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밤이었지만 장소는 달랐다.
삿포로 남쪽 외곽의 공장 폐허 깊숙한 곳에서 발전기 소리가 낮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짐승이 지하에서 신음하는 것 같았다. 한때 이곳은 자동차 부품을 제조하던 공장이었다. 절멸전 이전에는 삼교대로 수천 명이 일했고 컨베이어 벨트가 밤낮없이 돌아갔으며 완성된 부품들이 매일 트럭에 실려 전국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지금 그 광활했던 작업장은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기계들은 녹슬어 뼈대만 남았고 천장은 군데군데 무너져 밤하늘이 구멍처럼 뚫려 있었으며 바닥에는 깨진 유리와 금속 파편들이 마치 전쟁터의 시체처럼 흩어져 있었다. 눈이 구멍 난 천장으로 들어와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쌓이고 있었다. 그 위를 쥐들이 지나간 발자국만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공장의 구 사무동 이 층 회의실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문은 모두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문틈에는 고무 패킹이 덧대어져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방 안에는 여섯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모두 흑회색 전투복을 입고 있었고 어깨에는 에너하임 일렉트로닉스의 로고가 새겨진 완장이 두르러져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희미한 형광등 아래에서 창백하게 빛났고 눈 아래의 그림자는 마치 해골처럼 깊게 패여 있었다.
마츠모토 켄은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담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형광등 빛을 가르며 천천히 상승하고 있었다. 재가 길게 늘어져 바닥으로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십 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얼굴에는 그보다 더 많은 세월이 새겨져 있었다. 군인 특유의 각진 턱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왼쪽 귀는 일부가 찢어져 있었고 목에는 총상 흉터가 희미한 분홍빛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자위대에서 복무했고 이후 용병이 되어 아프가니스탄과 아프리카와 중동을 떠돌았다. 절멸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이미 PMC 업계의 베테랑이었고 전쟁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조직을 유지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그에게 전쟁은 비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일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홋카이도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낡고 구겨진 종이 지도였다. 곳곳에 붉은 펜과 파란 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붉은 표시는 에너하임이 이미 장악한 거점들이었고 파란 표시는 목표 지역이었다. 지도 위로 담배재가 떨어졌다. 회색 가루가 삿포로 중심부를 더럽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지도 위의 재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병력은?"
마츠모토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수십 년간 전장에서 명령을 외치느라 성대가 망가진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마치 녹슨 톱날이 금속을 긁는 것처럼 날카롭고 불쾌했다.
"오천이백."
그의 부관 사사키 류타가 대답했다. 삼십 대 후반의 남자로 안경을 쓴 지적인 외모였지만 그의 눈 뒤에는 무언가 죽어버린 것이 있었다. 육상자위대 특수작전군 출신이었고 절멸전 당시 도쿄 방어전에서 최후까지 싸운 부대의 생존자였다. 그가 본 것들은 그를 변화시켰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더 이상 국가를 믿지 않게 되었다. 국가라는 환상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불타는 도쿄에서 그는 정부가 도망가는 것을 보았고 군대가 붕괴하는 것을 보았으며 사람들이 짐승처럼 서로를 찢어먹는 것을 보았다.
"장비 상태는 양호합니다. 탄약은 석 달치 확보했고 보급로도 안정적입니다."
마츠모토는 지도 위의 붉은 표시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확인했다. 삿포로 남부에 세 곳과 하코다테 인근에 두 곳 그리고 동부 해안에 네 곳. 각 거점마다 이백에서 삼백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들이었다. 주요 도로의 교차점이나 항구나 비행장 인근이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을 때마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가 회의실의 침묵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페어리들 반응은?"
"아직 조용합니다. 공식적인 항의는 없었습니다."
사사키가 노트북을 열어 화면을 돌려 보였다. 거기에는 정찰 보고서가 떠 있었다. 녹색 글자들이 검은 화면 위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홍마관 쪽에서 우리 거점 주변을 정찰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파악하려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마츠모토가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켰다. 불꽃이 어두운 회의실을 잠깐 밝혔다가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주름과 흉터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담배 끝이 붉게 타올랐고 그것만이 어둠 속에서 작은 별처럼 빛났다.
