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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밸브잠가라


프레빌 45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0

06시 31분 28초


"12-B 방벽 기준 수압 초당 4.7톤." 구나르가 기계적으로 보고했다. 그의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춤을 췄다. 숫자들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 "유속 초당 30미터. 도달 예상 시간 3분 12초."


3분.


180초.


심장 박동 216회.


닐슨이 즉시 판단했다. 그의 뇌는 이미 계산을 시작했다. 생존 확률, 대피 경로, 희생자 수.


"7-F 비상격벽 작동 가능한가?"


"수동으로만. 유압 죽었습니다. 2년 전에." 구나르가 대답했다. "크랭크로 돌려야 합니다. 최소 4명 필요. 완전 차단까지 5분."


"시간이 없어." 닐슨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즉시 명령했다. "잉그리드, 팀 구성. 격벽 크랭크 필요. 최대한 빨리. 구스타프는 배수 펌프 점검. 작동한다면 시간을 벌 수 있어."


직공조합원들이 흩어졌다. 각자 맡은 일을 알고 있었다. 10년간 매주 한 번씩 해온 훈련이었다. 하지만 실전은 달랐다. 손이 떨렸고, 호흡이 거칠었다.


"대피는 불가능합니다." 홀름크비스트가 냉정하게 분석했다. "계단 폭 1.8미터. 수용량 분당 200명. 2만 3천 대피 소요 시간 115분."


"그럼 누가 남고 누가 가나?" 테카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주먹은 떨리고 있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그 선택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콘크리트 파이프를 통과하는 거대한 양의 물. 진동이 발로 전해졌다. 벽의 먼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원자로는?" 테카트가 구나르에게 물었다.


"해수 유입 시 염분 부식으로 냉각 계통 막힘. 24분 내 노심 온도 임계점. 그 이후는..." 구나르가 침을 삼켰다. 목젖이 달라붙는 소리가 났다. "체르노빌입니다. 지하에서."


"해결책은?"


"메인 밸브 수동 차단. 단, 작업 구역이..." 구나르가 화면을 보였다. 3D 도면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구역. "이미 침수 예상 구역."


2분 30초.


한 난민이 앞으로 나왔다. 무리를 헤치고. 40대 남자였다. 왼팔이 없었다. 어깨에서부터 깔끔하게 절단된 흔적. 오래된 상처였지만 잘 치료된 것 같았다. 피부가 매끈하게 아물어 있었다.


"밸브 위치 좌표 찍어주면 갑니다."


모두가 그를 봤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하지만 눈은 달랐다. 뭔가를 결심한 사람의 눈.


"당신은?"


"폐 용량 6분 12초." 그가 대답했다. 기계적인 목소리였다. "심박수 안정 시 분당 42회. 해군 EOD 출신. 기뢰 제거 전문." 그는 자신의 빈 소매를 가리켰다. "실수는 한 번뿐입니다. 은퇴 후 민간 잠수부. 심해 용접."


닐슨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나이, 체중, 근육량, 생존 확률.


"방호복 없이 방사능 오염수에. 수온 섭씨 87도. 피부 화상 2도 즉시. 3도 2분 내. 내부 피폭 시 48시간 내 장기 부전. 72시간 내 사망."


"알고 있습니다." 남자가 답했다. 담담했다.


"그런데 왜?"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한쪽만 움직였다.


"선택권이 있습니까? 여기서 다 죽거나, 혹은..."


그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끝낼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알았다. 한 명이 죽거나, 모두가 죽거나.


구나르가 태블릿을 가져왔다. 화면에는 복잡한 배관도가 떠 있었다.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선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여기." 그가 한 지점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떨렸다. "3번 격실. 침수 시 수심 4미터. 바닥에서 1.7미터 높이. 밸브 직경 20센티미터. 시계 반대 방향 17회전. 정확히 17회전. 16회전은 부족. 18회전은 파손."


1분 45초.


닐슨이 공구 가방에서 장비를 꺼냈다. 하나하나 바닥에 늘어놓았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이.


방수 LED 손전등. 배터리 잔량 73%. 수중에서 4분 지속.


24인치 파이프 렌치. 무게 3.2kg. 손잡이에 미끄럼 방지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마모된 부분이 있었지만 아직 쓸 만했다.


강철 와이어 10미터. 인장강도 2톤. 길찾기용.


나일론 로프 5미터. 부력 보조용.


그리고 작은 플라스틱 병.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모르핀 12mg." 닐슨이 설명했다. "못 견디겠으면. 의식은 유지됩니다. 고통만 줄입니다."


남자는 병을 집어 들었다. 햇빛에 비춰보듯 들어 올렸다. 형광등 빛이 액체를 통과했다. 무지개색으로 굴절되었다.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그가 말했다. "17회전을 세다가 까먹으면 다 죽는 거잖습니까."


