭔가 밟혔다. 깨진 유리, 콘크리트 파편, 그리고... 


그는 멈춰 섰다.


발밑에 인형이 있었다. 곰 인형.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는 인형을 집어 들었다.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 아이는 살아있을까?


인형을 품에 안고 계속 걸었다.


승리자의 걸음은 무거웠다.


---


11월 24일, 새벽 4시 17분.


브뤼셀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전투가 끝난 지 정확히 38시간. 도시는 승리의 환호성이 가라앉은 뒤의 특유한 공허함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폭풍이 지나간 뒤의 정적과도 같았고, 장례식이 끝난 뒤의 침묵과도 같았다. 


맥브라이드는 집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유리창에는 아직도 포성의 진동으로 생긴 미세한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보이는 브뤼셀은 마치 깨진 거울에 비친 도시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연기가 아직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동쪽 구역에서는 검은 연기가, 서쪽에서는 회색 연기가. 색깔로 무엇이 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검은 것은 고무와 플라스틱, 회색은 목재와 직물.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묻지 않는 것이 좋았다.


책상 위에는 손실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A4 용지 47장. 타자로 빽빽하게 채워진 죽음의 목록. 글씨체는 쿠리어 뉴였다. 전쟁 전 어느 관료가 설정해놓은 것을 아직도 쓰고 있었다. 획일적이고 감정 없는 글씨체가 죽음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책상 위의 유일한 빛은 거의 다 타버린 양초였다. 흔들리는 불빛이 서류 위에 그림자를 춤추게 했다.


*브뤼셀군 전사자 명단 (1/12)*

*001. 아벨 앙드레, 하사, 23세, 포병대대 2중대*

*002. 아드리앙 베르나르, 일병, 19세, 보병연대 3대대*

*003. 알렉상드르...*


맥브라이드는 명단을 한 줄 한 줄 읽었다. 341개의 이름. 341개의 인생. 341개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벨 앙드레는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다. 전쟁이 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꿈은 전쟁이 끝나면 브뤼셀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재건될 브뤼셀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알렉상드르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7살, 5살. 아내는 작년 겨울 폐렴으로 죽었다. 이제 아이들은 완전한 고아가 되었다. 


명단은 계속되었다. 끝없이.


문이 열렸다. 노크는 없었다. 이 시간에 노크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못 주무셨습니까."


뤼프케였다. 그는 두 개의 잔과 위스키 병을 들고 있었다.


"오늘은 자네가 먼저군."


맥브라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보통은 그가 뤼프케를 불렀다.


그도 밤을 새운 듯했다. 회색 군복은 구겨져 있었고, 턱에는 이틀치 수염이 자라 있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에는 새로운 상처가 있었다. 포탄 파편에 스친 자국이었다. 3센티미터만 더 깊었다면 그도 저 명단에 올랐을 것이다.


"자네도."


맥브라이드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48시간 동안 계속 명령을 내린 탓이었다.


뤼프케가 커피를 두 잔 들고 왔다. 진짜 커피였다. 미군이 가져온 것이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향기가 진했다. 너무 오랜만에 맡는 문명의 냄새였다.


"프랑스군 사상자 집계가 끝났습니다."


뤼프케가 파일을 건넸다. 또 다른 죽음의 목록이었다.


"127명 전사, 89명 중상, 203명 경상."


숫자는 간결했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거웠다. 프랑스군이 없었다면 패배했을 것이다. 그들의 참전이 전세를 바꿨다.


"뒤부아 소장이 개인적 결정이라고 했지."


맥브라이드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카페인이 혈관을 타고 퍼지면서 잠시나마 정신이 맑아졌다.


"예. 시라크 대통령의 공식 명령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위험해."


맥브라이드가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장군님?"


"개인의 결정은 바뀔 수 있어. 하지만 조직의 결정은 관성이 있지. 뒤부아가 마음을 바꾸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동맹은 영원하지 않다. 특히 이런 시대에는.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며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창밖에서 새벽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적인 빛이 아니었다. 잿빛 하늘을 뚫고 들어오는 병든 태양의 빛이었다. 모든 것을 회색으로 물들이는 우울한 빛.


"재벌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뤼프케가 침묵을 깼다.


"예상했던 일이지."


