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성기의 무게는 고작 2.3킬로그램에 불과했지만, 테카트의 손목은 천 근의 무게를 지탱하는 듯 욱신거렸다. 플라스틱 손잡이에 새겨진 마모 자국들이 손바닥의 굳은살과 맞물렸다. 배터리 표시등의 빨간 LED가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9%... 8.7%... 8.4%... 디지털 숫자가 소수점 단위로 죽음을 카운트다운했다.
"뉴틀란트 시민 여러분."
첫 음절이 갈라진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건조한 공기가 성대를 갈아먹은 듯했다. 그는 텁텁한 침을 삼켰다. 혀끝에서 피와 먼지 맛이 났다. 갈라진 입술 사이로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폐 깊숙이 들어온 공기에는 죽음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부패한 단백질과 암모니아, 그리고 희미한 오존 냄새.
"아직 살아있는 모든 분들에게 말합니다."
낡은 확성기의 스피커 코일이 비명을 질렀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일그러졌다가 다시 형태를 잡았다. 음파는 대강당의 금속 벽면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복도를 타고 흘러가며 죽어가는 도시의 미로 같은 통로들을 채웠다. 112만 개의 절망한 영혼들에게 가닿기 위해 발버둥쳤다.
대강당 바닥에는 시체들이 불규칙한 패턴으로 널려 있었다. 어제의 폭동에서 죽은 자들이었다. 일부는 아직 따뜻했고, 혈액이 응고되며 만든 검붉은 웅덩이가 형광등 빛을 반사했다. 그 사이사이에서 미세한 움직임들이 포착됐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자들이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일었다가, 마치 바람에 꺼지는 촛불처럼 스러졌다.
"우리에게 4일의 식량이 남았습니다. 정확히는 96시간 17분. 112만 3,847명이 하루 800칼로리로 연명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 후는..."
그는 말을 멈췄다. 정적 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똑. 파이프에서 새는 검은 물이었다. 똑. 리듬을 타며 떨어지는 물방울이 시간의 흐름을 상기시켰다. 똑.
한 시간 후, 대강당의 육중한 강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첫 번째로 들어선 인물을 보고 모두가 숨을 멈췄다.
올레 닐슨이었다.
그의 등장은 폭탄과도 같았다. 왼손에는 늘 그랬듯이 은색 계산기가 들려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차가운 금속 표면이 유독 빛났다. 오른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의 떨림이었다. 그의 회색 양복은 여전히 단정했지만, 옷깃에는 보이지 않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속삭임들이 퍼졌다. 하지만 그는 침묵했다. 창백한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이마에 맺힌 식은땀 방울이 형광등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두 번째는 복도 저편에서 걸어왔다. 하얀 간호사 유니폼은 피와 요오드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라 첸. 32세. 한때는 소아과 전문 간호사였지만, 이제는 죽어가는 도시의 마지막 치유자 중 한 명이었다.
"의료진이 필요할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쇠처럼 단단한 결의가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박힌 굳은살이 그녀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붙들려 애썼는지 말해주었다.
"방사능 화상의 진행 단계, 급성 방사선 증후군의 증상들, 오염된 상처의 괴사 과정... 누군가는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는... 기록이라도 남겨야죠."
그녀의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이 살짝 보였다. 빼곡히 적힌 의료 기록들. 죽음의 백과사전.
세 번째는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존재였다.
열다섯 살. 아니,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다. 영양실조로 성장이 멈춘 탓에 열 살처럼 보이기도 했고, 눈빛만 보면 백 살은 족히 넘어 보였다. 뼈만 남은 손목, 튀어나온 광대뼈,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그의 눈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본 눈. 부모가 서로를 뜯어먹는 것을 지켜본 눈. 문명의 종말을 목격한 눈.
"안 돼." 테카트의 거부는 즉각적이었다.
"왜요?" 소년의 대답은 기계적이었다. "어차피 96시간 17분... 아니, 이제 16분 후면 다 죽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죠?"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구겨진 사진 한 장. 가족사진이었다. 행복이 무엇인지 아직 알던 시절의 흔적. 사진 속 소년은 웃고 있었다. 지금의 그와는 다른 사람 같았다.
