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공식 회담은 정화가 시작된 지 열흘째 되는 날에 열렸다.
장소는 구 홋카이도 청사 건물이었다. 한때 이곳은 행정의 중심이었다.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오갔고 서류가 산처럼 쌓였으며 복도에는 민원인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절멸전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건물은 텅 비었고 창문은 깨졌으며 천장에서는 물이 새어 들어왔다. 겨울바람이 복도를 휘몰아치며 서류들을 날려버렸고 그 서류들은 눈과 섞여 바닥에 얼어붙었다. 의미를 잃은 문자들이 하얀 죽음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요정원은 이곳을 선택했다.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페어리들이 단순히 피난민이 아니라 이 땅의 정당한 통치자임을 보여줘야 했다. 건물 앞에는 새로운 깃발이 걸렸다. 청록색 바탕에 은빛 날개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그것은 바람에 펄럭이며 폐허 위로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고 있음을 선언했다. 깃발 아래로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누더기를 입지 않았다. 오무라가 제공한 새 군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에너하임이 제공한 소총을 들고 있었다. 무장은 여전히 빈약했지만 며칠 전과는 달랐다.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죽음을 기다리던 눈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눈으로 변했다.
건물 내부는 달랐다. 페어리들이 밤새 청소한 덕이었다. 깨진 유리를 치우고 바닥을 닦았으며 천장의 구멍을 천으로 막았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추웠고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그래도 회의를 할 만한 공간이 되었다. 삼 층 대회의실에 긴 테이블이 놓였다.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페어리들이 다른 건물에서 찾아와 계단으로 끌어올렸다. 무거운 나무 테이블이었다. 운반하는 동안 몇 명이 다쳤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는 흰 천이 깔렸다. 페어리 전통 의식용 천이었다. 얼룩이 있었고 가장자리가 해어졌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 위로 찻잔들이 놓였다. 도자기 찻잔이었다. 몇 개는 금이 가 있었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그것들 역시 폐허에서 건져낸 것들이었다. 인간 문명의 잔해를 모아 새로운 문명의 도구로 삼고 있었다. 창문에는 새 유리가 끼워졌다. 오무라가 제공한 강화 플라스틱이었지만 투명하지는 않았다. 빛이 통과하지만 밖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흐릿한 세상이 그 너머에 있었다. 눈 내리는 회색빛 세상이었다.
벽난로가 설치되었다. 이것도 임시방편이었다. 금속 드럼통을 개조한 것이었다. 그 안에서 장작이 타고 있었다. 장작은 페어리들이 인근 폐가에서 뜯어온 문짝과 서가였다. 한때 누군가의 집을 이루던 것들이 이제는 연료가 되어 타올랐다. 불꽃은 따뜻했다. 방 안의 온도가 올라갔다. 완전히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숨결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불빛이 벽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림자들은 춤을 추듯 흔들렸다. 마치 유령들이 이 회담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타이타니아는 일찍 도착했다. 그녀는 상석에 앉아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았다. 그녀의 드레스는 새것이 아니었다. 엘븐하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청록색 비단에 은실로 무늬가 놓인 드레스였다. 하지만 긴 여행과 혹독한 환경 탓에 색이 바랬고 가장자리가 닳았다.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여왕의 품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왕관이 있었다. 가벼운 은 왕관이었다. 보석은 하나도 박혀 있지 않았다. 단순한 형태였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고결함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날개는 접혀 있었다. 무지개빛 날개가 등 뒤로 우아하게 펼쳐졌다가 다시 접혔다.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페어리의 날개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다이짱이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두꺼운 파일을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지난 며칠간 준비한 모든 자료가 들어 있었다. 홋카이도의 오염 지도와 정화 예상 일정과 필요한 자원 목록이었다. 숫자들로 가득한 문서였다. 하지만 그 숫자들 하나하나가 생명을 의미했다. 얼마나 많은 페어리가 살 수 있는지와 얼마나 빨리 안전한 환경을 만들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숫자들이었다. 실질적으로 페어리들의 생명줄을 책임지는 대요정의 눈 아래에는 다크서클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지난 며칠간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계산하고 또 계산했다. 중요한 것은 회의장에서 오가는 말 몇마디로 정해질 것이었지만 어떻게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입지를 찾기위해, 점하기 위해 그녀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미유키는 여왕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날개는 접혀 있었지만 가끔씩 떨렸다. 긴장의 징후였다. 그녀는 현지 페어리-이요 출신으로서 페어리 왕국의 외교 담당이었고 이 협상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두꺼운 가죽 파일이 들려 있었다. 표지가 닳아 있었고 모서리가 해어져 있었으며, 그 안에는 지난 며칠간 작성한 협상안이 들어 있었다. 각 기업에게 제시할 조건과 받아낼 조건들이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것은 전장을 바라보는 장군의 눈빛이었다. 그녀는 진실로 이 회담이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전쟁임을 알고 있었다. 말로 싸우는 전쟁이었다.
