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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카나리아


프레빌 45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0


"섹터별 손상 보고 시작합니다."


구나르의 목소리가 중앙 통제실에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7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보고를 읽어내린 탓에 쉰 쇠붙이 같았다. 한 손으로는 진통제를 털어 넣으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태블릿을 놓지 않았다. 


임시로 마련된 지휘소는 한때 D-7 구역의 식료품 창고였다. 천장에는 아직도 '신선 보관 구역 - 섭씨 4도 유지'라는 표지판이 남아 있었다. 이제 이곳은 112만 3천 1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곳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4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난방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벽에는 급하게 그린 도면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분필과 숯, 피가 섞인 손가락으로 그린 거미줄 같은 배관도. 붉은 X표가 쳐진 구역들이 암세포처럼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떨리는 손으로 그려 넣은 파란 O표도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희망의 전이였다.


"12-B 구역 완전 침수. 복구 불가. 476명 사망 확인." 구나르가 잠시 멈췄다. 명단을 훑어보는 그의 눈꺼풀이 경련했다. "아동 147명 포함. 격벽으로 봉쇄 완료했으나 2차 붕괴 위험 상존. 7-F 격벽 응력 한계치 94%. 볼트 17개 중 11개 균열 진행 중. 추가 보강 시 4시간 소요 예상. 작업 중 추가 사상자 발생 확률 67%."


그가 말을 이을 때마다 통제실의 온도가 더 내려가는 것 같았다. 


"원자로 3호기 냉각 시스템 효율 61%로 저하. 해수 유입으로 인한 염분 부식 가속화. 박진수 기술관의... 희생으로 4호기는 안정화. 하지만 그의 시신 수습은 방사능 수치 때문에 최소 3개월간 불가능합니다."


숫자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절망의 숫자가 아니라 가능성의 숫자였다. 아주 작은, 간신히 손톱만큼의 가능성이지만.


테카트는 중앙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왼손은 주머니 속에서 낡은 사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족사진이었다. 3년 전 지상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 아내와 딸은 1차 붕괴 때 잃었다. 


그의 옆에는 닐슨이 있었다. 차가운 계산기 같은 그 닐슨도 이번에는 달랐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그 아래로 검붉은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12-B 구역에서 사람들을 구하다가 낙하물에 맞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치료를 거부했다. "의료진이 더 급한 환자들을 봐야 한다"며.


홀름크비스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양쪽 다리의 감각을 잃은 지 18시간째였다. 척추 손상이 의심됐지만 MRI는 이미 고장 난 지 오래였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펜을 놓지 않고 있었다. 법적 정당성, 도덕적 근거, 생존권의 우선순위... 죽어가는 문명의 마지막 법학자.


라그나는 서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대어 있었다. 왼쪽 어깨가 탈구된 상태였지만 팔을 붕대로 몸에 고정한 채 버티고 있었다. 그의 부하 경비대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이제 31명뿐이었다. 원래의 1/10도 안 되는 숫자였다.


그리고 새로 합류한 난민 대표들이 있었다. 


사라 첸. 37세. 전직 존스홉킨스 병원 간호사.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열 때문이 아니었다. 72시간 동안 쉬지 않고 부상자들을 돌본 탓에 양손은 피와 소독약으로 갈라져 있었다. 장갑을 끼면 촉각이 둔해져서 맨손으로 일했다. 손톱 밑에는 응고된 피가 검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12-B 구역에서 잃었다. 하지만 울 시간은 없었다. 아직도 1,300명의 부상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반 페트로프. 58세. 전직 소련 에너지부 원자력 기술자. 20년간 죽음의 구역에서 일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하얗게 셌고, 왼쪽 눈은 백내장으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피부는 방사능에 장기간 노출된 특유의 황갈색을 띠고 있었다. 갑상선암 3기. 하지만 그는 이미 죽음과 타협한 사람이었다. 


