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후, 밤.
삿포로 남쪽 외곽, 버려진 창고 지대에서 비밀 회동이 열렸다. 이곳은 한때 물류 센터였다. 절멸전 이전에는 수백 대의 트럭이 매일 드나들었고,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했던 곳이었다. 거대한 창고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철도 선로가 그 사이를 가로질렀으며, 컨테이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곳은 홋카이도와 본토를 연결하는 경제의 동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창고들은 텅 비어 있었고, 문은 녹슬어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철도 선로는 잡초에 뒤덮였고, 컨테이너들은 부식되어 무너져 내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금속판들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자들의 신음 같았다. 한때 이곳을 가득 채웠던 생명의 소리들, 기계의 굉음, 사람들의 외침, 트럭 바퀴가 지면을 구르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바람과 부패의 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시로, 아카시, 사치코가 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는 광대했다. 천장은 높았고, 공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한때 이곳에는 수만 개의 상자들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식량, 의약품, 기계 부품, 일상용품,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곳을 거쳐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메아리쳤다. 타닥, 타닥, 타닥. 그 소리가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가 사라졌다. 마치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이 거대한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유일한 조명은 휴대용 랜턴 세 개뿐이었다. 그것들은 바닥에 놓여 있었고,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빛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배터리가 약해지고 있었다. 그 빛 때문에 그림자가 거대하게 벽에 드리워졌다. 세 페어리의 그림자가 마치 거인처럼, 혹은 괴물처럼 보였다.
"위험한 장소를 선택하셨군요."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갑작스러웠지만, 동시에 예상된 것이기도 했다. 세 페어리가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인간들이 나타났다. 그들도 세 명이었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계급장이 희미한 빛에 반짝였다. 대령이었다. 그의 뒤로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명은 젊은 장교였고, 다른 한 명은 민간인 복장의 중년 남자였다. 민간인의 얼굴은 수척했고, 눈 아래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손의 위치, 시선의 방향, 몸의 자세, 모든 것이 경계를 말하고 있었다.
"저는 사사키입니다. GHQ 홋카이도 방면군 참모장입니다."
그는 자기 소개를 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긴장이 숨어 있었다.
"누군가 우리를 발견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의 질문은 단순한 우려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험이었다. 이 페어리들이 얼마나 신중한지, 얼마나 진지한지를 가늠하는.
"그래서 이곳을 선택한 겁니다."
시로가 차갑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기계가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지역은 방사능 오염도가 높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 페어리들도 가능한 피하는 곳이죠. 하지만 짧은 시간이라면 견딜 수 있습니다."
그는 손목에 차고 있는 작은 장치를 가리켰다. 방사능 측정기였다. 작은 화면에 붉은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위험 수준이었다. 하지만 즉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천천히 죽을 뿐.
"양측 모두에게 이 만남은 비밀이어야 합니다."
아카시가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시로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같았다.
"당신들의 장군이 알면 안 되고, 우리 여왕도 아직은 모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 말이 공기 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었다.
사사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이미 알아챘다. 이 페어리들이 자신들의 여왕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힌트를 주었다. 이들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들이 얼마나 절박한지도 보여주었다. 자신들의 여왕마저 속일 정도로.
"여왕 폐하께서 모르신다고요?" 그의 목소리에 조롱이 섞였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슨 권한으로 여기 왔습니까? 이것은 반역 아닙니까?" 그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진짜 질문이기도 했다.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시로가 앞으로 나섰다. 랜턴의 빛이 그의 얼굴을 아래에서 비췄다. 그림자가 기묘하게 드리워졌다. 그의 얼굴은 마치 해골처럼 보였다.