네번째는 브륀힐드 박사, 식물학자였다. 지상에 남아있는 그것들을 아직 식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강당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엔 다른 종류의 소리와 함께였다. 쇠사슬이 바닥을 긁는 소리, 억눌린 신음, 그리고 군화 소리.
라그나가 선두에 섰다. 2미터가 넘는 거구에 흉터투성이 얼굴. 20명의 무장 경비대가 그를 따랐다. 그들이 끌고 온 것은...
"아니야!" 테카트의 외침이 공간을 가를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17명의 죄수들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왔다. 어떤 이는 무릎을 꿇고 기어왔고, 어떤 이는 의식을 잃은 채 질질 끌려왔다.
닐슨이 뒤에서 나타났다. 새 계산기를 든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3명의 생존 확률: 0.0001%. 20명의 생존 확률: 0.0005%. 500% 증가입니다. 수학적으로 명백한 선택입니다."
한 남자가 테카트를 똑바로 봤다. 왼쪽 눈은 멍들어 감겨 있었고, 입술은 터져 있었다. 그럼에도 남은 한쪽 눈에는 날카로운 질문이 있었다.
"당신이... 이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테카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명령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지도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지하 70미터. 해저와 연결된 비밀 항구는 무덤 같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발목까지 차오른 검은 물은 기름과 녹, 그리고 알 수 없는 유기물이 뒤섞여 악취를 풍겼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미끄러운 무언가가 으스러졌다. 뼈인지, 금속 파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10인승 소형 잠수정 '희망'호. 아이러니한 이름이었다.
선체는 마치 한센병에 걸린 것처럼 녹으로 뒤덮여 있었다. 군데군데 뚫린 구멍들은 서둘러 용접했지만, 용접 자국 사이로 검은 물이 새어 나왔다. 리벳이 빠진 자리에는 볼트와 너트로 대충 때웠고, 그마저도 녹슬어 언제 빠질지 알 수 없었다.
"이게... 물에 뜰까?"
한 죄수의 떨리는 목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대답은 경비대원의 개머리판이었다. 턱을 맞은 죄수가 비틀거리며 잠수정 안으로 떨어졌다.
내부는 더 끔찍했다.
좌석의 가죽은 습기로 썩어 들어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계기판의 유리는 금이 가 있었고, 바늘들은 제멋대로 흔들렸다. 천장의 파이프 이음새에서는 일정한 리듬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똑. 똑. 똑.
공기는 디젤 냄새와 곰팡이, 그리고 오래된 구토물 냄새로 가득했다.
엔진이 켜졌다. 덜컹거리고 기침하듯 터덜거리다가 겨우 시동이 걸렸다. 검은 연기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산소 마스크!"
하지만 15개뿐이었다. 5명은 옷자락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연기는 폐 깊숙이 파고들어 점막을 태웠다.
잠수가 시작됐다.
작은 현창으로 보이는 물은 처음엔 탁한 갈색이었다가, 점점 짙은 녹색으로, 그리고 마침내 빛이 닿지 않는 완전한 흑색으로 변했다.
10초 후 선체가 삐걱거렸다.
20초 후. 용접 부위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30초 후
쿵!
무언가 선체를 때렸다. 금속이 움푹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쿵! 쿵! 쿵!
연속적인 충격. 잠수정이 좌우로 흔들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조명을 켜!"
1000와트 할로겐 램프가 어둠을 갈랐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맙소사..."
한때 물고기였을 존재들.
방사능이 DNA를 산산조각 낸 결과물들이었다. 어떤 것은 머리가 셋이었고, 어떤 것은 지느러미 대신 인간의 손가락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피부는 투명해서 내장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그 내장들은 녹색 형광을 발했다.
수십, 수백 마리가 잠수정을 에워쌌다. 이빨로 선체를 긁었다. 끼익, 끼익. 금속을 갉아먹는 소리가 내부에 울려 퍼졌다.
그때 더 큰 그림자가 나타났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함. 잠수정의 10배는 되어 보였다. 수백 개의 촉수가 춤추듯 움직였고, 그 중심에는... 눈이 있었다. 인간의 눈. 수십 개의 인간 눈이 불규칙하게 박혀 있었다.
그것이 잠수정을 움켜쥐었다.
