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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시한부


프레빌 45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0



지하 벙커의 중앙 회의실은 뉴틀란트의 심장부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죽어가는 심장의 마지막 경련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두께 2미터에 달하는 철근 콘크리트 벽은 한때 50메가톤급 핵폭발의 직격탄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이제는 시간이라는 더 잔혹한 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벽면 곳곳에서 석회질이 흘러내려 종유석처럼 굳어 있었고, 그 사이로 검은 곰팡이가 거미줄처럼 퍼져나갔다. 습도는 87%를 넘어섰고, 공기는 마치 썩은 시체의 입 속처럼 축축하고 끈적거렸다.


천장에 매달린 12개의 LED 조명 중 5개는 이미 완전히 죽었고, 3개는 죽음의 경련을 하듯 불규칙하게 깜빡거렸다. 나머지 4개도 정격 출력의 30%밖에 내지 못해, 회의실 전체가 마치 심해처럼 어둑했다. 그 희미한 빛마저도 먼지와 습기로 뿌옇게 흐려져, 사람들의 얼굴에 그로테스크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깜빡일 때마다 그림자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벽면의 얼룩들이 악몽 속 괴물처럼 형태를 바꿨다.


회의 테이블은 그 자체로 절망의 기념비였다. 절멸전쟁 당시 파괴된 T-15 중전차의 장갑판, 무너진 고가도로의 H빔,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신들과 함께 발견된 금속 파편들을 재활용해 만든 것이었다. 표면의 용접 자국은 마치 켈로이드 흉터처럼 울퉁불퉁했고, 군데군데 총탄 자국과 폭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떤 부분은 아직도 검붉은 녹이 슬어 있었는데, 그것이 진짜 녹인지 오래된 피의 흔적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는 더 이상 지도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한때는 군사용 정밀 지형도였을 것이다. 1:25,000 축척의 뉴펀들랜드 전술 지도. 하지만 이제는 땀과 눈물, 피와 화학물질에 절어 원래 색을 잃어버렸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양피지처럼 보였고, 가장자리는 방사능에 피폭되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지도 위에는 붉은 X표시가 37개나 있었다. 각각은 실패한 탐사 루트였고, 더 정확히는 돌아오지 못한 희망의 무덤이었다.


데카트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은 한때 강철처럼 단단했지만, 이제는 영양실조로 뼈마디가 튀어나와 있었고, 비타민 부족으로 손톱은 숟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손등의 정맥은 푸른색이 아니라 검붉은색이었다.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마신 결과였다. 그가 X표시 하나를 지날 때마다, 죽은 자들의 얼굴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스벤 올슨 - A-7 루트. 방사능 폭풍에 휩쓸렸다. 무전으로 들려온 그의 마지막 비명은 아직도 데카트의 귓가에 맴돌았다. 피부가 벗겨지면서 지른 절규는 인간의 목소리라고 믿기 어려웠다.


안나 헤드스트롬 - C-3 루트. 지질학자였던 그녀는 붕괴된 터널에 갇혔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산소 부족으로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더 끔찍한 건 그녀가 탈출하려고 맨손으로 콘크리트를 파내려 했다는 것이었다.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뽑혀 있었고, 뼛조각이 드러날 정도로 살이 닳아 있었다.


라스 닐슨과 그의 팀 - E-9 루트. 12명 전원이 사라졌다. 3주 후 수색대가 발견한 것은 뼈조차 남지 않은 채 내장만 늘어진 잔해들이었다. 무언가가 그들을 산 채로 뜯어먹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뼈와 살은 먹고 내장만 정교하게 남겨놓았다.




회의실의 공기는 납처럼 무거웠다. 아니, 납보다 더 무거웠다. 그것은 112만 명의 절망이 응축된 것이었다. 환기 시스템이 절전 모드로 전환된 후 이산화탄소 농도는 4,000ppm을 넘어섰고, 산소 농도는 18.2%까지 떨어져 있었다. 정상 수치의 21%와는 확연히 달랐다. 고산병 초기 증상과 비슷했다. 두통, 현기증, 그리고 판단력 저하.


숨을 쉴 때마다 폐가 더 많은 공기를 갈구했다. 횡격막이 경련을 일으켰고, 늑간근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리 깊게 들이마셔도 충분하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서 빨대로 숨 쉬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헐떡거렸고, 어떤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도 구원은 없었다. 오직 곰팡이 냄새와 죽음의 공기뿐이었다.


원탁 주위에 앉은 12명의 평의원들은 살아있는 시체들이었다. 아니, 그것은 모욕적인 표현이었다. 시체들에게. 적어도 시체들은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았으니까.


라그나의 얼굴은 잿빛을 넘어 시멘트색이었다. 한때 북유럽 여전사의 전형이었던 그녀의 금발은 이제 볏짚처럼 푸석거렸고, 군데군데 빠져서 두피가 드러나 있었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검은색을 넘어 보라색이었고, 그 안에는 실핏줄이 터져 붉은 점들이 박혀 있었다. 입술은 수분 부족으로 세로로 갈라져 있었고, 틈새마다 검붉은 피가 굳어 있었다. 그녀가 말할 때마다 상처가 벌어졌고, 신선한 피가 흘러나왔다.


페트로프는 더 처참했다. 방사능 피폭 4기. 의학적으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피부는 양피지처럼 얇아져서 혈관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그 혈관 속을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검은 타르 같은 것이었다. 머리카락은 모두 빠졌고, 두피에는 보라색 반점이 지도처럼 퍼져 있었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폐에서 젖은 그르렁 소리가 났다. 폐포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기침할 때마다 나오는 것은 가래가 아니라 폐 조직의 파편이었다.


