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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의 초상, 첫 발걸음


프레빌 35주 전 잡담 | 반응 : 중립적 | 댓글 6

성전 밖으로 나온 다니엘의 다리가 무너졌다.


붉은 피가 대리석 계단 위에 꽃처럼 번지고 있었다. 매 심장박동마다 새어 나오는 생명의 잔액이 그의 한계를 선고했다. 부러진 늑골이 폐를 찌를 때마다 내뱉는 숨에는 쇳내가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살아서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기적이었으므로.


"버텨라, 다니엘."


사울이 그를 부축하며 속삭였다. 군단장의 갑옷은 우리엘의 열기에 반쯤 녹아내려 있었고, 그 틈새로 보이는 살갗에는 2도 화상이 물집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팔은 흔들리지 않았다. 전사의 의무가 고통을 삼키게 했다.


미리암이 떨리는 손으로 의료 가방을 열었다. 남은 모르핀은 단 세 앰플. 붕대는 이미 누런색으로 변색되어 있었고, 소독약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그녀는 마지막 앰플을 다니엘의 팔에 주입했다.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안도와 절망 사이에서 흔들렸다.


"십사만 사천."


야곱이 중얼거렸다. 상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이 시작되고 있었다. 현재 예루살렘 생존자 18만. 의식 이후 살아남을 확률을 낙관적으로 잡아도 70퍼센트.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채울 것인가. 외부에서 끌어와야 하는가. 아니면 자연스러운 도태를 기다려야 하는가.


"우리가 무슨 계약을 한 거지?"


바라바의 목소리에는 후회가 묻어 있었다. 한때 창녀였던 그녀는 거래의 이면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모든 계약에는 보이지 않는 대가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대가는 항상 예상보다 컸다.


예루살렘의 저녁 하늘이 그들 위에 드리워졌다. 방사능 구름 사이로 비치는 석양은 피처럼 붉었다. 아니, 그것은 피였다. 하늘이 흘리는 영원한 출혈. 멀리서 들려오는 포효는 오염생물들의 저녁 인사였다. 성벽 너머 어둠 속에서 형광빛 눈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내일 새벽 정찰이 있다."


사울이 임무를 상기시켰다.


"북쪽 폐허에서 아직도 신호가 오고 있어. 생존자일 수도, 함정일 수도 있지. 자원자가 필요해."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자원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공허한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다만 누가 먼저 죽을 것인가의 순서만 있을 뿐.


그때였다.


성전 꼭대기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청동종의 울림이 아니었다. 영혼의 울림, 순수하고 신성한. 그러나 계약을 맺은 인간들의 귀에도 희미하게 그 진동이 전해졌다. 뼈를 통해, 영혼을 통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시작되는군."


다니엘이 피거품과 함께 내뱉었다.


"무엇이?"


"알 수 없어. 하지만..."


그의 눈이 지성소를 향했다.


"뭔가 깨어나고 있어."


---


지성소의 가장 깊은 곳, 빛조차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절대적 어둠의 영역에서 여호수아는 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둠이 그를 마치 어머니의 자궁처럼 감싸 안았고, 그 품은 따뜻하면서도 차가웠으며,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웠다. 촛불조차 없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 그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갔고, 육신과 영혼의 경계가 물처럼 흐릿해졌다.


그러나 그는 볼 수 있었다. 십 년이라는 세월이 그에게 준 선물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는 능력, 어둠 속에서도 보는 눈. 그것은 육안이 아니라 영안이었고, 빛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새로운 감각이었다.

언약궤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 떨림은 너무나 미묘해서 다른 이는 결코 느끼지 못할 진동이었다. 하지만 매일 이곳에서 기도하며 언약궤와 호흡을 맞춰온 그는 알았다. 무언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천 년의 침묵이 마침내 깨어지려 한다는 것을.


케루빔의 황금 날개 사이, 속죄소 위의 공간이 마치 물결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빛도 어둠도 아닌, 존재와 무존재 사이를 떠도는 무언가가 맥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우주가 탄생하기 직전의 특이점처럼, 모든 가능성이 응축된 순간처럼 보였다.


