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의식이 시작된지 한달째 되던 밤이었다.
삿포로의 하늘은 언제나처럼 납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구름 너머로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절멸전 이후 이 땅의 하늘에서 별이 사라진 지도 어언 수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느껴지는 그 공허함은 마치 세상 전체가 거대한 관 속에 갇혀버린 것 같은 질식감을 불러일으켰다. 도시의 불빛도 드물었다. 전력 공급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간혹 깜빡이는 희미한 불빛만이 아직 이곳에 생명이 남아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구 홋카이도청 별관 삼 층에 마련된 임시 사무실에서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오무라 타케시는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여러 장의 서류가 펼쳐져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보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창유리에는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반사되어 있었는데 마흔 중반의 나이답지 않게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고 눈 아래의 다크서클은 마치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짙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여전히 예리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재벌의 중추에서 살아남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냉철함이었다.
사무실의 난방은 작동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공기는 차갑게 느껴졌다. 벽 곳곳에 남아있는 방사능 오염의 흔적들이 마치 검은 곰팡이처럼 번져 있었고 천장의 일부는 금이 가 있었으며 복도 쪽 벽에는 총탄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이 건물은 절멸전 당시 격전지 중 하나였고 그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타케시는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복도에서 해골 하나를 발견했었다. 군복을 입은 채로 벽에 기댄 자세로 죽어있던 그 누군가는 아마도 이 건물을 지키다가 혹은 점령하려다가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조용히 매장하라고 지시했었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죽은 자들은 이미 충분히 많았고 한 명 한 명에게 애도를 표하기에는 살아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책상 위의 서류들은 모두 정화 의식에 관한 것이었다. 참여 인원 명단과 생체 데이터 변화 추이와 정화 효율 분석과 비용 대비 효과 계산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타케시는 그 숫자들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고 매번 읽을 때마다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엄청난 기회였다. 홋카이도 전역을 정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땅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에 따라 향후 수십 년간의 권력 구도가 결정될 것이었다. 아라사카 재벌은 절멸전 이전부터 일본 경제의 중추였고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확장해야 했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했으며 경쟁자들보다 한 발 앞서 나가야 했다.
타케시의 손가락이 책상을 두드렸다. 규칙적인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그는 지금 홋카이도에 모여들고 있는 다른 세력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에너하임 일렉트로닉스가 이미 대표단을 보냈다는 정보가 있었다. 그들은 PMC 사업으로 절멸전 이후에도 번창했고 특히 치안이 무너진 지역에서는 사실상 준군사조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홋카이도의 치안을 장악한다면 아라사카의 사업 전개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NHK도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교통과 통신을 장악한 그들은 정보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권력을 의미했다. 오츠카 홀딩스는 의료와 제약 분야에서 독보적이었는데 정화 사업으로 인한 인간들의 건강 문제가 불거지면 그들의 입지가 더욱 강화될 것이었다.
문이 노크되었다. 두 번의 짧고 정확한 노크였다. 타케시는 그 소리만으로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고 그의 비서가 들어왔다. 야마다 아키코는 오십 대 중반의 여성으로 타케시가 아라사카에 입사했을 때부터 그의 곁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절멸전 당시 도쿄에 있었고 그곳에서 가족 전부를 잃었지만 그 이후로도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무표정했고 목소리는 언제나 차분했으며 손은 언제나 정확하게 움직였다. 타케시는 때때로 그녀가 정말로 인간인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완벽한 기계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본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녀가 새로운 서류 뭉치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류의 표지에는 아라사카 재벌의 붉은 로고가 찍혀 있었고 그 아래로 극비 문서라는 도장이 선명했다.
"사브로 회장님께서 직접 결재하신 문서입니다. 홋카이도 사업부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셨습니다. 추가 예산으로 백억 엔이 배정되었고 본토에서 기술진 이백 명과 중장비 오십 대가 일주일 내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망설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 그것은 다음에 나올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계열사들과의 전면적인 협력이 지시되었습니다. NHK의 통신망과 오츠카의 의료 시스템과 소일렌트의 식량 공급망을 모두 연계하여 홋카이도에 통합 인프라를 구축하라는 명령입니다."
"완전한 장악이군요."
