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의식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난 아침이었다. 삿포로 시청사 주변으로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던 시각에 이상한 기운이 공기 중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히 차가운 바람이나 이른 아침의 냉기가 아니었다. 시청사 정문을 지키던 경비 페어리들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본능이 격렬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무언가 압도적인 존재가 접근하고 있었다.
안개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천천히 갈라지기 시작했고 그 틈새로 네 개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맨 앞을 걷고 있던 존재는 얼핏 보기에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창백한 피부는 마치 한 번도 햇빛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처럼 하얗게 빛났고 짧게 자른 하늘색 머리카락이 미풍에 살랑거렸다. 그러나 그녀의 등 뒤에서 천천히 펄럭이는 검은 박쥐 날개가 그녀가 결코 평범한 페어리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붉은 드레스는 고급 벨벳으로 제작된 것처럼 보였고 분홍색 모자는 정교한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의 외형만 본다면 귀족 가문의 인형처럼 사랑스러웠지만 붉은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오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온 고귀한 흡혈귀의 것이었다.
경비병 중 한 명이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동료가 창을 움켜쥔 손에 땀이 배어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투 훈련을 받았지만 이런 존재와 마주할 준비는 되어있지 않았다.
"제압할까요?"
흡혈귀 소녀의 바로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발의 메이드가 조용히 그러나 명확하게 물었다. 그녀의 메이드복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자요이 사쿠야라는 이름을 가진 이 메이드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든지 주변의 시간을 정지시켜 경비병들을 무력화시킬 준비가 완료된 상태였다. 그녀의 손이 메이드복 안쪽으로 살짝 움직였고 거기에는 날카롭게 벼린 은색 나이프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사쿠야. 우리는 손님으로 온 것이니깐"
레밀리아가 경비병들을 향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더욱 당황스러워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흡혈귀가 예의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들을 더 긴장시켰다.
"그래도 경계는 늦추지 마세요. 메이링"
레밀리아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붉은 머리의 중국풍 복장을 한 요괴에게 향했다. 홍 메이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문지기는 홍마관의 정문을 수백 년간 지켜온 충직한 부하였다. 그녀는 차이나드레스를 변형한 독특한 의상을 입고 있었고 모자에는 오각성이 장식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메이링이 공손하게 대답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기 감지 능력은 이미 시청사 건물 내부의 모든 생명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삼 층에 있는 강력한 기운부터 일 층 복도를 순찰하는 경비병들까지 모든 것이 그녀의 감각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무술로 제압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책에서 읽었던 것보다는 실망스럽네요."
네 번째 인물인 보라색 머리의 마법사가 두꺼운 책을 들고 중얼거렸다. 파츄리 널리지는 홍마관의 방대한 도서관을 관리하는 마녀였는데 천식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그녀가 보유한 지식의 양은 누가와도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레밀리아가 시청사 정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짧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홍마관의 주인 레밀리아 스칼렛입니다. 모든 요마들의 어머니 타이타니아 폐하를 알현하고자 왔습니다."
경비병 중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페어리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상황에 대한 지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의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졌고 몇 분 후 다이짱이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홍마관이라고 했습니까?"
다이짱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깔려있었다. 홍마관은 이 열도에서, 아니 엘븐하임 외부에서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페어리 세력 중 하나였지만 지금까지 철저하게 중립을 유지해왔다. 인간과 페어리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그들이 지금 이 시점에 나타났다는 것은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있음을 의미했다.
"수백년간 가만히 있다가 이제서 나타난 이유가 대체..."
