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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금기


프레빌 34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0

에녹은 더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


사흘째 이어진 불면이 그의 육체를 침식했으나, 역설적으로 그의 정신은 수정처럼 투명해져 있었다. 눈 아래 새겨진 검은 초승달은 단순한 피로의 흔적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자가 치르는 대가였다. 창백한 피부 위로 드리운 그림자는 죽음을 닮았으되, 그 안에서 타오르는 의식의 불꽃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했다.


작업실의 공기는 양초 연기와 양피지 냄새, 그리고 며칠간 씻지 못한 소년의 체취로 무거웠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선반에는 수정 조각들이 저마다 다른 각도로 빛을 굴절시키며 무지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광학 현상이었으나, 불면에 시달리는 소년의 눈에는 마치 다른 차원의 메시지처럼 보였다.


형광액이 담긴 병을 들어 올리는 그의 손이 떨렸다. 처음에는 미세한 진동이었으나, 점차 그 떨림은 증폭되어 갔다. 신경계가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근육 섬유 하나하나가 제각각의 리듬으로 수축하며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통제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이 왔다.


양피지가 젖어들었다.


검은 잉크로 그려진 수정 배열 도문이 형광액과 만나는 순간, 시공간의 법칙에 균열이 생겼다.

두 물질의 경계면에서 일어난 것은 화학 반응을 넘어선 현상이었다. 잉크의 탄소 분자와 형광액의 인광 성분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양피지 위의 기하학적 문양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각의 선은 뱀처럼 꿈틀거렸고, 교차점마다 미세한 전기가 흘렀다. 아니, 전기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근원적인 에너지였다.


"형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여덟 살 아벨의 절규가 작업실의 정적을 갈랐다. 그의 어린 영혼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것은 인간이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라는 것을. 벽에 등을 붙인 채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은 태초의 인간이 신의 현현 앞에서 느꼈을 두려움을 재현하고 있었다.

에녹 역시 뒤로 물러섰으나, 그의 시선은 현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과학자의 호기심이 원시적 공포를 압도하고 있었다. 작업대 위의 수정 조각이 중력의 속박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축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했고, 각 면이 빛과 만날 때마다 인간의 가시광선 영역을 벗어난 색채들이 공간에 흩뿌려졌다. 그것은 신의 팔레트에서 훔쳐낸 색들이었다.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야!"


에녹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성과 광기 사이에서 균형을 잃은 줄타기꾼처럼, 그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본능이 그를 양피지로부터 멀리 밀어내려 했으나, 호기심이 그를 다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운명적인 선택을 했다.

손가락이 문양의 가장자리에 닿는 순간, 천 개의 번개가 동시에 그의 신경계를 관통했다.

"으아악!"


비명과 함께 쓰러진 그의 팔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손바닥에 새겨진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문신처럼, 그것은 맥동했고, 그 리듬은 서서히 그의 심장박동과 하나가 되어갔다. 빛의 언어가 혈관을 타고 흐르며 그의 존재 자체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벤야민님! 벤야민님!!"


아벨의 울부짖음이 복도를 타고 퍼져나갔다. 늙은 건축가 벤야민이 허둥지둥 달려왔다가 문지방에서 얼어붙었다. 수십 년간 성전 건축에 종사했던 그였으나, 이런 광경은 난생처음이었다.아벨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늙은 건축가가 달려왔다가 문지방에서 얼어붙었다.


"맙소사, 이건 대체."


벤야민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수십 년간 성전에서 일했지만, 이런 현상은 본 적이 없었다.


"이건....! 아니 그럴 리 없어. 우리가 어떻게 그런 걸 만들 수 있겠어."


"꺼야 해! 당장 꺼야 해!"


아벨이 흐느꼈다. 하지만 아무도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랐다. 조각은 계속 회전했고, 문양은 더욱 밝게 빛났다.


그때였다.


문이 경첩을 비명 지르게 하며 열렸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폭풍처럼 들이닥쳤다. 천 년의 무게를 짊어진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평정심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절박함이 드러났다.


"모두 침묵하라!"