"장황한 외교적 수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사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충돌했다. 그것은 단순한 눈맞춤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지의 충돌이었다. 누가 먼저 눈을 돌리는가. 누가 먼저 약함을 보이는가. 하지만 둘 다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가 똑같이 절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카시가 서류 가방을 열었다. 오래된 가죽 가방이었는데, 표면에는 흠집이 많았다. 그는 거기서 문서들을 꺼냈다. 종이들은 구겨져 있었고, 가장자리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귀한 종이였다. 절멸전 이후 새 종이를 구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는 문서를 펼쳤지만, 건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에 쥔 채, 랜턴 빛 아래에서 읽기 시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홋카이도 전체를 정화할 수 있습니다. 방사능을 제거하고, 오염된 토양을 복원하며, 깨끗한 공기와 물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무리 준비를 했어도, 이 말을 실제로 입 밖으로 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사사키의 부관이 비웃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날카롭고 조롱적이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진작에 했겠죠.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무엇을 대가로 요구하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는 간절함도 숨어 있었다. 만약 정말로 가능하다면. 만약 정말로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 희망이 그의 목소리를 떨리게 만들었다.
"인간들의 생명력이 필요합니다."
시로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단어가 창고 안에 떨어졌다. 메아리쳤다. 생명력, 생명력, 생명력. 그 단어가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마치 창고 자체가 그 단어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창고가 얼어붙었다. 물리적인 온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기가 무거워졌다.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두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생명력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사사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혹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그것은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에.
시로는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푸른빛이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인간의 형상이 나타났다. 투명하고, 빛으로 이루어진, 마치 유령 같은 형상. 그리고 그 형상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마치 피가 흐르듯이. 그 빛이 형상 밖으로 빠져나와 공중에서 소용돌이쳤다. 형상은 점점 희미해졌다. 빛을 잃어갔다. 생명을 잃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졌다. 완전히. 흔적도 없이.
"수명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감정이 제거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는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죄책감일까. 혐오일까. 아니면 자기 혐오일까.
"인간 한 명당 매달 1개월치의 생명력을 추출합니다. 3년 동안 진행하면, 한 사람당 총 36개월의 수명이 단축됩니다."
창고 안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도 숨쉬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당신들은 미쳤습니까?"
사사키의 부관이 소리쳤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권총으로 향했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위협 앞에서 무기를 찾는 것. 하지만 그 무기가 이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 국민의 수명을 빼앗자고요?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연료로 쓰자는 겁니까? 우리를 불태워 당신들의 마법을 돌리자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사사키가 부관을 제지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도 창백했다. 그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계속 설명해주시죠."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훈련된 차분함이었다. 수십 년간 군인으로 살아온 사람의, 최악의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는 법을 배운 사람의 차분함이었다.
"총 필요 인원은 많습니다."
아카시가 문서를 보며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도 떨렸다.
"홋카이도에 거주하는 인간이 약 40만 명입니다. 만약 모두가 참여한다면, 3년 안에 정화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적인 시나리오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 노인, 병자들은 참여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생명력은 약하고, 추출 과정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는 문서를 접었다.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그 숫자들이, 그 계산들이 너무 잔인했다.
"40만 명..."
사사키의 목소리가 떨렸다.
"홋카이도에 남은 일본인 전부가 아닙니까."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그리고 그 확인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침묵이 다시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더 무거운 침묵이었다. 민간인 복장의 남자, 후쿠다가 벽에 기대었다. 그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구겨진 담배였다. 절멸전 이전의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것을 입에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물고만 있었다. 담배의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단지 위안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어떤 단어가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모두가 조금씩 수명을 잃게 되자만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더 길게, 더 건강하게."
그의 논리는 명확했다. 하지만 그것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살 수 있다고요?"
사사키가 비웃었다. 하지만 그 비웃음 속에는 고통이 담겨 있었다.
"수명이 짧아진 채로 말입니까?"
"지금보다는 길게."
시로가 반박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 오염된 땅에서 당신들은 얼마나 삽니까? 오십 년? 마흔 년?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병에 걸려 이십 년도 못 사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는 창고의 어둠을 가리켰다. 마치 그 어둠 속에 모든 죽어간 아이들이 서 있는 것처럼.
"정화가 완료되면, 당신들은 다시 오래 살 수 있습니다. 칠십 년, 팔십 년. 조금의 수명을 주고, 더 많은 수명을 얻는 겁니다. 3년을 주고 30년을 얻는 거래입니다."
"그것은 수학입니다." 후쿠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하지만 생명은 수학이 아닙니다. 사람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는 담배를 입에서 뺐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당신들은 우리를 계산식의 변수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에게는 이름이 있고, 가족이 있으며, 꿈이 있습니다. 그것을 6개월이라는 숫자로 환산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수학입니다."