레밀리아가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수백 년을 살아온 존재만이 지을 수 있는 여유로운 것이었다. 그녀의 능력은 운명을 조작하는 것이었고 이미 이 만남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희미하게나마 보고 있었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녀가 서쪽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붉은 실들이 그녀의 특별한 시야에 들어왔다. 운명의 실들이 각각 어딘가에서 끊어지고 있었고 그 끊어진 실들이 거대한 흐름을 이루며 홋카이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수만 개의 실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며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큰 변화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찬란했던 제국과 가증스러운 적들이 동시에 무너졌고 어머니께서도 그 새장을 뛰쳐나오셨죠, 그리하여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답니다 "
레밀리아가 잠시 말을 멈추고 타이타니아가 있을 삼 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유리창 너머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루한 것을 싫어하거든요. 당신도 알겠지만 수백 년을 살다보면 유쾌함을 줄만한 일이 그다지 없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흥미진진한 일이 일어날 것 같네요?"
그녀의 솔직한 고백에 다이짱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고귀한 흡혈귀가 역사적인 순간에 끼어들려는 이유가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라는 것인가?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진실이 담겨있었다. 레밀리아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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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사쿠야는 주변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복도의 양쪽 벽에는 정화 사업의 진행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들이 걸려있었고 몇몇 방에서는 인간과 페어리가 함께 서류 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쿠야는 이 광경에 작은 관심을 보이며 주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흥미로운 실험이네요 아가씨. 인간과 페어리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실험이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겠지요."
메이링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무술의 달인답게 건물 곳곳에 배치된 경비들의 실력을 한눈에 평가하고 있었다. 전투병기로서 창조된 종족이라는 이명이 무색하게도 대부분은 기본적인 훈련만 받은 것처럼 보였고 실전 경험은 거의 없어 보였다. 자세도 어딘가 어색했고 마법이나 무기를 다루는 솜씨도 없어보였다. 진짜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들은 몇 분도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회의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넓은 회의실 안쪽의 커다란 창가에 타이타니아가 서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을 비추며 후광처럼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레밀리아의 붉은 눈동자가 공기 중에서 마주쳤다. 두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회의실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긴장했다.
"레밀리아 스칼렛."
타이타니아가 먼저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권위가 담겨있었다.
"스칼렛 데빌 맨션의 주인이시며 홋카이도에서 가장 오래된 페어리 세력의 수장이십니다. 그리고 오백 년 이상을 살아오신 고귀한 흡혈귀 가문의 후예이시기도 하지요."
타이타니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당신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레밀리아의 표정에 약간의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요정들의 여왕이라는 이름은 장식이 아니었나보다
"오호라 저에 대해 조사를 하셨나 보네요. 영광입니다. 마음에 들어요. 저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거든요, 특히 재미있는 것들을요."
레밀리아가 우아하게 커티시를 했다. 그것은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동시에 진심이 담긴 경의의 표현이기도 했다. 오백 년을 살아온 흡혈귀가 한번도 본적없는 자신의 여왕에게 보이는 최소한의 예의였고 그녀 나름대로의 인정이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타이타니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불필요한 수사나 우회적인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협력을 제안하러 왔습니다."
레밀리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수백 년을 살아왔습니다. 인간들과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들의 문화와 습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식솔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파츄리가 마법으로 공중에 여러 장의 문서를 띄웠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푸른 빛의 문자들이 공중에서 빛나며 홍마관이 보유한 자산과 인력 그리고 영향력을 상세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표시했다. 숫자들과 도표들이 차례차례 나타났고 지도 위에 붉은 점들이 찍히며 홍마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보여주었다.
"홍마관은 현재 홋카이도 전역에 삼백 명의 협력자를 두고 있습니다. 대부분 일본 토착 페어리들이지만 인간 협력자도 상당수 있죠. 우리가 폐하의 새로운 질서에 합류한다면, 즉시 활용 가능한 행정력과 군사력을 얻게 될겁니다."
"대가는 무엇입니까?"
타이타니아가 냉정하게 물었다.
"폐하께서 하시는 일을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도록 해주새요. 구체적으로는 요정원에 자리를 좀 내어주시면 좋겠네요. 음...가능하다면 자취권도 인정해주시면 더할나위 없고요."