오무라 인더스트리가 두 번째로 도착했다. 대표는 오무라 스미노리였다. 육십대 초반의 남자였다.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했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하지만 그의 등은 곧았고 걸음걸이는 확고했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낡았지만 정갈했다. 넥타이는 파란색이었다. 아라사카의 상징색이었고 오무라 기업의 상징색이었다. 그의 뒤를 기술진 넷이 따랐다. 그들은 모두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화면에서 푸른 빛이 새어나왔다. 그들이 걸을 때마다 가운 자락이 바닥을 스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렸다. 오무라는 테이블 건너편에 앉았다. 그는 타이타니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중했지만 격식을 차린 인사였다. 그의 눈빛은 차분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사업을 해온 사람의 눈빛이었다. 수많은 협상을 겪었고 수많은 거래를 성사시켰으며 수많은 배신도 경험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 안에는 회의가 있었지만 동시에 실용주의도 있었다. 그는 페어리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협력할 수는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 번째로 도착한 것은 소일렌트 코퍼레이션 대표단이었다. 그들은 다섯 명이 왔다. 모두 뚱뚱했다. 이상할 정도로 뚱뚱했다. 절멸전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갈비뼈가 드러나고 뺨이 꺼졌으며 눈이 움푹 들어간 이들이 열도의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소일렌트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영양 과잉이었다. 자신들이 생산하는 식량을 실험 삼아 과도하게 섭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광고이기도 했다. 우리 제품이 이렇게 효과적이라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걸을 때마다 살이 출렁거렸고 의자에 앉으면 의자가 삐걱거렸다. 대표는 페어리라고 알려져있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여왕을 보고싶지 않다는 생각이었을까, 현장에 도달한 것은 야마구치라는 남자였다. 오십대로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둥글었고 항상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눈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입만 웃고 있었다. 눈은 차갑고 계산적이었다.
에너하임 디펜스의 대표단이 네 번째로 들어왔다. 마츠모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측근인 사사키가 왔다. 마른 남자였다. 안경을 쓰고 있었고 역시 파일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방 안의 모든 것을 관찰했다. 누가 어디에 앉았는지와 누가 누구와 눈을 맞추는지와 누가 긴장하고 있는지를 모두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군인 둘이 서 있었다. 무장은 반납하지 않았다. 그들의 자세와 눈빛이 그들이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해주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은 NHK였다. 쿠로다 신지가 홀로 왔다. 그는 평상시와 똑같이 낡은 파카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헤드폰이 걸려 있었다. 여왕은 물론이고 다른 기업 대표들과 비교하면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테이블 끝에 앉으며 노트북을 꺼냈다. 화면이 켜지며 푸른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는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무엇을 기록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빠르고 정확했다.
회의실이 채워졌다. 벽을 따라 배석자들이 서 있었다. 페어리 의원들과 인간 보좌관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신뢰는 없었다. 단지 필요에 의한 동맹이었다. 실내의 온도가 올라갔다. 사람들의 체온과 벽난로의 열기가 합쳐졌다. 창문에 김이 서렸다. 밖의 세상이 더욱 흐려졌다.
타이타니아가 일어났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모든 눈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는 권위가 있었다. 여왕의 목소리였다. 비록 꼭두각시였으나 태어날 때부터 통치하도록 훈련받은 이의 목소리였다.
"우리는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무너졌고 문명은 사라졌으며 죽음이 모든 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우리는 계속 싸워나가야 합니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 시선이 테이블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각 대표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미유키와 야마구치와 사사키와 쿠로다를. 그들 모두가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우리 페어리들은 이 땅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방사능을 제거하고 오염된 토양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기술이 필요하고 자원이 필요하며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녀의 손이 테이블 위로 펼쳐졌다. 손가락이 흰 천을 어루만졌다.
