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의식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
또한 대지가 죽음의 침묵 속에 잠겨 있던 때였다.
삿포로 북쪽 평원. 한때 이곳은 홋카이도의 곡창지대라 불렸다고 한다. 노인들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그 시절, 황금빛 밀 이삭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바람이 불면 밀밭은 거대한 생명의 바다처럼 일렁였고, 그 물결 소리는 대지의 숨결처럼 들렸다고 한다. 수확철이면 붉은 노을 아래서 트랙터들이 밤늦도록 들판을 누비고, 곡물 창고에는 햇곡식 냄새가 가득했으며, 마을 광장에서는 축제가 열렸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춤을 추고, 아이들은 웃음소리를 흩뿌리며 뛰어다녔고, 노인들은 사케를 나누며 한 해의 풍년을 감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죽어 있었다.
아니, 죽음이라는 표현조차 사치스러웠다. 죽음이란 한때 생명이었던 것이 그 생을 마감하는 과정이니까. 하지만 이곳은 애초에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토양의 분자 구조 자체가 방사능에 의해 변질되어, 더 이상 유기물을 품을 수 없는 무기질 덩어리로 변해버렸다.
회색빛 대지.
그것은 색이 아니라 색의 부재였으며, 모든 스펙트럼이 죽어버린 곳에 남은 것은 오직 무채색의 절망뿐이었다. 방사능 측정기는 단조로운 전자음을 내며 경고했다. 째각, 째각, 째각. 그 소리는 마치 죽음의 시계가 똑딱거리는 것 같았다. 수치는 여전히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시로는 이 죽은 대지 위에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이 차가운 북풍에 흩날렸다. 페어리로서 그는 방사능에 어느 정도 저항력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불쾌한 따끔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수천 개의 미세한 바늘이 세포막을 찌르는 것 같았다. 인간이라면 이미 구토를 시작했을 것이다.
"백 미터."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겨우 백 미터를 정화하기 위해서."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백 미터. 축구장 하나 크기의 땅을 되살리기 위해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시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구름 속에는 아직 내리지 않은 눈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각각의 눈송이 안에 방사성 동위원소들이 갇혀 있을 것이었다. 아름답고도 치명적인, 하얀 죽음의 입자들이.
그녀가 방금까지 머물던 책상 위에는 수십 개의 문서가 흩어져 있었다. 마법진 설계도와 에너지 계산식과 참여자 명단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종이 위를 더듬었다. 같은 수식을 다섯 번째 검토하고 있었다. 아무리 계산해도 답은 같았다. 페어리의 마력만으로는 표층 정화가 한계였다. 뿌리가 닿는 깊이까지 도달하려면 인간의 생명력이 필수적이었다.
감성에 젖어있을 그때, 아카시가 다가왔다
"GHQ에서 최종 명단을 보내왔습니다."
아카시가 봉투를 내밀었다. 시로는 그것을 받아 개봉했다. 안에는 타이프라이터로 작성된 명단이 들어 있었다. 오백 개의 이름과 나이와 주소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로의 눈이 명단을 훑었다. 타나카 켄지 이십오 세. 사토 유키코 사십이 세. 요시다 타케시 칠십일 세. 각각의 이름 뒤에는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가족 구성원과 참여 동기와 건강 상태.
"모두 자발적으로 지원한 사람들입니까?"
시로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섞여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아카시가 대답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굶주린 사람 앞에 빵을 내밀며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지."
시로는 명단을 내려놓았다. 종이가 책상에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게 될지 정말로 알고 있을까요?"
"모를 겁니다."
아카시가 고개를 저었다.
"GHQ는 그들에게 '협력'이라고만 설명했을 겁니다. '특별한 에너지 제공'이라고 둘러댔겠죠. 생명력이 빠져나간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피했을 겁니다."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진실의 일부만 말한 것입니다."
아카시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폐하께 하는 것처럼."
침묵이 흘렀다. 두 페어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못했다. 죄책감이 그들 사이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사치코는 어디 있습니까?"
"현장에서 마법진을 최종 점검하고 있습니다. 밤새 작업할 것 같습니다."
"우리도 가야겠군요."