끼이이이익!
금속이 비명을 질렀다. 압력계가 미친 듯이 돌았다. 빨간 경고등이 난무했다.
"선체 압력 한계 초과! 10초 안에..."
그때 한 죄수가 완전히 미쳐버렸다.
"나가! 나를 내보내! 차라리 물속에서 죽겠어!"
그가 비상 해치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막아섰다. 좁은 공간에서 20명이 뒤엉켰다. 주먹이 날아가고, 발길질이 이어졌다. 누군가 칼을 뽑았다.
푹!
뜨거운 피가 튀었다. 비명과 신음이 뒤섞였다. 바닥이 피로 미끄러워졌다.
그 순간, 거대한 존재가 잠수정을 놓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흥미를 잃었거나, 더 큰 먹잇감을 발견했거나.
해치가 열렸다.
들어온 것은 빛이 아니었다.
핵겨울의 하늘은 피와 재로 물든 캔버스 같았다. 검붉은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움직였고, 그 사이로 녹색 번개가 쳤다. 체렌코프 방사선이 대기 중에서 춤추고 있었다.
첫 번째로 나간 사람이 세 걸음도 가지 못하고 쓰러졌다.
"컥!"
그가 토한 것은 피가 아니었다. 검은 타르 같은 무언가였다. 덩어리들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폐 조직이었을 것이다.
가이거 계수기가 광란의 음을 토해냈다.
삐이이이이이이—
"시간당 12,000뢴트겐... 아니, 측정 불가!"
눈앞에 펼쳐진 것은 죽음이 예술이 된 풍경이었다.
항구의 잔해 위로 거대한 뼈들이 솟아 있었다. 고래보다 큰 무언가의 갈비뼈가 대성당의 기둥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척추뼈 하나가 버스만 했다.
건물들은 녹아내려 있었다. 콘크리트가 용암처럼 흘러내려 기괴한 조각품을 만들었다. 철골은 사탕처럼 휘어지고 꼬여 있었다. 깨진 유리는 모래가 되어 발밑에서 사각거렸다.
그리고 식물들...
검은 덩굴이 모든 것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식물이라기보다는 살아있는 악몽에 가까웠다. 표면은 젖어 있었고, 맥박치듯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한 죄수가 덩굴을 밟았다.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덩굴이 뱀처럼 그의 다리를 감아 올랐다. 가시가 방호복을 관통했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으아악!"
그가 넘어지자 더 많은 덩굴이 달려들었다. 마치 의식이 있는 것처럼, 먹잇감을 감지한 것처럼. 몇 초 만에 그는 검은 덩굴 무더기가 되었다. 비명이 멎었다.
하늘에서는 죽음의 눈이 내렸다.
검은 재였다. 피부에 닿는 순간 지직 소리를 내며 살을 태웠다. 방호복이 녹았다. 구멍이 뚫렸다. 그 사이로 파고든 재는 피부를 부식시켰다.
쿵. 쿵. 쿵.
땅이 리듬을 타며 흔들렸다. 무언가 거대한 것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타났다.
한때 인간이었을 존재들. 이제는 방사능이 빚어낸 조각품들.
키 3미터의 거구들. 피부는 벗겨져 붉은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그 위를 투명한 점막이 덮고 있어 내부가 훤히 보였다. 근섬유가 수축할 때마다 녹색 형광이 번쩍였다.
머리는 기형적으로 비대했다. 두개골이 유리처럼 투명해져 뇌가 드러나 있었다. 뇌는 평범한 회백색이 아니라 에메랄드빛으로 빛났다. 표면에는 이상한 문양들이 맥동했다.
눈은 없었다. 대신 눈구멍에서 가느다란 촉수들이 나와 있었다. 수십 개의 촉수가 공기 중을 더듬으며 냄새와 열, 그리고 생명의 징후를 감지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맙소사..."
거대한 유리 실린더들. 그 안에는 장기들이 들어 있었다. 살아있는 장기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고, 폐는 부풀었다 수축했다. 간은 꿈틀거렸고, 뇌는 전기 신호를 내보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마치 하나의 의식을 공유하는 것처럼.
그리고 멈췄다.