"로스차일드가 어제 밤 비밀 회동을 가졌습니다. 슈나이더, 니콜라 테슬라, 그리고..."


"그리고?"


"새로운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전쟁 통에 숨어있다가 나타난 기회주의자들이죠."


맥브라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승리의 냄새를 맡고 하이에나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명단을 작성해. 자세하게."


"이미 하고 있습니다."


뤼프케가 수첩을 꺼냈다. 검은 몰스킨 수첩이었다. 그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펼치자 빼곡한 메모가 보였다. 이름, 날짜, 장소, 대화 내용까지.


"주목할 만한 인물은 마리입니다."


"새로운 재벌인가?"


"전쟁 전 EU 의료정책 관료였습니다."


"그런 놈이 이제 나타났다?"


"네. 그리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합니다."


맥브라이드가 손을 들어 말을 멈췄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 번에 하나씩. 일단 재벌들부터 처리하고."


"하지만 장군님,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알고 있네."


맥브라이드가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낡은 가죽이 삐걱거렸다. 


"하지만 모든 전선에서 동시에 싸울 수는 없어. 우선순위를 정해야지. 가장 중요한건....따로 있으니깐"


민정 이양 계획서 - 초안


종이 위의 글자들이 그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몇달 후면 약속된 1년이다. 시라크와의 약속. 아니, 브뤼셀 시민들과의 약속.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펜을 만지작거렸다.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단 하나의 서명으로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었다. 그가 10년간 쌓아온 모든 것이.


"그 서류를 정말로 검토하고 계셨군요."


뤼프케가 민정 이양 계획서를 가리켰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네."


"결정할 게 있습니까? 약속은 약속이죠."


뤼프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무감정했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그 속에 숨은 무언가를 감지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는군."


"복잡하게 만드는 건 장군님입니다."


뤼프케가 두 번째 잔을 따르며 말했다.


"상황을 보시죠. 재벌들은 여전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위협은 날로 커지고 있고. 식량 생산은 목표치의 60%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잠시 멈췄다. 계산된 침묵이었다.


"민주주의 놀이를 할 여유가 있습니까?"


"놀이라..."


맥브라이드가 창밖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간간이 불빛이 보였다. 순찰대의 횃불이거나, 누군가의 마지막 촛불이거나.


"시라크는 다르게 생각하겠지."


"시라크."


뤼프케가 그 이름을 씹어서 뱉었다.


"얼마나 믿을 수 있습니까?"


"무슨 뜻인가?"


뤼프케가 파일을 꺼냈다. 준비해온 것이었다.


"최근 3개월간 시라크의 동향입니다."


사진들이 쏟아졌다. 비밀 회동, 은밀한 접촉, 무기 운반으로 의심되는 차량들.


"17차례의 비공개 회의. 참석자는 주로 구 프랑스 정부 인사들. 그리고..."


뤼프케가 특정 사진을 가리켰다.


"로스차일드와의 접촉이 5번."


맥브라이드의 표정이 굳었다.


"확실한가?"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또 다른 사진. 이번엔 문서였다. 흐릿했지만 읽을 수 있었다.


프랑스 자치정부 구성안


"자치정부?"


"브뤼셀 내에 사실상의 국가를 만들려는 겁니다. 독자적인 군대, 독자적인 경제 체제..."


"그건 추측이야."


"추측이 아닙니다."


뤼프케가 마지막 증거를 꺼냈다. 녹취록이었다.


[녹취록]

시라크: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들롱: 순조롭습니다. D-데이 이후 48시간 내에 주요 시설 장악이 가능합니다.

시라크: 맥브라이드가 순순히 물러날까?

들롱: 그래야 할 겁니다. 명분은 우리에게 있으니까요.

시라크: 그래도 만약을 위해... 2연대는 준비시켜 두게.


맥브라이드가 녹취록을 내려놓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D-데이. 11월 23일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위스키 잔의 얼음이 녹는 소리만 들렸다.


"그래서 자네 제안은?"


뤼프케가 맥브라이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촛불에 반사되어 기이하게 빛났다.


"먼저 치십시오."


단순한 제안이었다.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무거웠다.


"시라크를?"


"위협을 제거하는 겁니다."