시로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 안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인지, 세상에 대한 분노인지, 아니면 이 상황에 대한 분노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들은 매일 선택합니다. 누구에게 식량을 더 줄 것인가. 누구를 먼저 치료할 것인가.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그것은 모두 수학입니다. 생명을 계산하는 수학입니다. 당신들도 이미 하고 있습니다. 단지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는 후쿠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계산식이 조금 더 명확할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릅니다!"
사사키의 부관이 다시 소리쳤다.
"이것은 살인입니다!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살인입니다!"
"왜요?"
시로의 질문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진짜 의문이 담겨 있었다.
"왜 이것만 다릅니까? 전쟁에서 병사들을 전장에 보내는 것은 살인이 아닙니까? 식량이 부족할 때 누군가에게는 주고 누군가에게는 주지 않는 것은 살인이 아닙니까? 의약품이 부족할 때 젊은이를 먼저 치료하고 노인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살인이 아닙니까?"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를 죽입니다. 선택을 통해. 결정을 통해. 우선순위를 통해. 단지 그것을 살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입니다. 단지 손에 피가 묻지 않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무죄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진실이 너무 날카로웠기 때문에. 너무 아팠기 때문에.
"우리도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사치코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여태껏 조용히 서 있었지만, 이제 앞으로 나섰다.
"우리 페어리들도 이 거래에 참여합니다. 우리의 마력을, 우리의 생명력을 쏟아붓습니다. 우리만 인간들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함께 대가를 치릅니다. 우리도 지쳐 있고, 약해져 있으며, 매일 동족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선택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하지만 당신들은 선택했습니다."
사사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쓴웃음이 묻어 있었다.
"우리 동포들은요? 그들은 선택할 수 있습니까? 정말로?"
"자발적 참여입니다."
아카시가 새로운 문서를 꺼냈다. 그것은 계약서 초안이었다.
"강제는 없습니다. 원하는 사람만 참여합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동의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정당한 보상을 제공하겠습니다."
"원한다고요?" 젊은 장교가 비웃었다.
"굶주린 사람 앞에 빵을 내밀며 자발적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병든 아이의 부모에게 치료를 대가로 수명을 요구하며 선택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그것은 강제나 다름없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
"당신들은 우리의 절박함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발이 아니라 협박입니다!"
"그럼 빵을 주지 맙시다."
시로가 차갑게 반박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완전히 비어 있었다.
"당신들이 거부하면, 우리도 거부하겠습니다. 당신들은 계속 굶주리고, 우리는 계속 죽어가고, 이 땅은 계속 썩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들이 원하는 겁니까? 도덕적 순수함을 지키며 함께 멸망하는 것이?"
그는 사사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선택권을 드린겁니다. 지금, 이 순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지만 알아두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드리는 마지막 제안입니다. 거부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창고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금속판이 덜컹거렸다. 어디선가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후쿠다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다시 꺼냈다. 아까와 같은 담배였다. 그는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부러뜨리고 싶었다.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이었기 때문에.
"만약..."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만약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무엇이 됩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됩니까?"
"살아남은 자들이 됩니다."
아카시가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확신이 없었다.
"아니면 배신자들."
후쿠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고 있는 것인지, 웃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동족을 팔아넘기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의 수명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빵과 약을 주는 겁니다. 이것이 정부입니까? 이것이 보호입니까?"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우리는 괴물이 될 것입니다."
"당신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치코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금기를 깨고 있습니다. 우리 문명의 가장 신성한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손을 더럽히는 겁니다. 함께. 우리 모두 괴물이 되는 겁니다. 함께."
"공범이라는 뜻이군요."
사사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묻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 안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후쿠다가 문서를 받았다. 랜턴 빛에 비춰 읽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각 문장을 따라 움직였다. '참여자 가족에 대한 우선 식량 배급', '의료 혜택 보장', '토지 소유권 인정', '정치적 지위 보장'. 모두 매력적인 조건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합쳐도, 생명과 맞바꿀 수 있을까.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생명의 대가로는. 아무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습니까?"