닐슨, 구나르, 홀름크비스트... 모두가 죽음의 그림자를 얼굴에 짊어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방사능에, 어떤 이는 영양실조에, 어떤 이는 절망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한때 희망을 품었겠지만, 이제는 그저 덜 고통스러운 죽음을 바랄 뿐이었다.




"외부로 나간다고요?"


라그나의 목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아니, 찢는다는 표현도 부족했다. 그것은 폭발이었다. 성대가 찢어질 듯한 굉음이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탁자를 내리쳤다. 


쿠웅!


2.5센티미터 두께의 강철 탁자가 움푹 들어갔다. 용접 부위에서 금속 가루가 떨어졌고, 충격파가 탁자를 타고 전해졌다. 위에 놓인 물컵들이 덜컹거렸다가 쓰러졌다. 컵 안의 물 - 아니, 물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누런 액체가 쏟아졌다. 재활용수 특유의 화학약품 냄새, 염소와 암모니아가 섞인 역겨운 냄새가 퍼졌다. 액체는 탁자 위에서 기름처럼 퍼졌다. 표면 장력이 정상이 아니었다. 너무 많은 화학물질이 섞여 있었다.


"지상은 방사능 지옥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성대가 진동하면서 내는 소리는 마치 녹슨 톱날이 금속을 자르는 것 같았다. 침이 튀었다. 피가 섞인 침이었다. 잇몸에서 나온 피였다. 비타민 C 부족으로 잇몸이 썩어가고 있었다.


"시버트가 아니라 그레이 단위로 측정되는 곳입니다! 이해하십니까? 그레이! 100그레이면 즉사입니다. 10그레이면 1주일 내 장기부전. 1그레이면 암 발병률 100%!"


그녀의 눈이 충혈되었다. 실핏줄이 터지면서 흰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동공은 극도의 분노로 수축되어 있었다.


"1분만 노출되어도 DNA가 산산조각 납니다! 이중나선이 풀려서 스파게티처럼 엉킵니다! 5분이면 내장이 녹아내립니다! 위산이 위벽을 뚫고 나와 복강에 퍼집니다! 간이 액화되고, 신장이 셧다운됩니다! 그리고 뇌는... 뇌는..."


그녀가 말을 멈췄다.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두피에는 탈모로 인한 원형 반점들이 있었다.


"그리고 바다는..."


그녀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30센티미터 두께의 강화유리창. 삼중 적층 구조에 납 코팅까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가끔씩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지나갈 때마다.




창 너머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아니, 완전하지는 않았다. 가끔씩 섬뜩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생물발광이었다. 하지만 자연적인 것과는 달랐다. 


초록색 - 방사능에 오염된 플랑크톤이 내는 병적인 빛.

보라색 - 변이된 해파리의 독소낭이 빛나는 것.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색깔들 - 인간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스펙트럼을 벗어난, 뇌가 처리할 수 없는 파장들.


"해수면은 괴수들의 놀이터입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이 분노인지 공포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2년 전 마지막 정찰대를 기억하십니까? 네프튠-7 잠수정. 최신예 티타늄 합금 선체. 수심 500미터 압력도 견딜 수 있는. 19명의 정예 요원이 탑승했습니다."


그녀가 잠시 멈췄다. 입술을 깨물었다. 또 피가 났다.


"3초였습니다. 단 3초. 무언가가 잠수정을 물었습니다. 아니, 문 게 아닙니다. 씹었습니다. 티타늄 합금을 종이처럼. 블랙박스가 기록한 마지막 순간..."


그녀가 태블릿을 조작했다. 화면에 음파 그래프가 떴다.


"이게 그 순간의 음향 기록입니다."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잠수정 엔진의 윙윙거리는 소리. 그리고...


우지직. 쩍. 콰직.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 하지만 그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비명. 19명의 비명이 하나로 합쳐진, 인간의 성대가 낼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공포의 소리. 그리고 그 비명이 갑자기 끊겼다. 물이 들이닥쳤을 때의 꾸르륵 소리와 함께.


"0.7초 만에 선체 압괴. 1.2초 만에 침수. 3초 만에 완전 분해. 잔해조차 못 찾았습니다."




테카트는 대답 대신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은 노인처럼 굼뜨고 조심스러웠다. 한때 군인이었던 그의 자세는 이제 구부정했고, 관절마다 칼슘 부족으로 인한 관절염이 비명을 질렀다. 일어서는 동작 하나하나가 고통이었다. 척추 디스크는 수분이 빠져 납작해져 있었고, 무릎 연골은 닳아서 뼈끼리 직접 마찰했다. 


뚝. 뚝. 딱.


관절에서 나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에 메아리쳤다.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18걸음. 예전엔 12걸음이면 충분했지만, 이제는 보폭이 줄어들었다. 발을 들 때마다 허벅지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단백질 부족으로 근육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의학적으로는 악액질(cachexia)이라고 불렀다. 몸이 스스로를 분해하여 에너지원으로 삼는 것.


창 앞에 섰다. 


강화유리는 차가웠다. 영하 2도. 바깥 수온과 비슷했다. 유리에 손을 대자 차가움이 뼈까지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봤다.


70미터 심해. 태양광이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밤의 세계. 하지만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생물발광이 있었다.