시로가 일어섰다. 그는 명단을 다시 집어 들었다. 종이가 그의 손에서 떨렸다. 오백 개의 이름이 무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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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 측정기가 단조로운 경고음을 냈다.
수치는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즉사 수준은 아니었다. 간신히. 말 그대로 정말 한계에 가까울 지경이지만 백 명의 페어리가 마력을 집중하면 이 정도 반경은 정화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생명을 키워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적어도 죽음만을 내리는 땅은 아니게 될 것이다.
정화 예정지에는 이미 준비가 한창이었다. 거대한 원형의 마법진이 대지에 새겨져 있었다. 직경 이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원이었다. 그 안에는 수십 개의 작은 원들과 기하학적 문양들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각 선은 특수한 재료로 그어져 있었다. 은가루와 수정 가루를 섞은 혼합물이었다. 달빛을 받으면 희미하게 빛나는 재료였다.
사치코가 마법진의 북쪽 끝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보이지 않는 마력의 흐름을 확인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멈춰서 무언가를 조정했다. 손가락으로 공기를 튕기면 마법진의 일부가 미세하게 변형되었다.
시로는 들판 한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다. 너무나 푸르렀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그들은 지금 금기를 깨려 하고 있었다.
"모두 준비되었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아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문서 뭉치가 들려 있었다. 동의서들이었다. 오백 명의 서명이 담긴. 사치코는 마법진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따라 움직이며 마력의 흐름을 확인했다.
"마법진은 완벽합니다."
"폐하께는 뭐라고 보고하셨습니까?"
아카시가 다가왔다. 손에는 서류철. 동의서들. 오백 명의 서명과 지문과 증인 사인.
"'인간들의 협력 하에 첫 번째 대지 정화 의식을 거행한다'고. 폐하께서는 승인하셨습니다."
시로가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마침내 희망을 보았다고."
"구체적인 방법론은요?"
"묻지 않으셨습니다."
시로는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사치코가 물었다.
"병원입니다. 루미나를 비롯한 회복 중인 환자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는 요정원 회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행정 관련 안건들이 많이 쌓여 있습니다."
시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의도적으로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이곳에 올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것이..."
아카시가 말하려다 멈추었다.
"옳은 일입니까?"
"옳은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시로가 대답했다.
"하지만 필요한 일입니다. 폐하께서 이것을 보신다면,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폐하의 얼굴을 보며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낫습니다."
"폐하를 속이는 겁니까?"
"폐하를 보호하는 겁니다."
시로의 목소리에는 확신과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언젠가는 알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서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아카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은 마법진 중앙으로 갔다. 그곳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높이가 십 미터는 되어 보였다. 완벽하게 투명한 수정이었는데 내부에는 무언가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액체처럼 보이기도 했고 기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며 소용돌이쳤다.
수정 기둥 주변으로 세 개의 작은 제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각 제단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 엘프 문자였다. '생명'과 '순환'과 '재생'을 의미하는 글자들이 서로 얽혀 하나의 주문을 형성하고 있었다.
"페어리들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카시가 동쪽을 가리켰다. 멀리서 빛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날아오는 페어리들이었다. 그들의 날개에서 나는 빛이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깜빡였다.
한 명씩 도착한 페어리들은 미리 정해진 위치로 갔다. 마법진의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섰다. 각자 삼 미터씩 떨어져 완벽한 원을 이루었다. 그들은 모두 순백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후드를 깊이 눌러썼기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각자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지팡이들은 모두 달랐다. 어떤 것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어떤 것은 금속으로 어떤 것은 수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모두 끝에는 작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마력을 증폭시키는 매개체였다.
"전원 배치 완료했습니다."
한 페어리가 보고했다. 정확히 백 명이었다. 그들은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긴장이 감돌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역사적인 순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역사의 전모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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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 시작했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구름이 두꺼워서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빛만이 대지를 비췄다. 회색빛 들판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땅이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지였다. 방사능 측정기가 끊임없이 경고음을 냈다.
군용 트럭들이 도착했다.
한 대가 아니었다. 스무 대가 넘는 트럭이 긴 행렬을 이루며 다가왔다. 각 트럭에는 이십여 명의 인간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조용했다.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럭들이 멈췄다. 병사들이 뛰어내려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미리 계획된 대로였다. 마법진을 둘러싸듯 백 개의 작은 천막이 세워졌다. 각 천막은 다섯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방수포로 만들어진 간단한 구조물이었지만 바람과 시선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인간들이 트럭에서 내렸다.