"암살하라는 건가?"


맥브라이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위험한 영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뤼프케는 대답 대신 다른 파일을 꺼냈다.


"시뮬레이션을 해봤습니다. 민정 이양이 이루어질 경우."


차트와 그래프가 가득했다.


"시나리오 1. 시라크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지지율 67%. 첫 조치는 프랑스계 우대 정책. 3개월 내 내전 발발 확률 89%."

"시나리오 2. 다른 인물이 당선되어도 시라크의 영향력은 유지됩니다. 권력 이원화. 행정 마비. 6개월 내 붕괴."

"시나리오 3..."


"그만."


맥브라이드가 손을 들었다.


"숫자놀이는 됐어."


하지만 뤼프케는 멈추지 않았다.


"장군님, 감정을 배제하고 보십시오. 시라크가 살아있는 한 브뤼셀의 통합은 불가능합니다."


"그가 우리 편이 될 수도..."


"편?"


뤼프케가 차갑게 웃었다.


"정치에 영원한 편이 있습니까?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적입니다. 특히 권력이 걸렸을 때는."


맥브라이드가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갔다.


새벽의 첫 빛이 동쪽 하늘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핏빛 같은 붉은 빛이었다.


"내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건가?"


독백에 가까웠다.


뤼프케가 조용히 다가섰다.


"괴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지도자가 되는 겁니다."


"차이가 뭔가?"


"지도자는 필요한 일을 합니다. 괴물은 즐기면서 합니다."


"나는 즐기지 않아."


"그래서 장군님이 지도자인 겁니다."


뤼프케가 무언가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약병이었다.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리신입니다. 무색, 무취. 심장마비."


"..."


"아니면 더 확실한 방법도 있습니다. 저격. 베를린의 소행으로 위장할 수 있습니다."


선택지가 나열되고 있었다. 죽음의 메뉴판이었다.


맥브라이드가 약병을 들어 빛에 비춰보았다.


"언제부터 준비했나?"


"처음부터요."


"1년 전부터?"


"아닙니다. 절멸이후 장군님을 만난 첫날부터요."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항상 모든 가능성에 대비합니다. 그것이 제 일이니까요."


맥브라이드가 약병을 내려놓았다.


"만약 내가 거부하면?"


"그럼 기다리죠. 그리고 시라크의 계획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지켜봅니다."


"자네는 그때 어느 편에 설 건가?"


뤼프케가 미소 지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미소였다.


"저는 항상 유럽 편입니다. 그리고 지금 브뤼셀은 장군님입니다."


교묘한 대답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네, 지금 나에게 보여준 자료는 '진실'인가?"


"저는 언제나 각하를 위합니다."


"이게 정말 하나의 위조도 없냐는 말일세"


"예 그렇습니다."


맥브라이드는 이것이 그렇지만 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


오전 9시.


대광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제의 환호성이 아직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분위기가 달랐다. 


환희는 사라지고 피로가 남았다. 흥분은 가라앉고 현실이 드러났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제 뭐지?'라는 질문이 쓰여 있었다.


임시 연단이 세워져 있었다. 못과 나무판자로 급조한 것이었다. 페인트칠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날것의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현실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맥브라이드가 연단에 올랐다.


군중이 조용해졌다. 완전한 정적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기침 소리, 아이들의 칭얼거림,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곧 잦아들었다.


"시민 여러분."


확성기를 통한 그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스피커는 구식이었고, 음질은 형편없었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였다. 하지만 메시지는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하지만 어제만큼 열광적이지는 않았다. 의무적인 박수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가를 치렀습니다."


박수가 멈췄다.


"491명이 전사했습니다. 2,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숫자가 광장을 무겁게 눌렀다. 어디선가 흐느낌이 들렸다. 가족을 잃은 누군가의 울음이었다.


"그들의 희생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맥브라이드가 잠시 멈췄다. 군중을 둘러보았다. 5,000명은 넘어 보였다. 남녀노소가 섞여 있었다. 프랑스인과 벨기에인도 구분 없이 서 있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어떻게?"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우리 아버지도 죽었소! 무엇을 위해 죽었단 말이오?"


경비병들이 움직이려 했지만, 맥브라이드가 손짓으로 막았다.


"당신의 이름은?"