그가 방사능 측정기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바늘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일단 나쁜 소식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페트로프가 러시아 억양이 짙은 영어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차분했다. 죽음을 너무 많이 본 사람의 목소리였다. "이곳의 방사능 수치는 이미 연간 허용치의 400배를 넘었습니다. 즉, 우리는 모두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입니다. 암 발병률은 향후 5년 내 87%로 예상됩니다."


"5년 후를 걱정할 처지가 아닙니다." 테카트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좋은 소식입니다." 페트로프가 쓴웃음을 지었다. "원자로는 안정화됐습니다. 이름 모를 사내가 목숨을 바친 덕분입니다. 그는 냉각수 주입 밸브를 수동으로 열었습니다. 7000도의 증기를 맨몸으로 맞으면서요. 시신은... 증발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희생으로 연쇄 폭발은 막았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작게 기도문을 읊조렸다. 무신론자들의 도시에서도 죽음 앞에서는 신을 찾았다.


"하지만 현재 출력으로는 112만 명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페트로프가 이어갔다. "산소 생산 시설은 설계 용량의 187%로 작동해야 합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입니다. 정수 시설도 마찬가지고요. 하수 처리 시설은 이미 한계를 넘었습니다. 48시간 내에 역류가 시작될 겁니다."


"그럼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테카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주머니 속 손은 사진을 더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페트로프와 닐슨이 서로를 봤다. 두 사람 다 같은 계산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가운 수학. 냉혹한 산술.


"현재 소비율 유지 시 6주입니다." 닐슨이 답했다. 그가 태블릿을 들어 보였다. 화면에는 복잡한 그래프가 춤을 추고 있었다. "정확히는 42일 7시간 23분. 그 이후는 시스템이 도미노처럼 무너집니다. 먼저 공기 정화 시스템이 멈춥니다. CO2 농도가 치사량에 도달하는 데 4시간. 다음은 정수 시설. 탈수로 인한 첫 사망자는 18시간 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말을 멈췄다. 


"마지막으로?" 라그나가 재촉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기 시작할 겁니다." 닐슨이 차갑게 말했다. "물 한 모금, 공기 한 입을 위해. 제가 본 시뮬레이션으로는 전체 인구의 90%가 72시간 내에 사망합니다. 살인, 자살, 패닉으로 인한 압사..."


홀름크비스트가 끼어들었다. "법적으로 말하자면..."


"법이라고요?" 라그나가 비웃었다. "우리가 무슨 문명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은 그렇습니다." 홀름크비스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휠체어에 앉은 그녀의 모습은 부서졌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강철 같았다. "법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짐승이 됩니다. 그리고 짐승은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때 한 젊은이가 손을 들었다. 


야쿱 노박. 126세. 스톡홀름 공대 구조공학 박사과정. 방사능 화상으로 얼굴 절반이 녹아내린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12-B 구역에서 어린이 17명을 구하다가 입은 상처였다. 오른쪽 눈은 실명 상태였지만, 왼쪽 눈은 여전히 맑고 날카로웠다.


"제안이 있습니다. 미친 제안이지만 들어주십시오."


테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제정신인 제안을 들을 상황이 아니니까요. 말해보십시오."


야쿱이 절뚝거리며 벽으로 다가갔다. 왼쪽 다리에는 금속 파편이 박혀 있었지만 제거할 시간이 없었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분필을 들었다. 분필이 벽에 닿을 때마다 하얀 가루가 떨어졌다. 


"주 구조물은 이미 한계입니다. 하중 계산 결과 안전율이 0.3입니다. 건축학적으로 이미 무너졌어야 할 구조물이 기적적으로 서 있는 겁니다." 그가 도면을 그리기 시작했다. 선은 비뚤어졌지만 치수는 정확했다. "각 기둥이 받는 응력은 설계 한계의 340%입니다. 한 개만 더 무너져도 연쇄 붕괴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색 분필을 들었다. 피가 묻은 손가락 자국이 분필에 찍혔다.


"외부 암반은 아직 튼튼합니다. 선캄브리아기 화강암층입니다. 압축강도 200MPa 이상. 제가 직접 샘플을 채취해서 확인했습니다. 12-B에서 나오다가요." 그가 잠시 멈췄다.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곳의 물은... 아이들의 피와 섞여 있었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계속하십시오." 테카트가 부드럽게 재촉했다.