그들은 다양했다. 젊은 남자들이 가장 많았다. 이십 대에서 삼십 대로 보였다. 하지만 중년 여성들도 있었고 노인들도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초라했다. 낡은 외투와 구멍 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절멸전 이후의 궁핍이 그들의 모습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타나카 켄지가 트럭에서 내렸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마법진이 눈에 들어왔다. 은빛으로 빛나는 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중앙의 수정 기둥이 아침 햇살을 받아 무지개빛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원 주위에 서 있는 백 명의 페어리들이 보였다. 하얀 로브를 입은 그들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저것이..."
그가 중얼거렸다.
"정화 의식..."
그의 옆에 선 다른 남자가 말했다.
"생각보다 거창하군요.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요?"
"있겠죠. 페어리들의 마법이니까."
켄지가 대답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그는 주머니 속의 사진을 만졌다. 여동생의 사진이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창백한 얼굴과 움푹 들어간 눈. 방사능 병이 그녀를 천천히 죽이고 있었다.
GHQ 관계자가 찾아왔을 때, 그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했다.
"당신 여동생을 치료해주겠습니다. 페어리의 치유 마법으로. 완치가 가능합니다. 대신 당신이 이 작업에 참여해주십시오."
그는 물었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험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루 동안 앉아 있으면 됩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게 전부입니다."
그는 서명했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사토 유키코도 트럭에서 내렸다. 그녀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있었다. 대부분 그녀처럼 아이를 가진 어머니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같은 표정이 서려 있었다. 불안과 결연함이 뒤섞인 표정.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표정이었다.
그녀들이 참여한 이유는 간단했다.
식량이었다.
일 년치 배급권. 그것은 자식들이 일 년 동안 굶주리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요시다 타케시는 천천히 트럭에서 내렸다. 나이든 다리가 휘청거렸다. 한 병사가 그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할아버지?"
"괜찮네. 고맙네."
타케시가 미소 지었다. 주름진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오히려 기대되는군. 내 나이에 이런 역사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다니."
그는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문양들이 아침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저것이 이 땅을 되살릴 거라고?"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병사가 대답했다.
"우리 손자들이 깨끗한 땅에서 살 수 있겠구먼. 내 생의 마지막에 무언가 의미있는 하고 간다는게 얼마나 위안인지"
타케시가 중얼거렸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깊어졌다. 미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감정 때문이었을까.
천막으로 안내되었다. 다섯 명씩 그룹을 이루어 들어갔다. 천막 안은 좁았다. 바닥에 얇은 매트가 깔려 있었고 가운데 작은 랜턴이 놓여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켄지는 자리에 앉았다. 다른 네 명도 둥글게 앉았다.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했다. 처음 보는 사이였다. 하지만 같은 운명을 공유하고 있었다.
"뭘 해야 하는 걸까요?"
한 청년이 물었다.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되어 보였다.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습니다."
다른 남자가 대답했다.
"그게 전부라고. 우리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이상하네요.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는 걸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은 정말로 몰랐다. GHQ 관계자들은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저 '특별한 에너지'를 제공한다고만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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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가 가까워졌다.
태양이 중천에 떴다. 하지만 구름에 가려 희미했다. 그림자가 없는 빛이 대지를 비췄다. 모든 것이 평평하고 깊이 없어 보였다.
시로가 마법진 중앙으로 걸어갔다. 거대한 수정 기둥 앞에 섰다.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보라색 눈동자가 침착하게 빛났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손은 로브 속에서 떨리고 있었다.
열다섯 명 정도.
그정도라면 허용 가능한 손실이라고 GHQ는 말했다. 시로는 그 말을 듣고 구역질을 참아야 했다.
그녀는 수정에 손을 댔다.
차가웠다.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팔을 타고 올라와 심장까지 닿았다. 수정 내부의 소용돌이가 반응했다. 회전 속도가 빨라졌다. 빛이 강해졌다.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다. 마법으로 증폭된 소리였다. 모든 이가 들을 수 있었다.