한때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심해 생물들이 내는 신비로운 빛.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방사능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빛나는 것들이 지나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들. 어떤 것은 실처럼 가늘고 수십 미터나 길었다. 어떤 것은 공처럼 둥글지만 내부에서 맥동하는 장기들이 투명하게 비쳤다. 어떤 것은... 어떤 것은 설명할 수 없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벗어난 형태들. 보는 것만으로도 두통을 일으키는.


그때였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창 앞을 지나갔다.


처음에는 그저 어둠이 더 짙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유유히,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면서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표면은 매끄럽지 않았다. 종양 같은 것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다. 각각의 종양은 스스로 맥동하고 있었고, 어떤 것은 터져서 형광색 고름을 흘리고 있었다. 고름은 물속에서 퍼지면서 작은 빛의 구름을 만들었다.


더 가까이 왔다.


이제 표면의 질감이 보였다. 그것은 피부가 아니었다. 비늘도 아니었다. 그것은... 얼굴들이었다. 수천, 수만 개의 작은 얼굴들이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인간의 얼굴, 동물의 얼굴, 그리고 그 중간의 무언가들. 모든 얼굴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분명했다.


그것이 창에 닿을 듯 가까이 왔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창 전체를 가리고도 남았다. 30미터? 50미터? 더 클지도 몰랐다. 


그리고 눈이 보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표면 곳곳에 불규칙하게 박힌 수백 개의 눈.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탁구공만 했고, 어떤 것은 농구공만 했다. 하지만 모든 눈이 한 곳을 보고 있었다.


안쪽을. 


창 너머의 회의실을.


테카트를.




"4.6일."


테카트의 목소리는 죽은 사람처럼 평평했다. 모든 감정을 짜낸 후 남은 껍데기 같은 목소리. 아니, 감정을 느낄 여력조차 없는 목소리였다.


창밖의 괴물이 천천히 지나갔다. 꼬리인지 촉수인지 모를 것이 창을 스쳤다. 진동이 느껴졌다. 유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110시간 24분." 


그가 정정했다. 숫자에는 감정이 없었다. 냉정한 사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게 우리에게 남은 전부입니다. 정확히는 110시간 23분 47초. 매초가 지날 때마다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집니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을 지을 근육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시간이 지나면..."


그는 말을 멈췄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첫 72시간 - 노약자들이 쓰러지기 시작할 것이다. 심장이 멎거나 폐가 멈출 것이다. 조용한 죽음이 될 것이다.


96시간 - 아이들이 따라갈 것이다. 작은 몸은 기아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 부모들은 자신의 배급량을 나눠주려 하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110시간 - 건강한 성인들도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환각이 시작되고, 폭력이 일어날 것이다. 


그 이후는...


"인육."


누군가 속삭였다. 누가 말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기에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D구역에서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라진다고. 처음에는 미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수색을 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일부 가정의 배급량이 평소보다 오래 간다는 보고가 있었다.


"여기 앉아서 굶어 죽을 겁니까?" 


테카트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도, 절망도, 희망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아니면 밖에서 무언가를 찾을 겁니까?"


대답은 없었다. 할 수 없었다.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닐슨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가죽 가방이었다. 한때는 고급 소가죽이었겠지만, 이제는 곰팡이와 습기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지퍼는 녹슬어 뻑뻑했고, 당기는 데 상당한 힘이 필요했다.


지이익...


지퍼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지도였다. 플라스틱 코팅된 군용 지도. 하지만 그마저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코팅은 벗겨지고, 모서리는 해어지고, 표면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절멸전쟁 이전의 뉴펀들랜드 지도.


그가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파사삭.


종이 끝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방사능에 오염된 종이의 전형적인 증상. 셀룰로오스 분자가 파괴되어 있었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오래된 종이 냄새와 함께 곰팡이 포자가 공중에 퍼졌다. 몇몇이 기침했다. 포자를 들이마시면 폐에서 자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이건..." 


홀름크비스트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한쪽 눈은 백내장으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지만, 다른 쪽은 아직 볼 수 있었다.


"절멸전쟁 이전..."


"맞습니다." 


닐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마그네슘 부족이었다.


"30년 전 지도입니다. 정확히는 32년 7개월 전. 캐나다 지리원에서 발행한 마지막 공식 지도입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더듬었다. 검지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파킨슨병 초기 증상이었다. 도파민 생성 뉴런이 죽어가고 있었다.


"해안선을 보십시오."


모두가 몸을 숙여 지도를 들여다봤다. 


옛 해안선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지도에는 도시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세인트존스 - 인구 21만. 주도이자 최대 도시.

마운트펄 - 인구 2만 3천. 위성도시.

파라다이스 - 아이러니한 이름의 소도시.

콘셉션베이사우스 - 아름다운 해안 마을.


이름만 남은 유령 도시들.


"이 도시들은 모두..."


"물 아래 있거나 방사능 폐허가 되었을 겁니다." 닐슨이 대답했다. "해수면이 12미터 상승했고, 지각 변동으로 섬 자체가 기울었습니다. 동쪽은 가라앉고 서쪽은 솟아올랐죠."


그가 자를 꺼냈다. 


플라스틱 자였지만 열에 녹아 S자로 휘어져 있었다. 눈금도 일부는 지워져 있었다. 그래도 대략적인 측정은 가능했다.


"가장 가까운 육지까지..."


그가 자로 거리를 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매번 조금씩 다른 결과가 나왔다. 자가 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87킬로미터입니다. 오차 범위 ±5킬로미터."