"드디어 때가 온 것입니까."


그의 속삭임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 말은 메아리도 없이 사라졌다. 마치 심연이 그의 말을 삼켜버린 것처럼.


"응답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이것마저도 또 다른 시험입니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언약궤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액체도 기체도 아닌, 형태를 규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 물처럼흐르면서도 연기처럼 피어올랐고, 빛처럼 퍼져나가면서도 어둠처럼 모든 것을 삼켰다. 그것이 대리석 바닥에 닿는 순간, 단단한 돌이 유리처럼 투명해졌고, 그 너머로 끝없는 심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연.


끝없는 추락, 영원한 나락, 존재가 무로 돌아가는 궁극의 귀환점.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었고, 그 넓이는 무한했다. 그리고 그 가장 깊은 곳, 빛조차 닿지 않는 절대적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눈인지 입인지, 혹은 전혀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여호수아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를 꿰뚫어 보고,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인식하고 있었다.


여호수아의 손이 본능적으로 우림과 둠밈을 움켜쥐었다.십 년 만에 처음으로 돌들이 뜨거워졌다.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천 년의 잠에서, 혹은 영원의 침묵에서.


그리고 문득, 번개처럼 깨달음이 그의 의식을 관통했다.


야훼가 침묵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듣지 못했을 뿐이었다.


언약궤에서 흘러나오는 무언가는 이제 그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처럼 차가우면서도 불처럼 뜨거웠고, 시간처럼 느리면서도 번개처럼 빨랐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그의 숨결 속으로, 그의 영혼의 틈새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는 무너졌다.


아니, 무너졌다기보다는 녹아내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십 년간 버텨온 긴장의 끈이 마침내 끊어진 것처럼, 혹은 제단에 바쳐진 번제물이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듯. 그의 육신은 더 이상 그를 지탱할 수 없었고, 영혼은 너무 무거운 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그의 뺨에 닿았을 때, 그것은 죽음의 입맞춤처럼 부드러웠다. 동시에 그것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했고, 연인의 손길처럼 떨렸다. 그 냉기가 그의 혈관을 타고 올라가며 심장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전진했다.


아니, 쓰러졌다기보다는 녹아내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십 년간 버텨온 긴장의 끈이 끊어진 것처럼.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그의 뺨에 닿았다. 시원했다. 마치 죽음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유혹적이었다. 또는 제단에 바쳐진 번제물처럼 자신을 내어놓았다 해도 옳을 것이다. 십 년간의 기다림이라는 십자가에서 내려온 그의 육신이 마침내 대리석의 차가운 품에 안겼다. 그 냉기가 그의 뺨을 어루만질 때, 그것은 스올의 입맞춤인지 부활의 전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시간이 멈춘 지성소에서 영원이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여호수아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떠돌았다.


그곳에는 해도 달도 없었고, 낮과 밤의 구분도 없었다. 오직 기도의 향연만이 시간을 재는 저울이었고, 침묵만이 유일한 시계였다. 그의 호흡은 점점 느려졌고, 심장 박동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처럼 희미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시간인지, 하루인지, 혹은 영겁의 세월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은 마치 에스겔이 본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과 힘줄을 입고 다시 일어서는 것 같았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는 다시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로 돌아왔다.


무릎 아래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작은 양피지 조각이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놓아둔 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천 년의 먼지를 뚫고 나타난 계시처럼, 혹은 시간의 틈새에서 떨어진 파편처럼.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양피지는 너무 오래되어 손가락 사이에서 부스러질 것 같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질겼다. 마치 시간 자체가 그것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솔로몬은 놋쇠와 은을 섞어 신비한 장치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빛을 내며 어둠을 몰아내었다. 동방의 현자들이 가져온 지혜와 두로의 장인들이 전한 기술이 하나가 되어, 성전은 해와 달이 없이도 빛났더라』


나머지 부분은 시간의 이빨에 뜯겨 있었고, 혹은 의도적으로 찢겨진 것처럼 보였다. 여호수아는 그 조각을 들고 오랫동안 응시했다. 양피지에서는 희미한 향내가 났는데, 그것은 몰약도 유황도 아닌, 전혀 다른 무언가의 냄새였다.