타이타니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레밀리아를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미유키가 타이타니아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들은 믿을 만합니다. 폐하. 홍마관은 수백 년간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죠. 다만.."
"다만?"
"레밀리아 스칼렛은 이른바 흡혈귀입니다. 인간의 피를 필요로 하는 특이한 개체죠
레밀리아가 그 말을 듣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의 입가에 송곳니가 살짝 드러났다.
"걱정 마세요. 우리가 무작정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은 자발적 헌혈자들로부터 소량씩 제공받을 뿐이에요. 희생자들은 거의 죽지 않아요. 시대가 변했어요, 야만적인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구요. 뭐, 피를 못마신지 십수년 가까이 되기야 했지만 전쟁전에는 말이에요"
사쿠야가 주인의 눈짓을 받고 또 다른 문서를 꺼냈다. 그것은 홍마관과 인간들 사이의 협정서였다.
"추가로 말씀드리자면 파츄리의 도서관에는 수천 권의 마법서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정화 마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고대 문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지식을 기꺼이 공유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시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학자의 열정으로 밝게 빛났다.
"정말입니까? 고대 마법서들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엘븐하임의 대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자료들이...!"
타이타니아가 결단을 내렸다
"좋습니다. 협력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저쪽의 페어리들과 논의하면 될것 같습니다."
레밀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작고 창백한 손이었지만, 그 악력은 놀라울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한 가지 경고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뭐죠?"
타이타니아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어린아이가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레밀리아를 바라보았다.
"제 능력은 운명을 조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보이는 운명의 실들이... 꽤 흥미로운 방향으로 얽히고 있네요. 당신과 당신의 부하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 복잡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그것도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요."
타이타니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두려움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순수했고 어떤 두려움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환영합니다."
타이타니아가 진심으로 말했다.
"함께 새로운 홋카이도를 만들어갑시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레밀리아는 그 순수한 열정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이 여왕은 정말로 이상주의자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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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후 또 다른 특별한 방문자가 나타났다. 시청사 정문 앞에서 큰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쿠레이 신사의 무녀 하쿠레이 레이무입니다!"
자신을 소개하는 소녀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빨간색과 흰색의 무녀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독특했다. 전통적인 무녀복과는 달리 소매가 분리되어 어깨가 드러나 있었고 치마는 짧게 개량되어 있었다. 갈색 머리를 커다란 빨간 리본으로 묶은 그녀의 겉모습은 평범한 십대 소녀처럼 보였지만 그 눈빛에는 수많은 이변을 해결해온 베테랑 무녀의 경험이 깊이 서려있었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고헤이가 매달려있었고 등 뒤에는 여러 개의 부적이 꽂혀있었다.
"또 온 거야, 레이무?"
레밀리아가 삼 층 창문에서 내려다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기쁨이 담겨있었다.
"당신도 여기 있었네요!"
레이무가 창문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두 사람은 오랜 앙숙이면서도 동시에 묘한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쿠레이 신사의 무녀로서 환상향의 경계를 관리하고 요괴를 퇴치하는 것이 제 본래 임무입니다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레이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지며 무게감이 실렸다.
"이 땅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균형이 깨질 수 있죠. 제 역할은 균형을 유지하는 거예요. 인간과 요괴, 현실과 환상 사이의 균형을요
타이타니아가 직접 그녀를 맞이하러 내려왔다. 두 사람이 시청사 입구에서 마주 선 순간 공기 중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타이타니아의 금빛 머리카락과 레이무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하쿠레이 레이무, 마녀와 함께 수많은 이변을 해결해온 무녀라고 들었습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타이타니아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명성이라니 너무 거창합니다. 그냥 일이 터지면 해결하러 다니는 것뿐입니다. 사실 저는 꽤 게으른 편이거든요. 신사에 있을 때는 대부분 마루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차나 마시면서요."
레이무의 지나치게 솔직한 고백에 다이짱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자신이 게으르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타이타니아는 오히려 밝게 웃었다.