야쿱이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렸다. "제 계산으로는, 수평 굴착이 가능합니다. 기존 구조물에 추가 하중을 주지 않으면서 생활 공간을 늘리는 겁니다. 마치... 개미집처럼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닐슨이 물었다가, 갑자기 눈이 커졌다. 계산이 끝난 것이다. "설마 수동으로 굴착을 하자는 겁니까? 21세기에?"


"정확합니다." 야쿱이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화상 입은 쪽은 움직이지 않아 기괴하게 비대칭적이었다. "우리에게는 TBM(터널 굴착기)도, 폭약도 없습니다. 하지만 곡괭이는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112만 명이나 있고요."


라그나가 코웃음을 쳤다. "미친 계획이군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100년?"


"제 계산으로는..." 야쿱이 벽에 수식을 써내려갔다. "암반 경도, 인력 투입 가능 수, 작업 효율을 고려하면... 최소 2만 평방미터를 4주 안에 확보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페트로프가 단언했다. "연방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했습니다. 결과는 참혹했죠. 지하수를 만나면 끝입니다. 방사능 오염수가 역류하면서..."


"그래서 도박입니다." 테카트가 끼어들었다. 그의 눈에 뭔가 번뜩였다. 광기일 수도, 희망일 수도 있는 빛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하지만 장비는?" 닐슨이 물었다.


"창고를 뒤졌습니다." 구나르가 대답했다. "곡괭이 13120개, 삽 21896개, 수동 드릴 4704개."


닐슨이 계산기를 꺼냈다.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반창고 사이로 피가 배어나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암반 경도 200MPa 기준, 숙련도 계수 0.6 적용, 피로도 누적 고려, 하루 굴착 가능 거리는 평균 3.7미터. 필요 공간 최소 2만 평방미터. 갱도 단면적을 4평방미터로 잡으면... 총 연장 5,000미터. 작업 인원 200명 3교대 기준으로..." 


그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상자가 발생할 겁니다. 제 계산으로는 최소 150명이 죽습니다. 낙반, 질식, 과로사..."


"자원해서 죽는 것과 앉아서 죽는 것 중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테카트가 물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노인이 들어왔다. 


막스 하인츠. 73세. 은퇴한 독일 토목 기사. 알프스를 관통하는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 건설에 참여했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었지만, 등은 여전히 꼿꼿했다. 그의 왼팔에는 'Tunnel Rat'이라는 문신이 있었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다.


"50년간 터널을 팠습니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목소리는 쇳소리 같았다. "유럽 전역에 제가 판 터널이 97개 있죠. 알프스를 뚫고, 라인강 밑을 지나고, 북해 아래를 관통했습니다."


그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 암반은 캐낼 수 있습니다. 화강암은 단단하지만 정직합니다. 예측 가능하죠. 균열 패턴도 규칙적이고, 절리 방향도 일정합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인츠가 주머니에서 낡은 나침반을 꺼냈다. 바늘이 미친 듯이 돌고 있었다.


"자기장이 엉망입니다. 핵폭발의 여파죠.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가 벽의 도면을 가리켰다. "지하수맥입니다. 이 깊이면 대수층과 만날 확률이 73%입니다. 한 번 뚫리면 시간당 수천 톤의 물이 쏟아집니다. 12-B처럼요."


"지질 탐사는?" 페트로프가 물었다.


"탐사 장비가 있습니까?" 하인츠가 되물었다.


"3년 전 고장났습니다." 구나르가 확인했다. "일본산 부품이 필요한데, 아시다싶이 그놈들 부품이 너무 비싸죠, 그래서 아마 의회에서 허락을 안해줄겁니다"


닐슨이 이어받았다. "전략비축물자관리하던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일본놈들때문에 항상 예산이 터져나갔는데, 그놈들이 그리워질 날이 올줄은 몰랐습니다."