모든 머리가 일제히 돌아갔다. 텅 빈 눈구멍이 생존자들을 향했다.
그 순간, 침입이 시작됐다.
『신선한... 재료...』
목소리가 아니었다. 생각이 직접 뇌에 새겨졌다. 날카로운 바늘처럼 의식을 파고들었다.
『우리와... 하나가... 되라...』
『진화의... 길에... 동참하라...』
『고통은... 일시적... 영광은... 영원하리...』
주변에서 비명이 터졌다. 정신 공격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쓰러졌다. 눈, 코, 귀에서 피가 흘렀다.
한 명이 일어섰다.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입가에는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름답다... 너무나... 아름다워..."
그가 걷기 시작했다. 변이체들을 향해. 팔을 벌리고, 마치 오랜 친구를 맞이하듯.
"안 돼!"
데카트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초인적인 힘으로 밀쳐냈다. 오히려 3미터나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변이체가 손을 뻗었다. 길고 관절이 여러 개인 손가락이 희생자의 머리를 감쌌다.
칵!
경추가 부러지는 소리는 마른 나뭇가지가 꺾이는 것 같았다. 시체가 쓰러지기도 전에 해체가 시작됐다.
정밀한 수술이었다. 피부를 벗기고, 근육을 층별로 분리하고, 장기를 하나씩 적출했다. 모든 과정이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꺼낸 장기들은 즉시 유리 실린더에 담겼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살아남은 11명이 거대한 냉각탑에 도착했을 때, 가이거 계수기는 이미 최대치를 넘어 고장 났다. 마지막으로 표시된 숫자는 시간당 15,000뢴트겐이었다.
냉각탑은 괴물이 되어 있었다.
100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구조물은 10년간의 열과 방사능에 녹아내렸다. 표면은 왁스처럼 흘러내려 기괴한 종유석들을 형성했다. 틈새마다 녹색빛이 새어 나왔다. 체렌코프 방사선. 노심이 아직도 임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
"10년 동안... 계속 타고 있었어..."
브륀힐드 박사의 목소리는 경외감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입구를 찾는 데 30분이 걸렸다. 원래의 문은 열에 녹아 콘크리트와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대신 폭발로 생긴 균열을 통해 들어가야 했다. 가장자리는 유리처럼 날카로웠다.
내부로 들어서자 열기가 망치처럼 때렸다.
섭씨 80도. 아니, 더 높았다. 방호복의 고무 부분이 즉시 끈적거리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부품들이 변형되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타는 것 같았다.
중앙의 거대한 구멍에서 지옥이 끓고 있었다.
코륨. 용융된 핵연료와 콘크리트, 강철이 뒤섞인 용암. 표면은 붉은색과 주황색, 노란색이 소용돌이쳤다. 가끔 거품이 일어나며 터질 때마다 방사성 증기가 분출됐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이런..."
뼈의 산이었다.
수만 구의 해골이 10미터 높이로 쌓여 있었다. 마치 고대의 제단처럼. 일부는 아직 살점이 붙어 있었고, 일부는 방사능에 하얗게 표백되어 있었다. 어떤 두개골에는 세 개의 눈구멍이, 어떤 것에는 뿔 같은 돌기가 솟아 있었다.
쩌렁!
위에서 금속 파이프가 떨어졌다. 모두가 총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은...
냉각탑 내벽은 살아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언가가 벽을 뒤덮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림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한때 인간이었을 것들.
방사능이 그들을 거미로 만들어버렸다. 팔다리가 2미터 이상으로 늘어났고, 관절이 역방향으로 꺾였다. 손가락과 발가락 끝에는 갈고리 같은 발톱이 돋아 있었다. 피부는 키틴질로 변해 검고 번들거렸다.
얼굴은... 여전히 인간이었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인간의 눈으로 먹잇감을 바라보고, 인간의 입으로 침을 흘렸다.
수십 마리가 천장과 벽에 매달려 있었다. 거미줄 대신 녹아내린 살점으로 된 끈을 사용했다.
한 마리가 떨어졌다.
5미터 상공에서 낙하한 것은 한 생존자의 등 위였다. 찰칵 소리와 함께 목이 꺾였다. 시체가 쓰러지기도 전에 더 많은 것들이 떨어졌다.