"피에르 뒤부아입니다."


뒤부아. 흔한 성이었지만, 이 순간에는 의미가 있었다. 프랑스계였다.


"피에르, 당신 아버지는 무엇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하오?"


청년이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외쳤다.


"자유를 위해서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맞소.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만들 것이오."


맥브라이드가 군중을 향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오. 먼저 폐허를 치워야 하고, 기초를 다져야 하고, 그다음에야 건설할 수 있소."


현실적인 말이었다. 군중은 조용히 들었다.


"오늘부터 재건이 시작됩니다."


그가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첫째, 사망자 가족에게 특별 배급. 성인 기준의 150%를 6개월간."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둘째, 모든 시민의 노동 의무. 16세부터 60세까지, 하루 8시간."


이번에는 불평이 섞였다. 하지만 크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대신 배급량 증가. 현재 1,200칼로리에서 1,500칼로리로."


불평이 줄었다. 300칼로리는 큰 차이였다. 생존과 생활의 차이였다.


"셋째, 주거 재건. 3개월 안에 모든 시민에게 지붕이 있는 거처를 제공."


이것은 환영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지하실이나 천막에서 살고 있었다.


맥브라이드는 계속 말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들.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현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연설이 끝났을 때, 박수가 다시 터졌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열광적이지는 않았지만, 신뢰가 담겨 있었다.


맥브라이드가 연단에서 내려왔다.


"잘하셨습니다."


뤼프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네."


"예. 하지만 모든 진실을 말하지도 않으셨죠."


맥브라이드가 뤼프케를 보았다. 부관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있었다.


"무슨 뜻인가?"


"재벌들과의 협상. 프랑스와의 긴장. 그리고..."


뤼프케가 목소리를 더 낮췄다.


"1년 후 민정 이양."


핵심이었다. 맥브라이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도 진실이야."


"정말로 지키실 겁니까?"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뤼프케답지 않았다. 그는 보통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맥브라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옮겼다. 


그의 침묵이 답이었다.


---


오후 2시.


구 EU 집행위원회 회의실. 타원형 테이블은 여전히 있었지만, 의자는 반쯤 사라졌다. 남은 의자들도 짝이 맞지 않았다. 가죽 의자, 플라스틱 의자, 나무 의자가 뒤섞여 있었다. 전후의 현실을 보여주는 초라한 광경이었다.


재벌들이 속속 도착했다.


로스차일드가 먼저였다. 그는 여전히 말끔했다. 검은 양복, 하얀 셔츠, 붉은 넥타이. 전쟁 전과 다름없는 차림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달랐다. 양복은 같은 것을 계속 입어서 번들거렸고, 셔츠 칼라는 닳아 있었다. 넥타이만이 새것처럼 보였다. 아마 마지막 재고일 것이다.


그의 손에는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루이비통이었다. 모노그램 캔버스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지만, 여전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 안에는 틀림없이 숫자로 가득한 서류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대출 장부, 이자 계산서, 담보 목록...


슈나이더가 다음이었다. 그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작업복 차림이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나는 일하는 사람이다'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그의 손은 깨끗했다. 손톱 밑에 흙 한 점 없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직접 일하기를 그만두었다.


그의 뒤에는 비서가 따라왔다. 젊은 여성이었다. 금발에 파란 눈. 전형적인 플랑드르 미인이었다. 전쟁 전이었다면 모델이나 배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슈나이더의 또 다른 소유물일 뿐이었다.


니콜라 테슬라 3세는 거의 달려왔다. 숨이 차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발전소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의 작업복에는 기름때가 묻어 있었고, 냄새가 났다. 진짜 일하는 사람의 냄새였다.


마지막은 그루버... 아니, 그루버는 오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젯밤 전투에서 그의 PMC는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이제 거취를 결정해야 할 때였다.


새로운 얼굴도 있었다.


마리 블랑샤르. 40대 여성. 의사였다. 아니, 의료품을 독점한 사업가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그녀의 가방에는 모르핀과 페니실린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금보다 귀한 것들.


"모두 오셨군요."


맥브라이드가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뤼프케와 미해병대원 4명이 따랐다. 과도한 호위였다. 의도적이었다.