"갑자기 무장 병력 오천이 들어왔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담배 연기가 그의 입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연기는 형광등 빛 속에서 유령처럼 춤을 추며 천장으로 올라갔다. 회의실의 공기는 이미 담배 냄새로 가득했다. 환기가 되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서 그 냄새는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우리한테 대마법 훈련받은 애들 몇이나 돼?"
"오백 정도입니다."
"실전 경험은?"
사사키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묉이 대답이었다. 형광등이 깜빡였다. 전력 공급이 불안정했다. 빛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숨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없다는 얘기지."
마츠모토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연기가 그의 얼굴을 가렸다. 잠시 동안 그는 연기 속의 유령처럼 보였다.
"페어리들이랑 싸워본 놈이 한 명도 없어. 우리가 상대해본 건 전부 인간이었으니까. 총 쏘면 죽는 놈들. 근데 페어리들은 달라. 마법 쓰고 날아다니고 총알도 안 먹힐 수 있어. 우리가 아는 전투 교리가 전부 소용없을 수도 있다는 얘기야."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누군가의 시계 초침 소리만 또각또각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카운트다운처럼 느껴졌다. 죽음으로 가는 시간을 세는 것 같았다.
"정면으로 싸우면 지는 거야."
마츠모토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러니까 싸우지 말아야지.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건 다른 거야."
그가 지도 위의 다른 지점들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은 마치 장기를 두는 사람의 손처럼 정확하게 움직였다.
"물류. 우리는 트럭이 있고 헬기가 있어. 페어리들은 날 수 있지만 무거운 짐은 못 옮겨. 정화 장비 한 대가 몇 톤인데 그걸 날개로 어떻게 나르겠어. 우리가 운송을 맡으면 그들은 우리를 배제할 수 없어. 물론 오무라놈들이 기를 쓰고 막으려하겠지만, '습격' 몇번 맞으면 페어리들도 생각이 달라지겠지"
그가 다른 지점을 가리켰다.
"또한 우리는 아직 돌아가는 공장이 있어. 페어리들은 마법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대 기술은 또 다른 문제지. 정밀 전자기기나 화학 약품은 마법으로 안 돼. 우리가 그걸 제공하면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그의 설명을 듣던 참모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광등이 다시 깜빡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꺼졌다가 돌아왔다.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츠모토는 전술가였지만 동시에 정치가이기도 했다. 힘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절멸전이 그에게 가르쳐준 교훈이었다.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가장 교활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교훈.
"NHK는?"
마츠모토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담배가 마지막 연기를 내뿜으며 죽어갔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보 담당관 요시다 케이코가 대답했다. 사십 대의 여성으로 절멸전 이전에는 공안조사청에서 근무했었다. 그녀는 파일을 펼쳤다. 손톱이 짧게 깎여 있었고 손등에는 작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절멸전 당시 불타는 건물에서 탈출하며 입은 상처였다. 그녀는 그날 밤 자신의 동료 셋이 불에 타 죽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아라사카 계열사라서 우리랑 직접 거래하기를 꺼립니다. 하지만 현장 책임자 쿠로다 신지라는 자는 좀 다릅니다. 이십팔 살로 젊습니다. 본사 지시를 따르긴 하지만 자기 판단으로 움직일 여지를 남겨둡니다."
"접촉해봐."
마츠모토가 지시했다. 그는 새 담배를 꺼냈다. 담배갑이 거의 비어 있었다. 마지막 세 개비만 남아 있었다.
"비공식으로. 우리가 그들 중계소 경비해주겠다고 해. 대신 정보 좀 나눠달라고 하고."
"오츠카 홀딩스는?"
"의약품들로 인간들이 목줄을 쥐고 있습니다만, 페어리들의 힘이 점차 회복되면서 경쟁구도에 돌입한 것 같습니다. 마법은 돈도 안들고, 빠르니깐요. 그래서 우리랑 협력하는 데는 관심이 있는거 같지만서도.. 아라사카 눈치를 보는듯합니다."