"사격!"
탕! 탕! 탕!
총성이 울렸지만 탄약은 한정되어 있었다. 거미인간들은 총알을 맞고도 계속 움직였다. 치명상이 아닌 이상 멈추지 않았다.
한 생존자가 비명을 질렀다. 거미인간이 그의 팔을 물어뜯었다. 퍽 소리와 함께 팔이 떨어졌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탄약이 떨어졌어!"
절망적인 외침이 들렸다. 쇠파이프와 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콰아앙!
냉각탑 벽 한쪽이 폭발했다. 20센티미터 두께의 강화 콘크리트가 종이처럼 찢어졌다. 폭발의 충격파가 거미인간들을 날려버렸다.
연기와 먼지 사이로 그들이 들어왔다.
"Für Jarnheim! Khazak!"(야른하임을 위하여! 돌격!)
중화기의 포효가 시작됐다. 예광탄이 어둠을 가르며 정확히 목표를 찾아갔다. 12.7mm 중기관총탄이 거미인간들을 갈기갈기 찢었다.
연기가 걷히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군인들이 아니었다.
드워프들이었다. 평균 키 140센티미터의 전사들. 하지만 그들의 어깨는 일반인의 두 배였고, 팔뚝은 통나무 같았다. 특수 제작된 파워 아머를 입고 있었는데, 관절 부분에서 유압 장치의 작동음이 들렸다.
방호복에는 망치와 모루가 교차된 문장. 그 아래 룬 문자로 새겨진 글귀.
'JARNHEIM - STAHL UND EHRE'(야른하임 - 강철과 명예)
선두에 선 드워프가 투구를 벗었다.
회색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왔다. 왼쪽 눈에는 검은 안대. 오른쪽 눈은 강철처럼 차가웠다. 이마와 뺨에는 전투의 흔적인 흉터들이 지도처럼 새겨져 있었다.
"토르스텐 아이언해머."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야른하임 제3정찰대장. 당신들이 뉴틀란트 생존자들이오?"
"맞습니다만..." 테카트가 당황했다. "어떻게 저희를..."
"10년 전 자동 조난 신호." 토르스텐이 짧게 설명했다. "요새 침수 시 발신되는 비상 프로토콜. 바다가 험해서 늦었소. 미안하오."
그의 부하들은 이미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죽은 거미인간들을 확인 사살하고, 부상자를 응급처치하고, 탈출로를 확보했다.
"생존자가 몇이오?" 토르스텐이 물었다.
"112만..." 테카트가 말을 멈췄다. 현실이 무겁게 눌렀다.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토르스텐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강철 같던 눈에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112만..." 그가 수염을 쓸며 중얼거렸다. "Scheiße...(젠장...)"
쿠웅!
또 다른 폭발음. 이번엔 훨씬 가까웠다. 냉각탑 전체가 흔들렸다.
"대장님!" 한 드워프 병사가 외쳤다. "놈입니다! 용광로가 왔습니다!"
"벌써?" 토르스텐이 침을 뱉었다. "냄새를 맡은 게야. 젠장할."
땅이 흔들렸다. 쿵. 쿵. 쿵.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 무게가 느껴졌다.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무게.
"용광로가 뭡니까?" 테카트가 물었다.
토르스텐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원자로의 수호자라고 할까. 10년간 방사능을 주식으로 자란 놈이지. 우리가 만난 변이체 중 가장..."
콰앙!
냉각탑 벽이 안으로 폭발했다. 콘크리트 덩어리가 총알처럼 날아왔다. 한 생존자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맞았다. 상반신이 사라졌다.
먼지가 걷히며 나타난 것은...
그것을 생물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15미터 높이의 육산. 한때는 곰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방사능이 빚어낸 악몽이었다.
세 개의 머리가 있었다. 중앙의 곰 머리는 원래 크기의 세 배로 부풀어 있었고, 이빨은 세 줄로 나 있었다. 각 이빨은 단검만 했다. 양옆의 머리는...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의 머리가 기생충처럼 붙어 있었다. 의식이 있는지 계속 울부짖고 있었다.
"도와줘... 죽여줘... 제발..."