재벌들의 표정이 굳었다. 특히 로스차일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무장 병력이 왜 필요합니까?"


"보호를 위해서요."


맥브라이드가 상석에 앉으며 대답했다. 해병대원들은 벽을 따라 배치되었다. M4 카빈을 든 그들의 모습은 위협적이었다.


"우리가 위험합니까?"


슈나이더의 목소리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


"모두가 위험하지."


맥브라이드의 대답은 차가웠다.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때 그루버가 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전후 재건 계획 말입니다."


"좋소."


맥브라이드가 서류를 꺼냈다. 두꺼운 파일이었다.


"새로운 경제 질서를 발표하겠소."


폭탄선언이었다. 재벌들이 술렁였다.


"첫째, 전시특별세. 모든 수익의 40%."


"터무니없다!"


로스차일드가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40%? 그럼 사업이 안 됩니다!"


"그럼 하지 마시오."


맥브라이드의 대답은 단순했다.


"뭐라고요?"


"사업을 하지 말라고 했소. 떠나도 좋소. 단..."


그가 미소 지었다. 차가운 미소였다.


"재산은 놔두고."


"강도야! 이건 강도라고!"


슈나이더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쿵! 먼지가 일어났다.


"아니오. 이건 전쟁이오."


맥브라이드가 일어섰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어제 우리는 승리했소. 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베를린이 있고, 모스크바가 있고, 그리고..."


그가 재벌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내부의 적도 있지."


위협이었다. 노골적인 위협.


"우리가 적입니까?"


마리 블랑샤르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의사 특유의 침착함이었다.


"그건 당신들이 결정할 일이오."


맥브라이드가 두 번째 문서를 꺼냈다.


"둘째, 가격 통제. 모든 필수품의 가격은 정부가 결정."


"시장 경제의 죽음이군요."


로스차일드가 비아냥거렸다.


"시장 경제?"


맥브라이드가 웃었다. 


"독점과 약탈을 시장 경제라고 부르시오?"


사실이었다. 재벌들은 경쟁이 아니라 담합으로 가격을 정했다. 필수품을 독점하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했다.


"셋째, 노동자 보호.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 주 1회 휴일."


"생산성이 떨어집니다!"


슈나이더가 항의했다.


"굶어 죽은 노동자는 생산성이 0이오."


맥브라이드의 반박은 날카로웠다.


회의는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재벌들은 항의하고, 위협하고, 때로는 애원했다. 하지만 맥브라이드는 양보하지 않았다.


"24시간 드리겠소."


최후통첩이었다.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선택은 자유요."


재벌들이 하나둘 일어섰다. 표정들이 각양각색이었다. 


로스차일드는 차가운 분노.

슈나이더는 뜨거운 증오.

니콜라는 체념.

블랑샤르는 호기심.


그들이 나간 후, 맥브라이드는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너무 밀어붙이신 것 아닙니까?"


뤼프케가 우려를 표했다.


"그럴지도."


맥브라이드가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야. 승리의 여운이 남아있는 지금. 시간이 지나면..."


그가 말끝을 흐렸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잊는다. 희생을 잊고, 연대를 잊고, 다시 이기심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반발하면?"


"그럼 싸우지."


단순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는 많은 것이 숨어 있었다.


---


저녁 7시.


프랑스 문화원. 전쟁 전에는 프랑스 정부의 문화 홍보 기관이었다. 이제는 브뤼셀 내 프랑스인들의 실질적인 본부가 되어 있었다.


시라크는 2층 사무실에 있었다. 한때는 문화원장의 사무실이었다. 이제는 그의 임시 집무실이었다.


그는 창가에 서서 밖을 보고 있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폐허가 된 도시를 물들이고 있었다.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었다. 잔혹한 아름다움이었지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오."


들롱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파일이 들려 있었다.


"오늘 회의 내용입니다."


녹취록이었다. 맥브라이드와 재벌들의 회의. 어떻게 구했는지는 묻지 않는 것이 좋았다. 정치에는 비밀이 필요했다.


시라크가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40% 세금... 가격 통제... 이건 거의 전시 공산주의군."


"그렇습니다. 재벌들이 반발할 겁니다."


"당연하지."


시라크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야."