그의 명령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권능이었다. 세 인간은 즉시 입을 다물었고, 심지어 공기조차 그의 권위에 복종하여 정지한 듯했다. 여호수아가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가 입고 있던 대제사장의 에봇을 벗어 양피지를 덮는 순간, 빛이 마치 길들여진 짐승처럼 순순히 사그라들었다. 공중에 떠 있던 수정 조각이 중력의 품으로 돌아와 바닥에 떨어졌다.


"너희가 본 것은 환상이었다. 이해했는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으나, 그 안에는 천둥 같은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대제사장님, 방금 일어난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벤야민이 용기를 내어 물었으나, 여호수아의 눈빛이 그를 침묵시켰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여호수아가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말아 품에 넣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래 기다려온 무언가가 마침내 시작되었다는 전율이었다.


"에녹, 네가 한 일이 무엇인지 너는 모른다. 그리고 계속 모르는 것이 좋다. 적어도 지금은."


---



여호수아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을 때, 그는 놀라지 않았다.

우리엘이 거기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파괴의 천사는 항상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나타났다. 마치 혼돈의 냄새를 맡는 하이에나처럼, 변화의 징조를 포착하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급하게 움직였군."


우리엘의 목소리는 물처럼 중립적이었다. 감정의 파도 하나 없는 고요한 호수 같았으나, 그 깊은 곳에는 측량할 수 없는 심연이 숨어 있었다.


"필요한 일이었다."


여호수아도 같은 온도로 대답했다. 두 천사는 서로를 직접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의 교차는 너무 많은 진실을 드러낼 위험이 있었다. 대신 그들은 창문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통해 대화했다. 거울 속의 대화는 직접적인 대면보다 더 많은 것을 숨길 수 있었다.


"인간 소년이 만든 것인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우리엘이 이미 알고 있다는 신호. 하지만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


"보여줄 건가?"


"보여줘야 할 이유가 있나?"


두 존재가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대화했다. 우리엘은 여전히 창밖을, 여호수아는 벽의 성화를 보고 있었다. 직접적인 시선 교환은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낼 위험이 있었다.


"우리의 약속을 잊었나?"


"잊지 않았다. 한 달이 남았지."


"그럼 볼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다만?"


여호수아가 한숨을 쉬며 천천히 양피지를 꺼냈다. 하지만 펼치지는 않았다. 접힌 채로 손에 들고 있을 뿐이었다.


"예상보다 빠르다. 소년이 우연히 발견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정확한 조합을 찾았다."


"우연." 우리엘이 그 단어를 음미했다. "여전히 우연을 믿나? 십 년째 야훼의 침묵을 견딘 자가?"


"그럼 섭리라고 해야 할까?"


"섭리." 이번에는 우리엘이 웃었다. 건조한 웃음이었다. "누구의 섭리? 침묵하는 야훼의? 아니면 언약궤에 숨어있는 그것의?"


여호수아가 처음으로 우리엘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내가 알 것 같나?" 우리엘도 여호수아를 향해 돌아섰다. "너도 모르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겠나? 다만 추측할 뿐이지."


"어떤 추측?"


"말해서 뭐하겠나. 어차피 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두 천사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천 년의 시간이 응축된 시선이 교차했다.


---


"소년이 경계를 넘었나?"


"어떤 경계를 말하는 건가?"


"일곱 개의 문 중 하나."


여호수아가 미세하게 긴장했다. 우리엘이 성법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은 처음이었다.


"두 번째 문이 열렸다고 봐야겠지."


"두 번째 문, 부양의 문." 우리엘이 그 의미를 되새겼다. 


"둘째 날, 궁창이 물을 가르던 날. 하늘과 땅 사이의 경계가 만들어진 날. 그 권능을 소년이 재현했다는 것인가?"


"재현이 아니라 모방이다. 그것도 불완전한."


"불완전하다 해도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로마의 찬탈자가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흥미롭군, 찬탈자가 이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여호수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로마의 일을 언급하는 이유가?"


"언급하면 안 되나? 절멸전쟁 이후 우리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그 일을?"


두 천사는 창문에 비친 서로의 모습을 통해 대화했다.