그가 계산기를 꺼냈다. 구식 태양전지 계산기. CASIO fx-260. 한때는 모든 학생이 가지고 있던 모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골동품이었다. 액정 화면에는 죽은 픽셀이 군데군데 있었고, 버튼 중 4, 7, 그리고 = 버튼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는 우회해서 계산했다. 3+1 대신 4를 쓰고, 8-1 대신 7을 썼다. = 대신 두 번째 계산으로 결과를 확인했다.


"잠수정이 아직 작동한다면..."




구나르가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시멘트처럼 건조했다. 수분 부족으로 성대가 제대로 진동하지 않았다.


"네프튠-3가 아직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잠수정입니다."


그가 파일을 뒤적였다. 서류철은 습기로 부풀어 있었고, 종이들이 서로 달라붙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떼어내려 했지만, 일부는 찢어졌다.


"순항 속도 15노트. 최대 속도 22노트. 하지만..."


그가 특정 페이지를 찾았다.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연료 소비량, 배터리 수명, 산소 용량...


"연료가 문제입니다."


그가 손가락으로 특정 숫자를 가리켰다. 7.3리터.


"디젤 7.3리터. 비상분 포함해서 정확히 왕복 1회분입니다. 87킬로미터 왕복이면... 174킬로미터. 연료 소비율을 계산하면..."


그가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스트레스성 발한이었다.


"한 방울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조류를 잘못 타면... 역조를 만나면..."


그는 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 만국 공통의 제스처. 죽음을 의미하는.


"게다가 조류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지각 변동으로 해저 지형이 바뀌었고, 수온 변화로 해류 패턴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10년 전 데이터는 쓸모없고, 새로운 데이터는..."


"없죠." 라그나가 끝맺었다.




"더 큰 문제는 방사능입니다."


구나르가 다른 파일철을 꺼냈다. 이것은 금속 바인더였다. 녹이 슬었지만 아직 열 수 있었다.


철컥.


바인더가 열렸다. 안에는 그래프와 차트들이 있었다. 모두 방사능 측정 데이터였다.


"지상의 방사능 수치는..."


그가 한 장을 들어 올렸다.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아니, 그래프라기보다는 절벽이었다. X축은 시간, Y축은 방사능 수치. 선은 거의 수직으로 올라가 있었다.


"측정 불가입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침을 삼키려 했지만 입 안에 수분이 없었다. 타액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방사능의 영향이었다.


"10년 전 마지막 측정 때..."


그가 숫자를 가리켰다. 12,000.


"시간당 12,000 뢴트겐. 하지만 이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계측기 최대치가 10,000이었는데 바늘이 끝까지 가서 꺾였습니다. 실제로는 더 높았을 겁니다."


그가 다른 차트를 보여줬다. 인체 피폭 영향 도표였다.


그가 차트를 내려놓았다. 종이가 탁자에 닿는 소리가 묘하게 최종적이었다.


"12,000이면..."


"계산할 필요도 없죠." 페트로프가 끼어들었다.




그때 페트로프가 기침을 했다.


켁, 켁, 컥!


마른기침이 아니었다. 젖은 기침. 가래가 끓는 소리가 났다. 그가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늦었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것이 새어 나왔다. 


피였다. 


하지만 보통 피가 아니었다. 너무 검었고, 너무 걸쭉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덩어리들이 있었다. 분홍색의, 스펀지 같은 조직 조각들. 폐포였다. 그의 폐가 스스로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냈다. 한때는 하얀 리넨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수놓은 이니셜이 희미하게 보였다. P.M. 페트르 미하일로비치. 하지만 이제 손수건은 갈색과 검은색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래된 피와 새 피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그가 가래를 뱉었다. 


톡.


무겁고 끈적한 소리였다. 손수건이 더욱 붉어졌다. 그리고 무게가 느껴졌다. 액체가 아니라 반고체였다.


모두가 못 본 척했다.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방사능 피폭 말기. 폐 섬유화가 진행되면서 조직이 떨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의 남은 시간은 며칠이 아니라 몇 시간 단위였다.


"체르노빌에서 배운 게 있습니다."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성대가 손상되어 쇳소리가 났다. 마치 녹슨 경첩이 돌아가는 소리. 기름칠이 필요한 기계 소리.


"방사능은... 켁..."


또 기침이 나왔다. 이번엔 참았다. 피를 삼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이 역겨웠다. 철분 맛, 부패한 고기 맛,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화학약품 맛.


"방사능은 고르지 않습니다."


그가 지도에 손가락을 올렸다. 


손이 끔찍했다. 


손톱은 노랗게 변색되어 있었고, 일부는 검게 죽어 있었다. 손등에는 검은 반점이 레오파드 무늬처럼 퍼져 있었다. 방사선 화상. 피부 아래 모세혈관이 터져서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손가락 관절마다 물집이 있었다. 투명한 액체로 가득 찬, 언제 터질지 모르는.


"바람의 방향, 지형, 건물의 배치에 따라 달라집니다. 폴아웃이 집중되는 핫스팟이 있고..."


그의 손가락이 지도의 특정 지점들을 짚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구역도 있습니다."


"안전하다고요?" 라그나가 비웃었다. "어디가 안전합니까? 시간당 100뢴트겐이 안전합니까?"


"일반인에게는 30분이면 치사량입니다." 페트로프가 인정했다. "하지만 적절한 장비와... 그리고..."


그가 잠시 멈췄다. 숨을 고르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피가 역류하는 것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정말 놀라운 것들이 살아남아 있습니다."




테카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나무가 아니라 금속 의자였지만, 용접 부위가 약해져 있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페트로프가 또 다른 파일을 꺼냈다.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마치 성물을 다루듯이. 파일 표면에는 '극비' 도장이 찍혀 있었지만, 빨간 잉크는 퇴색되어 분홍색이 되어 있었다.