하인츠가 웃었다. "그럼 100년 전 방식으로 해야겠군요. 맨손으로요. 시험 굴착을 하면서 조금씩 전진하는 겁니다. 물이 새면 즉시 봉쇄하고 방향을 바꿉니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가 시선을 돌려 참석자들을 하나하나 훑어봤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사람이 죽을 겁니다. 많이 죽을 겁니다. 제가 본 최악의 경우는 1987년 스위스에서였습니다. 갱도가 무너지면서 23명이 생매장됐죠. 구조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습니다. 시신은... 으깬 토마토 같았습니다."


사라가 입을 가렸다. 하지만 눈은 피하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테카트가 결정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강철 같은 결의가 있었다.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겠습니다. 위험을 숨기지 않고 솔직히 알리고요."


"자원봉사자는 충분할 겁니다." 사라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피로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희생을 봤으니까요. 한 사람의 죽음이 모두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 있는 죽음이 무의미한 삶보다 낫다는 것을요."


홀름크비스트가 펜을 들었다. "법적 문서를 작성하겠습니다. 자원봉사 동의서요. 유족 보상 조항도 포함해서."


"무슨 보상을 하겠다는 겁니까?" 라그나가 물었다. "추가 배급?"


"존엄입니다." 홀름크비스트가 대답했다. "그들의 이름을 새기는 겁니다. 언젠가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가장 먼저 세울 기념비에요."


닐슨이 벽에 붙은 도면을 보며 말했다.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합니다. 첫째, 기존 시설의 효율을 극대화합니다. 모든 낭비 요소를 제거하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합니다."


그가 잠시 멈췄다. 다음 말이 목구멍에 걸린 듯했다.


"노약자와 중환자들의 생명 유지 장치를 꺼야 할 수도 있습니다."


충격적인 침묵이 흘렀다.


"그게 무슨..." 사라가 시작했지만, 닐슨이 손을 들어 막았다.


"감정은 나중에 하십시오. 지금은 숫자입니다. 인공호흡기 하나가 소비하는 전력으로 정수 시설을 2시간 더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1,000명이 하루를 더 삽니다."


"그럼 누가 결정합니까?" 홀름크비스트가 물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를?"


"투표를 하죠." 라그나가 제안했다. "민주적으로."


"다수가 소수를 죽이는 것이 민주주의입니까?" 홀름크비스트가 반박했다.


"그럼 대안이 있습니까?" 테카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일부가 죽거나, 모두가 죽거나. 셋째 길은 없습니다."


페트로프가 끼어들었다. "체르노빌에서도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800명을 살리기 위해 80명을 보냈죠. 원자로 아래로. 그들은 자원했습니다. 술에 취한 채로, 가족 사진을 품고서요."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하인츠가 말했다. "자원하는 사람만 보내는 겁니다. 강제는 없습니다."


"자원자가 부족하면?" 닐슨이 물었다.


"그럼 모두 함께 죽는 거죠." 테카트가 답했다. "최소한 인간답게."




작업이 시작됐다.


복도는 거대한 벌집이 되었다. 2만 3천의 난민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서정연한 혼돈이었다. 


누군가는 파이프를 운반했다. 녹슨 금속 냄새가 손에 배었다. 파이프 이음새에서 흘러나온 검은 물이 바닥에 고여 있었다. 그 물에는 방사능 경고 표시가 둥둥 떠다녔다.


누군가는 벽을 보강했다. 시멘트 대신 진흙과 피를 섞어 만든 임시 접착제를 사용했다. 냄새가 역겨웠지만 효과는 있었다. 균열을 메우면서 작업자들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게 바로 피와 땀으로 지은 집이군." 블랙 유머였지만,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는 바닥의 물을 퍼냈다. 양동이가 모자라 헬멧으로, 헬멧도 모자라면 맨손으로 떠냈다. 한 노파는 뜨개질하던 스웨터를 풀어 물을 빨아들이는 심지로 만들었다. 50년간 간직한 남편의 유품이었다.


섹터 9-A. 굴착 시작 지점.