솔로몬 성전의 것일까. 아니면 더 오래된, 바벨탑 이전의 것일까. 혹은 이것 자체가 언약궤가 전하는 메시지일까.


발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조심스러운 발걸음. 곧 문이 열렸다.



"대제사장님."


엘리야의 목소리는 칼날과 같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벌써 삼경이 지났습니다. 새벽 제사를 준비해야 할 시간입니다."


"엘리야."


여호수아의 목소리는 광야에서 40일을 보낸 모세의 것처럼 쉬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시내산에서 본 불기둥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너는 아느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예?"


엘리야가 당황했다. 그의 젊은 얼굴에 혼란의 빛이 스쳤다. 새벽 세 시, 지성소 앞에서 갑자기 천 년 전 역사를 묻다니.


"구체적으로 묻겠다. 솔로몬이 천사들 외에 또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아느냐."


엘리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고, 기억의 서고를 뒤지는 듯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두로의 왕 히람이 백향목과 기술자들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놋쇠 세공에 능한 장인 히람이 있었는데, 그가 성전의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만들었다고."


"그뿐인가?"


여호수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이것은 정사에는 없지만 외경과 전승에 따르면 동방에서 현자들이 왔다고 합니다. 별을 연구하는 자들, 칼데아의 마법사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사제들. 그들이 가져온 지혜로 성전의 기둥이 스스로 빛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이 72명의 악마를 다스리는 인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전설도."


"기록은 남아 있는가?"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바빌론 유수 때 일부가, 로마 침공 때 또 일부가, 그리고."


"절멸전쟁 때 나머지가 사라졌겠지."


"그렇습니다, 대제사장님."


여호수아가 천천히 일어섰다. 무릎이 쑤셨고, 다리는 저렸다. 돌바닥에 너무 오래 꿇어앉아 있었던 탓이었다. 혈액이 다시 순환하기 시작하자 수천 개의 바늘이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신의 대리인도 육신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임을 증명하는 마지막 보루였을지도 모른다.


"내일 새벽 예배는, 아니 앞으로 일주일간은 네가 주관하도록 하여라."


"네? 하지만 대제사장님, 그것은 규정에."


"피곤하다. 십 년 만의 휴식이 필요하다."


거짓말이었다. 여호수아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호기심인지, 희망인지, 아니면 저주받을 탐욕인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대제사장님."


엘리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계와 우려가 섞여 있었다.


"혹시 카발라의 금기된 가르침에 관심이 생기신 겁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경고드려야 할 의무가."


"아니다."


여호수아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창세 이전, '빛이 있으라' 하시기 전에 이미 있던 지혜. 토후와 보후의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찾아낸 자들의 유산. 첫 번째 날 이전의 날들에 대한 기록."

엘리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야훼 이전의 것들, 창조 이전의 지식. 그것을 탐구한 자들은 모두 광기에 빠지거나 이단으로 화형당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여호수아가 덧붙였다. 우림과 둠밈이 그의 품속에서 차갑게 식어 있었다. 마치 잠시 눈을 뜨었다가 다시 긴 잠에 빠진 것처럼.


---


그로 부터 사흘.

여호수아는 지금까지와 정반대의 삶, 구도자로 살았다.


매일 밤 그는 잊혀진 도서관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일곱 개의 봉인을 풀고, 일곱 번 계단을 돌아, 일곱 겹의 장막을 지나서야 닿을 수 있는 곳. 그곳에는 바빌론 유수 이전과 이후의 모든 기록들이 잠들어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무덤 같은 장소.


그렇지만 아무도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한 명은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요즘 안색이 좋아 보이는군."


가브리엘이 어느 날 말했다.


"그런가? 십년만의 휴가니, 마음껏 즐기고 있다내"


"그런의미가 아니라..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살아있는 것 같다고 할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예언의 천사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살아있다... 우리 중 누가 진정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소?"


"철학적이시군."


가브리엘이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조심하시오. 호기심은 때로 치명적이니까."