"10년 전, 센서가 이상한 신호를 잡았습니다."


파일을 열었다. 안에는 열감지 프린터로 출력한 자료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희미해져서 읽기 어려웠지만, 아직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북서쪽 37킬로미터 지점."


그의 손가락이 좌표를 가리켰다. 북위 47도 37분 18초, 서경 52도 42분 51초.


"구 세인트존스 시가지 방향입니다. 정확히는 다운타운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주택가였던 곳입니다."


모두가 지도에서 그 지점을 찾았다. 한때 중산층 주거지역이었을 곳. 단독주택들이 늘어서 있었을 곳. 이제는 죽음의 땅.


"무슨 신호였습니까?" 홀름크비스트가 물었다. 그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백내장에 걸리지 않은 눈이 초점을 맞추었다.


"생체 신호였습니다."


페트로프의 대답에 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침묵. 


절대적인 침묵.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 정도의 침묵.


"불가능합니다." 


닐슨이 즉시 반박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과학자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런 방사능 수치에서는 박테리아도 살 수 없습니다. 타르디그레이드조차도. 계측 오류일 겁니다. 센서 고장이거나 우주선의 간섭이거나..."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페트로프가 인정했다. 그가 출력물의 다른 부분을 가리켰다. 파형 그래프였다. 오실로스코프로 기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신호가 규칙적이었습니다."


파형은 정말로 규칙적이었다. 사인파도 아니고, 구형파도 아니었다. 복잡한 패턴이었지만 정확히 반복되고 있었다.


"72초 간격. 정확히 72.0초. 오차 없이."


그가 다른 그래프를 보여줬다. 에너지 스펙트럼 분석이었다.


"그리고 신호의 강도가..."


그가 말을 멈췄다. 다음 말을 하기가 두려운 듯했다. 아니, 믿기지 않는 듯했다.


"얼마나 강했습니까?" 테카트가 재촉했다.


"성인 인간 487명분의 생체 에너지에 해당합니다."


침묵.


"하나의 개체에서요." 페트로프가 덧붙였다.


### 괴물의 증거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 납처럼 무거운 침묵. 공기 중의 산소마저 무게를 가진 것 같은 침묵.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똑.


파이프 이음새에서 새는 물이었다. 녹물인지 방사능 오염수인지 알 수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웅덩이 표면에 무지개빛 유막이 떠 있었다. 기름이 아니었다. 방사성 물질이 만들어내는 체렌코프 복사의 흔적이었다.


"괴물." 


라그나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방사능이 만든 괴물. 네크로모프. 텀블러. 글로잉 원..."


옛 도시 전설들의 이름이었다. 핵전쟁 후 나타난다는 돌연변이 괴물들. 한때는 그저 공포 영화의 소재였지만, 이제는...


"혹은..."


페트로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희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생존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적응한... 진화한..."


그때 구나르가 끼어들었다.


"더 이상한 보고도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는 태블릿을 조작했다. 구형 아이패드였다. 화면에는 금이 가 있었고, 터치가 제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배터리 경고가 떴다. 10%. 충전할 곳은 없었다. 전력 배급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화면 밝기를 최소로 줄였다. 그러자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3개월 전, 자동 관측 장비가 포착한 영상입니다."



화면에 영상이 떴다.


흑백이었다. 저조도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것이었다. 해상도는 480p도 안 되었다. 게다가 압축 손실로 블록 노이즈가 심했다.


처음 몇 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보라 같은 노이즈뿐이었다. 방사능이 CCD 센서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무작위로 픽셀들이 밝게 빛났다가 사라졌다.


"여기입니다."


구나르가 화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화면에 닿자 정전기가 일어났다. 


파직.


작은 불꽃이 튀었다. 공기가 너무 건조했다. 습도는 높은데 정전기가 이는 모순. 이온화된 공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그림자인 줄 알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건물 잔해의 그림자. 하지만 바람과는 상관없이 움직였다.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확대해보겠습니다."


구나르가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벌렸다. 핀치 줌. 하지만 터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여러 번 시도해야 했다.


영상이 확대되었다. 픽셀이 깨지면서 더욱 흐릿해졌다. 하지만 형체는 조금 더 분명해졌다.


그것은...


행렬이었다.


"맙소사..." 


라그나가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폐로 들어가면서 기침이 나왔다.


화면 속에서 무언가들이 줄을 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두 발로 걷는 것들이었다. 인간형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었다.


비율이 이상했다. 팔이 너무 길었다. 무릎까지 내려왔다. 아니, 무릎 아래까지. 그리고 다리는... 다리는 역관절로 꺾여 있었다. 마치 새의 다리처럼. 하지만 새보다 훨씬 두꺼웠다.


그리고 크기가...


"저 옆의 건물과 비교하면..."


닐슨이 빠르게 계산했다. 그의 뇌는 아직 작동했다. 수학적 사고는 마지막까지 남는 능력이었다.


"표준 규격 차고 문이 2.1미터... 저 생물체는... 최소 3미터입니다. 어쩌면 4미터..."


카메라 각도 때문에 정확한 측정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인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운반하고 있었다.


커다란 것을. 


여럿이 함께 들고 있었다. 앞에 넷, 뒤에 넷. 마치 관을 운구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맥동하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마치 거대한 심장처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형태가 변했다. 부풀어 올랐다가 쪼그라들었다가.


그리고 그 표면에는...


"확대할 수 있습니까?" 홀름크비스트가 물었다.