"솔직하시네요. 그런 모습이 좋습니다. 거짓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요."
타이타니아가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레이무의 솔직함이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엇을 제안하시려고 오셨습니까?"
"제 경계 조작 능력입니다."
레이무가 허리춤에서 고헤이(御幣)를 꺼내 들었다. 린노스케 모리치카가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그녀의 정화봉이었다. 흰색과 빨간색의 종이가 매달려있었고 나무 자루에는 세밀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요정들, 요괴들과 인간들이 섞여살게 되면 분명 크게 작은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사실 제안이라고 할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껏 하던 일들을 조금 도움을 받아서 하겠다는 말을 하러 왔습니다. 폐하께도 분명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대가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레이무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신사에 인간 참배객들이 더 많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요괴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요. 그리고..."
레이무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금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새전함에 돈도 좀 넣어주고요. 신사 운영이 쉽지 않거든요. 눌러붙어있는 신 하나 때문에..."
"좋습니다."
타이타니아가 기쁘게 대답했다.
"하쿠레이 신사는 새 정부의 공식 종교 기관 중 하나로 인정하겠습니다. 그리고 매달 일정한 지원금도 제공하겠습니다. 신사가 잘 유지되어야 사람들도 찾아올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입니까? 와아!"
레이무가 펄쩍 뛰며 기뻐했다. 평소의 쿨하고 냉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순수한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마치 원하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다니! 이제 매일 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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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의식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홍마관과 하쿠레이 신사까지 합류하자 GHQ도 더 이상 상황을 관망만 할 수 없게 되었다. 홋카이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는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커져있었고 본토로부터의 난민들이 계속해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야시 장군이 공식적으로 시청사를 방문한 것은 이월 중순의 어느 추운 날이었다. 그는 군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왔는데 그것은 이 방문이 군사적 압박이나 위협이 아닌 정치적 협상임을 분명히 하는 제스처였다. 그의 뒤에는 소수의 수행원들만 따라왔고 그들 역시 무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회의실에는 확대된 세력의 대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넓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타이타니아가 앉아있었고 그녀의 양옆으로 다이짱과 시로가 자리했다. 새로 합류한 레밀리아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레이무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맞은편에는 하야시 장군과 사사키 대령 그리고 몇몇 민정관들이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홋카이도 지도와 여러 문서들이 펼쳐져 있었다.
"상황이 많이 변했습니다."
하야시 장군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각 인물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특히 레밀리아를 볼 때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오백 년을 산 흡혈귀의 존재는 군인인 그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는 수많은 전투를 겪었지만 이런 초자연적 존재와 협상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레밀리아가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장군. 저는 예의 바른 흡혈귀예요. 초대받지 않은 곳에는 가지 않죠.
그말에 레이무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잠시 째려봤지만 눈치챈 이는 메이링뿐이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사사키 대령이 커다란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지도에는 본토의 주요 도시들이 표시되어 있었고 붉은색으로 칠해진 지역들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현재 본토의 상황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악화되고 있습니다. 도쿄는 이미 완전히 버려진 상태이고 오사카도 절반 이상이 죽음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나고야와 후쿠오카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생존자들이 살 곳을 찾아 북쪽으로 대규모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키가 지도 위에 여러 개의 붉은 화살표를 그렸다. 화살표들은 모두 홋카이도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의 추산으로는 한 달 안에 최소 오만 명이 석 달 안에는 십오만 명이 홋카이도로 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만약 상황이 더 악화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십오만 명이라니."
다이짱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식량 배급 주거 시설 의료 지원 치안 유지 모든 것을 고려해야 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가진 자원으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식량도 부족하고 주택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제안이 있습니다."
하야시 장군이 새로운 문서를 꺼냈다. 그것은 정치 체제에 관한 제안서였다.
"자유민주당을 재건하고자 합니다."
회의실 안의 모든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유민주당은 절멸전 이전 일본을 수십 년간 지배했던 집권당이었다. 그 이름이야말로 일본 정치의 상징이었다.