사브로 아라사카는 절멸전 이전부터 일본 재계의 전설이었고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아 여전히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작은 것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약 홋카이도에 손을 뻗친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에너하임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타케시가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들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제 밤 삿포로 항구에 수송선 세 척이 도착했습니다. 화물의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항만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군사 장비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오전 에너하임의 북부 담당 부사장 마츠모토 켄이 직접 해협을 건넜다고 했습니다."
타케시의 손가락이 멈췄다. 마츠모토 켄은 에너하임의 실세 중 한 명이었고 그가 직접 움직인다는 것은 에너하임이 이 사업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회담 요청이 있었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비공식 채널을 통해 탐색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협력하기보다는 경쟁하려는 것 같습니다."
타케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아라사카와 에너하임은 오랜 숙적이었고 어느 한쪽이 양보할 리 없었다. 홋카이도는 새로운 전장이 될 것이었고 이번에는 총이 아니라 계약서와 장부로 싸우게 될 것이었다.
"소일렌트 쪽은 어떻습니까?"
타케시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소일렌트 코퍼레이션은 일본 페어리들이 운영하는 기업이었고 식량 생산과 배급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법과 기술을 결합하여 오염된 토양에서도 식용 가능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개발했고 그것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요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일본 페어리 연합 측은 아라사카와의 협력에는 관심이 있지만 여왕 폐하의 승인 없이는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아키코가 또 한 번 망설였다.
"그들은 정화 사업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지만 인간들의 생명력 수탈에 대한 소문이 페어리 사회 내부에서 조금씩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확증은 없지만 만약 이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타케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것은 그가 가장 우려하던 부분이었다. 정화 의식의 진짜 메커니즘은 극소수만 알고 있었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비밀로 유지되어야 했다. 만약 진실이 드러난다면 인간과 페어리 사이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될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모든 사업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그 소문의 출처를 파악하십시오. 그리고 확산을 막을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그가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아키코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를 했다.
밤의 정적이 다시 흘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고 어디선가 금속이 바람에 부딪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타케시는 서류를 펼쳤다. 회장의 결재 도장이 찍힌 명령서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의 눈이 특정 문단에 멈췄다. "홋카이도는 제국 재건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 땅을 아라사카의 영토로 만들어라." 문장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거웠다. 이것은 단순한 사업 지시가 아니었다. 이것은 전쟁 선포였다.
"NHK 쪽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있습니까?"
타케시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들은 이미 삿포로 시내 주요 지점에 중계소 설치를 시작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재난 방송 복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보 통제망을 구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요정원 청사 주변과 GHQ 본부 근처에 집중적으로 설비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아키코가 새로운 서류를 꺼내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삿포로 시내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붉은 점들이 여러 곳에 찍혀 있었다. 각 점은 NHK의 중계소나 통신 거점을 의미했다. 타케시는 그 배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NHK는 교통과 통신 분야에서 아라사카의 계열사였지만 동시에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정보라는 무형의 자산을 다루었고 그것은 때로 물리적 자산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들의 책임자는 누구입니까?"
"쿠로다 신지입니다. 이십팔 세로 NHK 내에서도 신진 세력으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기술력은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고 특히 암호화 통신과 정보 보안 분야에서는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사실상 다 죽은 NHK를 다시 살려놓은 천재죠."
"천재라...." 타케시는 그 이름을 기억 속에 저장했다. 젊고 유능한 기술자. 그런 인물들은 양날의 검이었다. 충성심만 확보한다면 강력한 자산이 되지만 야심이 과하면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가 될 수 있었다.
"오츠카 홀딩스는요?"
"그들은 더 조용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페어리들의 방사능 병 치료를 지원하는 인도주의적 사업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의약품 공급을 독점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정화 의식 참여자들에게 필수적인 회복 약물의 가격을 단계적으로 인상하고 있습니다."
타케시의 입가에 냉소적인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전형적인 재벌의 방식이었다. 필수 불가결한 것을 장악하고 그것으로 상대방의 목줄을 쥐는 것. 오츠카가 의약품을 통제하는 한 페어리들은 아무리 정화 의식을 진행해도 결국 인간 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피스 뱅크의 움직임은 파악되었습니까?"