"이게 최대입니다." 구나르가 답했다. "더 확대하면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봤다. 


그 표면에 무언가 붙어있는 것을. 작고, 꿈틀거리는 것들을. 마치... 마치...


"유충." 페트로프가 말했다. "아니면 촉수. 아니면..."


그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배터리가 7%로 떨어졌다는 경고가 떴다.


"그 후로 카메라가 작동을 멈췄습니다." 구나르가 설명했다. "방사능 때문인지, 아니면..."


그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아니면 그것들이 카메라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위치는?" 테카트가 물었다.


"북서쪽 42킬로미터." 구나르가 지도에 표시했다. "페트로프가 말한 생체 신호 발견 지점에서 불과 5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또 다른 침묵.


이번에는 홀름크비스트가 깨뜨렸다.


"정리하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법정에서처럼 차분했다. 한때 그녀는 뉴틀란트 최고의 검사였다. 지금은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갇혀 있지만, 그녀의 논리적 사고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휠체어를 조금 앞으로 밀었다. 


끼익. 끼이익.


바퀴에서 나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기름칠을 한 지 2년이 넘었다. 기계유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식용유로 대체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귀했다.


"우리에게는 4.6일분의 식량이 있습니다."


그녀가 손가락을 펴며 하나씩 꼽았다.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구부러진 손가락들이 갈고리처럼 보였다.


"112만 명이 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일일 500칼로리로 계산해도 1인당 쌀 한 줌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녀가 두 번째 손가락을 폈다. 아니, 펴려고 했다.


"대안은 두 가지. 여기서 굶어 죽거나,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찾거나."


세 번째 손가락.


"밖은 방사능 지옥입니다. 시간당 12,000뢴트겐 이상. 즉사 수준의 10배가 넘는 방사능."


네 번째.


"그런데 거기에 무언가 살아있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 크기의 500배에 달하는 생체 신호를 내는 무언가가."


다섯 번째.


"그리고 3미터가 넘는 인간형 생명체들이 집단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운반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입니다."


그녀가 멈췄다. 


구부러진 손가락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모두를 둘러봤다. 한 명 한 명의 눈을 들여다봤다. 피하는 사람도 있었고, 마주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나가시겠습니까?"


대답은 없었다.


할 수 없었다.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테카트가 천천히 일어섰다.


이번에는 더욱 힘들어 보였다.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팔이 떨렸다. 근육이 체중을 지탱하기 버거워했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콘크리트 바닥에 금속 다리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끽. 끽. 끼이익.


듣기 거북한 소리였다. 마치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 같았다.


그가 완전히 일어섰다. 


한때 185센티미터였던 그의 키는 이제 175센티미터 정도로 줄어 있었다. 척추가 압박되고, 디스크가 납작해진 결과였다. 어깨는 구부정했고, 목은 거북목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아니, 살아있다기보다는 타오르고 있었다. 최후의 불꽃처럼. 촛불이 꺼지기 직전 가장 밝게 타오르듯이.


"탐사대를 조직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결연함이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목소리. 아니, 이미 죽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자원자만 받겠습니다."


그가 잠시 멈췄다.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건조해서 삼키기 힘들었다.


"강제는 없습니다. 그것이... 그것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품위입니다."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수첩이었다. 가죽 표지는 닳아서 반들반들했고, 모서리는 해어져 있었다. 그가 수첩을 펼쳤다. 안에는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죽은 자들의 이름이었다.


"가족에게는 추가 배급을... 아니."


그가 스스로를 정정했다. 쓴웃음이 그의 입가에 맴돌았다.


"추가 배급할 식량이 없군요."


침묵.


"그렇다면... 명예라도 드리겠습니다."


그가 수첩을 들어 보였다.


"이름을 기록하겠습니다. 이 수첩에. 그리고 언젠가... 언젠가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인류가 다시 일어선다면, 가장 먼저 세울 기념비에 이 이름들을 새기겠습니다."


"죽으러 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새기자는 겁니까?" 


라그나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쓴웃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해도 있었다.


"희망을 찾으러 가는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테카트가 정정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같은 말이라는 것을.




"장비는?" 페트로프가 물었다. 


실질적인 질문이었다. 아무리 용기가 있어도 장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구나르가 다른 파일을 꺼냈다. 재고 목록이었다. 


종이는 습기를 머금어 울었다. 잉크가 번져서 일부 숫자는 읽기 힘들었다. 그는 돋보기를 꺼냈다. 렌즈에 금이 가 있었지만 아직 쓸 수 있었다.


"방호복 17벌."


그가 읽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건조하고 사무적이었다.


"온전한 것은 9벌입니다. 나머지는..."


그가 세부 사항을 읽었다.


"3벌은 몸통 부분에 찢어진 곳이 있습니다. 테이프로 땜질했지만 완벽하지 않습니다. 2벌은 지퍼가 고장났습니다. 벨크로로 대체했지만 밀폐가 되지 않습니다. 3벌은... 3벌은 이전 사용자의 피가 아직 묻어 있습니다. 세척이 불가능했습니다."


그가 페이지를 넘겼다. 종이가 찢어질 듯 바스락거렸다.


"가이거 계수기 11대. 작동하는 것은 7대."


그가 주석을 읽었다.


"3대는 베타선만 감지합니다. 감마선 센서가 고장났습니다. 2대는 수치가 정확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교정이 5년 전이었고, 그 후로 30% 정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대는... 비교적 정상입니다."


또 페이지를 넘겼다.


"산소통 34개. 완충된 것은 19개."