"물론 예전과 똑같은 형태는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당으로 재건하려 합니다. 인간들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하면서도 요정원과 긴밀하게 협력하는 구조를 만들고자 합니다. 인간과 페어리가 함께 일하는 정부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타이타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원적인 정치 체제가 필요합니다. 요정원을 중심축으로 삼되 모든 세력이 자유롭게 참여하고 의견을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서로 죽일듯이 싸우던 나날은 이제 질렸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진지했고 눈빛은 순수한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타이타니아는 정말로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바로 그때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경비병이 헐떡이며 뛰어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긴급 보고드립니다! 남쪽에서 대규모 인원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대규모라니 얼마나 되는가?"
하야시 장군이 날카롭게 물었다.
"약 삼천 명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자가 자신을 신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라고 칭하며 알현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회의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도쿠가와라는 이름은 일본 역사에서 절대 가볍게 들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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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로 안내된 남자는 사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전통적인 하오리를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진짜 일본도를 차고 있었다. 그의 복장은 마치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가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에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하오리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인 삼엽 아욱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뒤에는 사무라이 복장을 한 호위병들이 일렬로 서있었다. 그들 모두가 허리에 일본도를 차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시대극 촬영장 같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공의 방계 후손 도쿠가와 마사히로라고 합니다."
그가 정중하지만 동시에 거만한 태도로 인사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 명문가의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절멸전 이후 흩어진 일본인들을 규합하여 하코다테 남쪽에 새로운 번을 세웠습니다. 현재 약 삼천 명의 백성들이 저를 번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제게 충성을 맹세했고 저는 그들에게 보호와 질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십일 세기에 번주라니 말이 됩니까?"
시로가 비웃듯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담겨있었다. 근대 국가 체제를 연구한 학자로서 봉건 제도의 부활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사히로는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혼란의 시대에는 강력하고 명확한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민주주의는 평화로운 시대의 사치입니다.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해줄 강한 지도자를 원합니다. 그리고 전통은 사람들에게 안정감과 정체성을 제공합니다. 저는 그들에게 질서와 보호를 제공하고 그들은 저에게 충성과 노동을 바칩니다.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관계입니다.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레밀리아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마사히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들의 권력 다툼을 관찰해왔고 이런 야심가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들의 패턴은 시대가 변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죠?"
타이타니아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불필요한 대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인정을 바랍니다."
마사히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희 영지를 자치구로 공식 인정해주신다면 새로운 정부에 전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정기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고 공공 사업에 인력을 제공하며 필요시에는 군사 지원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협력자가 되고 싶습니다."
"조건부로 수락하겠습니다."
타이타니아의 즉각적인 대답에 회의실의 모든 이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긴 토론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폐하!"
다이짱이 급하게 외쳤지만 타이타니아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다이짱, 그대가 항상 말하지 않았나요? 지금 당장 홋카이도 전체를 직접 통치할 만한 행정력도 군사력도 없습니다. 이런 지역 세력들과의 협력은 불가피합니다. 그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습니다."
타이타니아가 마사히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순수했지만 동시에 단호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로 요정원의 최고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로 정화 사업에 매달 최소 백 명의 인력을 제공해야 합니다. 셋째로 주민들에 대한 과도한 착취와 권리 침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넷째로 정기적으로 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 조건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모두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사히로가 즉시 대답했다. 그는 이미 이 정도의 조건은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어때요, 다이짱 저도 꽤 하죠?"
그 후로도 비슷한 방문들이 계속 이어졌다. 자칭 오다 가문의 후계자라는 자가 나타났고 다테 가문의 재건자를 주장하는 무리도 왔다. 심지어 새로운 천황가를 세우겠다고 주장하는 집단까지 나타났다. 대부분은 실질적인 힘이 없어 거절당했지만 진짜로 인구와 영토를 확보한 네 개 세력만이 다이묘로 공식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