타케시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스타피스 뱅크는 이요들이 운영하는 금융기관이었고 홋카이도 경제의 십오 퍼센트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요정들의 자산을 관리했고 특히 소일렌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들은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요정원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타피스의 실질적 운영자인 카와시마 렌은 이요 출신이지만 엘븐하임에서 건너온 적요 세력과도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양쪽 모두와 거래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형적인 금융업자군요."
타케시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멸과 존경이 뒤섞여 있었다. 금융업자들은 언제나 그랬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서지 않으면서도 양쪽 모두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려고 했다.
"닛폰긴코는 어떻습니까?"
"그쪽은 거의 움직임이 없습니다. 절멸전 이후 본토의 주요 지점들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홋카이도 지점도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현재는 GHQ와 자유민주당의 재정 관리 정도만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잘 쳐줘도 5푼도 안될겁니다."
타케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닛폰긴코는 한때 일본 최대의 은행이었지만 지금은 과거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절멸전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오래된 권위는 무너졌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누가 살아남고 누가 사라질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송이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며 떨어지고 있었다.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불길했다. 각각의 눈송이 안에는 방사성 물질이 담겨 있었고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이 땅을 천천히 죽이고 있었다. 타케시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화 사업은 단순히 땅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을 재편하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있을 것이었다. 인간들의 생명력이 빨려나가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엄청난 기회이기도 했다. 만약 아라사카가 그 비밀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페어리들은 영원히 인간 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요정원 내부의 파벌 상황은 어떻습니까?"
타케시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핵심이었다. 페어리들은 하나의 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파벌로 나뉘어 있었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었다.
아키코가 두꺼운 파일을 꺼냈다. 표지에는 "요정원 파벌 분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현재 요정원은 크게 네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세력은 충성파로 49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여왕 폐하께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엘븐하임 출신 페어리들이며 환천성창이라는 정부 기구를 통해 경제의 2할정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타케시는 그 숫자들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49석. 과반에는 못 미치지만 압도적인 다수였다. 하지만 그것이 여왕의 뜻이 항상 관철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치는 숫자만으로 움직이지 않으니깐.
"독립파는 19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도 엘븐하임 출신이지만 여왕과는 다른 노선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요림재부자문처를 통해 경제에도 발을 어느정도 걸치고 있으며 특히 군사 분야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광국방안전위원회가 그들의 거점입니다."
타케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독립파. 엘븐하임에게서 벗어나는 데에 동의하지만 굳이 충성파로 분류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즉, 그들은 여왕에게 만족하고 있지않다. 그렇다면 그들과 거래할 여지가 있을지도 몰랐다. 충성심이 없는 자들은 언제나 이익으로 움직였고 이익으로 움직이는 자들은 협상이 가능했다.
"회귀파는 9석. 이들은 엘븐하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파입니다. 숫자도 적고, 여왕과 적요세력과는 직접 대치하는 입장이지만, 그들이 입장을 관철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본국이겠지, 고귀하신 엘프나리들이 전쟁한번 졌다고, 물론 그 전쟁이 정말로 이 행성을 죽여버릴뻔 한 것이더라도 그놈들이 포기할리가 없다."
타케시가 중얼거렸다. 그것은 골치 아픈 변수였다. 엘븐하임은 페어리 문명의 발상지이자, 마법의 총본산이고 수만 년의 역사를 가진 제국이었으며,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국가였다. 만약 그들이 홋카이도에 개입한다면 모든 계산이 틀어질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본 페어리 연합이 9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 이 땅에 살던 페어리들이며 소일렌트와 스타피스 뱅크를 통해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특히 홍마관이 그들의 핵심 세력입니다."
홍마관. 타케시는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오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흡혈귀 가문이었고 홋카이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페어리 세력 중 하나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중립을 지켜왔지만 최근 요정원에 합류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흥미롭군요."
타케시가 창밖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충성파는 너무 강고했다. 그들을 설득하거나 매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독립파나 이요는 다를 수 있었다. 특히 이요는 이익에 민감할 것이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인간들과 오랫동안 거래해왔고 실용주의적이었다.
"자유민주당의 재건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되었습니까?"
타케시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자유민주당은 절멸전 이전 일본의 집권당이었고 GHQ가 주도하여 재건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야시 장군이 직접 주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당원 수는 약 삼천 명이며 대부분 구 정치인들과 관료들 그리고 GHQ 관계자들입니다. 요정원 내에서 9석의 의석을 할당받았고 경제적으로는 재정금융관리국을 통해 입김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아홉이라..."