거대한 강철문 앞에 84명의 광부들이 모였다. 그들의 얼굴은 각양각색이었다. 피부색도, 나이도, 출신도 달랐다. 하지만 눈빛은 같았다. 어둠을 뚫어본 사람들의 눈이었다.


앙헬 산체스가 그들 앞에 섰다. 52세. 광산 매몰 사고 생존자. 69일간 지하 700미터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구조된 33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얼굴은 안데스의 바람과 태양, 그리고 어둠에 새겨진 주름으로 가득했다. 왼손 약지가 없었다. 낙반 사고로 잃은 것이다.


"형제들이여." 그가 스페인어로 시작했다가, 더듬거리는 노르드어로 바꿨다.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합니다. 땅을 팝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위로 가는 길이 아니라, 옆으로 가는 길을 만듭니다."


그가 곡괭이를 들어 보였다. 날은 무뎠고 자루는 갈라져 있었다. 테이프로 겨우 고정한 상태였다.


"이것이 우리 무기입니다. 초라하죠? 하지만 이것으로 안데스를 뚫었고, 히말라야를 넘었습니다. 이제는 희망을 캐낼 차례입니다."


한 젊은 중국인 광부가 물었다. "얼마나 팔 수 있을까요, 선배님?"


산체스가 그를 봤다. 리 장. 32세. 산시성 탄광 폭발 사고에서 아버지와 형을 잃었다.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광부가 되었다. 운명의 아이러니였다.


"모르겠습니다, 장." 산체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산호세에서 배운 게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기적이라는 것을요. 오늘 우리가 판 1미터가 내일 누군가의 1미터가 됩니다."


그가 시선을 돌려 다른 광부들을 봤다. 


"자, 시작합시다." 산체스가 강철문에 다가갔다. "이 문 뒤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무엇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광부니까요. 어둠은 우리 친구고, 돌은 우리 형제입니다."


그가 문 옆의 제어판을 눌렀다. 경고음과 함께 붉은 불이 깜빡였다.


"경고: 비인가 구역. 구조적 위험. 진입 금지."


산체스가 안전핀을 뽑고 수동 해제 레버를 당겼다. 육중한 금속음과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틈새로 찬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곰팡이와 금속, 그리고 뭔가 오래된 것의 냄새가 났다. 죽음의 냄새와 비슷했지만, 또 달랐다. 가능성의 냄새였다.


"헬멧 쓰고, 라이트 켜고." 산체스가 명령했다. "2인 1조로 움직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생명줄입니다. 잊지 마세요."


광부들이 줄을 지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헤드램프의 불빛이 춤을 추며 벽을 비췄다. 화강암이었다. 하인츠의 말대로 단단하고 정직한 돌이었다.


"여기다!" 은코모가 더듬거리며 외쳤다. "여... 여기가 좋... 좋아!"


그가 가리킨 곳은 자연 절리가 발달한 지점이었다. 약한 곳을 찾는 것은 광부의 본능이었다.


산체스가 벽을 손으로 쓸어봤다. 차갑고 단단했지만, 미세한 균열이 느껴졌다.


"좋아. 여기서 시작하자."


그가 곡괭이를 들었다. 다른 광부들도 각자의 도구를 들었다. 순간,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모두가 느꼈다.


"요새를 위하여." 산체스가 말했다.


"요새를 위하여!" 광부들이 함성을 질렀다.


첫 번째 곡괭이가 암반을 쳤다.


캉!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불꽃이 튀었다. 작은 돌조각이 떨어졌다. 보잘것없었지만, 시작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타격이 이어졌다. 리듬이 생기기 시작했다. 캉, 캉, 캉. 광부들의 오래된 리듬.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이어져 온 리듬.


"노래하자!" 코발스키가 제안했다. 그의 목소리는 쉬고 거칠었지만, 멜로디는 분명했다.


폴란드 광부들의 노래가 시작됐다. 가사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리듬은 곡괭이질과 맞아떨어졌다. 곧 다른 나라의 광부들도 자기들의 노래를 보탰다. 스페인어, 중국어, 힌디어, 아프리칸스어가 뒤섞였다. 바벨탑 같았지만, 이상하게 조화로웠다.