그가 계산했다.


"1인당 4시간 사용 기준입니다. 하지만 격렬한 활동을 하면 2시간으로 줄어듭니다. 재충전 장비는..."


그가 한숨을 쉬었다.


"3년 전 C-7 구역 화재 때 녹아버렸습니다."




"무기는?" 라그나가 물었다.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으로 갔다. 한때 권총을 차고 있던 곳이었다. 이제는 빈 홀스터만 남아 있었다.


"자동화기 12정."


구나르가 무기 목록을 읽었다.


"AK-47 구형 6정. 탄약은 정당 평균 47발. 30발들이 탄창 하나하고 낱발 17발입니다. M16 3정, 탄약 32발. G36 2정, 탄약 60발. 그리고... MP5 1정, 탄약 없음."


그가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화염방사기 2대. 연료는 3분 사용분. 정확히는 2분 47초."


"폭약은?" 닐슨이 물었다.


"없습니다." 구나르가 단호하게 답했다. "C-4, TNT, 심지어 수제 폭탄 재료까지. 모두 C-7 폭파에 사용했습니다. 남은 건... 신호탄 7발뿐입니다."




"그럼 총 몇 명이나 보낼 수 있습니까?" 닐슨이 물었다.


구나르가 빠르게 계산했다.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춘다면... 9명입니다."


그가 설명했다.


"방호복 9벌, 각자 산소통 2개씩 18개, 여분 1개. 가이거 계수기는 2명당 1개씩. 무기는..."


그가 잠시 멈췄다.


"선택해야 합니다. 전원 무장시킬 것인지, 아니면 일부만 무장시킬 것인지."


"일부 장비를 포기한다면?" 테카트가 물었다.


"15명에서 20명까지는 가능합니다." 구나르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그러면 생존 확률은 더 떨어집니다. 방호복 없이 나가는 사람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자살 특공대군요." 라그나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테카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망적인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때였다.


환기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드르륵... 탁!


처음에는 환기 팬이 고장 난 줄 알았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베어링이 마모되어 덜컹거리다가 멈추곤 했다.


하지만 소리는 계속되었다.


드르륵... 드드륵... 탁! 탁!


리듬이 있었다. 기계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유기적인 소리였다.


모두가 위를 올려다봤다.


천장의 환기구 그릴. 30센티미터 사각형의 금속 격자. 나사 4개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하나는 이미 빠져 있었다. 녹이 슬어서.


그릴 사이로 뭔가 보였다.


검은 것이었다. 움직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먼지 덩어리인 줄 알았다. 환기 덕트에는 먼지가 쌓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먼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었다.


"뭐지?" 닐슨이 물었다.


대답은 금방 왔다.


그것이 그릴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쥐였다.


하지만 보통 쥐가 아니었다.




털이 없었다. 


완전히 빠진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뭉텅이로 남아 있었다. 마치 심한 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드러난 피부는 분홍빛이 아니라 회색이었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종기 같은 것들이 돋아 있었다. 어떤 것은 터져서 노란 고름을 흘리고 있었다.


눈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백내장이 아니었다. 홍채와 동공의 구분이 사라진, 완전히 하얀 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보고 있었다. 회의실을. 사람들을.


그리고 크기가...


고양이만 했다. 아니, 작은 개만 했다. 일반 쥐의 10배는 되어 보였다.


쥐가 그릴 사이로 몸을 비집고 나왔다. 금속 격자가 휘어졌다. 녹슨 금속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


이빨이 보였다.


세 줄로 난 이빨이었다.


상어처럼. 아니, 상어보다 더 끔찍했다. 이빨이 앞뒤로만이 아니라 옆으로도 나 있었다. 그리고 각 이빨은... 회전하고 있었다.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히. 마치 전기톱의 날처럼.


"변이체다!"


라그나가 외쳤다.




그녀의 반응은 본능적이었다.


수십 년의 군사 훈련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의식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허리춤의 홀스터에 손이 갔다. 비어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부츠에 숨겨둔 예비 권총. 구형 마카로프 PM. 9발들이 탄창에 7발이 남아 있었다.


뽑고, 조준하고, 쏘는 동작이 1초도 안 걸렸다.


탕!


총성이 울렸다.


밀폐된 공간에서의 총성은 귀청을 찢었다. 음압이 고막을 때렸다. 몇몇은 귀를 막았지만 늦었다. 이명이 시작되었다.


총알은 정확히 쥐의 머리를 맞췄다.


그리고...


쥐가 터졌다.


말 그대로 폭발했다.


피와 내장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그것은 붉은 피가 아니었다. 형광 초록색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체액이 아니었다.


산성이었다.


치익!


액체가 탁자에 떨어지자마자 금속이 녹기 시작했다. 2.5센티미터 두께의 강철이 종이처럼 녹아내렸다.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으로 아래층이 보였다.


"산성이다! 피하라!"


데카트가 외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튄 체액이 곳곳에 떨어졌다. 의자가 녹고, 벽이 녹고, 바닥이 녹았다.


그리고...


"아악!"


페트로프의 비명이었다. 체액 한 방울이 그의 왼쪽 어깨에 떨어졌다. 옷감이 즉시 녹아내렸다. 그 다음은 피부였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이 녹았다. 뼈가 드러났다. 그것도 녹기 시작했다.


"방독면! 방독면을 쓰라!"


닐슨이 외쳤다.


초록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성 체액이 기화하면서 생긴 것이었다.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와 썩은 계란 냄새가 섞인 악취였다. 그보다 더한 것은... 그것을 들이마시면 폐가 녹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독면은 없었다. 