아카시와 사치코가 각자의 제단으로 갔다. 정삼각형의 꼭짓점에 섰다. 그들도 손을 제단 위에 올렸다. 제단이 빛나기 시작했다. 새겨진 문자들이 하나씩 활성화되었다.
"1단계. 기초 결계 형성."
시로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고대 엘프어였다. 인간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하지만 그 음률에는 힘이 있었다. 공기를 진동시키고 대지를 울리는 힘이었다.
백 명의 페어리들이 동시에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동작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지팡이 끝의 보석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했다. 반딧불 같은 빛이었다. 하지만 점점 강해졌다. 별처럼 빛났다.
"연결하라."
시로의 명령이 떨어졌다.
페어리들의 마력이 흘러나왔다. 푸른빛의 실처럼 가늘게 뻗어나왔다. 그것들은 마법진의 선을 따라 흘렀다. 은빛 선들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마법진 전체가 살아나듯 문양들이 맥동했다.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2단계. 대지 공명."
시로의 주문이 변했다. 더 낮고 더 깊은 음조가 되었다. 땅속 깊은 곳까지 닿는 소리였다.
마법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했다. 발바닥으로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점점 강해졌다. 대지 자체가 반응하고 있었다. 죽어 있던 땅이 깨어나고 있었다.
천막 안의 인간들이 불안해했다.
"지진인가요?"
누군가가 물었다.
"아니에요. 마법의 일부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진동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천막의 기둥이 흔들렸다. 랜턴의 불빛이 깜빡였다.
수정 기둥이 더욱 밝게 빛났다.
내부의 소용돌이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투명했던 액체가 색을 띠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옅은 초록색이었다. 봄날 새싹 같은 색이었다. 그것은 생명의 색이었다. 희망의 색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시로는 알고 있었다. 페어리들의 마력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다. 이미 몇몇은 휘청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표면만 긁는 것에 그칠 것이었다.
"3단계."
그녀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가슴이 조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지금부터가 금기였다.
"착취."
그의 손이 복잡한 인장을 그렸다. 허공에 보이지 않는 문양을 새겼다. 그것은 그 극악무도한 제국조차 스스로 수천 년간 금지해온 주문이었다.
그녀의 마력이 뻗어나갔다.
보이지 않는 촉수처럼. 굶주린 뿌리처럼. 천막들을 향해 뻗어갔다. 오백 개의 가느다란 실이 공중을 가로질렀다. 아무도 볼 수 없었다. 아무도 느낄 수 없었다. 처음에는.
---
타나카 켄지는 처음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약간 춥다고 생각했다. 천막 안인데도 갑자기 온도가 내려간 것 같았다. 그는 외투를 여몄다. 하지만 추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졌다. 피부가 아니라 뼈 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였다.
그리고 무언가가 그에게 닿았다.
보이지 않았다. 만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그의 가슴에 닿았다. 심장 근처였다. 차가운 손가락 같았다. 얼음장 같은 손가락이 그의 가슴 속을 더듬고 있었다.
"으..."
그는 신음했다. 숨이 막혔다. 가슴이 조였다. 무언가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따뜻한 무언가였다.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무언가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소중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지...?"
옆의 청년도 얼굴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손이 떨렸다.
"뭔가... 빠져나가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 모두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으니까.
사토 유키코는 목걸이를 꽉 쥐었다.
죽은 남편이 준 목걸이였다.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구역질이 났다. 무언가가 그녀의 몸 속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피를 뽑는 것 같았다.
"아이들..."
그녀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눈물이 흘렀다. 왜 우는지 몰랐다. 그저 슬펐다. 무언가를 잃어가는 슬픔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의 슬픔이었다.
요시다 타케시는 천막 바닥에 누웠다.
일어나 있을 힘이 없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뼈가 물렁해지는 것 같았다. 근육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평온했다.
두렵지 않았다. 그는 오래 살았다. 충분히 살았다. 사랑했고 사랑받았고 일했고 쉬었고 웃었고 울었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었다.
"아아..."
그가 작게 웃었다.
"이런 것이었구나..."
그는 하늘을 보려 했다. 하지만 천막 천장만 보였다. 누런 방수포였다. 구멍이 나 있었다. 그 구멍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아름답네..."