"우리는 협력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하여 우리는 타인을 희생시키고 이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데에 모두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녀가 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딱딱 하는 소리였다. 나무가 열에 의해 갈라지는 소리였다.
오무라 켄지가 일어났다. 그는 타이타니아만큼 우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에는 수십 년 기업을 경영해온 사람의 무게감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오무라 인더스트리는 이미 정화 장비를 제공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제공할 것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하지만 분명했다. 회의실 구석구석까지 전달되었다.
"우리는 지난 십 년간 방사능 정화 기술을 연구해왔습니다. 수천억 엔을 투자했고 수백 명의 과학자가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죠, 페하께서도 아시다싶이 페어리들과의 몇번의 '실험'은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그가 잠시 멈췄다. 기술진 하나가 태블릿을 켰다. 화면이 벽에 투사되었다. 홋카이도 지도가 나타났다. 붉은 점들이 지도를 뒤덮고 있었다. 오염 지역들이었다.
"현재 홋카이도의 팔십칠 퍼센트가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 상태로는 아무도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무라의 대표를 넘어 '인간' 오무라 스미노리라는 사람은 '요정 동지'들과의 협력을 통해 이 역경을 반드시 극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지도 위의 붉은 점들이 천천히 초록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시뮬레이션이었다. 북쪽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우리도 대가가 필요합니다."
오무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것은 사업가의 눈빛이었다.
"욕심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열도를 다시 생명이 넘치는 대지로 만들고 싶습니다. 정화된 토지의 이십 퍼센트를 우리에게 할당해주십시오. 그곳에 공장을 짓고 연구소를 세울 것입니다. 또한 페어리들의 마력을 이용한 신기술 개발에 협력해주십시오. 루미나를 비롯한 요정분들을 치료한 데이터가 이제 조금씩 쌓이고 있고, 벌써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이짱의 손이 파일을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이십 퍼센트였다. 예상보다는 적었지만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그는 표정을 관리했다.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오무라는 페어리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이들이었고, 지금은 들을 때였다. 협상은 나중의 일이었다.
야마구치가 웃으며 일어났다. 그의 배가 테이블에 부딪혔다. 테이블이 약간 흔들렸다.
"소일렌트는 식량을 제공하겠습니다. 인간을 물론이고, 페어리 분들에게도 충분하고, 또 적절한 양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영양학적으로 완벽하게 균형 잡힌 식품입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싶이 우리 소일렌트의 대표분은 페어리십니다. 어찌 협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가방에서 녹색 용액이 든 병을 꺼냈다. 투명한 플라스틱 병이었다. 그 안의 액체는 걸쭉했다. 빛을 받으면 약간 빛났다.
"이것 하나면 하루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페어리분들에게는 마력이겠지요-섭취할 수 있습니다. 맛도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수만 명을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그가 병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액체가 출렁거렸다. 페어리 의원 몇몇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혐오와 호기심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리고 저희 역시 대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정화한 농지의 사용권을 주십시오. 우리는 그곳에서 원료를 재배할 것입니다. 인조식품을 생산하는 저희능력은 이미 세계최고라고 자부할만한 것이지만 땅에서 나고자란 것만하겠습니까? 다시 말하겠습니다만, 소유권이 아닙니다, 그저 사용권만으로도 족합니다. 회장님께서는 여왕님께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
사사키가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안경을 벗어 닦았다. 렌즈에 김이 서려 있었다. 그가 안경을 다시 쓰고 입을 열었다.
"에너하임은 군사적 보호를 제공하겠습니다. 홋카이도에는 위험이 많습니다. 약탈자들과 방사능 괴물들과..."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오무라와 소일렌트, 그리고 GHQ참관인들을 잠시 흘겨봤다.
"적대적인 인간들말입니다."
저격당한 자들의 표정이 약간 구겨진것과 대비적으로 그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날씨를 읽는 것처럼 담담했다.