한편, 의료 구역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사라 첸이 임시 수술대 위에서 한 남자의 복부를 열고 있었다. 제대로 된 마취제는 떨어진 지 오래였다. 공업용 알코올로 대체했지만, 환자는 의식이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세요." 사라가 말했다.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떨어져 환자의 상처에 떨어졌다. 염분이 상처를 자극했지만, 소독 효과는 있었다.


환자는 로버트 클라크. 45세. 전직 캐나다 공군 조종사. 12-B 구역에서 방수벽을 설치하다가 철근에 복부를 관통당했다. 


"괜찮습니다... 닥터."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더한 것도 봤으니까요."


사라가 상처를 확인했다. 간이 찢어져 있었다. 정상적인 병원이라면 즉시 이식 수술을 해야 할 상태였다. 하지만 여기엔 그런 사치가 없었다.


"정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사라가 클라크의 눈을 봤다.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습니다. 지혈하고 봉합은 하겠지만..."


"알고 있습니다." 클라크가 웃으려 했지만 신음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얼마나?"


"운이 좋으면 48시간. 운이 나쁘면..."


"충분합니다." 그가 사라의 손목을 잡았다. 피 묻은 손이었다. "딸에게... 편지를 쓸 시간이면 되니까요."


사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봉합을 시작했다. 바늘이 살을 뚫을 때마다 클라크의 몸이 경련했지만, 그는 신음하지 않았다. 대신 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엠마... 엠마..."


옆 침대에서는 다른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7살 소녀 메이 린. 중국계 캐나다인. 머리 부상으로 의식을 잃은 지 30시간째였다. 그녀의 어머니 제니퍼 린이 손을 잡고 있었다.


"뇌압이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보조 간호사가 보고했다. "수술이 필요한데..."


"신경외과 의사가 있습니까?" 사라가 물었다.


"아니요. 정형외과 레지던트가 한 명 있긴 한데..."


사라가 한숨을 쉬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불러오세요. 그리고..." 그녀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톱을 준비하세요. 두개골을 열어야 합니다."


제니퍼가 흐느꼈다. "제발... 제 딸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라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보장은..."


그때 누군가 뛰어들어왔다. "닥터 첸! 긴급환자입니다!"


들것에 실려온 것은 젊은 광부였다. 장 리. 막 작업을 시작한 그였다.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낙반입니다!" 동료 광부가 설명했다. "천장에서 돌이 떨어져서... 가슴을 정통으로..."


사라가 재빨리 상태를 확인했다. 늑골 다발성 골절. 혈흉. 즉시 흉관 삽입이 필요했다.


"수술대로! 지금!"


하지만 수술대는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클라크가 누워 있었다.


"저는..." 클라크가 말하려 했지만 피를 토했다.


사라가 1초 만에 결정했다. "클라크 씨를 옮기세요. 여기 환자가 더 급합니다."


"하지만 이동하면 출혈이..." 보조가 항의했다.


"알고 있습니다!" 사라가 소리쳤다.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인 것이었다. "하지만 선택해야 합니다. 살 가능성이 높은 쪽을!"


클라크가 웃었다. 피가 섞인 웃음이었다. "괜찮습니다... 닥터. 어차피... 시한부였으니까요."


그들이 클라크를 옮기는 동안,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구겨진 사진이었다. 금발의 소녀가 웃고 있었다.


"이걸... 전해주세요. 엠마에게..."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다시 뜨지 않을 눈이었다.


사라는 눈물을 닦을 시간도 없이 장 리의 가슴에 메스를 댔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원자로 제어실.


닐슨과 페트로프가 계기판 앞에 앉아 있었다. 숫자들이 미친 듯이 춤추고 있었다. 그 옆에는 진수의 동료들이 있었다. 다들 방호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3호기 노심 온도 847도." 한 기술자가 보고했다. "상승 곡선이 가팔라지고 있습니다."


"제어봉 삽입률은?"