그는 병을 돌려줬다. 망설임 없이.


닐슨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0.3초간. 승인의 표시였다. 프로는 프로를 알아보는 법.


1분.


"가족은?" 테카트가 물었다.


"없습니다. 다 죽었어요. 그래서 제가 적임자죠. 미련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의 오른손은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만졌다. 주머니 속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아마도 사진이었을 것이다. 닐슨처럼.


물소리가 굉음으로 변했다. 벽이 떨렸다. 석고가 떨어졌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름은?"


"중요합니까?" 남자가 되물었다. "어차피 시체 확인도 못할 텐데.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아서."



30초.


그가 상의를 벗었다.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연습된 동작이었다.


마른 몸이었다. 갈비뼈가 드러나 보였다. 하지만 근육은 남아있었다. 특히 다리. 수영 선수의 다리였다. 허벅지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윤곽이 드러났다. 오른팔에는 문신이 있었다. 바랜 파란색. 한글로 쓰여 있었다. '코간과 에이린'. 그 아래 날짜. '1997.3.12 - 2009.8.7'. '2001.7.23 - 2009.8.7'. 같은 날 죽었다. 가족이었을 것이다.


잉그리드 팀이 격벽 앞에 도착했다.


"크랭크 연결! 3시 방향부터!"


쇳소리가 났다. 100년 된 비상격벽이 처음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녹이 떨어졌다. 윤활유가 말라 있어서 삐걱거렸다. 센티미터씩, 고통스럽게 천천히.


"더 빨리!"


"이게 최선입니다!"


라그나가 크랭크를 붙잡았다. 근육이 불끈거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20초.


소린은 심호흡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과호흡. 혈중 산소 농도를 높이는 기법이었다. 하지만 과하면 어지럽다.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몇 번을, 얼마나 깊이.


흡. 4초.


멈춤. 2초.


호. 4초.


그의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줄었다. 폐포 하나하나에 산소를 채우듯이.


"밸브 위치 다시 한 번." 그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3번 격실 진입 후 직진 12미터. 우측 두 번째 파이프. 빨간 표시. 녹슨 부분 있지만 작동 확인." 구나르가 암송하듯 말했다. 그도 긴장했다. "수심 1.7미터에서 밸브. 시계 반대 방향 17회전. 너무 세게 돌리면 스템 파손. 적당한 힘으로."


"17회전." 그가 반복했다.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경로를. 어둠 속에서 가야 할 길을.


10초.


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복도 끝 모퉁이에서 검은 물결이 솟구쳤다. 거품을 일으키며. 포말 속에 뭔가 떠다녔다. 쓰레기, 시체 조각, 그리고...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


"격벽 30% 폐쇄!"


"빨리! 더 빨리!"


5초.


그는 눈을 떴다. 맑았다. 두려움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비운 사람의 눈.


그는 렌치를 들었다. 무게를 확인했다. 와이어를 허리에 묶었다.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매듭. 이언 매듭. 풀리지 않는다.


3초.


"지금이다!" 닐슨이 외쳤다.


그가 달렸다.


물을 향해서.


미친 짓이었다. 4미터 높이의 물의 벽. 초속 30미터로 다가오는 죽음. 그 속은 섭씨 87도의 방사능 오염수. 피부를 녹이고 폐를 태울 지옥.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발이 콘크리트를 박찼다. 탁, 탁, 탁. 리듬이 있었다. 군인의 뜀걸음. 정확하고 효율적인.


마지막 순간, 그가 뛰어올랐다.


다이빙이었다. 완벽한 자세는 아니었지만, 충분했다. 팔을 앞으로 뻗고, 머리를 숙이고, 몸을 일직선으로.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자세.


공중에서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ᛒᛚᚬᚬᛏ ᚠᛚᚬᚢᛋ, ᛒᚢᛏ ᛁᚱᚬᚾ ᛏᚬᛁᛋ ᚾᚬᛏ ᛒᛅᚴᛁ

(피는 흐를지언정, 철은 굽지 않는다)


물이 그를 삼켰다.


0.5초 후, 물이 모두를 덮쳤다.


06시 33분 49초


쿠웅!


충격파가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4미터 높이의 물의 벽이 복도를 가득 채우며 돌진했다. 초속 30미터. 시속 108킬로미터.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의 속도.


사람들이 쓰러졌다. 일부는 벽에 부딪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둔탁하고 끔찍한. 비명. 하지만 물소리에 묻혔다.


한 노인이 넘어졌다. 엉덩이뼈가 부러졌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물이 그를 덮치기 직전, 손자가 그를 끌어안았다. 아이의 작은 몸이 방패가 되었다. 물은 둘 다 쓸어갔다.