"에너하임은 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요정 여왕 폐하의 군대'에 헐값으로 장비들을 지원하고, 그들을 훈련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군대의 몫을 할 수 있을때까지 훗카이도의 치안을 에너하임이 담당하겠습니다. 또한 본사차원에서 무상으로 삿포로에 인력을 파견하여 전쟁이전의 문명을 재건하기 위한 공장설립을 지원하겠습니다. 여왕 폐하는 그저 저희들이 머물곳을 잠시 빌려주시고, 밥만 제때 주시면 됩니다."
쿠로다가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그는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 화면이 여전히 켜져 있었고 그의 얼굴을 아래에서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이 그의 얼굴에 이상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NHK는 통신망을 복구하겠습니다. 방송을 재개하고 정보를 전달할 것입니다. 페어리 왕국의 소식을 홋카이도 전역에 알릴 것입니다."
그가 잠시 멈췄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두드렸다. 딱딱 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방송 내용에 대한 무제한적 자유를 보장해주십쇼. 우리는 진실을 보도할 것입니다.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모두. 그 대신 페어리 왕국의 공식 발표를 우선적으로 송출하겠습니다. 또한 통신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부지와 전력역시 NHK가 전부 부담하겠습니다."
회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각자가 들은 것을 소화하고 있었다. 계산하고 있었다.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무엇을 잃어야 하는지를. 벽난로의 불이 타올랐다. 장작 하나가 무너지며 불꽃이 튀었다. 작은 불씨가 공중에서 춤을 추다가 사그라들었다.
타이타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각 대표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오무라와 야마구치와 사사키와 쿠로다를. 그들 모두가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예상보다 적었다. 너무 적었다. 그것이 오히려 불안했다.
"우리는 신중하게 검토하겠습니다."
타이타니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안에는 피로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입니다. 페어리 왕국은 홋카이도의 정당한 통치자입니다. 우리가 여러분께 협력을 요청하는 것이지 복속을 약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일어났다. 드레스가 바닥을 스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이틀 후에 다시 모이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답을 드리겠습니다."
---
회의가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씩 일어나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로 흩어졌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이 다시 텅 비어갔다. 회의실에는 미유키와 다이짱만 남았다. 벽난로의 불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가 그들의 얼굴 위에서 춤을 추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유키가 다이짱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창가로 걸어갔다. 강화 플라스틱 너머로 눈 내리는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회색빛 세상이었다. 죽어가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사람들은 살려고 발버둥쳤다. 페어리들도 인간들도 모두.
"너무 관대합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 말 속에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그들 모두 훨씬 더 큰 대가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우리에 대해 정량적인 것들은 모두 알고 있을겁니다.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더 치명적이고 더 확실한 요구사항들을 꺼낼 수 있었을 겁니다."
미유키가 파일을 펼쳤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것은 거래가 아닙니다. 일방적인 지원입니다.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NHK말씀이십니까?
"그가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비밀은 정말 철저하게 지키고 있으니, 그건 아니겠죠"
다이짱이 말했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가 정화 사업의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간들의 생명력이 대가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그것을 보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끝날 것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벽난로의 불이 꺼져가고 있었다. 장작이 재가 되어 무너졌다. 열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방이 다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습니까?"
미유키가 조용히 물었다.
"그들이 제시한 조건이 함정이든 선의든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기술도 없고 자원도 없습니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죽습니다. 천천히 굶어 죽거나 방사능에 중독되어 죽겠죠."
"다이짱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폐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까? 만약 제가 그들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했다고 전한다면 무언가 노리는 것이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린다면 말입니다."
미유키가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여왕의 성품을 알고 있었다. 순수하고 정의로웠다. 때로는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여왕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갑자기 돌아섰다. 그녀의 눈빛이 결연했다.
"폐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투명해져야 한다고. 숨길 것이 없다면 검열도 필요 없다고. 우리가 정당하게 행동한다면 어떤 보도도 두렵지 않다고 말입니다."
다이짱은 표정을 관리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폐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미유키가 조용히 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미유키와 다이짱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해도 있었다. 여왕은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이상적이고 순진하게 들렸지만 옳았다. 거짓 위에 세워진 왕국은 결국 무너질 것이었다. 진실 위에 세워진 왕국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합시다. 저들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다이짱이 파일을 닫았다. 그 소리가 결정처럼 울렸다.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벽난로의 불이 마지막 빛을 내뿜으며 꺼져갔다.
어둠이 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 어둠 속에서 두 페어리는 서 있었다.