"기다려봐, 지금은 그들도 가진것이 많아. 죽기직전까지 내몰려야 뒷일같은거 신경을 못쓰지."
마츠모토는 계속해서 지시를 내렸다. 각 세력과의 접촉 방법과 협상 전략을 수립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가 그려지고 있었다. 군사력만으로는 부족했다. 경제와 정보와 기술을 모두 엮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홋카이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그물로 감싸야 했다. 그리고 그 그물의 중심에 에너하임이 서야 했다.
"GHQ는?"
"복잡합니다."
사사키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의 안경에 형광등 빛이 반사되어 눈이 보이지 않았다.
"하야시 장군이 우리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홋카이도를 사유화하려 한다고 의심합니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마츠모토가 비웃었다. 그의 얼굴에 냉소적인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실제로 그러려고 하니까. 다만 공개적으로 말 안 할 뿐이지."
회의실에 웃음이 번졌다. 하지만 그것은 유쾌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고 공허한 웃음이었다. 죽음을 본 사람들의 웃음이었다.
"자유민주당은 약합니다. 의석도 적고 자원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명분은 있습니다. 아직은 여왕의 눈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만 일본의 정통을 주장한다면 그 이름만한 것이 없죠."
"명분이라..."
마츠모토가 중얼거렸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 불꽃이 다시 한 번 어둠을 밝혔다.
"쓸모있을 수도 있겠네. 우리가 그들을 지원하면 우리 행동에 정당성을 붙일 수 있으니까. 접촉해봐."
담배 연기가 다시 공기를 채웠다. 회의실의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다.
"다이묘들은?"
"각자 영역이 있고 나름 군사력도 있습니다. 도쿠가와 가문이 삼천 명 정도 모았다고 합니다. 장비는 형편없지만 지역 주민들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건드리지 마. 지방 세력이랑 싸워봤자 손해야. 대신 교역하자고 해. 우리가 무기랑 물자 주고 그들은 식량이랑 정보 주는 식으로."
두 시간 넘게 회의가 이어졌다. 지도 위의 표시들이 조금씩 바뀌었고 새로운 선들이 그어졌다. 홋카이도가 거대한 체스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형광등은 계속해서 깜빡거렸고 그때마다 회의실은 잠깐씩 어둠에 잠겼다. 마치 세상이 점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존재와 부재 사이를 오가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요시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화 사업 관련해서 이상한 소문이 돕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시계 초침 소리마저 멈춘 것 같았다.
"어떤?"
"인간들 생명력을 빼낸다는..."
마츠모토의 손이 멈췄다.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던 동작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거기에는 무언가 위험한 것이 깨어나고 있었다.
"확인됐어?"
"아닙니다. 하지만 정황증거는 있습니다. 참여자들이 급격하게 노쇠하고 사망률도 높습니다. 페어리들도 이상하게 조심스럽게 굽니다."
침묵이 흘렀다. 발전기 소리만 낮게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지하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면..."
마츠모토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엄청난 스캔들이지. 페어리랑 인간 사이가 완전히 깨질 수도 있어."
그가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연기가 그의 폐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천천히 배출되었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기회야. 우리가 증거를 잡으면 그게 협상 카드가 돼. 페어리들 압박할 수도 있고 인간들 규합할 수도 있지."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거기에는 포식자의 빛이 있었다.
"조사하겠습니까?"
"해. 근데 들키지 마. 증거 확보하면 바로 보고하고."
요시다가 파일을 닫았다. 그 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마치 관 뚜껑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회의가 끝났다. 참모들이 하나씩 일어나 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복도로 멀어지고 있었다. 곧 회의실에는 마츠모토만 남았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 검은 천을 살짝 젖혔다. 밖에는 폐허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멀리서 경비병들 발소리가 들렸고 발전기 소리가 바닥을 통해 진동으로 전달되었다. 그 진동이 그의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색이 바랜 오래된 사진이었다. 젊은 여자와 어린 소녀가 웃고 있었다. 그의 아내와 딸이었다. 절멸전 당시 도쿄에 있었고 그 이후 소식이 없었다. 아마 죽었을 것이었다. 도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그날 밤을 기억했다. 하늘이 붉게 타올랐고 공기가 뜨거웠으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렸다. 그는 임무 때문에 도쿄에 없었다. 그것이 그를 살렸고 동시에 저주했다.