---


그는 그날 밤도 촛불을 켜고 도서관에 갔다.

십 년. 3,650번의 밤. 같은 책들을 펼치고, 같은 구절들을 읽고, 같은 절망을 삼켰다.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의 제단, 야곱의 사다리, 모세의 장막, 다윗의 시편, 솔로몬의 아가. 욥의 탄식. 예레미야의 애가. 전도서의 허무.


그의 손가락이 양피지 위를 더듬었다. 잉크는 바랬고, 글자는 흐릿했다. 마치 신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듯이.


그런데.


『אל־תירא』


알-티라.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책에서, 모든 만남에서 반복되는 첫 마디.


창세기의 아브람에게. 이삭에게.

불타는 떨기나무 앞의 모세에게

골리앗 앞의 다윗에게

그의 이름을 가진 선조에게

천사를 만난 마리아에게


신이 인간에게 다가올 때 항상 먼저 하는 말.


같은 말. 계속해서, 끊임없이.


여호수아는 다음 책을 펼쳤다. 사사기. 열왕기. 이사야. 다니엘.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왜?


전능한 자가 왜 그토록 자주, 그토록 먼저, 그 말을 하는가?


촛불이 흔들렸다. 밀랍이 녹아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시간이 녹아내리듯이.


그리고 번개처럼, 깨달음이 왔다.


전능함과 만나는 것은 공포다.

무한과 마주하는 것은 소멸이다.

거룩과 대면하는 것은 죽음이다.


그래서 신은 항상 먼저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나는 너를 태우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너를 부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함께하러 왔다.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먼저의 배려. 너희가 나를 견딜 수 없을 것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맞추겠노라.


여호수아의 손이 떨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지금은?


그는 일어섰다.

복도 끝 창문 너머로 인간 거주구역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깜박이고 있었다. 횃불도 촛불도 아닌, 새로운 빛.


---


바로 그 시각, 인간 거주구역의 가장 어두운 모퉁이.


"왜 안 되는 거야! 분명히 이번엔 될 줄 알았는데!"


에녹의 외침이 좁은 작업실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열네 살 소년의 얼굴은 좌절과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의 손에는 깨진 수정 조각과 타버린 구리선이 마치 실패한 꿈의 잔해처럼 들려 있었다. 손바닥에는 이미 화상 자국이 지도처럼 그려져 있었고, 각각의 상처는 실패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실패작들이 마치 전쟁터의 시체처럼 흩어져 있었다. 첫 번째 시도는 수정이 과열로 산산조각 났고, 두 번째는 형광액이 새어나와 구리선을 녹여버렸으며, 세 번째는 폭발과 함께 작업실 천장에 검은 자국을 남겼다. 네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실패했는데, 어떤 것은 너무 약한 빛을 냈고, 어떤 것은 너무 강한 빛을 내다가 즉시 타버렸으며, 어떤 것은 아예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형, 제발 그만하자.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여덟 살 아벨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어린 동생의 눈에는 형에 대한 걱정과 함께 막연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론이 모세의 지팡이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느꼈을 양심의 가책과 닮아 있었다.


"아니야, 이번엔 정말 뭔가 달랐어.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봤다고."


에녹이 타버린 장치를 들어 보이며 열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리선이 녹은 부분에는 단순한 열 손상이 아닌 이상한 패턴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순간적으로 통과하면서 남긴 흔적 같았다.


"여기, 이 부분을 봐. 형광액이 수정을 통과하는 순간, 아주 짧게나마 천사들의 빛과 비슷한 무언가가 나타났어. 그것은 단순한 발광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었어. 마치 빛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그는 다시 재료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오염생물의 발광낭 세 개가 유리병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깨진 천사 무기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낸 수정 조각들이 작은 상자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폐허에서 주워온 구리선은 여러 굵기로 분류되어 있었고, 각종 공구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형광 물질의 농도를 더 높이고, 수정의 배치를 바꾸면 혹시."


에녹이 작은 해부칼을 들고 첫 번째 발광낭에 다가갔다. 그의 손놀림은 이미 숙련된 장인의 그것이었다. 칼날이 낭의 표면을 따라 정확하게 움직였고, 녹색빛 액체가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준비해둔 유리 용기에 조심스럽게 액체를 받아냈다.