인간의 목소리였다. 10년 동안 죽지도 못하고 갇혀 있던 영혼들의 비명.
몸통은 종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축구공만 한 종양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고, 일부는 터져서 녹색 고름을 흘렸다. 고름이 바닥에 떨어지자 치익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를 녹였다.
팔은 여섯 개였다. 원래의 앞다리 둘과 뒤에서 돋아난 인간의 팔 넷. 크기가 제각각이었고, 일부는 아직 성장 중인지 꿈틀거렸다.
그리고 가슴 중앙에는...
"맙소사..."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니, 입이었다. 늑골이 이빨처럼 늘어서 있는 두 번째 입. 그 안에서 녹색빛이 pulsating했다. 삼킨 원자로 노심의 일부가 아직 그 안에서 타고 있었다.
"프로토콜 하겐 실행!"
토르스텐의 명령이 떨어지자 드워프들의 움직임이 일사불란하게 바뀌었다.
"1분대, 좌측 이동! 2분대, 견제 사격! 3분대, 연막!"
슈우우웅—
연막탄이 터졌다. 하지만 일반 연막이 아니었다. 은빛 입자가 섞여 있었다. 방사능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특수 연막.
"이동! 이동! 이동!"
뉴틀란트 생존자들을 중앙에 두고 드워프들이 철벽 대형을 만들었다. 후퇴하면서도 정확한 사격을 유지했다.
탕! 탕! 탕!
12.7mm 철갑탄이 용광로의 관절을 노렸다. 정확한 사격이었지만 거대한 몸집에는 벌레 물린 정도였다.
용광로가 돌진했다.
체중 50톤의 괴물이 시속 40킬로미터로 달렸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현실이었다. 발걸음마다 땅이 갈라졌다.
"우회로다!"
토르스텐이 옆 건물의 벽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콰앙!
벽이 뚫렸다. 일행이 재빨리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용광로가 건물째로 들이받았다.
콰콰콰쾅!
5층 건물이 종이처럼 무너졌다. 수십 톤의 잔해가 쏟아졌다.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잠시 정적.
그리고...
잔해가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용광로가 일어섰다. 거의 무傷이었다.
"이런 괴물을 어떻게..." 김철수가 절망했다.
"방법이 있소." 토르스텐이 침착하게 말했다. "늘 있었지."
### 유인 작전
"헤르만! 유인조 출동!"
세 명의 드워프가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특수 개조된 바이크였다. 엔진은 전기 모터로 교체되어 있었고, 뒤에는 강철 체인으로 무언가를 끌고 있었다.
"방사능 미끼다." 토르스텐이 설명했다. "코발트-60. 놈들은 방사능에 중독되어 있거든."
과연 용광로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세 개의 머리가 일제히 돌아갔다.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크르르르르..."
낮은 으르렁거림. 지진 같았다.
바이크들이 출발했다. 완벽한 삼각 대형을 유지하며 용광로 주변을 돌았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절묘한 거리.
용광로가 미끼를 쫓았다. 거대한 몸이 돌면서 건물 잔해를 짓밟았다.
"지뢰 구역까지 500미터!"
토르스텐이 손가락으로 카운트다운했다.
"3... 2... 1... 지금!"
바이크 운전자들이 동시에 점프했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안전하게 착지했다. 바이크는 자동 조종으로 계속 직진했다.
용광로가 따라갔다.
그리고...
콰콰콰콰광!
연쇄 폭발이 시작됐다. 대전차 지뢰 50개가 동시에 터졌다. 충격파가 건물을 흔들었다.
용광로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50톤의 괴물이 20미터 상공에서 회전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쿠우우웅!
땅에 처박혔다. 크레이터가 생겼다. 먼지와 잔해가 100미터 상공까지 치솟았다.
"확인 사살!"
옥상에서 저격수들이 나타났다. 12명이 동시에 조준했다.
"눈 조준!"
탕! 탕! 탕!
대물 저격총이 불을 뿜었다. 20mm 탄환이 용광로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인간 머리들의 눈이 터졌다. 검은 액체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하지만 용광로는 일어섰다.
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져 있었지만, 나머지 다리로 기어 일어났다. 가슴의 두 번째 입이 벌어졌다. 녹색빛이 강해졌다.