회의실에는 없었다. 가장 가까운 비상용품함은 복도 끝에 있었다. 30미터 떨어진 곳에.


모두가 입과 코를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연기는 손가락 사이로, 옷감 사이로 스며들었다.


기침이 시작되었다.


"켁! 켁!"


"나가! 모두 나가!"


테카트가 명령했다.


하지만 문은 하나뿐이었다. 폭 1.2미터의 방화문. 한 번에 한 명씩밖에 나갈 수 없었다.


밀치고, 넘어지고, 짓밟히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홀름크비스트의 휠체어가 문턱에 걸렸다. 앞바퀴가 5센티미터 높이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비켜! 비켜!"


"못 움직여요!"


라그나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휠체어째로. 7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였지만, 아드레날린이 분비된 상태에서는 가능했다.




복도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천장 곳곳에서 드르륵 소리가 났다. 환기 덕트를 따라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발톱이 금속을 긁는 소리였다.


"이런..."


테카트가 중얼거렸다.


환기구 그릴 하나가 떨어졌다.


쨍그랑!


금속이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쥐가 쏟아져 나왔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두 마리, 세 마리, 열 마리...


셀 수 없었다. 검은 파도처럼 쏟아져 내렸다. 각각은 고양이만 한 크기였고, 모두가 그 끔찍한 세 줄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뛰어!"


테카트가 외쳤다.


더 이상의 명령은 필요 없었다.


모두가 뛰었다.


복도는 길고 좁았다. 폭 2미터, 길이 50미터. 양쪽 벽에는 문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잠겨 있었다. 전력 절약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구역은 봉쇄했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발톱이 콘크리트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탁탁탁탁탁!


수백 개의 발톱이 만들어내는 타악기 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들리는 치찰음. 이빨이 회전하는 소리였다.


앞서 뛰던 페트로프가 비틀거렸다. 왼쪽 어깨의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산으로 녹은 상처는 지혈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그가 넘어졌다.


"페트로프!!"


닐슨이 멈춰 서려 했지만, 테카트가 그의 팔을 잡았다.


"안 돼! 계속 뛰어!"


페트로프가 뒤를 돌아봤다. 그의 눈에는 공포가 아니라 체념이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제 끝이라는 것을.


"가세요!"


그가 외쳤다. 그리고 남은 힘을 다해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벽을 향해 걸었다. 벽에는 소화전이 있었다. 그는 유리를 깨고 소화기를 꺼냈다.


쉬이이익!


소화기를 분사했다. 하얀 분말이 복도를 가득 메웠다. 쥐들의 진격이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정말 잠시뿐이었다.


쥐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비명이 들렸다. 인간의 목소리라고 믿기 힘든 비명이었다. 그리고 그 비명은 곧 끊어졌다. 젖은 씹는 소리로 바뀌었다.




복도 끝이 보였다.


비상 격벽이었다. 50센티미터 두께의 강철 문. 핵전쟁 시 구역을 봉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테카트가 제어판에 도달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손가락이 떨려서 두 번이나 틀렸다.


"빨리!"


라그나가 외쳤다. 그녀는 마카로프의 남은 탄환을 쏘고 있었다. 


탕! 탕! 탕!


총알이 쥐들을 맞췄다. 터지면서 산성 체액이 튀었다. 하지만 쥐들은 너무 많았다. 하나가 죽으면 열 마리가 그 자리를 메웠다.


철컥!


마침내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테카트가 레버를 당겼다. 유압 장치가 작동하면서 거대한 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우우웅...


문은 천천히 닫혔다. 너무 천천히.


틈이 점점 좁아졌다. 1미터... 50센티미터... 30센티미터...


마지막 사람이 간신히 통과했다.


20센티미터...


쥐 한 마리가 틈으로 뛰어들었다.


10센티미터...


라그나의 부츠가 쥐의 머리를 짓밟았다. 


퍽!


초록색 체액이 튀었다. 부츠 밑창이 지글거리며 녹았다.


5센티미터...


쿵!


문이 완전히 닫혔다.




모두가 헐떡이고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었고, 벽에 기댄 사람도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폐가 불타는 것 같았다.


문 반대편에서 쿵쿵 소리가 났다. 쥐들이 문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리고 긁는 소리. 갉아먹는 소리.


끼이익... 끼익...


금속을 갉는 소리였다. 50센티미터 두께의 강철도 언젠가는 뚫릴 것이었다.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이래서..."


테카트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의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심장 박동이 분당 180회를 넘었다. 심방세동 직전이었다.


"이래서 더더욱 나가야 합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둘러봤다. 


11명이 있었다. 페트로프가 없었다. 그는 복도에 남았다. 아니, 남은 것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모두 창백했지만,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죽음을 눈앞에서 본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여기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환기구가 있었다. 아직은 조용했지만, 언제 또 무언가가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어디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뉴틀란트는 더 이상 요새가 아니었다. 무덤이었다.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무덤.




"1시간 후 대강당에서 자원자를 모집하겠습니다."


테카트가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단호했다.


"방송 시스템이 아직 작동한다면 말입니다."


그가 벽에 있는 인터콤을 확인했다. 빨간 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전력 부족 경고였다. 하지만 아직은 작동했다.


"그때까지 각자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말을 이었다.


"강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잠시 멈췄다.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가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우리 모두는..."


그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끝낼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4.6일 후.


아니, 이제는 4.5일 후.


식량이 떨어지면, 그때는...


천장에서 또 드르륵 소리가 났다.


더 가까워졌다.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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