"73%에서 멈췄습니다. 유압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페트로프가 욕을 러시아어로 중얼거렸다. "수동으로 해야겠군요."


"그곳은 방사능이..." 


"알고 있습니다." 페트로프가 일어섰다. "3분이면 됩니다."


그가 방호복의 지퍼를 올렸다. 헬멧을 쓰려다가 멈췄다.


"혹시 담배 있는 사람?"


닐슨이 주머니를 뒤졌다. 구겨진 담배 한 개비가 나왔다.


"마지막입니다."


"충분합니다." 페트로프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20년 만이군요. 끊었었는데."


그가 담배를 비벼 끄고 헬멧을 썼다.


"3분 후에 안 나오면 문을 봉쇄하세요. 그리고 다음 자원자를 보내세요."


"확인했다. 그대의 희생에 경의를 표하지"


페트로프가 차폐문으로 걸어갔다.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문이 열리자 열기가 폭풍처럼 쏟아져 나왔다. 가이거 계수기가 미친 듯이 울렸다. 바늘이 최대치를 넘어 계속 돌았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제어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기술자들이 초시계를 보고 있었다.


30초.


1분.


1분 30초.


"심박수 180." 한 명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체온 41도."


2분.


"제어봉 삽입률 85%!"


2분 30초.


"90%! 거의 다 됐습니다!"


2분 45초.


"95%! 조금만 더!"


3분.


"문을 봉쇄..." 책임자가 말하려는 순간, 인터컴에서 소리가 들렸다.


"100%... 달성." 페트로프의 목소리였다. 헐떡이고 있었다. "문을... 열어주세요."


문이 열리고 페트로프가 비틀거리며 나왔다. 방호복은 열로 일부가 녹아 있었다. 헬멧을 벗자 머리카락이 한 줌씩 빠졌다.


"얼마나 맞았습니까?" 의무관이 달려오며 물었다.


페트로프가 선량계를 봤다. "800렘. 치사량의 4배군요."


충격적인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원자로는 안전합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잇몸에서 피가 났다. "그게 중요한 거 아닙니까?"


의무관이 모르핀을 준비했다. "고통스러울 겁니다."


"압니다." 페트로프가 침대에 누웠다. "체르노빌에서 봤으니까요. 피부가 벗겨지고, 내장이 녹고... 일주일쯤 걸립니다."


"편하게 해드릴 수는..."


"아직입니다." 페트로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할 일이 있습니다. 매뉴얼을 작성해야 합니다. 다음 사람을 위해서요."


그가 펜을 들었다. 손은 이미 떨리기 시작했지만, 글씨는 또렷했다.


"원자로 비상 제어 절차. 작성자: 이반 페트로프. 잔여 생존 예상 시간: 168시간."




굴착 현장.


첫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교대 시간이었다. 1조가 나오고 2조가 들어갈 시간.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안 나옵니까?" 2조 조장이 물었다.


산체스가 곡괭이를 내려놓지 않고 대답했다. "조금만 더요. 15미터가 눈앞입니다."


"규정은 8시간입니다. 벌써 10시간째..."


"규정은 지상에서나 지키는 겁니다." 코발스키가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은 석탄처럼 까맣게 변해 있었다. "여기선 다릅니다."


2조 광부들이 서로를 봤다. 그리고 그들도 곡괭이를 들었다.


"그럼 함께 팝시다."


"미쳤군요." 산체스가 웃었다. "다들 미쳤어. 하지만 미친 게 정상인 세상이니까."


두 개 조가 합쳐지자 속도가 배가 됐다. 곡괭이 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캉! 캉! 캉!


암반이 조금씩 무너졌다. 1센티미터, 10센티미터, 1미터씩.


그때였다.


"잠깐!" 은코모가 손을 들었다. "뭔... 뭔가 이상해!"


모두가 멈췄다. 정적 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산체스가 벽에 손을 댔다. 축축했다. "지하수다."


공포가 번졌다. 12-B 구역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후퇴합니까?" 누군가 물었다.


산체스가 벽을 자세히 살폈다. 그의 40년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아니다. 이건 본류가 아니야. 스며드는 정도다. 봉쇄할 수 있어."