"엄폐!"
쿠우우웅!
방사능 빔이 발사됐다. 건물 하나가 통째로 증발했다. 콘크리트가 플라즈마가 되어 사라졌다.
"2단계 이행! 화염 공격!"
건물 잔해 사이에서 화염방사기병들이 튀어나왔다.
"Für unsere Brüder!"(우리 형제들을 위하여!)
6개 방향에서 동시에 화염이 뿜어졌다. 백린과 네이팜이 섞인 지옥의 불꽃. 온도는 2000도를 넘었다.
용광로가 비명을 질렀다. 세 머리가 동시에 울부짖었다. 종양들이 터지며 녹색 고름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불타는 몸으로 돌진했다. 화염방사기병 하나가 미처 피하지 못했다. 거대한 발에 짓밟혔다. 파워 아머가 깡통처럼 찌그러졌다.
"하인츠!"
동료의 이름을 부르는 절규. 하지만 전투는 계속됐다.
"중화기 투입!"
숨어있던 장갑차 세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포탑이 일제히 용광로를 향했다.
쿠웅! 쿠웅! 쿠웅!
105mm 대전차포가 연속 발사됐다. 용광로의 몸통에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구멍은 즉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종양이 부풀어 오르며 상처를 메웠다.
"재생한다고?" 브륀힐드 박사가 경악했다.
"10년 동안 방사능을 먹었으니까." 토르스텐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거의 불사신이지."
토르스텐이 등에서 무언가를 내렸다.
전투 망치였다. 하지만 평범한 망치가 아니었다.
길이 1.5미터, 머리 부분의 무게만 30킬로그램.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손잡이 끝에는 로켓 추진기가 달려 있었다.
"묠니르의 분노." 그가 망치를 쓰다듬었다. "우리 일족의 보물이지."
"대장님, 위험합니다!"
"가끔은 옛날 방식이 최고야."
그가 파워 아머의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관절에서 증기가 뿜어졌다. 근력 증강 300%.
그리고 달렸다.
140센티미터의 드워프가 15미터의 괴물을 향해.
용광로가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토르스텐이 슬라이딩으로 피했다. 팔이 땅을 때렸다. 크레이터가 생겼다.
일어서며 점프했다.
드워프 특유의 강인한 하체 근육과 파워 아머의 증강이 합쳐졌다. 5미터를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망치를 들어올렸다.
"Baruk Khazâd! Khazâd ai-mênu!"(드워프의 도끼! 드워프는 너희들을 향한다!)
고대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로켓이 점화됐다.
슈우우우웅!
망치가 가속했다. 마하 2를 돌파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중앙 머리가 폭발했다.
두개골이 산산조각 났다. 뇌수와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충격파가 퍼져나가며 주변 건물의 유리창을 모두 깨뜨렸다.
용광로가 흔들렸다.
거대한 몸이 균형을 잃었다. 무릎이 꺾였다.
쿠우우우웅!
50톤의 괴물이 쓰러졌다. 땅이 지진처럼 흔들렸다.
먼지가 가라앉자...
토르스텐이 망치를 어깨에 걸치고 서 있었다. 파워 아머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안면 보호구는 깨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꿋꿋이 서 있었다.
"목표 제거 확인."
담담한 목소리. 마치 일상적인 훈련을 마친 것처럼.
"부상자 확인. 전사자 수습. 10분 후 재집결."
보고가 올라왔다.
"부상자 3명. 전사자... 하인츠 한 명입니다."
토르스텐의 표정이 굳어졌다. 강철 같던 눈가에 무언가 번들거렸다.
"좋은 전사였다. 발할라에서 만나자고 전해라."
폐허가 된 건물 안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112만 명이라..." 토르스텐이 수염을 쓸었다. "우리 함선으로는 1000명이 한계요. 그것도 빽빽이 실어야."
침묵이 흘렀다.
"선택해야 합니다." 닐슨이 말했다 "모두를 살릴 수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선별해야합니다 데카트, 유능한, 그리고 드워프 위주로."
"그게 여기까지 와서 할 선택입니까?" 사라 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숫자로 생명의 가치를 매기는 게?"
"그럼 대안이 있나요?" 라그나가 물었다. "모두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