"재벌들이 우리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들롱의 분석은 정확했다. 재벌들은 대안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브뤼셀에서 맥브라이드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은...


"우리뿐이지."


시라크가 의자에 앉았다. 낡은 가죽 의자가 삐걱거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들롱의 질문은 조심스러웠다.


시라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랍에서 담배를 꺼냈다. 골루아즈. 프랑스 담배였다. 마지막 한 갑이었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었다.


"맥브라이드..."


그가 연기 속에서 중얼거렸다.


"능력 있는 사람이야. 카리스마도 있고. 하지만..."


"하지만?"


"권력이 그를 바꾸고 있어."


시라크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1년 전만 해도 달랐는데."


"전쟁이 사람을 바꿉니다."


"아니."


시라크가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아니야. 권력이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들롱이 문장을 완성했다.


"그래."


시라크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볐다. 반쯤 남은 담배였지만 아까워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뒤부아를 불러."


"지금요?"


"지금."


30분 후, 뒤부아 소장이 도착했다.


프랑스군 지휘관은 피로해 보였다. 전투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왼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이마에는 찰과상이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대통령님."


그는 여전히 시라크를 대통령으로 불렀다. 비록 프랑스도, 대통령직도 이제는 의미가 없었지만.


"앉게."


시라크가 와인을 따랐다. 보르도였다. 2015년산. 전쟁 전 마지막 빈티지 중 하나였다.


"어제 자네가 한 일..."


"후회하지 않습니다."


뒤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명령 없이 움직인 것은 사과하지만, 결정 자체는..."


"고맙네."


시라크의 말에 뒤부아가 놀랐다.


"대통령님?"


"자네 덕분에 많은 목숨을 구했어.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브뤼셀 시민들도."


"제 의무였습니다."


"그 이상이었어."


시라크가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타닌의 쓴맛과 과일의 단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문명의 마지막 잔재 같은 맛이었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네."


"무엇을요?"


"맥브라이드를 어떻게 생각하나?"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뒤부아가 잠시 망설였다.


"유능한 지휘관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때로는 너무 차갑습니다. 마치 인간이 아니라 뭐랄까, 리바이어던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겠군요"


정직한 평가였다.


"자네는 그를 따를 건가? 끝까지?"


시라크의 질문은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뒤부아가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이 시라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는 유럽재건위원회 소속, 프랑스, 군인입니다, 대통령님."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시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가도 좋아."


뒤부아가 일어섰다. 하지만 문 앞에서 돌아보았다.


"대통령님."


"?"


"1년 후가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나갔다.


시라크와 들롱만 남았다.


"믿을 만합니까?"


들롱이 물었다.


"글쎄.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있나?"


시라크가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브뤼셀의 밤은 깊고 어두웠다. 가로등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켜진 것들도 희미했다.


"1년..."


시라크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1년을 기다릴 수 있을까?"


대답은 없었다.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11월 15일, 새벽 2시 43분.


브뤼셀 북쪽 외곽. 버려진 공장 지대. 


한때는 유럽의 제조업 중심지 중 하나였다. 이제는 녹슨 철골과 깨진 유리창만 남은 산업시대의 무덤이었다.


세 대의 차량이 도착했다. 각각 다른 방향에서, 5분 간격으로. 


첫 번째 차에서 로스차일드가 내렸다. 혼자였다. 평소와 달리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검은 스웨터와 청바지. 위장이었다.


두 번째는 슈나이더였다. 그는 경호원 한 명을 데려왔다. 신뢰할 수 있는 부하였을 것이다.


세 번째는 그루버였다. 그는 완전 무장 상태였다. 방탄복에 자동소총까지. 과도해 보였지만, 그에게는 일상이었다.


그들은 공장 내부로 들어갔다. 녹슨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안은 어두웠다. 달빛만이 깨진 천창을 통해 들어왔다. 거대한 기계들의 실루엣이 괴물처럼 보였다.


"이런 곳에서 만나야 하다니."


로스차일드가 불평했다. 


"안전이 우선이지."


그루버가 주변을 경계하며 대답했다.


"맥브라이드의 개들이 어디서 냄새 맡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들은 공장 한가운데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의자와 테이블은 멀쩡했다.


슈나이더가 가방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조니 워커 블루 라벨. 최고급품이었다.