"뭘로요? 시멘트도 없는데."


그때 파텔이 나섰다. "인도에서는 진흙과 소똥을 섞어 씁니다. 방수 효과가 탁월하죠."


"소똥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인분은 있죠." 파텔이 쓴웃음을 지었다. "화장실이 막힌 지 사흘째니까요."


역겨운 침묵이 흘렀다.


"미친 짓이지만..." 산체스가 한숨을 쉬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1시간 후, 그들은 정말로 그것을 하고 있었다. 인분과 진흙을 섞어 벽의 틈을 메우고 있었다. 냄새는 끔찍했지만, 효과는 있었다. 물이 멈췄다.


"이걸 영웅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젊은 광부가 코를 막으며 물었다.


"영웅은 깨끗한 일만 하는 게 아니지." 산체스가 대답했다. "때로는 똥 묻은 손으로도 세상을 구해야 해."


그들이 웃었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는 게 기적이었다.


"15미터!" 누군가 외쳤다. 


환호성이 터졌다. 서로를 껴안았다. 똥 냄새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오늘 목표 달성!" 산체스가 선언했다. 



중앙 통제실.


테카트가 닐슨과 함께 전체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식량 생산 시설 가동률 70%." 닐슨이 보고했다. "에너지 절약으로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하루 1,800칼로리 기준으로 87%만 충족 가능합니다."


"배급량을 줄여야겠군요."


"이미 줄였습니다. 더 줄이면 노동 효율이 떨어집니다. 특히 굴착 작업자들은 칼로리 소모가 심합니다."


테카트가 한숨을 쉬었다. "악순환이군요."


"항상 그랬습니다." 닐슨이 말했다. "다만 이번엔 조금 다릅니다."


"뭐가요?"


"사람들이 불평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배급이 줄면 폭동 직전까지 갑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이해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거나 함께 죽거나. 중간은 없다는 것을요."


그때 통신기가 울렸다.


"굴착팀입니다!" 산체스의 목소리였다. 흥분이 섞여 있었다. "5미터 전진했습니다! 암반이 예상보다 부드럽습니다. 이 속도면 하루 5미터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테카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작지만 진짜 미소였다.


"잘했습니다. 하지만 무리하지 마세요.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소장님, 사람들의 사기가 높습니다.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통신이 끊겼다.


닐슨이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 속도면 4주 안에 기본 공간 확보가 가능합니다. 물론 지하수를 만나지 않는다면요."


"만난다면?"


"기도하는 수밖에요." 닐슨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무신론자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뭐라도 믿고 싶어집니다."




첫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테카트가 홀로 서 있었다. 벽에 붙은 진행 상황표를 보고 있었다.


굴착: 12미터

사망자: 3명 (사고 2, 과로 1)

부상자: 47명 (경상 38, 중상 9)

남은 시간: 41일 13시간


숫자들이었다. 닐슨처럼 차가운 숫자들. 하지만 그 뒤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희망을 품고 곡괭이를 드는 사람들이.


"못 볼 꼴을 보고 계시는군요."


닐슨이 들어왔다. 손에는 두 개의 컵이 들려 있었다. 재활용수지만, 뜨거웠다.


"가끔은 숫자로만 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테카트가 컵을 받으며 말했다.


"하지만 숫자로만 보면 안 되죠." 닐슨이 자신의 컵을 들었다. "그걸 오늘 배웠습니다."


두 사람이 잠시 침묵 속에서 물을 마셨다.


"6주." 테카트가 중얼거렸다. "정말 해낼 수 있을까요?"


"확률은 여전히 낮습니다." 닐슨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0%는 아닙니다. 그리고 가끔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밖에서는 여전히 곡괭이 소리가 들렸다. 캉, 캉, 캉. 희망의 리듬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진짜 시험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6주 후, 굴착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들은 또 다른 선택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더 잔혹하고, 더 절망적인.


하지만 오늘은, 이 순간만큼은, 희망이 있었다.


112만 3천 1명의 희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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