물이 격벽에 부딪혔다. 30%밖에 닫히지 않은 틈으로 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수압이 너무 강해서 물줄기가 거의 수평으로 뿜어져 나왔다. 맞은 사람들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버텨!"


라그나가 크랭크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의 팔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정맥이 튀어나왔다. 피부 아래서 뱀처럼 꿈틀거렸다. 손에서 피가 흘렀다. 거친 금속이 살을 파고들었다.


"40%! 50%!"


크랭크가 돌아갔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녹슨 기어가 비명을 질렀다. 100년 만의 움직임. 금속이 금속을 갉아먹는 소리.


물의 압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격벽이 효과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너무 많았다. 바닥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종아리까지.


"60%!"


그때 구나르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밸브가... 밸브가 닫히고 있어!"


모니터에 압력 게이지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빨간색에서 노란색으로. 그 남자가 성공하고 있었다. 4미터 수심, 87도의 방사능 오염수 속에서. 완전한 어둠 속에서.


하지만 그의 생체 신호는 없었다. 애초에 측정할 장비도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물속에서. 죽음 속에서.


"70%! 80%!"


격벽이 거의 닫혔다. 물의 흐름이 줄어들었다. 폭포에서 시내로. 하지만 이미 들어온 물이 문제였다. 무릎까지 차올랐다. 차가웠다. 뼈까지 시리는 냉기. 하지만 일부 구역은 뜨거웠다. 원자로 냉각수가 섞인 곳.


"90%!"


마지막 10센티미터. 가장 힘든 부분. 수압이 격벽을 밀어냈다. 크랭크가 거꾸로 돌아가려 했다.


테카트가 달려와 크랭크를 잡았다. 그의 손에서도 피가 흘렀다. 쇠가 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놓지 않았다.


"완료!"


쿵.


격벽이 완전히 닫혔다. 물이 멈췄다. 고요가 찾아왔다. 섬뜩한 고요.


모두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물에 젖어 떨고 있었다. 일부는 울고 있었다. 안도의 눈물인지 슬픔의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사망자 확인!" 홀름크비스트가 명령했다.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체를 끌어냈다. 7구. 아니, 8구. 작은 시체가 하나 더 있었다. 아이였다. 노인을 구하려던 그 아이.


"부상자는?"


"확인 중입니다... 최소 47명. 골절 23명, 타박상 15명, 익사 직전 구조 9명..."


숫자들. 또 숫자들. 닐슨이 자동으로 계산했다. 의료 물자 소모량, 회복 기간, 노동력 손실...


"냉각 시스템 정상." 구나르가 확인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안도가 섞여 있었다. "원자로 안정화. 노심 온도 하락 중. 위기 모면."


"그 사람은?" 누군가 물었다. 이름도 모르는 난민 중 하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87도 방사능 오염수에서 6분. 드워프라도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그는 밸브를 잠그면서 죽었을 것이다. 아니, 잠근 후에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출구를 찾을 수 없었을 테니까.


침묵이 흘렀다.


그때 갓난아기가 울었다. 크고 맑은 울음소리. 생명의 소리.


모든 시선이 아기에게 쏠렸다. 엄마 품에 안긴 작은 생명. 방금 태어난. 이 지옥 같은 곳에서.


"0.1%." 닐슨이 중얼거렸다. "그가 만든 0.1%."


그는 계산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처음으로.


"소장님." 그가 테카트를 봤다. "난민 등록 시작하겠습니다. 기술자 분류. 그리고..."


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희망자 분류도. 미친 짓에 동참할 사람들."


테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죠. 112만 3천의 미래를."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배수 펌프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스타프가 성공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수위가 낮아졌다.


그리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민들이. 2만 3천이.


한 명이 나섰다. 중년 여성이었다. "전 간호사였습니다. 15년 경력."


또 한 명. "전기 기사입니다. 원전 근무 경험 있습니다."


또 한 명. "용접공입니다. 수중 용접도 가능합니다."


한 명씩 나섰다. 그리고 열 명. 백 명. 천 명.


닐슨이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태블릿도 종이도 부족했다. 벽에 분필로 적었다. 이름과 기술.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그때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낡은 노동요였다. 가사는 잊혔지만 멜로디는 남아있었다. 한 명이 부르자 두 명이 따라 불렀다. 그리고 열 명. 백 명.


노래가 울려 퍼졌다. 죽음의 벙커에서. 희망의 노래가.


테카트는 물에 젖은 바닥에 서서 그들을 봤다. 112만 3천. 아니, 이제는 112만 3천 1명. 갓 태어난 아기까지.


불가능은 여전히 불가능이었다. 수학은 변하지 않았다. 자원은 여전히 부족했고, 시간은 여전히 모자랐다.


하지만 그들은 시도하고 있었다.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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