그가 중얼거렸다.
무엇이 아름다운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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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기둥이 눈부시게 빛났다.
이제 그것은 작은 태양 같았다. 직접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았다. 그 빛이 하늘로 솟구쳤다. 기둥 모양의 빛이 구름을 뚫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 빛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처럼. 축복처럼. 황금빛 입자들이 대지로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이 땅에 닿자 변화가 시작되었다.
회색빛 토양이 변했다.
처음에는 색이 변했다. 죽음의 회색이 옅어졌다. 갈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흙의 색이었다. 생명을 품을 수 있는 흙의 색이었다.
다음은 질감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땅이 부드러워졌다. 입자들이 풀어졌다. 공기가 스며들었다. 수분이 순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냄새가 변했다.
방사능 특유의 금속성 냄새가 사라졌다. 대신 흙냄새가 났다. 오래전 기억 속의 냄새였다. 비 온 뒤의 냄새였다. 봄날의 냄새였다.
페어리들이 환호했다.
"성공이다!"
"정화가 되고 있어!"
"기적이야!"
그들은 자신들의 마력이 이런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믿었다. 자랑스러워했다. 감격해했다. 어떤 이는 울었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시로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천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았다. 오백 명의 생명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수명이 단축되고 있었다. 하루에 몇 달씩 몇 년씩.
"용서하십시오."
그녀가 속으로 되뇌었다.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정화는 계속되었다.
반경이 넓어졌다. 처음에는 십 미터였다. 그다음은 이십 미터 삼십 미터 오십 미터. 원이 커질수록 더 많은 생명력이 필요했다. 추출 강도가 높아졌다.
천막 안의 신음 소리가 커졌다.
"아파..."
"숨이... 안 쉬어져..."
"도와주세요..."
하지만 아무도 돕지 않았다. 아무도 올 수 없었다. 의식이 진행 중일 때는 중단할 수 없었다. 중단하면 역류가 일어날 것이었다. 모든 에너지가 폭발할 것이었다. 그럼 모두가 죽을 것이었다.
---
두 시간이 지났다.
정화 반경이 백 미터에 달했다. 거대한 원형의 깨끗한 땅이 만들어졌다. 기적이었다. 진짜 기적이었다.
하지만 천막 안은 지옥이었다.
절반 이상이 의식을 잃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얕았다. 맥박은 뛰고 있었지만 약했다.
타나카 켄지는 간신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시야가 흐려졌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온몸이 차가웠다. 마치 피가 모두 빠져나간 것 같았다.
"여동생..."
그가 힘겹게 말했다.
사토 유키코는 의식을 잃었다.
목걸이가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금속 소리가 작게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 있는 꿈을. 행복했던 시절의 꿈을.
그리고 요시다 타케시는.
그는 숨을 멈췄다.
조용히. 평화롭게. 마치 잠든 것처럼.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있었다. 무엇을 보고 미소 지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
세 시간째.
시로가 주문을 멈췄다.
"종료."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세 시간 동안 계속 주문을 외운 탓이었다.
수정 기둥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마법진의 빛도 희미해졌다. 페어리들이 지팡이를 내렸다. 그들도 지쳐 있었다. 몇몇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성취감이 서려있었고 행복했다.
"해냈다..."
한 페어리가 중얼거렸다
"정말로 해냈어..."
"이 땅이 살아났어!"
그들은 정화된 땅을 바라보았다. 백 미터 반경의 원이었다. 완벽한 원이었다. 그 안의 흙은 건강한 갈색이었다. 방사능 측정기가 침묵했다.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았다.
그들은 환호했다.
울었다.
서로를 껴안았다.
기적이었다. 진짜 기적이었다.
하지만 시로와 아카시와 사치코는 축하하지 않았다.
그들은 천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GHQ 의료진이 달려가고 있었다. 천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들것이 나오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은 사람들이 실려 나왔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시로가 다가가서 물었다.
의료진 책임자가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대부분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마치... 마치 몇 년을 하루 만에 늙은 것 같습니다."
시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들은 정말로 몇 년을 잃었으니까.
"사망자는 몇 명입니까?"