시로가 물었다. 그것은 진짜 질문이었다. 조롱이 아니었다. 아니, 자기상황에 대한 조롱이었을수는 있다. 어쨌든 그의 생각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질문이었다. 후쿠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이것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아무리 끔찍해도, 아무리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우리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사사키가 마침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하야시 장군께 보고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 권한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일주일, 그 이상은 기다릴 수 없습니다. 매일 우리 동족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국민도 마찬가지고요."
사사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문서들을 집어 들었다. 그 종이들이 너무 무거웠다. 마치 납으로 만든 것 같았다.
"한 가지만 확실히 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당신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것은 거래지만, 신뢰가 아닙니다. 우리는 감시할 것이고, 기록할 것이며, 언제든 이 거래를 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약속을 어긴다면, 만약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싸울 것입니다. 설사 이길 수 없어도."
그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그것만은 확실히 해두겠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권리입니다."
시로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존경이 담겨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 순간 그는 이 인간을 존경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국민을 지키려는 그 의지를.
"우리도 원하는 것은 같습니다. 신뢰는 필요 없습니다. 필요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GHQ 일행이 돌아섰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창고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가 닫혔다. 그 소리가 메아리쳤다. 마치 관 뚜껑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세 페어리만 남았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랜턴의 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곧 완전한 어둠이 찾아올 것이었다.
"우리는 방금 무엇을 한 겁니까?"
사치코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우리는 방금 살인 계약을 맺었습니다. 수천 명의, 어쩌면 수만 명의 살인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시로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무거웠고, 끝이 없는 것 같았다.
"폐하께는 어떻게 보고하겠습니까?"
사치코가 물었다.
"진실의 일부를, 인간들이 협력하기로 했다고. 그들의 기술과 자원을 제공한다고. 그들이 정화 작업을 지원한다고."
"거짓말에 가까운 이야깁니다."
"전부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로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확신은 절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폐하는 순수하셔야 합니다. 이 더러운 진실을 아셔서는 안 됩니다. 폐하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이것을 아신다면, 만약 폐하께서 우리와 같은 죄책감을 느끼신다면, 폐하는 부서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폐하가 부서지면, 우리 모두가 부서집니다."
그들은 창고를 나섰다. 밖은 추웠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카시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너무 두꺼웠다. 혹은 하늘 자체가 그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신이 우리를 보고 계실까요?" 그가 중얼거렸다.
"신은 죽었습니다." 시로가 대답했다. "절멸전과 함께. 아니, 어쩌면 그 전에 이미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이라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럼 우리를 심판할 자는 없는 겁니까?"
아카시의 질문이 어둠 속에 떠올랐다.
시로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가 녹아 흘러내렸다. 마치 눈물처럼.
"심판할 자들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습니다. 너무나 많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눈송이 하나를 받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엘븐하임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쓴웃음이 담겨 있었다.
"우리가 등을 돌린 그곳. 원로원의 현자들, 만 년의 지혜를 가진 자들이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반역자라 부를 것입니다. 금기를 깬 범죄자라고. 황제는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들이라 하실 것이고, 법황은 생명의 신성을 더럽힌 자들이라 하실 것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요? '생존을 위해서였습니다'라고?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라고? 그들이 비록 압제자이긴 하였으나 수천 년, 수만 년을 살아왔습니다.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었고, 수없이 많은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 금기를 깨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들 앞에서, 우리의 변명이 설득력을 가질까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폐하께서도 계십니다."
침묵이 흘렀다. 세 페어리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타이타니아 폐하."
시로가 그 이름을 천천히 발음했다. 마치 신성한 이름을 다루듯이.
"우리가 따르기로 맹세한 분.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신 분. 자유와 정의를 위해 제국과 맞서신 분. 그 순수한 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폐하, 우리는 폐하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그 이상을 배신했습니다'라고?"
"언젠가는. 반드시. 엘븐하임이 우리를 찾아낸다면, 그들의 법정에 설 것입니다. 역사가 우리를 심판할 것이고, 후손들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며, 헬라디르께서 아직 계신다면 우리는 환상계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겁니다."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그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눈은 계속 내렸다. 하얗게, 모든 것을 덮으며. 죄를 덮고, 진실을 묻고, 선의 경계선을 지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