"이럴 때를 위해 아껴뒀지."


그가 종이컵에 위스키를 따랐다. 크리스털 잔은 사치였다. 종이컵도 귀했지만.


"그래서."


로스차일드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본론을 꺼냈다.


"어떻게 할 건가?"


"뭘?"


슈나이더가 물었지만, 다 아는 내용이었다.


"맥브라이드. 저 독재자 말이야."


단어가 나왔다. 독재자. 한때는 구원자였지만, 이제는 독재자였다.


"40% 세금은 미쳤어."


슈나이더가 주먹을 쥐었다.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사업을 일으켰는데."


"자네만 고생했나?"


로스차일드가 비꼬았다.


"노동자들 피 빨아서 일으킨 거 아닌가?"


"뭐? 이 고리대금업자가..."


"그만!"


그루버가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군인다웠다. 명령하는 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싸울 때가 아니야. 우리가 분열하면 맥브라이드만 좋아해."


말이 맞았다.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일단 현실을 보자."


그루버가 지도를 펼쳤다. 브뤼셀 지도였다. 여러 지점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맥브라이드가 통제하는 병력. 정규군 1,500명. 충성도 높음."


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점들이었다.


"프랑스군 600명. 충성도 애매함."


파란색 표시였다.


"미해병대 200명. 맥브라이드에게 완전 충성."


검은색이었다.


"우리는?"


로스차일드가 물었다.


"내 PMC 150명."


그루버가 자신의 병력을 먼저 말했다.


"정예지만 숫자가 적어."


"내 건설 노동자 500명을 무장시킬 수 있어."


슈나이더가 덧붙였다.


"훈련은?"


"기본적인 것만. 하지만 싸울 의지는 있어. 먹고살 길이 막히면..."


"돈은 내가 댈 수 있다."


로스차일드가 말했다.


"무기도 구할 수 있어. 암시장에 아는 사람이 있거든."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정면 대결은 무리야."


그루버의 판단은 현실적이었다.


"맥브라이드는 전쟁 영웅이야. 시민들의 지지가 아직 높아."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로스차일드가 서류를 꺼냈다. 


"이걸 봐."


재정 보고서였다. 브뤼셀의 수입과 지출이 상세히 나와 있었다.


"어떻게 구했어?"


"내 사람이 재무부에 있거든."


"역시 은행가..."


슈나이더가 감탄했다.


"여기 보면, 3개월 뒤면 재정이 바닥나."


로스차일드가 핵심을 짚었다.


"40% 세금으로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재건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그럼 맥브라이드가 우리에게 손을 벌리겠군."


슈나이더가 이해했다.


"맞아. 그때가 기회야."


세 사람의 눈이 빛났다. 계획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일단은 기다린다."


그루버가 결론을 내렸다.


"척하는 거야. 굴복한 척. 그리고 때를 기다리는 거지."


"얼마나?"


"3개월. 길어야 6개월."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슈나이더의 우려는 현실적이었다.


"버텨야지."


로스차일드가 위스키를 들어 올렸다.


"브뤼셀의 자유를 위해."


아이러니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남을 착취할 자유였다.


"자유를 위해."


세 개의 종이컵이 부딪쳤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들은 몰랐다. 


공장 2층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어둠 속에서 적외선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었다. 녹음기도 돌아가고 있었다.


뤼프케였다.


그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


11월 21일. 오후 4시.


맥브라이드의 집무실.


뤼프케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두꺼운 봉투였다.


"앉게."


맥브라이드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배급 계획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뤼프케가 앉았다.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게 뭔가?"


"보고서입니다."


"무슨?"


맥브라이드가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뤼프케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더 무거웠다.


"재벌들의 비밀 회합."


맥브라이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가 봉투를 열었다. 사진과 녹취록이 나왔다.


5분 동안 침묵이 흘렀다. 맥브라이드가 자료를 읽는 동안.


"3개월 후..."


그가 중얼거렸다.


"그때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군."


"그렇습니다."


"증거는 확실한가?"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맥브라이드가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뤼프케의 질문은 조심스러웠다.


선택지는 많았다. 곧 쓸 수 있겠지, 당장의 그 일이 마무리된다면, 어떻게 마무리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무리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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