타케시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때 일본을 지배했던 정당이 이제는 요정원 내의 소수 파벌로 전락했다. 그것이 전쟁 이후의 현실이었다. 인간들은 더 이상 이 땅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페어리들의 그늘 아래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처지가 되었다.
"다이묘들은 어떻습니까?"
"도쿠가와 가문을 비롯한 네 개 세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보이는 힘은 미미하지만 있지만 실제 영향력은 그보다 큽니다. 특히 지방에서는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를 하고 있습니다. 요정원은 그들을 통제하기보다는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 같습니다."
타케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봉건 영주들의 부활은 시대착오적인 질 나쁜 농담이었지만 동시에 현실적이기도 했다. 중앙 정부가 약할 때는 지방 세력이 강해지는 법이었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었다.
"그 미치광이들...아니 대본영..이라 이름 바꾼 자위대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육군부가 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비가 노후화되었고 보급도 불안정합니다. 해군부는 함선 대부분이 파괴되어 연안 경비 정도만 가능한 상태입니다. 공군부는 사실상 와해되었습니다."
타케시는 그 정보를 곱씹었다. 그들이 스스로를 대본영이라 부르든, 자위대든 지금은 과거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병력은 있지만 무기가 없었고 무기가 있어도 탄약이 없었으며 탄약이 있어도 보급할 수송 수단이 없었다. 군대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군사력은 페어리 측이 장악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여왕군 시위대가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충성파와 적요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도로 훈련된 마법 전투 부대입니다. 홍마관과 하쿠레이 신사까지 포함시킨다면 열도 전체의 군사력 중 7~8할이 여왕의 명령을 따릅니다."
타케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페어리들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들이 그들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만약 충돌이 발생한다면 인간들은 이길 수 없었다. 협상과 거래만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다.
"우리는 에너하임조차 버거운 상대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에너하임의 PMC 병력은 약 오천 명으로 추정되며 절멸전 이후에도 최신 장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명목상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독자적인 군사 조직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타케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했다. 너무나 복잡했다. 페어리와 인간이 뒤섞여 있었고 각자의 파벌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으며 재벌과 군부와 정치 세력이 모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 혼돈 속에서 아라사카가 주도권을 쥐려면 매우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당분간은 관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타케시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성급하게 움직이면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각 세력의 동향을 계속 파악하고 우리에게 유리한 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특히 정화 사업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폭로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아키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마쳤다. 그녀가 일어서려는 순간 타케시가 손을 들어 그녀를 멈추게 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여왕 폐하에 대한 정보는 얼마나 확보되었습니까?"
아키코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또 다른 파일을 꺼냈다. 이번 파일은 다른 것들보다 훨씬 얇았고 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매우 제한적입니다. 타이타니아 폐하는 공개적인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요정원 회의에도 직접 참석하는 경우가 드물고 대부분 측근들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십니다.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그녀가 파일을 펼쳤다. 거기에는 몇 장의 흐릿한 사진과 짤막한 메모들만 있었다.
"폐하는 엘븐하임 출신이며 황실 직속 근위대 출신으로 추정됩니다. 나이는 불명이지만 외모상으로는 이십 대 초반으로 보입니다. 성격은 이상주의적이며 매우 순수하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어서 충성파들이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순수하다..."
타케시가 그 단어를 반복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지만 그것은 따뜻한 미소가 아니었다.
"순수한 지도자는 위험합니다. 그들은 예측하기 어렵고 이익으로 설득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배신에 약하고 진실을 알았을 때 쉽게 무너지니까요."
"무슨 뜻입니까?"
"만약 여왕 폐하께서 정화 사업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의 신하들이 인간들의 생명력을 빨아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아키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비장의 카드로 남겨두십시오."
타케시가 조용히 지시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 필요한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증거를 수집하고 보관해두십시오. 정화 의식의 실제 메커니즘에 대한 모든 자료와 참여자들의 증언과 생체 데이터 변화 기록을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보험이 될 것입니다."
타케시는 창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송이들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그 광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거짓말은 영원히 유지될 수 없었고 비밀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아라사카는 홋카이도를 장악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진실이 드러나도 이미 늦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