---
이틀 후의 회의는 첫 번째보다 짧았다.
협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과정이었다. 페어리 측 실무진과 기업 대표들이 작은 방들에 나뉘어 앉아 조항을 검토했다. 하지만 검토할 것이 별로 없었다. 기업들이 제시한 조건은 너무나 명확했고 너무나 관대했다. 페어리들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거부할 여력도 없었다.
오무라 인더스트리는 당일엔 정화된 토지의 십 퍼센트를 요구했다. 처음 제안했던 이십 퍼센트에서 스스로 절반을 깎아낸 것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연구 시설을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 마법과 과학을 결합한 신기술 개발에 페어리들이 협력해달라고 요청했다. 모든 연구 결과는 공동 소유가 될 것이었다. 오무라만의 독점이 아니었다. 페어리 실무진은 조항을 읽고 또 읽었다. 함정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문서는 투명했고 조건은 공정했다. 오무라 측 협상 대표는 말했다. 우리는 요정 동지들과 함께 이 땅을 되살리고 싶을 뿐이라고. 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소일렌트는 더욱 간단했다. .야마구치는 협상장에서 반복해서 말했다. 소일렌트 회장의 지시는 분명하다고. 여왕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제공하라는 것이라고. 페어리 협상단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아는 바에 따르면 기업은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부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에너하임은 가장 파격적이었다. 그들은 페어리 왕국의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자청했다. 정규군으로 편제되어 왕국의 지휘를 받겠다고 했다. 장비는 원가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제공될 것이었다. 훈련 프로그램은 무상이었다. 공장 설립 지원 역시 무상이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단지 머물 곳과 식사뿐이었다. 사사키는 협상장에서 냉정하게 말했다. 에너하임은 페어리 왕국의 성공에 투자하고 있다고. 왕국이 강해지면 에너하임도 강해진다고. 그것이 진정한 협력이라고. 페어리 협상단은 침묵했다. 그들은 이것이 함정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증명할 수 없었다. 계약서에는 함정이 없었다. 모든 것이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NHK는 가장 단순했다. 쿠로다 신지는 협상에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완전한 보도 자유를 요구했다. 검열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약속했다. 페어리 왕국의 공식 발표를 최우선으로 송출하겠다고. 왕국의 입장을 정확히 전달하겠다고. 진실을 보도하는 것과 왕국을 지지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통신 인프라 구축을 위한 부지는 받겠지만 전력은 자체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페어리 협상단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존중했다. 그는 최소한 정직했다. 원하는 것이 명확했다.
협상은 단 석 시간 만에 끝났다. 조율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페어리들은 거의 모든 것을 얻었다. 기업들은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불안했다. 미유키는 각 협상장을 돌아다니며 실무진들의 보고를 받았다. 모두가 같은 말을 했다. 이상하다고. 너무 좋은 조건이라고.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찾을 수 없다고. 미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서명식이 열렸다. 같은 회의실에서였다. 이번에는 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페어리 의원들과 기업 간부들과 기술진들과 군인들이 벽을 따라 서 있었다. 역사적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서였다.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계약서들이 놓여 있었다. 각 기업마다 하나씩이었다. 페어리 문자와 일본어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양쪽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타이타니아가 첫 번째로 서명했다. 그녀는 은빛 펜을 들었다. 엘븐하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제국 황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손이 종이 위를 움직였다. 페어리 문자로 그녀의 이름이 적혔다. 유려한 곡선이었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었다.
오무라가 서명했다. 그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육십 년을 살아온 사람의 확고한 손이었다. 야마구치가 서명했다. 그의 뚱뚱한 손가락이 펜을 쥐었을 때 펜이 작아 보였다. 사사키가 서명했다. 그는 안경을 벗지 않았다. 서명하는 내내 표정이 없었다. 쿠로다가 서명했다. 그는 마지막이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각자의 이름이 계약서를 채워갔다.
그리고 그것이 끝났을 때 회의실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희망의 박수였다. 안도의 박수였다. 혹은 어쩌면 공포를 숨기기 위한 박수였다.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 계약이 구원이 될지 저주가 될지.
하지만 그들은 박수를 쳤다.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쳤다.
그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건물 밖까지 퍼져나갔다.
눈 내리는 삿포로의 하늘 아래로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