사진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천을 다시 내렸다. 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송이들이 폐허 위로 쌓여가고 있었다. 그 눈 속에는 방사성 물질이 담겨 있었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죽음의 눈이었다. 세상을 하얗게 덮으며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눈이었다.
마츠모토는 담배를 끄고 회의실을 나갔다. 복도는 어두웠다. 그의 발소리만이 콘크리트 바닥에 울렸다. 그 소리는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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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이틀 후 삿포로 중심부의 한 건물 옥상에서 안테나가 세워지고 있었다. 높이가 십 미터쯤 되어 보이는 철제 구조물이었다.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수신기와 송신기가 부착되어 있었다. NHK의 새로운 중계소였다. 절멸전으로 파괴된 통신망을 재건하는 작업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재난 방송 복구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정보 통제망에 가까웠다. 정보는 권력이었고 권력은 생존이었다.
쿠로다 신지는 옥상 난간에 기대어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십팔 세였지만 눈가에는 이미 주름이 패여 있었다. 절멸전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 노화가 아니었다. 정신이 늙었다. 영혼이 늙었다. 검은색 파카를 입고 있었다. 곳곳에 기름때가 묻어 있었고 지퍼는 반쯤 고장나 있었다. 목에는 헤드폰이 걸려 있었고 허리춤에는 각종 공구들이 매달려 덜컹거렸다. 그의 손가락에는 작은 화상 자국과 절단 상처가 여러 개 있었다. 전자 기기를 다루다 입은 흔적들이었다. 그 흉터들 하나하나가 그가 살아남기 위해 치른 대가였다.
작업원들이 케이블을 연결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들의 손이 빨갛게 얼어 있었지만 작업은 계속되었다. 추위 따위는 이제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살아남는 것만이 중요했다. NHK는 절멸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기술력만큼은 여전했다. 살아남은 기술자들이 모두 모였고 절박함이 그들을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절박함은 때로 재능보다 강했다.
"신지 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부하 중 한 명인 타나카였다.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화면에는 복잡한 주파수 그래프가 떠 있었다. 파형들이 춤을 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 전파 스캔 끝났습니다. 페어리 측 마법 통신이 예상보다 활발합니다. 특히 요정원 청사와 홍마관 사이 교신량이 많습니다."
쿠로다가 노트북을 받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이 빠르게 움직이며 데이터를 분석했다. 마법 통신은 일반 전자기파와 다른 주파수를 사용했다. 내용은 해독 불가능했지만 통신량과 패턴은 파악할 수 있었다. 패턴이 중요했다. 패턴이 진실을 말해주었다.
"홍마관이 움직인다는 뜻이군."
쿠로다가 중얼거렸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지만 불은 붙이지 않았다. 금연한 지 석 달째였다. 하지만 습관은 남아 있었다. 담배를 물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착각이었지만 착각도 때로는 필요했다.
"에너하임 쪽은?"
"그들 암호화 통신도 포착됩니다. 군용 주파수 쓰고 있습니다. 암호화가 상당히 정교합니다. 해독하려면 시간 걸릴 것 같습니다."
"급할 거 없어. 어차피 내용보다는 패턴이 중요하니까. 누가 누구랑 얼마나 자주 연락하는지만 알아도 충분해."
쿠로다는 노트북을 돌려주고 다시 안테나 작업을 바라보았다. 작업원 하나가 높은 곳에서 균형을 잃을 뻔했지만 간신히 붙잡았다. 쿠로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전 장비는 이미 다 착용했고 그들은 전문가였다. 전문가를 믿어야 했다. 믿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본사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타나카가 다른 서류를 꺼냈다. 암호화된 팩스를 복호화한 문서였다. 종이가 바람에 펄럭였다.