"교황이 가진 것은 이미 그의 것이 되었다."


"'천국의 열쇠'를 그의 것이라고?" 우리엘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경멸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 "베드로에게 주어진 것을 후계자가 물려받는 것과, 찬탈하여 감추는 것은 다른 문제 아닌가?"


"그것이 일곱 번째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을까?"


"알든 모르든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그가 가지고 있고, 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지."


"그래서 인간 소년이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이 흥미로운가?"


"흥미롭다기보단,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위험?" 우리엘이 웃었다. "바티칸이 우리를 배신한 순간부터 이미 모든 것이 위험해졌어. 그들이 절멸전쟁에서 어느 편에 섰는지 잊었나?"


"잊지 않았다."


"그런데도 침묵하고 있었군. 십 년째."


"야훼께서 침묵하시니 우리도 침묵할 뿐이다."


"야훼의 침묵과 우리의 무기력을 혼동하지 마라. 미련한 '정의'는 생각이 다를지도 몰라도 침묵이 항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우리엘이 한 걸음 다가왔다. 열기가 따라왔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시험하는 것에 가까웠다.


"미카엘과 레미엘의 갈등이 임계점에 도달했다. 인간들의 계략이 예상보다 잘 작동하고 있어."


화제의 전환은 급작스러웠으나, 여호수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우리엘의 대화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인간들의 계략을 알고 있었나?"


우리엘이 창가로 다시 돌아섰다. 방사능 폭풍이 만들어낸 녹색 번개가 그녀의 윤곽을 불길하게 비추었다.


"당연하지.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내가 둔하다고 생각했나?" 우리엘이 웃었다. "오히려 잘됐어. 그들이 알아서 판을 흔들어주니 우리는 그 혼란을 이용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산헤드린의 대천사라는 자가 너무 멋대로인거 아닌가? 통제에서 벗어난다면..."


"통제?" 우리엘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것은 폐허 위에 내리는 잿빛 눈처럼 차가운 웃음이었다. "이미 모든 것이 통제를 벗어났다. 야훼의 침묵, 절멸전쟁의 상처, 외부 세력들의 부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대한 붕괴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뿐이다."


우리엘이 다시 창가로 돌아갔다. 그녀의 네 개의 팔이 각각 다른 신호를 만들고 있었다. 고대 천사들의 수화였지만, 일부러 불완전하게 만들어 의미를 알 수 없게 했다.


"다음 산헤드린 회의에서 폭발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 우리엘이 고개를 돌렸다. "우리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일시적 동맹이라고 정정하지."


"그것도 너무 강한 표현 아닌가? 나는 그저 각자의 이익이 잠시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


두 천사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방사능 폭풍이 더욱 거세게 창문을 두드렸고, 녹색 섬광이 실내를 간헐적으로 비추었다. 그때마다 두 천사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여호수아가 양피지를 다시 품에 넣었다.


"그 평행선은 언제까지 유지할건가?"


"필요한 만큼."


"누구에게 필요한 만큼?"


"살아남는 자에게."


두 천사가 다시 침묵했다. 방사능 폭풍이 창문을 때렸다. 녹색 번개가 실내를 비췄을 때, 두 천사의 그림자가 일그러졌다. 


"소년의 발명품을 계속 발전시켜라." 우리엘이 마침내 말했다. "될수있다면 빠르게, 즉시전력감으로."


"구체적인 지시를 주는군."


"조언이라고 생각해라."


"조언은 보통 이유가 있지."


"이유를 꼭 알아야 하나?"


"신뢰의 문제랄까."


"신뢰?" 우리엘이 다시 웃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이 있었나?"


여호수아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없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거다."


"그럼 왜 협력하지?"


"적의 적은 잠시나마 동료가 될 수 있으니까."


"누가 적인가?"


"말하지 않겠네. 그것을 말로 하는 순간, 진짜 적이 되는 법니깐."


우리엘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떠나기 직전, 그녀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가브리엘이 무언가를 봤다고 한다."


"무엇을?"


"물어보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두려운 건가?"


"아니. 재미없을 것 같아서."


문이 닫혔다. 여호수아는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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