아카시가 물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은 일곱 명입니다. 하지만 위독한 사람이 더 있어서..."
의료진 책임자는 고개를 저었다.
"최종 집계는 나중에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시로는 요시다 타케시의 시신을 보았다. 흰 천으로 덮여 있었다. 작은 몸이었다. 나이 들고 마른 몸이었다.
"그분의 가족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혼자셨다고."
그나마 다행이었을까.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면 더 슬픈 일이었을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죽음이라는 것이.
의료 트럭들이 떠났다. 부상자들을 싣고. 시신들을 싣고.
들판에는 페어리들과 정화된 땅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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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시로와 아카시와 사치코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첫 번째 정화 의식 성공적으로 완료."
시로가 소리 내어 읽었다.
"백 미터 반경의 토양 완전 정화 달성. 방사능 수치 측정 한계 이하로 감소. 마나 순환 정상화. 생명력 완전 회복."
"인간들의 협력은?"
사치코가 물었다.
"'인간 측의 적극적 협력으로 목표 초과 달성'이라고 쓰겠습니다."
아카시가 펜을 들었다.
"기술적 세부사항은?"
"생략합니다. '복잡한 다층 구조 마법진 활용. 상세 내용은 협력 계약에 따라 기술 보안상 기밀'이라고."
시로가 지시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공범자들의 눈빛이었다.
"계속할 수 있을까요?"
사치코가 물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속이면서. 계속 희생시키면서."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시로가 반문했다.
대답은 없었다.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을.
"두 번째 의식은 언제합니까?"
"일주일 후입니다. 장소는 남쪽 평원. 이번엔 오백 미터 반경을 목표로."
아카시가 일정표를 확인했다.
"그럼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GHQ가 이미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그들도 대단히 만족한거 같았습니다 다음에는 천 명 정도를 데려오겠다고"
천 명. 천 명의 생명력. 천 명의 수명.
"언젠가는..."
사치코가 말했다.
"폐하께서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그때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시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진행된 후일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받아들이시든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시든지."
"그것도 일종의 강요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시로가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폐하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폐하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방법입니다."
창밖으로 정화된 땅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그곳만은 다르게 보였다.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내일 폐하께서 현장을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다이짱이 전했다.
"정화된 땅을 직접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안내는 제가 하겠습니다."
시로가 자원했다.
"폐하께서 물으신다면?"
"기술적 성과를 강조하겠습니다. 페어리와 인간의 협력이 만든 기적이라고. 미래의 희망이라고."
"그것도 거짓은 아니죠."
아카시가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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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타이타니아가 정화 현장에 도착했다.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람에 치맛자락이 나부꼈다. 금빛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빛났다. 그녀는 천사처럼 보였다. 순수하고 깨끗한 존재처럼.
"놀랍군요."
그녀가 정화된 땅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해냈군요."
그녀는 땅에 무릎을 꿇었다. 흙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갈색의 건강한 흙이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흙이 흘러내렸다.
"살아 있어요."
그녀가 속삭였다.
"이 땅이 살아 있어요."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맺혔다.
"우리 아이들이 이 땅에서 놀 수 있겠어요. 꽃을 심을 수 있겠어요. 나무를 키울 수 있겠어요."
시로는 조용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았다.
"인간들에게 감사를 전해야겠어요."
타이타니아가 일어나며 말했다.
"그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들도 이익을 얻었습니다."
시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화된 땅에서 그들도 살게 될 것이니까요."
"그래도 감사는 전해야죠.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는 동반자니까요."
타이타니아의 미소는 환했다. 너무나 순수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로는 차마 그 미소를 바라볼 수 없었다.
"다음 의식은 언제죠?"
"일주일 후입니다."
"저도 참관하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시로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것은..."
"위험할까요?"
"아닙니다.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폐하께서는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으십니다. 의식은 저희가 진행하겠습니다."
타이타니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믿고 맡기겠어요."
그녀는 다시 정화된 땅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홋카이도 전체가 이렇게 되겠죠?"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시로가 대답했다. 그것만은 진심이었다.
타이타니아는 돌아섰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뒤돌아보았다.
"시로."
"예 폐하."
"고마워요. 정말로."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시로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정화된 땅 한가운데 홀로 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