"회장의 지시입니다. 통신망재건이 완료되는대로 모든 정보를 감청해서 정리하여 보고하라고"
쿠로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아라사카는 계열사들을 묶어 홋카이도를 장악하려 했다. 오무라가 땅 정화하고, 페어리들에게 환심을 얻고 오츠카가 사람 치료하고 소일렌트가 식량 공급하고 NHK가 정보 통제하는 완벽한 시스템. 종이 위에서는 완벽했다. 하지만 현실은 종이가 아니었다.
"거부할 수 있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계열사니까요."
"알아. 그냥 물어본 거야."
쿠로다는 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키는 백칠십 정도로 평균보다 약간 작았지만 몸은 단단해 보였다. 절멸전 이후 모두가 굶주렸지만 그는 나름 체력 관리를 했다. 살아남으려면 건강해야 했다. 병들면 죽었다.
"에너하임이 접촉해왔다는 거 들었어?"
"네. 비공식 채널로요. 우리 중계소에 보안을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대가는?"
"정보 공유입니다. 우리가 수집한 통신 데이터를 달라고 했습니다."
쿠로다는 웃었다. 유쾌하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의 입가가 비틀어졌다.
"재밌네. 아라사카는 우리를 자기네 시스템에 넣으려 하고 에너하임은 매수하려 하고. 우리는 양쪽 다한테 필요한 거지."
바람이 불어왔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양쪽 다 받아들여. 아라사카 지시도 따르고 에너하임 제안도 수락해. 근데..."
담배를 입에서 빼냈다. 바람에 날아갈 뻔했지만 움켜쥐었다.
"진짜 중요한 정보는 우리가 갖고 있어. 둘 다 못 믿으니까."
타나카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직 명령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고 이런 이중 플레이를 불편해했다. 하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그건..."
"살아남는 방법이야."
쿠로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약해. 군사력도 없고 돈도 없어. 우리한테 있는 건 기술이랑 정보뿐이야. 그걸 독점 안 하면 우리는 그냥 소모품이야.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옥상 문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에 울렸다.
"안테나 작업 끝나면 바로 시험 송출 시작해. 페어리 통신 패턴 분석도 계속하고. 특히 독립파 쪽 움직임 봐."
"독립파요?"
"응. 그들이 변수거든. 충성파는 여왕한테 충성하니까 예측 가능해. 회귀파는 엘븐하임만 쳐다보고. 이요들은 돈에 움직이지. 근데 독립파는 달라. 여왕한테도 불만이고 엘븐하임도 싫어해. 그런 놈들이 제일 위험해. 예측 못 하니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타나카가 따라왔다. 건물 안은 어두웠다. 전력 절약 때문에 최소한의 조명만 켜놓았다. 발소리가 콘크리트 계단에 울렸다. 그 소리가 메아리쳤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았다.
"소일렌트는 어때? 자기들 여왕이 왔는데도 한번도 얼굴을 안내비치던데, 많이 불안해하나?"
"아마 그러지 않겠습니까? 멀리 갈것도 없이 몇십년만에 보는 자기 어머니에게 그 돼지같은 모습을 보이기는 싫겠죠"
"파핫, 하기야 나는 요정들이 다 그런줄 알았어"
그리고 쿠로다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인데 말이야, 절대 용서 못하지. 요정원에 선물하나 주면서 만나자고 한번 전해줘"
"알겠습니다, 저도 기대되는군요"
일 층에 도착했다. 건물 로비는 황폐했다. 깨진 유리와 쓰레기가 널려 있었고 벽에는 낙서가 가득했다. 그 낙서들은 절망의 기록이었다. "신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적힌 것도 있었고 "모두 죽었다"라고 적힌 것도 있었다. 쿠로다는 그것들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회색 도시 위로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쿠로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별도 달도 없었다. 그저 회색빛 공허만이 있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서 빼내 눈 위에 던졌다. 담배가 눈 속에 박혀 천천히 젖어갔다. 하얀 눈이 담배를 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건물 안으로 돌아갔다.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