"이 액체가 뭔지 아니?"


에녹이 동생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과학자의 열정과 소년의 호기심이 동시에 묻어났다.


"오염생물들이 어둠 속에서도 완벽하게 사냥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거야. 이 형광액이 그들의 시신경과 연결되어 있어서, 빛이 없는 곳에서도 주변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거든. 하지만 단순한 발광이 아니야. 이건 뭔가 다른 차원의."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무겁고 느린 발걸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천사의 것이 아니었다. 천사들은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발걸음이었지만, 평범한 사람의 것도 아니었다. 권위가 묻어나는 걸음걸이, 그리고 특유의 리듬.


"뭘 하고 있느냐?"


여호수아의 목소리가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


에녹의 손에서 형광액 병이 미끄러졌고, 아벨은 본능적으로 형 뒤로 숨었다. 유리병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다행히 깨지지는 않았다. 다만 굴러가며 녹색 빛을 흩뿌렸고, 그 빛이 여호수아의 얼굴을 기묘하게 비췄다.


"대제사장님이 왜 여기에."


에녹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떨렸다. 신성모독죄, 천사의 권능을 도둑질하려 한 죄. 그것은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중죄였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예상과 달리 부드럽게 무릎을 꿇고 소년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눈에는 심판자의 분노가 아니라 탐구자의 호기심이 빛나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배우러 왔다."


그 말에 에녹은 더욱 당황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이 열네 살 소년에게 배우러 왔다니.


"네가 하는 일을 내게 보여다오. 자세히, 처음부터."


에녹은 망설이다가 천천히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엔 떨렸지만, 점차 안정되어 갔고, 나중에는 열정이 넘치기 시작했다.


"이 형광액이 수정을 통과할 때, 수정의 결정 격자가 일종의 프리즘 역할을 합니다. 무질서한 에너지가 정렬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빛이 만들어지는데."


그는 다시 실험 준비를 시작했다. 새로운 수정을 골라 구리 코일 중앙에 고정시켰다. 열 바퀴, 스무 바퀴, 서른 바퀴. 각 바퀴의 간격은 정확히 3밀리미터를 유지했다.


"이제 형광액을 한 방울씩."


첫 방울이 수정에 닿았다. 미세한 진동이 일어났다.
두 번째 방울. 작은 불꽃이 튀었다.
세 번째 방울. 수정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네 번째 방울.


갑자기 수정이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촛불도 아니고 횃불도 아닌, 전혀 새로운 종류의 빛이었다. 차갑고 깨끗하며, 순수했다. 천사들의 신성한 빛과는 달랐지만,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마치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다른 가지처럼.


"이것은."




바벨탑이 무너진 후 인류가 잃어버린 무언가.


홍수가 쓸어간 후 노아가 간직한 무언가.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사라진 후 모세가 그리워한 무언가.




그것이 창세기 첫 말씀의 메아리인지, 프로메테우스가 훔쳐온 불씨인지는 오직 침묵하는 신만이 알 것이었다.

댓글 [ 6 ]

  아카라이브
  35주 전
  아카라이브
  35주 전
고대 인류의 힘?
  프레빌
  35주 전
내가스포하고싶어지는군시발
  프레빌
  35주 전 수정됨
고대인류라기보다는(초고대문명같은거 고려해보긴 했는데 여기선 야훼이전의 신화들을 별개로 독립시켜놨으니)

야훼가 천사들데리고 와서는 엘/드/월 이랑 뚜시따시 맞다이를 떴다고 했잖아요? 그중에서 현생인류랑 커넥션이 생겼고? 를 좀 발전시켜볼생각임..+신성공학 사전빌드업
  프레빌
  35주 전
그리고원래내부에서풀어야하는데내필력과세계관의한계로인해못풀겠는거

빛이있으라이전의지혜->달토끼떡밥임
  아카라이브
  35주 전
ㅇㅎ 고대 인류 맞네
달토끼라는 말이 생각이 안 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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